[출판 특집] 2018년 상반기, 우리가 주목한 책 - 장은수 출판평론가
어떤 책의 세계로 들어갈지 심장이 두근거린다.
글ㆍ사진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출판평론가)
2018.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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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의 힘

 

텔레비전 방송 대 소셜 미디어. 상반기 출판 시장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대충 이와 비슷할 것이다. 몇 해 전부터 흐름이 뚜렷했지만, 올해 들어 아주 선명해졌다. 현재 추세로 보아 아마도 연말까지는 큰 변화 없이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 인기 방송의 고정 출연자이거나 방송에서 책을 들고 소개하거나 또는 방송 프로그램을 책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소셜 미디어 스타이거나 소셜 미디어에서 화제가 되거나 소셜 미디어 마케팅에 성공하거나…. 디테일은 약간씩 다르지만 모두 베스트셀러 공식이 되었다.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 (돌베개),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 크로스), 유현준『어디서 살 것인가』 (을유문화사) 등 tvN <알쓸신잡>의 출연자들은 책을 출간할 때마다 폭풍 같은 화제를 몰고 왔으며 빠짐없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과학책 분야의 화제였던 호프 자런의 『랩 걸』 알마) 역시 <알쓸신잡>의 힘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아이휴먼)도 여기에 덧댈수 있다.


아직은 불편한 지점도 있다. 머리는 이해하지만 마음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종현-산하엽 : 흘러간, 놓아준 것들』 (SM Entertainment)처럼 애도할 비극적 사건은 있었지만 연예와 책이 만나 시장을 정복하는 중이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연예 기획사가 직접 출판까지 해낸다는 점이다. 초연결 사회에서는 모든 주체가 콘텐츠 발신자가 된다. 콘텐츠 연결을 통해 팬덤을 일으키고, 팬덤을 통해 모든 사업을 수행한다. 따라서 출판은 점차 팬덤이 되는데, 팬덤이 출판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나의 콘텐츠, 캐릭터, 이미지 등을 개발한 후 가능한 모든 영역에서 사업을 벌이는 트랜스미디어 전략은 전 세계 미디어 산업의 일반 원리가 되었다.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알에이치코리아)의 경우도 넓게 보면 이 전략의 기발한 파생 상품일 뿐이다. 문제는 연예 팬덤을 통해 유입된 독자들은 다른 책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스타의 책을 수십 권 구매해 사은품(굿즈)만 챙긴 뒤 책은 버리고 떠난 중국 팬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관련한 책들이 점차 많아지는 중이고 화제에 오르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러나 기존 출판계에선 이 독자들을 어떻게 습관적 독자로 만들어야 할지 아직 잘 모른다.

 

친구들과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책은 더욱 사랑스럽다. <알쓸신잡> 작가들이 거의 정복한 서점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흐름은 소셜 미디어 스타들의 전진 배치다. 하태완의 『모든 순간이 너였다』 (위즈덤하우스),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 (말글터) 등 작가 자신 또는 독자들이 소셜 미디어에 올린 구절들이 퍼져 나가면서 거센 돌풍을 일으켰다. 저자는 물론이고 편집자조차 불확실한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역시 인스타그램을 통해 익숙하고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소소한 공감을 일으키는 말들이 저절로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김동식의 『회색 인간』 요다)은 오늘의 유머 공포 게시판에서 이름을 높이다가, 김영탁의 『곰탕』 (아르테)은 카카오페이지에서 화제가 된 콘텐츠로 종이책 출간 직후부터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팟캐스트 <서울대는 어떻게 공부하는가>의 진행자인 한재우의 『혼자 하는 공부의 정석』 (위즈덤하우스), 욕쟁이 요리 블로거 당근정말시러의 『맛 보장 가정식 레시피』 (빛날;희) 등도 비슷한 경로를 탔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주목할 것은 고바야시 야스미의 『앨리스 죽이기』 (검은숲)가 이른바 ‘역주행 베스트셀러’에 오른 일이다. 2016년에 출판되어 별다른 주목도 받지 못한 이 미스터리 소설이 소설 분야에서 상반기 내내 화제였다. ‘전자책이 종이 책의 발견 도구일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한 전자책 전문 서점에서 독점 판권을 확보한 후, 소셜 마케팅 전문 업체인 ‘책끝을접다’에 의뢰한 광고로 주목을 끌었다. 전자책이 폭발적으로 팔리면서 곧바로 종이 책도 팔리기 시작했다. 작은 계기가 촉매로 작용하면서 이처럼 거대하고 폭발적인 갈망을 일으켰다.

