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관객의 90%는 여성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공연장에 가면 객석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여성 관객의 파워를 무시할 수 없기에 그들이 좋아하는 배우(아무래도 남자배우), 그 배우가 돋보이는 작품을 양산하는 것도 나무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척박한 시장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여배우들이 있으며, 다양한 무대, 다채로운 캐릭터가 확산되는 뮤지컬시장의 변화는 그들에게 제2의 전성기, 아니 전성기의 연장을 허락하고 있다. 새해 시작과 함께 초연을 예고한 창작뮤지컬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유작 반환 소송 실화를 모티브로 만든 창작뮤지컬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국립도서관과 호프라는 여자 사이에 진행된 30년간의 재판을 둘러싼 이야기인데요. 국내에서 대중적인 작가도 아니고 잘 알려진 내용도 아닌데, 어떤 점이 끌리셨나요?
“소속사에서 작품을 얘기하며 캐릭터가 78세 노파라는데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거적때기를 걸치고 얼굴에는 버짐이 피어 있는 인물이라는 얘기를 듣고 ‘할게요!’라고 말했어요(웃음). 재밌겠더라고요. 마음이 가면 주변 여건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에요.”
역대 맡은 인물 중 최고령이죠? 직접 연기하자면 어려움이 많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모든 희로애락이 노인으로서 표현돼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재미를 느꼈지만 어렵기도 하죠. 무조건 자세나 목소리를 노인처럼 하는 건 안 맞는 것 같고, 정서를 좇아간 상태에서 신체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데... 자기보다 원고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엄마로 인해 상처가 있지만, 막상 그 원고를 물려받았을 때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게 되는, 그렇게 세월이 흘러 78세가 돼버린, 인생에 원고밖에 안 남은 여자거든요.”
창작 초연은 배우들도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면이 있잖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카프카도 반 고흐처럼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 죽어서 남긴 몇 안 되는 작품으로 유명해졌다고 해요. 그 원고의 의미가 어느 정도기에 오랜 기간 소송까지 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공연은 한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에 대해 얘기하잖아요. 결핍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됐으나 그럼에도 새롭게 살아야 한다고. 이 작품도 그런 면에서 갈증을 풀어주는 게 있어요. 특히 호프에게는 숙명 같은 존재면서 애증이 섞인 원고가 K로 의인화돼 등장하는데, 잘하면 색다른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저희도 관객들과 어떻게 만나게 될지 궁금해요.”
흔히 ‘믿고 보는 배우, 믿보배’라고 하잖아요. 김선영 씨가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관심을 갖는 관객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 선택할 때 더 신중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반반이에요. ‘좀 더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반이라면 반대로 ‘그럴 필요 없다’고 좀 더 자유로워진 면도 있어요. 나이가 든 만큼 선택의 폭이 좁아진 면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 재밌게 시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책임감이나 부담감이 때로는 교만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저 혼자 하는 작품이 아니잖아요. 제가 즐겁게 작업하면 보는 분들도 좋지 않을까 단순하게 생각하게 돼요.”
뮤지컬 무대에서만 20년인데, 최근 몇 년 사이 환경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호프> 처럼 여성이 극의 중심에 있는 작품도 많고, 여배우의 나이도 큰 걸림돌이 되지 않고요.
“그렇죠, 호프로 함께 캐스팅된 (차)지연이도 그렇지만 지금 30대 후반 여배우들이 주연을 하고 있잖아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30대 후반이 되면 내가 할 작품이 있을까?’ 말할 때가 있었단 말이죠. 요즘은 작품과 캐릭터가 꼭 나이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기도 했고요. 저희들 입장에서는 반갑고 감사한 일이죠.”
그래서인지 전성기가 계속 연장되고 있는 느낌입니다(웃음).
“제가 그렇게 보여요? 다행이네요(웃음). 한창인 나이에서 조금 벗어나고 아이도 낳으면서 ‘내가 과연 선택할 수 있는 것, 또는 누군가 나를 선택해주는 게 가능할까’ 고민할 때가 있었죠. 그런데 감사하게도 맞는 작품들을 만났고, 과거에는 ‘이 인물을 연기하기에 내가 어리지 않나’ 생각했던 배역들에 좀 더 편하게 다가서게 됐어요. 그리고 저는 언제나 역할의 비중보다는 ‘내가 이 인물로 어떻게 무대에 서 있을 것이냐’에 대해 고민해요. 그 열정만 사라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그 존재감이 사라질까요? ‘매력 없는 배우는 있어도 매력 없는 역할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인물의 매력은 배우가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렇게만 작업할 수 있다면 늙도록 쭉 무대에 서고 싶어요.”
<호프> 개막과 함께 새해가 시작되는데, 마지막으로 새해 계획이나 희망을 들어볼까요?
“해가 지고 바뀌는 것에 의미는 갖지만, 딱히 계획이나 목표를 세우지는 않아요. 그냥 오늘, 이 순간, 이번 시즌 내게 주어진 일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면 또 몇 달 뒤의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살거든요. 나이 들수록 점점 더 욕심 없이 일을 하자는 생각이 드니까 연습할 때나 무대에 올라서도 조급하거나 화날 일도 없고요. 하고 있는 작품에 집중하고 개인적인 삶에서도 오늘의 나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웃음).”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