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강릉 해발 1100미터 능선 위에 퍼진 초록빛, 안반데기
도서출판 가지에서 출간하는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시리즈는 우리가 사랑하는 도시들의 풍경과 맛과 멋, 사람과 공간에 깃들어 있는 서사를 밝혀주는 책입니다. 그 지역에서 자랐거나 일정 기간 살아본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기록한 ‘본격 지역문화 안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ㆍ사진 도서출판 가지
201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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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100미터 능선에 펼쳐진 고량지채소밭. ⓒshutterstock


 

안반데기는 제 모습을 쉬이 보여주지 않는다. 강릉 시내에서 출발해 닭목령을 넘어가는 길을 따르자면 쉬엄쉬엄 오라는 듯 왕산팔경이 연이어진다. 계곡을 따라 오르던 길이 문득 틀어진 경사로를 만들면 곧 ‘백두대간 닭목령’이라고 큼지막하게 새겨진 표지석에 다다른다. 백두대간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닿은 것인지 능경봉에서 고루포기산, 삽당령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 닭목령은 운무로 아득할 때가 많다.


안반데기는 해발 1100미터 높이의 능선에 있다. 감자원종장 직전에 우회전해 이어지는 키 큰 나무들 사이, 안반데기로 이르는 도로를 따르다 보면 참으로 외진 곳이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안반데기가 화전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을 때 이 길은 세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고랭지채소밭


안반데기라는 이름은 지형이 떡메로 떡쌀을 칠 때 밑에 받치는 넓고 평평한 나무판인 안반을 닮았다고 해서 지어졌다. 보통 굵은 소나무를 잘라서 만드는 안반은 식생활 도구치고는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 남북으로 넓고 길게 뻗어 있는 안반데기는 어찌 보면 거대한 해마가 꼬리를 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높은 곳에서 부감하듯이 내려다보면 안반처럼 평평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경사가 심한 비탈밭이다. 지금은 기계를 이용해 농사를 짓지만 얼마 전까지도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겨릿소가 아닌 호릿소로 밭을 갈 수밖에 없을 것같이 비탈이 심하다.


오늘날 안반데기에 거주하는 가구는 서른 세대를 넘지 않는다. 감자를 수확하거나 배추를 심을 때는 외부에서 인부를 고용할 수밖에 없다. 한 이랑씩 차지한 인부들이 넓디넓은 밭에 씨눈을 매단 씨감자나 배추 모종을 오종종 심으면 씨눈과 모종이 지력에 기대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그 다음부터는 줄곧 햇살과 바람 그리고 비가 그것들을 키운다.


고도가 높은 안반데기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 이 바람을 이용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풍력발전기가 종일 쉬-엑, 쉬-엑 소리를 내며 풍차 손을 돌려댄다. 가까이서 보면 이물스러운 거대한 인공구조물이지만 멀리서 조망할 때는 경작지의 실루엣을 풍성하게 하는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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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멋진 풍광을 보이지만 고도가 높아 다 오르기 전에는 날씨를 예측할 수 없다.

 

 

안반데기는 우리나라 최고의 고랭지채소 단지다. 농경지가 195만5000제곱미터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크기가 언뜻 가늠되지 않는다. 마음먹고 걷자고 해도 한참이나 걸릴 만큼 넓은 면적이다. 이 광활한 밭에서 감자, 배추 등을 생산한다. 고지대 산을 깎아 만든 경작지라 토질이 그리 비옥한 편은 아니지만 작물들의 수확 철이 되면 이를 실어 나르기 위한 대형 트럭들이 가파른 산비탈을 줄지어 오르내린다.


접근도 어려운 고산지대에 이토록 넓은 농경지를 조성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미 알려진 대로 안반데기는 화전민들의 손으로 개간되었다. 농사지을 땅뙈기 하나 없던 가난한 사람들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깊은 산중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은 것이 그 시초였다. 양반들이 풍부한 노동력과 경제력으로 개간해 사유화했던 토지와 달리 화전민이 개간한 농토는 생산성이 떨어지는 척박한 땅이었다. 이런 토지들은 한국전쟁 후 본격적으로 개간되기 시작했는데, 1965년경 마을을 이루고 1995년 주민들이 농지를 불하 받아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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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지가 상당히 넓지만 실제 안반데기에 거주하는 가구수는 서른 세대가 넘지 않는다. ⓒ강릉시

 

 

흔치 않은 풍광으로 사진가들 불러 모으는 인기 출사지


밭을 갈 때 골라낸 돌들을 모아 쌓은 곳이 멍에 전망대다. 표지석이 멍에 모양을 닮았는데, 멍에는 소가 쟁기를 끌도록 모가지에 거는 휘어진 막대를 뜻한다. 전망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안반데기는 소와 농부의 애환이 서린 땅이다. 천형 같은 노동에 고단했을 소가 착한 눈을 끔뻑이며 전망대 표지석을 보고 있을 것만 같다.


전망대에 서면 안반데기의 그림 같은 풍광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하얀 도화지 같은 고원에 일제히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쨍한 풍경을 맞닥뜨릴 기회를 어디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특히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 출사지로 떠올랐다. 고랭지채소 산지인 안반데기가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받게 된 것이다.


멍에 전망대 외에도 안반데기의 면모를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일출 전망대, 정자쉼터, 고루포기 전망대 등이 있다. 차와 간단한 간식을 먹을 수 있는 쉼터도 있는데, ‘구름이 노는 곳’이라는 뜻의 운유 쉼터다. 안반데기에 관한 간략한 설명과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패널로 소개되어 있다.


안반데기에 접근하는 코스는 두 가지다. 강릉에서 닭목령을 넘어가는 방법과 용평에서 피득령을 넘어가는 방법이다. 두 코스 모두 울창한 산림 속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하는데 피득령 길이 더 구불구불하고 가파르다. 안반데기는 고도가 높아 다 오르기 전에는 날씨 상태를 종잡을 수 없다. 금방 쾌청했다가도 어느새 구름이 모여들거나 안개가 자욱이 끼곤 한다. 연중 멋진 풍광을 보여주는 곳이지만 일기를 예측할 수 없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낯선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 때문에 사람들은 험한 고개를 넘어 외진 고원으로 찾아온다. 그들은 인공이 제법 자연화한 안반데기에서 날것의 초록을 즐긴다.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초록의 자연성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안반데기의 지형이 마치 팔을 활짝 벌려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는 산주인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이 글을 쓴 정호희는 강릉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대학 졸업 후 오죽헌/시립박물관에서 26년간 유물을 다루며 상설전시와 기획전시를 담당했고, 지금은 강릉시청 문화예술과로 자리를 옮겨 문화재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혼자 궁싯궁싯거리는 시간을 좋아하고 일 내 내내 매화, 수수꽃다리, 인동초, 산국 향기를 탐하러 쏘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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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가지

<세계를 읽다> 시리즈는 장소보다는 사람, 그리고 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본격적인 세계문화 안내서다. 그곳에서 직접 살아보며 문화적으로 적응하는 기쁨과 위험을 몸소 겪었던 저자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현지인의 생활문화, 관습과 예법들을 쉽고 친절하게 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