 

 


혼자 있어도 단단하게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이 시대 읽기 트렌드 중 하나를 분명히 표현한 마케팅 카피다. 사회 전 부문에서 ‘홀로 선 개인’으로도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다지고 세우는 기술이 퍼져 나가는 중이다. 사회의 시대, 연대의 시대가 저물고 개인의 시대, 마음의 시대가 열리는 중일까. 우리의 감각은 집단 속에서
자신을 온통 잃어버리는 재앙에서 탈출해 순간순간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보하고 혼자로도 당당하고 단단한 자신으로 서려는 열망을 중심으로 재구축되는 중이다. 확실히 이 시대 출판의 키워드는 ‘나’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타인이 아니라 나를 주목할 때 찾을 수 있다는 분명한 신념이 ‘영리한 행복의기술’로 꾸준히 독자들을 이끌어간다.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 갤리온), 제임스 홀리스의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더퀘스트), 하완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웅진지식하우스), 와타나베 준이치의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다산초당) 등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삶의 규칙을 따르지 않을 자유를 확인하라고 ‘나’한테 선언한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인간다운 품위를 잃지 않을 권리가 나한테는 있다. 단호하면서도 우아하게 ‘나답게’ 살아갈 뿐, 당신의 위로는 필요 없다. 나는 일상에서 지킬 걸 지키면서도 조금씩 자리를 만들고, 이 위험한 세상에서 토끼가 굴을 파듯 안심할 수 있는 틈새 공간을 확보해갈 것이다.

 


당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은 혼자 있을 수 없다. 제멋대로 살아가려고 ‘홀로’를 택한 것이 아니다. 같이 있으면 오히려 야만으로 떨어질까 무서워서, 오로지 생존만 갈망하는 파충류의 뇌를 거부하려고 『개인주의자 선언』 문학동네)을 한 것이다. 혼자일수 있어야 문명인이 되는 세상은 비극적이다. 우리의 삶은 근본부터 다시 조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을 한꺼번에 바꿀 수 없으니 강준만이 『평온의 기술』 (인물과사상사)이라고 부르는, 당신과 나 사이 관계의 새로운 기술이 잠정적으로 필요하다. 정문정의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가나출판사), 채사장의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웨일북), 김혜남의 『당신과 나 사이』 (메이븐), 롤프 도벨리의 『불행 피하기 기술』 (인플루엔셜) 등은 나로 자립하는 동시에 당신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조언한다.


피터 홀린스의 말처럼,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어』 (포레스트북스)가 우리의 속마음이다. 정말로 알고 싶다. 이토록 무례한 세상에서 자존감을 지키면서 동시에 어른으로 사는 법은 없는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은 옳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남을 사랑하지도 못한다.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 사람은 타인을 존중하는 법도 모른다. 우리는 따로, 그리고 같이 살아가고 싶다. 나는 ‘이생망’이라도, 아이는 ‘인간으로서’ 살기를 바란다. 아이가 자신을 소중히 하는 동시에 좋은 삶을 살도록 연습시키고 싶은 소망이 박성우의 『아홉 살 마음 사전』 (창비)에 이어 『아홉 살 함께 사전』 창비)도 찾도록 만든다.

 


쓰디쓴 인생의 달콤한 설탕 한 스푼

 

그러나 당신은 짐승이다. 아무래도 길들여지지 않는다. 아무리 기술을 부려도 영혼은 꾸준히 상처를 입고 너덜너덜 누더기가 된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어느새 등을 치는 이 뼈아픈 세상에서 인생의 맛은 쓴맛이기 십상이다. 따라서 우리한테는 쓰디쓴 인생을 견디게 해줄 설탕 한 스푼이 필요하다. 우석훈의 말처럼, 무엇보다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메디치미디어) 되어야한다. 인생의 등뼈에 힘을 불어넣는 한마디 마법의 말들이 우리의 인생을 기쁨으로 물들인다. 잠시일지라도 우리한테 ‘느낌이 있는 삶’을 돌려준다.


『언어의 온도』 일상의 언어를 미끼로 삼아 하찮은 삶의 갈피들을 아름답게 변주한다. 두 해 가까이 꾸준히 독자들의 선택을 받더니 기어이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박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난다)도 인기가 여전하지만, 『모든 순간이 너였다』  ,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 『곰돌이 푸,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등이 연이어 나오면서 “나를 지키기 위해 나를 잃어가는 세상”에서 인생의 보조 배터리를 제공하는 중이다. 인생의 본질은 감동이다. 성숙해지려면 어떤 감동인지 반드시 물어야 하지만, 때로는 심쿵한것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한마디 말의 무게

 

이처럼 언어는 무척 힘이 세다. 우리는 언어 바깥을 도무지 사유할 수 없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닐 수 있지만, 그조차 언어를 통해서만 전할 수있다. 나를 세우는 것도, 당신을 다루는 것도, 일상을 바꾸는 것도, 세상을 다시 생각하는 것도 말의 힘을 얻으면 한결 수월할 것이다.


