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재미를 느낀 때는 언제부터였나요?
초등학교 3학년때 무슨 일로 담임선생님이 『프란다스의 개』 를 선물하셨어요. 당시는 전후의 궁핍한 시절인지라 책들이 볼품이 없었는데 이 동화책은 장정이나 삽화나 지질이나가 모두 훌륭했어요. 고아와 버림받은 개와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줄거리도 진진해서 책 읽는 재미에 빠졌지요. 주인공 ‘넬로’를 ‘네로’라고 한 걸 보면 아마도 일본책을 중역한 듯싶은데 하여튼 이 책이 저를 독서로 이끈 나침반의 하나였네요.
이 무렵으로 기억되는데, 어머니가 사다 주신 『리터엉박사』라는 만화책이 또 있군요. ‘엉터리박사’를 뒤집은 제목답게 기발했어요. 늙은 부부가 애를 얻었는데 어찌 빠르게 크던지 옷은 배의 돛을 뜯어 만들고 단추는 마차 바퀴를 떼서 달았다는 거인아기 이야기와, 겨울날 어느 기사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눈밭에서 헤매다 겨우 뾰족한 쇠꼬챙이를 발견해 말을 매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깨보니 말이 성당의 높은 첨탑에 매달려 힝힝거렸다는 허풍이야기 등, 서양의 소화(笑話)들을 모은 재미난 책입니다. 혼자 깔깔거리며 읽은 기억이 지금도 선명한데 고서점을 뒤져도 구할 수가 없는 게 유감이에요.
저는 어린 시절 좀 내성적이라 잘 어울리지를 못했는데 다행히 책이 피난처이자 또 하나의 학교라는 점을 일찍 안 셈이니 행운이지요.
독서는 왜 중요한가요?
독서는 무엇보다 앉는 법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궁둥이로 한다는 말처럼 독서도 궁둥이로 합니다. 제대로 된 독서는 의자에 바로 앉아서 그것도 꽤 길게 앉아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에 간간이 자세를 고쳐잡으며 책에 집중하는 행위 자체가 고도의 훈련입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동행하는 독서행위의 과정에서 선인(先人)들이 ‘절기(切己)’라고 일컬은 상태가 가능해집니다. ‘절기’ 곧 ‘내 몸에 절실하게’ 읽어라! 그래야 읽은 것이 투철하게 이해될뿐더러 몸으로 곧 실천으로 이월한다는 것입니다. ‘절기’를 생략한 상태를 율곡(栗谷) 선생은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書自書 我自我)” 흩어져 버린다고 지적했습니다. 책을 읽었는데도 ‘책도 그대로, 나도 그대로’라면 문제입니다. 읽는 순간 책과 사람이 함께 변하기 마련인지라 책도 읽기 전의 책이 아니고 나도 읽기 전의 나가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사람다움을 최대한 끌어올리면서 자신이 몸담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나누는 시민적 자각을 높이는 그런 ‘절기’의 독서가 틈틈이 그러나 지속적으로 수행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정한 규모의 진지한 독서인의 층이 견실할 때 한국사회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서는 최저강령입니다.
요즘 관심사는 무엇이며 이와 관련해서 읽을 계획인 책이 있나요?
물론 최대의 현안은 한반도평화체제의 향방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묵은 숙제를 해결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임진왜란 7주갑(420년)이자 충무공 순국 7주갑에 해당한 지난 2018년에 맞춰, 중세의 이순신을 근대로 불러낸 첫 작업임에도 소홀히 다뤄진 단재 신채호 선생의 『이순신』(1908)을 교주한 정본을 구축하는 한편, 그 가치를 제대로 알리는 해제를 아우른 연구서를 출판하려고 했습니다만 다른 일들 때문에 안타깝게 놓쳤습니다. 올해는 반듯이 내리라 마음먹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삼국지』 번역자로도 저명한 소설가 박태원 선생이 역주(譯註)한 『이충무공 행록』(1948)도 함께 묶다 보니까 읽을 것과 찾을 것이 많아져 진척이 느리지만 학구(學究)의 기쁨은 더욱 큽니다.
최근작 『문학과 진보』 와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문학의 귀환』 (2001) 이후 쓴 평론 가운데 그래도 쓸 만한 것들을 추린 평론집인데 아마도 본격 평론집으로는 마지막이 될 듯합니다. 고민 끝에 정한 제목 ‘문학과 진보’는 좀 낡은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굳이 택한 데는 한국문학의 중요한 유산의 하나인 문학의 사회성을 ‘진보’라는 열쇳말을 통해 다시 생각해 보자는 제 나름의 충정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촛불 이후 소문자 ‘나’의 직접정치가 더욱 중요해져서 ‘그날’을 위해 ‘나’를 억제하라는 197,80년대 식의 진보는 이미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안으로 민주주의의 완성, 밖으로 분단의 평화적 해소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도 ‘나’와 ‘남’을 새롭게 사유하는 다른 사회성의 구성이 절실합니다. 문학작품을 내 몸에 절실하게 읽어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이 작업의 핵심일 것입니다만, 한국문학으로부터 가출한 독자들의 귀환과 그에 걸맞은 작가들의 정진을 한국문학의 한 독자로서 강력히 희망합니다.
명사의 추천
요즘 독자들이 교과서 밖에서는 점점 한국현대문학 유산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보여, 꼭 읽었으면 하는 작품들을 골랐습니다.
만세전
염상섭 저 | 문학과지성사
일본유학생 ‘나’의 우울한 귀국여행을 통해 무단통치 아래 신음하는 3.1운동 전야의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발견하는 과정을 침통히 그려낸 한국근대소설의 이정표.
천변풍경
박태원 저 | 문학과지성사
이상과 함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박태원의 문제작. 서울의 청계천변을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정밀한 묘사를 통해 한 지역을 파고드는 다른 리얼리즘을 실험한 새로운 장편의 등장을 고지하는데, 특히 서울 중바닥 토박이 말 ‘경아리말’의 보고(寶庫)로도 유명하다.
태평천하
채만식 저 | 문학과지성사
서울에 사는 어느 친일부재지주 윤직원의 하루에 집중한 중편의 전형으로서 부정적인 것을 전경화하여 긍정을 암시하는 궁핍한 리얼리즘을 판소리의 전유(專有)를 통해 풀어낸 신판 놀부전.
한국현대대표시선
최원식 편 | 창비
민영 최원식 최두석이 엮은 시선 3권 중 제1권. 한국 자유시의 효시 김안서의 「봄은 간다」(1918)로부터 1970년대 민중시의 먼 선구인 한하운의 「전라도길」(1949)까지 총 3부로 나누어 3.1운동 즈음부터 6.25 전전(戰前)까지에 이르는 한국현대시의 진화과정을 한눈에 조망한바, 해금된 월북시인들의 작품까지 포괄한 옹근 의미의 첫 시선집.
김남천의 장편 『사랑의 수족관』(1939~40)
제목 때문에 통속소설로 오해된 불운한 장편으로 리얼리즘이 제약될 수밖에 없던 일제말의 상황에 즉해 토착자본가들을 비롯한 도시 지식인들의 생태를 생생하게 묘파한 현대소설의 대표작.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한국문학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