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집에 관한 이야기를 꾸준히 올렸다. 눈밝은 편집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집과 취향에 대한 책’을 써보자는 제안이었다. 계약은 작가의 의견에 따라 초고를 쓰고 난 후 하기로 했다.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예상 밖의 이야기로 풀어졌다.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한 여성의 성장기로 흘러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가 만들어졌다. 전작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으로 호평을 받았던 하재영 작가의 이야기다.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198쪽)
타자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책
블로그에서 출발한 책이라고요.
아버지랑 오래된 빌라를 인테리어 하는 이야기를 올렸었어요. 그걸 보고 출판사에서 연락을 주셨어요. 책을 염두에 두고 썼던 글이 아니라서, 고민을 좀 하다가 우선 써보기로 했는데 취향에 관한 이야기가 안 써지더라고요. 서너 꼭지를 써보니 집이 한 여성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졌어요.
독자들의 리뷰를 찾아보니, 책을 읽고 자신이 거쳐온 집들을 떠올렸다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반가운 반응이었어요. 제 이야기가 타자의 이야기가 되고, 타자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연결성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실린 책이지만, 한 시대를 공유하며 성장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반성과 보편성을 담고 깊은 마음이 있었어요.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라는 제목이 인상적이었어요. 서간문을 상상한 독자도 있더라고요.
퇴고를 쓸 때까지 제목이 없었어요. 처음 생각한 제목은 ‘디어 마이 홈’이었는데, 당시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를 읽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웃음)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마지막에 떠오른 제목인데, 표제에 그 표현을 쓴 이유는 행복했던 집과 벗어나고 싶었던 집을 모두 포함하는 한 가지 말을 찾자면 ‘친애하는’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였어요. 책이 서간문의 형식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과거의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느낌도 있었고요. 독자들 또한 이 책을 읽으며 과거의 자신에게 괜찮다고, 잘했다고 말해주기를 바라요.
프롤로그 없이 글이 시작돼요. 유년 시절을 보냈던 대구 북성로 이야기부터요.
처음에는 북성로 이야기를 프롤로그처럼 썼어요. 그런데 쓰다 보니까 이게 첫 꼭지가 됐어요. 개인적으로도 본문을 다 쓴 다음에 정리하는 글로 '작가의 말'을 쓰는 걸 더 좋아합니다.
내가 거주하는 집, 또는 공간에 따라서 쓰여지는 글의 소재나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제가 책에 쓴 집들을 예로 들면 각 집에 살 때 제가 품고 있는 질문이 달랐어요. 난곡에 살 때에는 재개발로 밀려날 위기에 처해 있는 저소득층 주민들이나 방범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동네와 집에 거주해야 하는 여성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들은 저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저도 그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니까요. 그때 품고 있었던 질문은 ‘주변부의 사람이 중심부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한가’, ‘사회는 그것을 어떻게 가능/불가능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행신동에서는 ‘집다운 집이 무엇인가’에 대해, 결혼 후의 집에서는 ‘집에서의 내 자리는 어디인가’에 대해 질문했고요. 각각의 집에 살 때 제가 가진 질문들이 달랐다는 것은 그 집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글의 소재와 방식이 달랐다는 의미도 되겠지요.
담담한 필치가 인상적이었어요. 행복했던 일이나 힘들었던 기억 모두가 굉장히 차분하고 고요한 서사로 읽혔어요. 어떤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시는지 궁금해요.
저는 일단 문장 자체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요. 서사를 그냥 잘 전달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작가를 만났는데 비유가 신선했어요. “그런 걸 하루 종일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이 상황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지만, 기발한 문장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요. 르포를 쓸 때는 내가 이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극적인 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에요.
‘지금, 여기’의 소중함
집에 관한 많은 추억 중 가장 고맙다고 여기는 시간 또는 순간, 장면이 있을까요?
사실 저는 힘들었던 시간도 지나고 나면 감사하게 된다는 식의 말에 반감이 있었어요. 세상에는 그 일을 겪기 전의 나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좋았던 일도, 좋지 않았던 일도 지금의 내가 형성되는 데 영향을 준 건 사실일 거예요. 글을 쓰면서 집에 관한 이야기가 한 사람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정희진 선생님의 추천사에도 “생애사는 곧 집의 역사이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글을 쓰면서 정말 그렇다고 느꼈어요. 집에 대한 기억들이 가진 연속성이 있었고 그 연속성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특정한 집이나 기억이 좋았다기보다는 그 순간들이 만들어낸 지금의 저를 좋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양가감정을 느끼는 공간도 있겠고요.