세상 모든 이들이 연결되어 서로를 향해 지저귀는 트윗의 시대에는, 구어적 소통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통찰력 있고 진정성 있는 한마디로 타인을 설득하는 기술이 모두에게 절실해진다. 20만 부 이상 판매된 김윤나의 『말 그릇』 (카시오페아)을 비롯해서 김범준의 『모든 관계는 말투에서 시작된다』 (위즈덤하우스), 나이토 요시히토의 『말투 하나 바꿨을 뿐인데』 (유노북스)와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대화법』 (홍익출판사), 고구레 다이치의 『횡설수설하지 않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법』 (갈매나무) 등이 상황마다 우리를 언어의 달인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과 통하고 싶다. 사필귀모(事必歸母), 한국에서 모든 자기 계발은 엄마로 끝난다. 자존감 열풍이 김미경의 『엄마의 자존감 공부』 (21세기북스)를 낳았듯, 박재연의 『엄마의 말하기 연습』 (한빛라이프)이 나온 것도 당연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어렵고 소통하기 힘든 대상은 내 자식이니까 말이다.


한편 말하기와 함께 글쓰기에 대한 열망도 자연스레 늘어난다. 해마다 글쓰기 관련 책들이 독자들의 눈길을 얻는데, 상반기에는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 (위즈덤하우스)와 곽재식의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위즈덤하우스)가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진정한 설득의 기술은 심리의 기술이나 표현의 기술이 아니라 윤리의 기술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 (숲)에서 통찰했듯이, 설득에는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이 말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살아온 삶의 훌륭함(Ethos)에 덧붙여 타인의 고통에 공감(Pathos)하고 진리에 부합하는 논리(Logos)를 갖출 때, 우리는 타인을 설득할 수 있다. 윤리 없는 언어는 공허하고, 논리 없는 언어는 부실하다. 타자를 세심하게 배려하지 않을 때 언어는 전달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 (어크로스)는 중요 하다. 이 책은 우리가 더 이상 서로 혐오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일상에서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공존하는 방법을 깊게 성찰한다.

 


영혼까지 민주화

 

정치의 민주화가 끝은 아니다. 민주화가 집 앞에서, 회사 문 앞에서, 즉 일상의 삶이 시작되기 직전에 멈춰버린다면 촛불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것이다. 마사 C. 누스바움이 『분노와 용서』 (뿌리와이파리)에서 말하는, 갑질에 대한 분노, 소수자 혐오에 대한 분노, 적폐에 대한 분노를 우리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분노는 새로운 사회 질서가 나타날 때 생겨나는 ‘이행-분노’다. 삶의 절대적 만족은 눈감기나 자기만족으로는 얻지 못한다. 행복은 투쟁으로만, 전쟁 기계가 될 때에만 가능하다.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아침에 혀에 올려 둔 인생의 달콤한 설탕 한 조각도 출근해서 마주친 상사의 갑질 한 방이면 날아가버린다. 우리는 아직도 더 싸우고 더 갈등하고 더 분노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를 영혼까지 민주화할 것이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  등이 우리 삶의 뒤틀린 뿌리들에 대한 격정을 해를 넘겨 표출하는 가운데, 진태원이 그 중요성을 통찰한 『을의 민주주의』 (그린비)를 이룩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현재를 기록하고 존엄한 삶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이어지는 중이다. 김도균 외의 『자신에게 고용된 사람들』 (후마니타스), 김민아 외의 『자비 없네 잡이 없어』 (서해문집), 이범연의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레디앙), 이문영의 『웅크린 말들』 (후마니타스) 등은 사장이라는 이름의 비정규직인 자영업자, 노동 해방 투사에서 대기업 노조 놈들로 전락한 대기업 노동자, 휴가를 가려고 사표를 던지는 청년 노동자, 일자리가 통째로 소멸한 폐광의 광부 등 을들의 치열한 삶을 전하면서 삶의 질서를 전면적으로 재구축할 것을 촉구한다. 『인권이 없는 직장』 (스리체어스)을 지탱하는 ‘갑을 관계’를 해체해서 우리의 삶터를 민주화할 수 없다면, 우리는 먹고사는 데 매몰된 『죽도록 일하는 사회』 (지식여행)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우아하고 아름답고 존엄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을 읽어야 한다. 일급 지체 장애인인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함께 살아감의 의미에 대한 뜨거운 변론을 펼친다. 한승태의 『고기로 태어나서』 (시대의창)는 우리가 어디까지 끔찍하고 야만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식용 동물 농장에서 우리가 먹는 고기들이 생산되는 무서운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는 삶터에서 같은 식으로 사육되는 중일 수도 있다.

