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하고 쓰고 편집하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사람, 김시선. 그는 1세대 영화 유튜버이자 100만 구독자의 ‘영화 친구’이고, 영화 GV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팟캐스트와 라디오를 통해 영화를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와 함께한 자신의 순간들을 담아 책을 썼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사랑에 빠진 사람이 하는 일은 대개 비슷하다. 대상에 집중하고, 보고 또 보고, 자꾸 생각하고, 탐구하고, 계속 이야기하고, 어떤 방법으로든 기록을 남긴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도 그렇다. 김시선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마침내, 『오늘의 시선』이 세상에 나왔다.
“책에는 그동안 제가 겪은 영화판 이야기, 영화 뒤에 존재하는 사람들, 그리고 제 시선들이 담겨있습니다.” 출간 뒤 김시선이 트위터에 남긴 글이다. 그가 『오늘의 시선』에 담아낸 것은 ‘나는 영화를 사랑한다’는 고백이고, 영화에 애정을 쏟는 이들에게 보내는 마음이고, 언젠가 ‘영화 잘 아는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꿈이다.
2014년 유튜브 채널 ‘시선 플레이’로 1세대 영화 유튜버 활동을 시작한 저자는 현재 ‘김시선’ 채널을 운영하며 100만 구독자와 만나고 있다. 1세대 독립영화잡지 <시선일삼>을 발간했고, KBS2 라디오 <음악이 있는 풍경 이정민입니다>와 한국영상자료원 등 다양한 곳에서 영화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은 KBS 라디오 <김태훈의 시대음감>에서 ‘시선의 시선’의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다. 팟캐스트 <김시선의 영화코멘터리>의 운영자, 그리고 넷플릭스와 왓챠의 공식 리뷰어로 활동하고 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도 마찬가지잖아요
‘영화 보기’가 취미이자 특기이자 직업이에요. 이른바 ‘덕업 일치’가 이루어진 건데요(웃음).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고 나면 이전과는 달라지지 않나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지인들이 깜짝 놀라는 경향이 있는데요. 이제 일 다 했으니까 영화 보면서 쉬어야겠다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당연히 일로써 봐야 되는 영화들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쉴 때도 영화를 봐요. 쉬기 위해 보는 영화들이 따로 있어요. 좋아하는 게 일과 연관되면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생긴다고 하잖아요. 저도 똑같아요. 그런데 굉장히 긍정적인 스트레스라고 생각해요.
긍정적인 스트레스요?
영화를 좋아하기 위해서는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영화에 흠이 되는 요소도 알게 되고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요소들하고 부딪히게 될 텐데, 그런 것들을 영화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해나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스트레스로 받는 것 같아요. 누군가를 좋아할 때도 그 사람의 좋은 면만 보고 계속 좋아하지는 않잖아요. 가까이 가다 보면 분명히 싫은 면도 발견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 부분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또는 싫은 면보다 좋은 면이 훨씬 더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더 발전적인 관계를 맺게 되잖아요. 저한테는 영화도 그런 것 같아요.
책의 첫 문장에서 ‘사랑 고백’을 하셨는데, 지금도 연애에 비유해 주시니까 단번에 이해가 되네요(웃음).
가끔은 영화를 생명체처럼 느낄 때가 있어요. 나한테 뭘 알려주는 선생님인 것 같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서 힘들 때는 <빌리 엘리어트>라든가 아이가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보면 ‘나도 무언가를 위해서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이구나’ 하면서 위로를 받기도 하고요. 멜로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런 때가 있었던 것 같다고 추억할 수도 있는 거고요. 때에 따라서, 내 감정에 따라서, 영화가 생명체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영화가 생명체라고 생각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걸 전제하다 보니까 질릴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다른 일들은 다 금방 질리는데 영화는 수 년 동안 해오고 있지만 질리지 않아요. 질리면 딴 걸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태어나서 지금까지 질리지 않은 건 영화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이야기를 하시잖아요. 유튜브에서는 영상으로, 라디오와 팟캐스트에서는 말로, 이번에는 글로써 이야기하셨는데요. 더 익숙하거나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방식이 있나요?
