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컨설턴트이자 대한민국 남성복 패션 칼럼리스트 1호인 황의건 작가가 첫 소설 『장녀』를 출간했다. 세 자매의 장녀(長女)인 '사샘'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 작가는 사랑을 믿지 못하고 고독과 결핍 속에서 세상을 외면한 채 살아가던 주인공이 '간장이 익어가듯' '장 꽃이 피어나듯' 조금씩 성숙해지며 끝까지 살아갈 이유와 용기를 찾아내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십 년간 홍보 마케팅, 브랜드 컨설팅을 하시던 분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여쭤 봐도 될까요?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리고, 글은 컬럼니스트로서 늘 써왔고요, 그래서 그냥, 늘 쓰는 것이 읽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편이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아, 내가 소설을 쓰고 있구나’ 하고 느꼈을 때에는 이미 장녀를 거의 다 써내려갈 무렵이었으니까요. 최근 전업 작가로 삶을 바꾸기 7년 전부터 이미 이런 저런 이야기를 전투적으로 쓰고 있었지요. 맨 처음에는 고양이에 관한 드라마를 썼었고, 그게 누군가에 의해 매우 저급으로 복제당하고 제작의 기회가 여러 번 무산 되면서 좌절을 맛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쓰는 게 여전히 좋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을 편하게 먹었어요. 제 글을 보여주려고 쓰기 보다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쓰고 싶은 것들을 일기처럼 토해 냈다는 것이 맞을 거 같네요. 그리고 이제 작가가 되어있네요.
그럼 ‘장녀’도 우연히 쓰시게 된 건가요. 혹시 어떤 것에 영감을 받으셨는지 기억이 나시는지요?
몇 년 전에 우연히 메주를 얻게 돼 호기심에 장을 담그게 되었죠. 당시, 회사를 다니면서 장편 소설을 하나 쓰고 있었어요. 아, 그리고, 동시에 드라마를 하나 또 쓰고 있었죠. 그런데 시간이 1년이 지나도록 일을 하면서 써서 그런지 둘 다 잘 안 써지더라고요. 그즈음 마침, 장이 익어서, 그 장으로 요리를 해 친한 지인 몇 명을 집으로 초대했었어요. 술 한 잔 나누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간장에 대한 여자이야기가 제 술잔 안으로 훅 들어왔어요. 그리고, 기분 전환도 할 겸 좀 그 이야기를 좀 짧고 임팩트 있게 써보자는 생각을 그날 밤 하게 되었죠. 그게 장녀였지요. 그런데, 그렇게 기획을 하고, 초반 부 몇 장을 써 놓은 후에 새 직장을 가게 된 거에요. 그 후로는 변명 같지만, 2년 가까이 거의 제 자신을 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바쁜 날들을 보내느라 정말로 물리적으로 글 쓸 시간이 없었어요. 마음은 늘 ‘장녀’를 마무리 하고 싶었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러다가 나는 정말 단 하나의 이야기도 끝까지 마무리 할 수 없을 것 만 같은 공포가 저에게 엄습해 왔어요. 그래서 용기를 냈지요. ‘쓰자.’ 그리고, 퇴사를 했습니다. 퇴사 후 3주 만에 2년 동안 쌓여있던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아주 짧은 시간에 완성 시킨 것이 바로 ‘장녀’에요. 한 호흡으로 써서, 아마 읽으시는 독자들도 한 번에 읽기 편하실 거라 믿어요.
맨 뒤 작가의 글에서 보니 ‘장녀’란 뜻이 큰딸 ‘長女’와 장을 담그는 여인인 ‘醬女’, 이렇게 중의적인 뜻으로 제목을 지었다고 적으셨던데요, 실제로 내용을 보면 그녀의 이야기 또한 여러 가지 중의적 의미가 소설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어떤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시고 쓰신 건지요?