 


편견을 뛰어넘다

 

이야기는 영원하다. 이야기의 가장 본원적 힘은 인생을 여러 번 사는 연습이다.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중심 도구가 클라우드 기반의 화면으로 넘어간 지금, 소설이야말로 인생의 중심축을 잡아주는 힘을 제공한다. 열풍이 식지않고 있는 『82년생 김지영』 은 이야기 하나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대단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우리한테 보여주었다.


미셸 푸코가 『성의 역사』 (나남)에서 선명히 보여주고,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트러블』 (문학동네)에서 이론적으로 논파한 것처럼, 생물의 성은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회적 성(Gender)만이 아니라 생물학적 성(Sex)도 인간이 창조했다. 실제로 세상에는 더 많은 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각자 사랑하는 것이지, 규칙에 맞추어 사랑하지 않는다. 여성에 이어 돌출된 사회적 성인 퀴어 문제 속으로 뛰어드는 소설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데일 펙의 『마틴과 존』(민음사), 지넷 윈터슨의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같은 고전이 이미 나와 있다. 안드레 애치먼의 『그해, 여름 손님』 (잔)이 화제가 된 데 이어 한국 최초의 커밍아웃 소설가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 (문학동네)가 쇄를 거듭하는 중이다.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른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 (문학동네)도 레즈비언 문제를 중심에 놓고 있다. 퀴어는 한국 사회의 윤리적 촉수를 드러낸다. 소수자이자 약자인 이들의 삶을 어떻게 성찰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성애 중심의 남근주의에 물든 우리의 성적 감수성은 바뀔 것이고, 또 바뀌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또 다른 편견인 북한을 향한 감수성 조정도 시작 중이다.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적대성을 버린 사유의 근육을 새로 키우는 일이 필요했다. 하나의 뚜렷한 흐름이 있다면, 북한 문제의 주제어가 통일에서 평화로 옮겨 갔다는 점이다.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한 나라로 합치하는 게 아니라 평
화로운 이웃으로 공존하는 일이 된 듯하다.


북한에 덮어씌운 이데올로기적 시각도 버리고, 한 민족이라는 막연한 이상주의도 버린 채, 있는 그대로 북한을 성찰해보겠다는 다양한 기획이 쏟아졌다. 강진웅의 『주체의 나라 북한』 (오월의봄), 박한식과 강국진의 『선을 넘어 생각한다』 (부키), 정의길의 『지정학의 포로들』 (한겨레출판) 등이 그것이다.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특보와 홍익표 의원의 대담집인 『평화의 규칙』 (바틀비)은 대미를 장식했다. 하지만 화제가 된 것은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 태영호의 회고록인 『3층 서기실의 암호』 (기파랑)다. 북한 고위직 출신의 증언인 만큼 사실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평화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증오는 부추기기 쉽다. 평화가 일상이 된다면 우리의 감각에도 분명히 역전이 일어날 것이다.

 


현실을 뛰어넘다

 

현실이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할 때 책은 잘 팔리지 않는다. 출판계의 속설이다. 올해는 책의 해이지만, 평창 동계 올림픽을 기점으로 전쟁 위기를 탈출한 남북의 판문점 정상회담 및 북미의 싱가포르 정상회담, 야당의 몰락을 가져온 지방 선거, 한국 팀의 극적 승리를 가져온 월드컵 등이 연속되면서 출판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책이 현실에 지는 법은 없다. 이건 불가능하다. 책은 언제든지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한 나라’를, 현실보다 웅장하고 굴곡 많은 인생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 이래 여섯 해째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라 있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현대문학)을 비롯해 『그대 눈동자에 건배』 (현대문학), 『연애의 행방』 (소미미디어), 『눈보라 체이스』 (소미미디어) 등 히가시노 게이고의 ‘지루한 독주’가 계속되는 가운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반딧불이』 (문학동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 (열린책들), 프레드릭 배크만의 『베어타운』 (다산책방) 등 문학의 영주들이 차례로 도전장을 내미는 식이다.  『마션』 (알에이치코리아)의 작가 앤디 위어도 『아르테미스』 (알에이치코리아)로 이 대열에 끼어들었다. 모두 상상력이 대단한 작품들이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가 대단한 작가들이다. 국내 작가로는 김동식, 김진명, 이영도 등이 눈에 띌 뿐, 이야기의 폭을 넓히지 못하고 있어서 상당히 아쉽다.