요즘 저를 소개할 때 ‘영화를 말하고 쓰고 편집하는 김시선’이라고 하거든요. 어떤 방식이 좋다기보다, 그냥 좋은 영화가 있으면 공유하고 싶은 욕망이 끓어올라요. 그 영화의 좋은 부분들을 막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럴 때 어떤 도구를 통해서 전달하는 게 효과적일지, 그걸 고민하는 거죠. 지금은 영상을 통해서 많은 분들에게 전달하고 있는데, 오디오나 글 역시 영화를 소개하기에 정말 좋은 도구라고 생각해요. 오리지널 매체였고,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킬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영상보다는 글이나 오디오가 더 맞다고 생각해요. 영상은 어쩔 수 없이 편집이라는 가공이 일어나기 때문에 제대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제가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채우기 위해서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2014년부터 유튜브 활동을 시작하셨어요. 당시에 <시선일삼>이라는 독립잡지도 같이 만드셨죠?
네, 맞아요.
직장을 그만두셨을 때였나요?
아니에요, 직장은 그보다 몇 년 전에 그만뒀고요. 그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계시는 실버 극장에서 GV를 진행했었어요.
그때도 영화 관련 일을 하셨군요.
네, 국가에서 운영하는 동네 극장 같은 곳에서 GV를 하기도 했고요. 독립잡지는 책을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어요. <시선일삼> 1호가 만들어질 즈음에 독립잡지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서점들도 많아지고 독립영화잡지들도 나와서, 저도 재밌어하면서 직접 만들었어요. 그런데 ‘역시 책 만드는 건 다른 (전문가) 분들이 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거기에서 멈췄고요. 그 즈음에 유튜브를 개설한 이유는, 제가 블루레이 컬렉터인데, 외국에는 블루레이를 언박싱하면서 소개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우리나라에는 왜 없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그걸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영상을 길게 찍었는데 올릴 공간이 없잖아요. 그때 저한테 유튜브를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신 분이 계셨어요.
지금처럼 유튜브가 활성화되지 않았을 때였죠?
맞아요. 그때 유튜브에 영상을 올렸는데, 어느 날 한 형이 만나고 싶다고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빨강도깨비’라는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분인데, 그때는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거든요. 유튜브에서 제 영상을 보고 연락을 해온 거예요.
그래서 만나셨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시던가요?
유튜브라는 건 공존 시스템이기 때문에 나 혼자 잘 되는 게 아니라 같이 잘 돼야 한다면서 유튜브를 해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어요. 듣고 나니까 뭔가 그림이 그려지더라고요. 내가 지금 뭔가를 해야 되나 보다 싶고요. 그 분이 말씀하셨던 건 ‘당신은 영화를 되게 좋아하고 영화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하지 않냐, 나는 대중들이 많이 볼 수 있는 좋은 콘텐츠를 만들 건데 당신은 전문 영역을 담당하는 콘텐츠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그러면 서로 호합이 되잖아요. 어차피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라고 하니까, 이 참에 편집도 더 많이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튜브를 시작하게 됐어요.
영화 뒤에 존재하는 사람들
‘나는 영화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자각은 언제 생겼나요?
사실은 지금도 없어요(웃음). 요즘 부캐가 유행하는데, 그 사람을 부르는 칭호가 상황이나 공간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에도 플랫폼 관련해서 강연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면 ‘콘텐츠 제작자’죠. 그러면 철저하게 기획자의 입장이 되는 거예요. 시사회를 가거나 영화제에 가거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될 때는 평론가라고 불리고요. 지금처럼 인터뷰를 할 때는 저한테 작가라고 하시잖아요. 하는 일은 영화 보고 쓰고 말하고 편집하는 사람인데 상황에 따라서 다른 직함으로 불리는 것 같아요. 저는 끊임없이 더 좋은 영화를 보기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언젠가 만나게 될 꿈의 영화, ‘이 정도 봤으면 이제 영화 일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를 보기 위해서 계속해서 일하는 것 같아요.
그런 영화가 있을 것 같으세요?
없을 것 같아요. 질리지가 않아서(웃음). 그래서 어제도 영화 보고, 오늘도 영화 보고, 내일도 영화 보고, 계속 그러고 있는 것 같아요. 영화 보고 글을 써달라고 하면 글을 써드리고, 영상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영상을 만들어드리고, 말을 해달라고 하면 말을 해드리고요.
왜 영화는 질리지 않을까, 이유를 생각해 보셨어요?
