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최근 어떤 모바일 게임을 시작했다. 전 국민의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에 동참해 집에서 조용히 게임이나 하자는 의미도 있고, 영어를 기반으로 한 외국 MMORPG라 본의 아니게 영어 공부를 하는 생산적인 기분을 느낄 수도 있어서 요즘 자주하고 있다. 게임을 하면서 영어 공부를 하겠다니, 여가에도 효율성을 따지는 전형적인 한국인이다.
게임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서 이제까지 겪어 본 모바일 게임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외국 게임이라 그런지 이제까지 해왔던 한국인 위주의 게임과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보다 훨씬 레벨이 높으면서 저레벨 사냥터를 기웃거리는 사람을 만났다. 게임 시간이 겹치면 사냥을 같이했는데, 그는 마지막 공격을 늘 양보해주었다. 처음에는 게임 회사에서 만든 NPC(게임 안에서 플레이어 이외의 캐릭터)인가 싶었다. 요새는 게임 튜토리얼을 플레이어처럼 생긴 NPC로 하나? 몇 마디 나눠보니 점점 더 의문이 쌓여갔다.
와이 아유 헬핑 미? (왜 나를 도와주니?)
아임 히어 투 헬프 유. 아임 글래드 투 헬프. (나는 너를 도와주기 위해 왔어. 도와줘서 기뻐.)
도와줘서 기쁘다고? 정말 NPC처럼 말하네. 게임을 하면서 남을 도와주는 게 기쁜 일이야? 이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게임 세상을 돌아다니는데 모르는 사람이 방어력 마법을 걸어주고, 계속 말을 걸길래 사기인가 싶어 자리를 뜨자 끈질기게 따라와 아이템 교환을 신청하더니 나한테 유용한 아이템을 주고 떠났다. 낚시를 하고 있자니 갑자기 자기 레벨에는 필요 없다며 잡은 물고기를 주기도 한다. 내가 모르는 게임 문화인가 싶어 주변에 물어봐도, 모르는 사람이 단순한 선의로 말을 걸고 아이템을 주는 경우는 잘 없다고 한다.
네이버로 검색해보니 한국인이 주로 모여있다는 서버가 있어서 단체방에 들어가 보았다.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라고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이 게임 세계는 원래 이렇게 따뜻한가보다 싶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레벨 몇이세요? 렙 100 전이면 서버 옮기세요! 랩업 훨씬 수월하실걸요
OOO몹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른 들어오세요!
어디서 나오는 아이템이 성능이 좋다, 랜덤으로 아이템이 나오는 몹을 잡았더니 아이템을 안 줘서 짜증 난다 등 사람들은 레벨업과 아이템 스펙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린 왕자』 에 나오는 어른들 같았다. 20명이 모여서 잡아야 하는 보스몹을 깨려고 다들 점심시간을 쪼개서 게임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게임에서까지 조별 과제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조용히 단체방을 나갔다.
모여봐요 동물의 숲 트레일러 영상 중
최근 '모동숲'이라 줄여 부르는 닌텐도 스위치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 인기라고 한다. 다들 농담조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예쁘게 섬을 꾸미고 힐링을 즐길 동안 한국인은 전투적으로 모든 자원을 다 털어서 빚을 갚고 누구보다 집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는 정말 그런 것 같다. 한국인은 혹시 여가를 즐기는 법을 모르게 된 게 아닐까, 같은 플레이어들에게 조건 없는 선의를 베푸는 법을 잃어버린게 아닐까. 이게 정말 외국과 한국의 분위기 차이인 걸까? 게임을 하는 사람을 붙잡고 인류학적 조사라도 벌이고 싶었다. 어디 사십니까? 몇 살입니까? 언제부터 이 게임을 하셨나요? 원래 이렇게 친절하신가요? 왜 저를 도와주시죠?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처음에 나눴던 대화가 자꾸 떠오른다. 와이 아유 헬핑 미? 도와주는 것에 이유를 묻는 사람은 도움을 받는 게 어색한 사람이다. 아임 글래드 투 헬프. 다른 한편에는 도와주는 게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도움을 주는 게 기뻐서 도와주는 사람. 게임을 하면서 그저 도와줄 수 있는 게 기뻐서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역시, 어떤 일에든 교훈을 얻어야 하는 한국인답다.
추신 : 며칠 뒤, 몬스터를 잡으려고 애쓰는 플레이어가 보이길래 선의로 같이 때려서 잡았다. 나도 누군가를 도왔다고 뿌듯해하는 것도 잠시, '돈 어그로(Don't aggro)'라고 귓속말이 날아왔다. 나는 그냥 도와주려고 그런 건데... 때로는 선의가 늘 선의로 다가가지는 않는다는 또 다른 교훈. 선의의 지구촌 플레이어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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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생 텍쥐페리 저/황현산 역 | 열린책들
다른 별에서 온 어린 왕자의 순수한 시선으로 모순된 어른들의 세계를 비추는 이 소설은, 꾸밈없는 진솔한 문체와 동화처럼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 속에 삶을 돌아보는 깊은 성찰을 아름다운 은유로 녹여 낸 작품이다.
정의정
uijungchung@yes24.com
천일야화
2020.03.31
재밌게 잘읽었어요 담에 또 후속글 나오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