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것을 되살려내는 것은 다름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이다.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앞선 세대의 이야기를 담은 웹툰『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속 여성들의 모습은 현재와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불교 미술의 영향을 받은 뛰어난 작화와, 세밀한 조사로 탄탄하게 쌓아 올린 서사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놀랍게도 공명 작가의 데뷔작.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나목』과 같은 근현대 문학 등을 찾아가며, 이름을 빼앗긴 ‘숙이’의 이야기를 구상했다.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여성서사를 만나고 싶다면, 지금 이 작품에 주목하자.
공명 작가는 2019년 웹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데뷔하여, 제1회
어머니 세대를 떠올리다 시작된 이야기
안녕하세요, 작가님. 웹툰으로 연재되던 작품을 단행본으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실물 책을 받아본 느낌은 어떠셨나요?
처음 책을 받았을 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내 만화로 책을 내고 싶단 소망을 가졌는데 그 꿈을 이뤄냈으니 이 감격은 말로 감히 설명되질 않네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게 어떤 존재인지 실감 났습니다.
‘공명(共鳴)’ 한자어 필명을 쓰시는 것이 눈에 띄었어요. 혹시 뜻이 있나요?
대학 시절 교수님께서 만화가는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가장 중요하단 얘길 해주셨어요. ‘남의 사상이나 감정, 행동 따위에 공감하여 자기도 그와 같이 따르려 함’이란 비슷한 의미를 가진 ‘공명’이란 단어를 필명으로 사용하게 됐습니다.
이번 작품이 작가님의 데뷔작이지요. 창작을 시작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첫 번째 뿌리는 2017년 초반에 읽은『82년생 김지영』에 수록된 김지영의 엄마 이야기에서 시작됐습니다. 남자 형제들을 위해 선생님이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공장으로 일하러 가는 에피소드를 읽고, “만약 내가 그때 태어났더라면 원하는 것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싶었어요. 김지영의 어머니 얘기가 남의 얘기가 아니라 저의 얘기가 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근현대에 살아간 여성의 잊힌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차별에 무감각했던 저의 무지를 자각한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차별을 받고 자란 기억 없이 부모님의 애정을 받으며 자라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차별 없이 살았다고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사회에서 만났던 다양한 여성들이 현재까지도 가정 안에서 여성이란 이유로 차별받는 얘기를 들었을 때 지금까지 여성 혐오를 모르고 살아왔음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 후 자연스레 사회에 스며들어 눈치채지 못했던 여성 혐오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림, 스토리 모두 맡고 계시는데요. 작품 기획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2018년도 졸업작품으로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졸업 프로젝트 담당 교수님께서 시놉시스를 짜오라 하셨고 그중 하나가 ‘여자라는 이유로 부처가 준 이름을 빼앗긴 기성세대 여성’이었습니다. 시놉시스를 보신 교수님께서 "이거다"라며 위의 문장을 손으로 짚어주셨습니다. "태명과 불교 소재에 여성 혐오를 주제로 한 작품을 과연 누가 하겠냐"라 말씀하시면서요. 독창적인 면에서 지지를 받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를 모티프로 삼으셨는데요. 원래 불교문화에 친숙하셨나요? 어떤 점에 끌리셨는지요?
불교 신자인 어머니 덕분에 집에서 불교용품이나 동양 분위기가 물씬 나는 물건들을 많이 보며 자랐습니다. 별개로 어린 시절부터 코끼리를 좋아했는데 엄마를 따라 절에 갈 때마다 탱화 속에 그려진 흰색 코끼리를 찾아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좋았던 이유를 떠올려보면, 절에 있는 동물들과 신들이 저를 지켜준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 탱화 속 다른 상상의 동물들과 보살도 좋아져서 따라 그리기 시작했더니 자연스레 불화가 제 그림에 녹아들었습니다.
강렬한 작화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세밀하게 그린 탱화나 문양, 절의 기둥을 떠올리게 하는 색채감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됐는지 궁금합니다.
실제 사찰에 가서 탱화와 단청, 건물의 사진을 찍어서 그림에 인용했습니다. 또 국립중앙박물관 불교 관련 전시나 불교 상점에도 자주 가서 참고할 만한 자료를 구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제 색을 찾고 있습니다.
불화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던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받았었습니다. 담담한 비구니의 모습과 겨울 속 사찰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표현한 나혜석 화백과 강렬한 원색의 탱화와 무속인을 그린 박생광 화백을 존경합니다. 같은 불화를 보고도 각기 다른 시선으로 담아낸 두 화백의 그림은 큰 경외감을 느끼게 해줬습니다.
근현대사 화백 이야기가 나와서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숙이가 살던 시절의 분위기를 내고자 근현대 회화 작가들의 전시회를 다녔습니다. 그들의 그림을 보면서 당대의 분위기와 삶, 그리고 작가의 정체성이 투영된 그림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하곤 했습니다.