이유는 생각 안 해봤는데요. 어떤 영화를 보고 감탄을 할 때가 있어요. ‘와, 이걸 왜 이제야 봤지? 이런 영화가 있었어?’ 싶으면서 반성하게 되는 거예요. 영화제에서 아직 개봉하지 않은 너무 좋은 영화를 발견했을 때도 그래요. 이를테면 ‘타이카 와이티티’라는 감독이 있는데요. <토르:라그나로크>와 <조조 래빗>을 연출한 감독이에요. 그 분이 2014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를 소개했는데, 그때 보고서 ‘저 감독은 정말 특이한 유머 감각을 지녔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 감독을 발견할 때 ‘이렇게 좋은 감독이 있다는 걸 빨리 알려줘야 되는데?’. ‘이렇게 재밌는 영화가 나왔는데, 빨리 소개해야 되는데 어떡하지?’ 이런 고민을 하게 돼요. 그러다 보니까 질리지도 않고, 질릴 수도 없고, 계속해서 그런 작업들을 해나가는 것 같아요.
구독자들을 ‘영화 친구’라고 부르시죠. 영화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할 누군가가 있다는 건 굉장히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그렇죠. 제가 ‘이 영화 좋았어’ 하고 이야기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도 볼 수 있네’라고 말해주는 영화 친구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시선』이라는 책을 낼 수가 없었겠죠. 그 분들 한 분 한 분의 도움이 다 있었던 것 같아요. 책에도 나오는 문장인데, 최근에 사인할 때 그런 문구를 적어요. “영화는 나눌수록 더 커집니다”라고요.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고, 실제로 영화는 나눌수록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스크린에 투사된 영화의 이미지는 그 순간에서 끝나버리지만 사람을 통해서 (극장) 바깥으로 퍼져 나오는 거거든요.
“영화는 영감을 심어둔 바이러스다”, “바이러스에게 알맞은 숙주가 필요하듯, 영화에게는 좋은 영화를 알아봐주는 관객이 꼭 필요하다”고 쓰셨죠.
맞아요. 그리고 실제로 감독님들을 만나 봐도 그것에 대해서 되게 감사해 하세요. ‘내 영화를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하시고, 그럴 때마다 기분 좋아하세요. 어떤 감독님들은 ‘아, 그렇게도 볼 수 있어요? 너무 멋있다! 저도 다른 데 가면 그렇게 말해야겠어요’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고요. 관객 분들이 기분 좋은 숙주가 돼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퍼트리는 건 영화를 좋아하는 모든 분들에게 다 도움이 돼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김초희 감독과 인터뷰하셨던 이야기도 실려 있는데요. 그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들이 있었어요. 관객 상훈이 형, 영화 수입하는 박 대표 아저씨, 극장 프로그래머 휘병 씨 같은 분들이죠.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 뒤에 존재하는 사람들’인데요. 이 분들의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신 이유가 있나요?
영화에 여러 장르가 있지만, 저한테 보면 볼수록 매력을 느끼게 하는 장르는 다큐멘터리 같아요. 대부분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특별해 보이지 않을 것 같지만 보다 보면 특별해지는’ 사람들이잖아요. 제가 만약 다큐멘터리 같은 글을 쓴다면 이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관객들은 극장 스크린에서 영화를 소비하고 나오면 끝인데, 스크린 뒤에는 그 영화를 걸기 위해 노력하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잖아요.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시면 영화가 조금 더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박 대표 아저씨가 수입한 영화가 이 영화구나, 휘병 씨가 일하는 곳이 이런 극장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의 느낌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다큐멘터리 같은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마지막 꼭지의 제목은 “코로나19가 만든 끔찍하지만 설레는 극장 풍경”이에요. 최근 영화계 종사자들이 아주 힘든 상황을 보내고 있죠.