그런 식으로 부러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려고 의도했던 건 아니었어요. 다만, 처음 글을 쓰기 전부터 장을 담그는 여자가 제 이야기 주인공이었고, 날을 세우는 과정에서 그녀가 큰 딸이 되었던 거죠. 주인공 ‘사샘’은 가학적이면서도 피학적이고,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그 어느 지점에 서 있는 여자에요. 그리고, 그건 우리 모두의 투영일 수도 있지요. 실제 우리의 삶은 얼마만큼 기억을 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잘’ 그 기억을 소화하느냐에 달렸어요. 아무리 나쁜 일도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달렸다고 봐요, 저는. 그것이 기억을 왜곡하는 일일지라도. 자신을 스스로 속여서까지 자신의 삶을 지키겠다고 하는 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방어기재에요. 다시 말해 살기 위해 하는 왜곡은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도덕적 관점이나 사회적 관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왜곡해서 더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 질 수 있지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셔터 아일랜드’처럼 말이지요. 마치 지금 우리 모두가 소통하고 있는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가 그렇다고 봅니다. 솔직한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에서 인플루엔서가 되기 어려워요. 필터를 끼우고 가공해서 뭔가 새로운 자아를만들고 포장해 내야만 수많은 추종자들이 생기죠. 어찌 보면, 21세기적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자신에게 주목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에요. 다만, 저는 그것이 꼭 멋지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가짜니깐요. 다만, 장녀 안에서 주인공 ‘사 샘’의 기억은 지금의 그런 시대를 사는 여자를 투영했다고 보면 오히려 이해가 쉽지 않을까 싶네요.
첫 소설 ‘장녀‘는 어떤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으신가요?
삶의 대한 용기였어요, 제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요. 요즘 밀레니얼 세대, 그리고 30대들은 미래에 대한 큰 기대보다는 작은 것에 만족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며 행복지수를 올리는 것에 더 집중을 하죠. 그러다 보니 얻는 것도 있지만 잃는 것도 있어요. 그 중에 하나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들을 너무 쉽게 놓아 버린다는 점이에요. 사랑도 결혼도 이별도 처절하지가 않아 보여요. 쿨한 것일 수는 있는데, 뭐랄까 깊은 묵은지 맛이 아니라, 겉절이 맛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날 한순간에 자신을 처절하게 마주하게 되는 날이 올 때 스스로에게 황망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물론 그것이 상관없다 하면 그냥 지금처럼 하루하루 소소하게 사는 것도 삶의 한 패턴이고 방식일 수 있습니다만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사람과 함께 할 기회조차 그런 기회를 만들 용기조차 없는 청춘이라면 훗날 자신의 청춘을 되돌아보게 될 국화꽃이 되었을 때, 어쩌면 그 순간조차도 국화꽃이 아니라 그냥 식물일 수도,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그냥 식물인 것도 난 상관없다면 그거 역시 상관없을 수도 있어요. 아무튼 제가 드리고 말씀은 사랑하는 것들을 포기할 만큼 나약한 청춘은 되지 말자라는 거예요. 나이가 들면 점점 포기할 이유들을 만드는데 더 적극적으로 창의적이 되거든요.
발효 로맨스라고 하셨는데, 발효 로맨스란 무엇인지요? 또, 발효에 꽂히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발효는 부패와 한 끗 차이에요. 미생물의 발효가 성공하면 다시 더 한 번의 기회가 있는 거죠. 그것도 기존의 것보다 훨씬 더 긴 마치 영생과도 같은 긴 새로운 사이클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거죠. 하지만 발효에 실패하게 되면 그냥 부패하고 말아요. 다시 말해 그것으로 생명을 다하게 되는 것이죠. 그 발효가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매개체가 바로 효모입니다. 제 소설에서 그 효모는 바로 사랑 혹은 ‘남자’입니다. 여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발효 로맨스란 삶의 저 밑바닥을 찍고 다시 올라가서 쟁취하게 되는 로맨스, 그래서 더 소중하고 기적 같은 사랑을 말해요. 누구에게나 사랑은 기적이죠. 그것이 불륜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발효에 꽂히게 된 이유는 제가 10여 년 전에 처음 쓴 에세이가 샴페인에 관한 것이었어요. 그리고 샴페인은 우리나라 김치처럼 발효과학의 산물이죠. 두 번 발효 된 샴페인은 한번 발효된 와인과 달리 그래서 기포가 있고, 만드는데 더 복잡하죠. 와인은 발효주인데 그중에서도 샴페인은 발효주의 꽃, 발포성 와인입니다. 바로 그 기포 때문에. 발효 로맨스는 그런 샴페인처럼 더 많은 ‘수고로움’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로맨스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장녀’에서는 간장이 그런 숙성의 의미를 지닌 와인과도 같은 맥락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소설 ‘장녀’와 함께 한 아티스트들이 여러 명 계시던데요.