 


시리즈의 백화제방

 

‘쏜살문고’(민음사)의 성공적 정착이 자극을 준 듯, 문학 분야에서 새로운 시리즈가 연달아 등장하는 중이다. ‘콘텐츠는 가벼운, 디자인은 아름다운’이라는 독자 소비 트렌드에 맞춘 듯,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판형, 200쪽을 넘지 않는 가벼운 분량, 인스타그램 등에 공유할 때 눈에 띄는 디자인 등을 특징으로 한다. 문학 편집자들이 주도적으로 콘텐츠의 틀을 만들고 원고를 모아 책을 내는 방식을 통해 전반적 정체 상태에 빠져 있는 문예지 중심의 한국 문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정세랑, 배명훈, 김학찬 등 이른바 순문학의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해온 작가들의 SF 단편 소설과 인기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삽화를 하나로 묶은 ‘테이크아웃’(미메시스), 기존 시집이나 소설에 비해 절반 정도 분량으로 실험적인 작품들을 모아 점퍼 호주머니에 들어갈 만큼 작은 판형으로 펴낼 ‘현대문학 핀’(현대문학) 등 올해 들어 새로운 시리즈가 속속 나오는 중이다. 여러 작가가 쓴 짧은 소설을 모아 시리즈로 발전시킨 ‘짧아도 괜찮아’(걷는사람)에 이어 세계의 명단편을 아담한 판형에 착한 가격으로 펴내는 ‘루켓유 어셀프’(책읽는고양이), 세계의 여러 도시에 대한 작품을 모으는 ‘누벨바그’(아르띠잔) 등도 새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리즈가 대부분 출판사에서 끈기를 갖고 오랜 시간 꾸준히 투자했을 때 비로소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자본 집약형 사업임을 감안하면 놀랄 만한 일이다.


시나 소설에만 그치지 않는다. 100명의 국내 작가들이 문화, 예술, 철학, 과학 등 지적 산맥의 전 분야에 걸쳐 셰익스피어, 클림트, 니체, 페소아 등 사유의 거장들이 살았던 공간들을 탐험하는 인문 여행서의 결정판 ‘클래식 클라우드’(아르테), 장으뜸ㆍ강윤정 부부의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책을 읽는다』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독서 일기를 묶은 ‘읽어본다’(난다) 등도 멋진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제철소, 코난북스, 위고 등 소출판사 셋이 따로 또 같이 펴내는 ‘아무튼’ 시리즈도 벌써 12권이 나왔다.


하나하나의 책은 한 세계의 도약과 확장을 기록한다. 영혼의 높이뛰기이자 정신의 멀리뛰기다. 세상에는 못 만든 책은 있어도 형편없는 책은 없다. 어디까지나 책은 독자의 읽기로 완성된다. 카를 마르크스는 도서관에 쌓인 자질구레한 도서를 읽어서 『자본』(길)을 썼고, 미셸 푸코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자료 더미를 읽고 『말과 사물』 (민음사) 그리고  『감시와 처벌』( 나남) 등을 썼다. 토마피케티의 『21세기 자본』 (글항아리)은 어떤가. 엄청난 양의 통계 자료들을 읽고 집적한 뒤 소설까지 곁들여 불평등의 세계적 심화 현상을 폭로했다. 당신이 읽은 책이 당신을 알려주는 게 아니다. 당신이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가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독자 별점과 한 줄 평과 회원 리뷰와 북스타그램의 시대에는 더욱더….


하반기에도 책의 모험은 계속된다.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 (창비)과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 ,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 ,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 ,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  등은 이미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중이다. 유홍준, 윤홍균, 전승환, 유발 하라리, 마크 맨슨 등 베스트셀러 저자들의 신작도 예정되어 있다. 어떤 책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며, 거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심장이 두근거린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2018년 상반기 #책의 모험 #역사의 역사 #열두 발자국 #eBook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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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einkim

    2018.08.06

    편집자가 주목한 출판 트렌드인건 알겠지만, 이렇게 글을 못쓰는 장은수에게 계속 일을 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생각이 없는 말장난은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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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편집자로 일을 시작해 민음사 대표를 지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한국문학번역원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