지금 극장의 많은 인력들이 감축되고 있는 상황인 건 맞아요. 사실 코로나 이야기를 쓰려고 했을 때 주변에서도 반대를 많이 했어요. 에세이를 통해서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고 싶어 하는 독자 분들이 많을 텐데 코로나 이야기가 들어가는 건 조금 그렇지 않느냐는 의견이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코로나19로 인한 영화판의 이야기는 꼭 쓰고 싶었어요. 지금의 상황이 분명히 안 좋은 건 맞지만, 그 안에서 수많은 분들이 노력을 하고 계시고, 또 관객 분들이 찾아주시거든요. 사실 영화를 개봉하는 사람에게도 그렇고 극장에도 남는 장사가 아니에요. 관객이 떨어져 앉아야 하니까 전체 객석 가운데 절반은 못 쓰거든요. 영화를 개봉하는 것 자체가 적자가 돼버리는 상황이에요. 그런데도 이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응원하겠다는 마음으로 오시는 관객 분들이 계시거든요. 그 분들과 현장의 상황들을 글로 꼭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훗날 누군가 이 책을 봤을 때 ‘맞아, 2020년의 영화판에서는 코로나로 인해서 굉장히 많은 분들이 고생을 했지. 나도 그때 극장을 잘 못 갔던 것 같아. 그 분들의 버팀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극장에서 좋은 영화들을 보고 있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시지 않을까, 그런 로망을 꿈꾸면서 썼던 것 같아요.
‘영화 잘 아는 할아버지’가 되고 싶어
책을 읽고 나니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 추가할 작품들이 늘어났어요.
이 책으로 인해서 어떤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체크해 놓으셨다는 분들의 후기를 볼 때마다 쾌감이 있더라고요. 제 책을 읽고 자신의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 어떤 작품이 추가했다는 건데, 저에게는 그것보다 좋은 상은 없는 것 같아요. 원래 그걸 하고 싶어서 (영화 관련) 일을 했던 사람이니까요. 조금이나마 좋은 영화들을 소개해드릴 수 있다는 게 굉장한 행복인 것 같아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내가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가 됐으면 좋겠다’, ‘독자들이 책을 읽고 각자 의 시선을 가졌으면 좋겠다’고요.
영화의 경유지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건 맛만 보게 해주겠다는 의미예요. 이 영화의 진짜 묘미는 내 입으로 표현해낼 수 없으니 직접 확인을 해봐야 된다는 거죠. 실제로 경유지가 되기를 바라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댓글은 ‘일단 여기에서 영상 멈추고, 영화 보고 다시 올게요’라는 거예요. 영화를 보러 가셨다는 건 이미 그 영화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 것이잖아요. 그 순간부터는, 영화가 좋든 싫든 간에, 그건 온전히 자기 것이 된 거거든요. 그 영화에 대한 진짜 이야기는 직접 봤을 때 생기는 거잖아요. 그걸 해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댓글들이 되게 좋아요.
영화 유튜버들 중에는 특정 작품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들려주는 데 중점을 두는 이들도 있어요. 작가님은 그렇지 않으신 것 같아요.
제가 ‘시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잖아요. 그건 제 시선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시선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어요.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김시선은 이렇게 영화를 봤고 이런 설명을 해주네, 그러면 내 시선에 이 영화는 어떻게 보일까?’ 그런 동기부여를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계속 (영상을) 만든 것 같아요. 때로는 작품을 보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최대한 압축해서 보여드리기도 해요. <퀸스 갬빗> 같은 경우는 제가 실제로 체스 선생님들을 만나서 체스에 대해 배우고 경기도 해보면서 2주 가량 준비했어요. 그래서 체스에 관한 문화, 경기 규칙, 왜 영화에 그런 이야기들이 들어갔는지를 녹여서 전달하는 역할도 됐을 거예요. 또 어떤 때는 과감하게 ‘나는 이 영화를 이렇게 봤는데, 영화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기도 해요. 저의 생각에 동의든 반박이든 하려면 직접 영화를 봐야겠죠. 그렇게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저라는 존재가 없는 게 제일 좋죠.
작가님을 거치지 말고 영화와 직접 만나라는 의미인가요?
그렇죠. 그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됐을 때는 모두가 각자의 시선을 가질 때겠죠. 물론 지금은 같이 도와주면서 영화 친구처럼 이야기하는 게 서로 재밌지만, 언젠가 그런 시기가 오면 저는 또 다른 역할을 해야겠죠.
‘내가 만든 콘텐츠를 통해서 어떤 작품을 함부로 재단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영화를 보는 자기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인생 영화’로 <체리 향기>를 꼽으셨어요. 주인공과 비슷했던 작가님의 어느 시절이 떠오르셨다고요. 영화와 관객 사이에도 사연이 있으면 끈끈한 인연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책에서 말씀하신 ‘영화 인연설’도 떠오르고요.