그렇죠. 어릴 때 북성로 집에서 대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기억이 감사할 일이라면 감사할 일일 거예요. 하지만 이 기억은 그 대가족의 살림을 젊은 엄마가 혼자 감당해야 했다는 사실에 빚지고 있기도 해요. 엄마에게는 그때가 가장 가혹한 시절 중 하나였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 시절을 행복하게 회상하는 데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 시기에 저는 엄마의 어려움을 알기엔 너무 어렸고 많은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어린 시절이 제 자존감을 형성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 같긴 해요. 성장 이후 힘든 시간을 보낼 때마다 그때를 떠올리며 견뎌왔기도 하니까요.
지금 살고 있는 구기동 집을 “사랑하는 이들을 기억하며 기꺼이 혼자가 되는 공간”이라고 표현하셨어요. 집 역시 책만큼이나 고요한 느낌이에요. 집에서 머물 때,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언제인가요?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요.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드물어요. 낯선 사람이나 낯선 장소에 가는 것을 좀 꺼리는 편이기도 하고요. 일과로 치면 가사노동도 하지만 제 작업과 관련한 일, 읽거나 쓰거나 생각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요. 조용한 동네에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혼자 보낸다는 것은 제가 선택한 생활이긴 하지만 너무 정적이고 자극이 없기도 하죠. 그래서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밤에 남편과 식탁에 앉아 대화할 때가 좋아요. 그날 제가 썼던 글과 읽었던 책, 혼자 몰두하던 생각과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한 뒤, 이해받고 때로는 조언을 듣고 피드백을 듣는 순간들이 중요하게 느껴져요. 어떤 인터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구가 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개인적인 가구인 책상도 소중하지만 타인과 함께 마주앉을 수 있는 식탁도 그만큼 소중하다고 대답한 기억이 나네요.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는 편인가요? 끝까지 책상에 앉아 있는 편이신지 또는 다른 일을 하면서 사고를 전환하시는지요?
책은 엉덩이로 쓴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저는 다행히 잘 앉아 있는 편이에요. 책 작업에 들어가면 써지든 써지지 않든 그날 쓰기로 한 분량을 마칠 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요. 하지만 ‘책을 쓰는 시기에 글을 쓰지 않는 시간대’도 있잖아요. 그때는 다른 것들을 많이 흡수하려고 해요. 다양한 주제의 책도 읽고 영화나 다큐멘터리도 보면서요. 그 시기에는 무엇을 읽거나 봐도 제가 쓰고 있는 글과 관련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전혀 연관성 없는 데에서 제가 써야 할 방향을 찾을 때도 있고, 어떤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고 수정하기도 해요. 그밖에 하는 일로는 산책 정도. 어쨌든 바깥바람도 쐬어야 하니까요.
후속작이 '여성'에 관한 책이 될 것 같다고요.
이번 책에서 저의 이야기뿐 아니라 엄마의 이야기도 종종 등장하는데요, 저희 엄마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고,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연작 형식의 논픽션으로 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 담긴 내용은 사실 그대로인 책. 저희 엄마를 비롯해 주변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들의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이나 드라마 같다고 느껴요. 당신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하면 그들은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책의 소재가 되냐며 손사래를 치지만요. 그러나 저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감동을 느낄 뿐 아니라 이 사회에서 여성들의 자리가 어디인가 생각하게 돼요. 페미니즘이 이룬 성취는 크지만 동시에 그것을 과대평가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평범하지만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 가늠해보고 싶어요.
'집'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하는 분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집에 대한 고민의 범위가 워낙 넓고 다양해서 저의 이야기가 온전히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을 거예요. 다만 이 책이 담고 있는 주제에 의지하여 말하자면 저의 경우 집에 대한 고민은 그 집에서 보내는 나의 시절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어요. 좋았던 집도, 그렇지 않았던 집도, 글을 쓰다 보니 한 시절의 배경으로 제 서사의 일부가 되어 있었어요. 집은 한 사람의 삶의 배경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때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며, 시간이 지나면 자기 서사의 일부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같아요. 이 책을 통해 ‘지금, 여기’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요.
*하재영 2006년, 작가가 되었고 ‘피피’라는 이름의 강아지와 살게 되었습니다. 2013년, 유기동물 구조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동물과 더불어 사는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018년, 버려진 개들에 관한 책인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냈고 그밖에 지은 책으로는 두 권의 소설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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