표지는 몇 년 전부터 인연이 돼 알고 지내던 신민주 작가 (PKM 갤러리 소속)의 작품 중에서 아직 미발표 된 것을 특별히 재능 기부를 받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의 질감과 색감이 주인공 사샘의 아픔과 성장처럼 처연하고도 강렬해서 아틀리에 가서 처음 그림을 고를 때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또, 고등학교 동창이자, 할리우드에서 영화음악을 하는 남수진 작곡가로부터 소설 장녀 OST를 기획하게 돼 유튜브에 음원을 출간과 맞추어 part 1을 업로드하게 되었습니다. 순차적으로 더 긴 버전들이 계속 올라갈 예정입니다. 이제 소설을 활자로만 보는 것 이상의 시대가 왔기에 음악을 같이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점점 더 짧은 이야기를 보고 듣고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로서는 안타까울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넷플릭스처럼 짧게 치고 빠지는 다양하고 강렬한 오리지널 스토리를 많이 창작하는 것이 이 시대에 부합하는 작가의 숙명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다른 아티스트들과 협업하여 표지도 이야기에 맞게, 음악도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상상하게 할 수 있도록 독자들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이야기와 함께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퇴사 후 글을 쓰는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는데 어떠하신가요?
왜 진작 이런 삶을 살지 못했나 싶어요. 용기가 없었겠죠? 가난해질 용기. 사실 글을 써서 먹고 살 수는 없어요, 현실적으로 말이죠. 그럼에도 전업 작가로 살겠다고 용기를 낸 건 더 이상 제 삶을 뒤로 미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청춘도 지나갔고, 또 그게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한참 전에 일어났던 일이었더군요. 심지어 요즘은 20년 전 일은 엊그제 같고 2년 전 일은 10년 전처럼 시간의 타임라인이 조금 뒤죽박죽이에요.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더 전업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가장 나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이미 깨달은 지 십 년인데도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미루고 또 미뤘으니 이제 남은 인생은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요즘은 글 쓰는 삶의 하루하루가 그저 벅차고 경이롭습니다. 대부분을 집에서 작업하고 산책을 하는 때 외에는 거의 나가지도 않습니다. 공교롭게 코로나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되고 있는 때와 맞아떨어지면서 제 삶이 다른 이들과 비교했을 때 하나도 이상할 것도 없다는 게 더 이상할 지경입니다. 다행히 요즘은 좀 잘 써지는 날들이지만, 2년 전 한 줄 쓰기도 어려웠을 때를 생각해 보면, 분명 어느 순간 제가 또 ‘번아웃’이 올 수도 있고요. 또 글 쓰는 순간을 잠시 쉬어야 할 때도 오겠지요. 그럼, 그때는 좀 쉬었다가 다시 쓰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저는 근육으로 쓰기보다는 심장으로 쓰는 타입이라서, 제 기분과 컨디션 조절을 예민하게 잘해야만 좋은 글이 나오는 편이에요. 그래서 쥐어 짜내서 꺼내기보다는 터져 나올 때 순식간에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잘 담아내야만 제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되더군요. 앞으로 더 예민하고 더 복잡한 그러나 표현은 간결하고 무심한 듯 배려하는 글을 쓰고 싶어요.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서 잘 떨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단, 읽을 때 재밌어서 한 호흡에 훅 읽을 수 있는 그런 스타일로, 세련되게 물론 저는 항상 독자들의 삶 속에 있는 동시대적인 작가로 남고 싶으니까요. 그럼, 다음 작품도 지켜봐 주세요.
추천기사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