맞아요. 저는 ‘영화 인연설’을 만들고 주창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영화 중에서도 이상하게 자꾸 내 눈에 띄거나, 자꾸만 나를 봐달라고 말을 거는 것 같은 영화들이 생겨요. 어떤 영화들은 너무 보고 싶은데도 만날 일이 없고요. 그럴 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보려고 하는 습성이 있거든요. 그러지 말고 못 보는 영화들은 과감하게 놔주자는 거예요. 사람 관계도 똑같잖아요. 인연이 아닌데 억지로 붙잡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놔줄 영화는 놔주고, 나한테 다가오는 영화는 기쁘게 맞이하자는 게 ‘영화 인연설’이에요. <체리 향기>는 저한테 그런 영화였어요.
“세상 모든 영화에서 장점을 찾아내 칭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라고 쓰셨습니다. 영화 리뷰를 하거나 GV 진행을 하실 때, 칭찬하기 어려워서 힘드실 때는 없으세요(웃음)?
사실 저도 영화의 빛보다는 흠을 찾는 게 익숙했어요. 비평이라는 게 빛보다 흠을 찾는 게 더 쉽고, 재밌고, 빠르게 퍼트릴 수 있잖아요. 뉴스를 생각해 보면 좋은 이야기는 퍼지지 않고 나쁜 이야기가 퍼지잖아요. 저도 그런 걸 좋아했죠. 그런데 어떤 경험들을 하게 됐어요. 어떤 영화가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이 소개를 하게 됐거든요. 그런데 어떤 분들이 ‘그 영화 정말 좋았어요, 시선 님 때문에 그 영화를 알게 됐어요’라는 거예요.
그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제가 너무 오만방자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한테는 별로일 수도 있고, 별로였다는 걸 피력할 수는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영화의 좋은 부분들이 보였을 거라는 생각을 제가 못했던 것 같아요. 물론 정말 좋고 잘 만들어진 영화들은 더 칭찬하고 더 좋은 점을 발견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는 영화라 하더라도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하는 영화가 될 수도 있거든요. 누군가의 삶에서는 그 영화가 정말 특별하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웬만하면 편견을 안 두려고 해요. 정말 재밌는데 단점이 많다면 ‘이런 부분들이 조금 아쉬웠지만 저런 부분들이 굉장히 좋았다, 좋을 것이다, 어떠어떠한 이유로 인해서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온 것 같다’ 하고 말하려고 노력해요. 그러다 보니 제가 영화를 보는 시선 자체도 조금 더 아름다워지는 것 같아요. 그게 좋은 것 같아요.
‘영화 잘 아는 할아버지’가 되는 게 꿈이라고요.
그런 할아버지가 돼서 해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아요. 그때는 마블 영화가 고전 명작이 돼있을 수도 있어요. 또는 <체리 향기> 같은 영화가 보존이 안 돼서 사라져버릴 수도 있겠죠. 그러면 영화를 찍고 영상을 만드는 젊은 친구들에게 <체리 향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고, ‘그때는 이런 이유들로 이런 영화들이 나왔고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 ‘지금 그런 영화들이 나오면 어떨까’ 이런 조언을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영감의 소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예전에 제가 실버 극장에서 GV를 했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때의 저는 조금 착각을 했던 것 같아요. ‘영화는 20~30대가 좋아하는 거잖아, 타깃이 거기에만 맞춰져 있잖아’라고요. 그런데 실버 극장을 돌아다니면서 누구보다도 영화에 대한 큰 애정을 가진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많이 볼 수 있었어요.
그 분들과 영화 이야기도 나누셨나요?
영화 시작 전에 옆에 앉으신 할머니 분들이 영화를 추천해주신 적이 있었는데, 뭔가 뭉클한 게 있었어요. ‘정말 영화를 좋아하시는구나’, ‘그런데 영화 관객으로서 이 분들은 약간 소외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영화 산업은 그 분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런 점에서 보면 그 분들은 영화를 짝사랑하고 계신 거잖아요.
그렇죠, 영화를 짝사랑하면서 보러 오신 거죠. 그 분들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할아버지가 될 테고 내 영화 친구들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텐데, 그때도 같이 즐겁게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노후를 영화로 마무리하는 것도 참 좋은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지금도 가끔 상상해 봐요. 제가 지팡이를 짚고 무대 앞으로 나와서 ‘다들 오랜만이네, 오늘 영화는...’ 하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요. 그럴 수 있으면 되게 인생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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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