할머니, 어머니, 딸로 이어지는 삶
당시 여성의 삶을 치밀하게 조사/취재하신 것 같아요. 스토리를 짜실 때, 주로 어떤 참고 자료 및 도움을 받으셨는지 궁금하더라고요. 당대를 검토하시면서, 어떤 것을 느끼셨는지도 궁금합니다.
특정 시대를 파악하기 위해선 그 시절이 녹아 있는 작품을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시민 작가의 『나의 한국 현대사』와 근현대 소시민의 삶을 소설에 녹여낸 박완서 작가의 책에서 특히 영감을 얻었습니다.
박완서 작가의 단편집 중에 인상 깊었던 이야기가 「돌아온 땅」인데, 70~80년대엔 친척 중에 월북을 한 사람이 있으면 가족들의 사회생활 자체를 막아버리는 연좌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었습니다. ‘빨갱이’란 말이 당시 사람들을 얼마나 억압했을지 생생히 와닿았습니다.
70년대 영화들도 시대 분위기를 연구하는 데 참고했습니다. <바보들의 행진>과 <도시로 간 처녀>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그중 <도시로 간 처녀>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버스 안내원으로 일하는 여성의 서사인데, 당시 경제적 활동을 하는 여성들의 삶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친척 어르신들께서 실제 살아오신 이야기도 매우 좋은 자료였습니다. 당숙 이모님의 이야기인데, 집안이 가난하여 빨리 돈을 벌어오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숙 이모님의 어머님께선 공부를 중요시 생각하셨고요. 당숙 이모님은 결국 고모, 즉 저의 외할머니께 학원비를 부탁드렸고, 외할머니께선 금반지를 팔아 당숙 이모님께 학원비를 마련해주셨다고 합니다. 당숙 이모님은 그 돈으로 학교에 다니는 척하며 학원에 다니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들키고 말아 어머님께 “저년 고집은 국제적 고집”이란 말을 들으셨단 일화가 인상 깊었습니다.
외할머니 얘기도 함께 말씀드리면 저는 외할머니가 학교 선생님이신 외할아버지를 만나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사셨을 거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께 6.25 전쟁 때 큰오빠를 잃고 작은오빠 역시 전쟁 당시 폐렴으로 떠나보내셨단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70년이 지난 일이지만 당시 외할머니께서 겪으셨을 슬픔의 깊이를 감히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박완서 작가님의 『나목』의 주인공 ‘경아’도 전쟁으로 인해 오빠들을 잃는데, 당시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이 듭니다.
그 외 친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던 친할머니, 가족들을 두고 눈물을 흘리며 서울의 공장으로 일하러 올라갔던 큰고모의 일화도 작품에 녹여냈습니다. 그 두 분의 이야기가 바로 <시즌2>에 등장하는 필남의 서사에 큰 틀이 됐습니다.
어쩌다 근현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나 되짚어보면 처음엔 단순히 호기심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급격한 속도로 발전하여 선진국이 되었는데, 그 과정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자마자 전쟁을 경험하고 경제성장과 민주화 운동까지, 짧고도 굵은 역사 속을 살아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궁금했습니다.
작품을 읽어나가며 놀랐던 것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적인 분위기가 정말 공기처럼 와 닿는다는 점이었는데요. 사실, 남아 선호, 여아 차별 등을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구조적 폭력’으로 다시 체감하게 하는 것 같아요. 숙이의 현실을 묘사할 때,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이 있는지요?
"만약 제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어떻게 살아갔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숙이는 곧 저의 생각이 그대로 담긴 캐릭터입니다. 숙이를 묘사할 때 제일 중점을 둔 것은 시의성입니다. 이 작품의 배경이 과거라 해서 현대의 젊은 독자들, 특히 여성분들에게 시의성이 부족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활발히 논해지는 지금이기에 더욱 시의성을 갖추었다고 봅니다. 숙이로 대변되는 기성세대와 현대의 젊은 독자들은 서로 다른 시대를 타고났지만 세월에 따라 조금씩 모습만 달라졌을 뿐, 계속 이어지고 있는 가부장제의 경험자들입니다. 독자들이 숙이의 경험에 공감하고 함께 분노하는 것 또한 그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만화가 현대의 독자들에게 시대와 동떨어진 일로 읽히지 않게끔, 그저 ‘그땐 다 그랬어’라며 과거의 일로 치부되지 않게끔 주의하며 그리고 있습니다.
우뚝 선 여성들을 그리고 싶다
‘할머니’, ‘아버지’, ‘남동생’ 등 가족구성원의 역할이 모두 폭력적이지만 세세하게 다르게 설정해주신 점이 좋았어요. 어떻게 이들 캐릭터를 설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왜 할머니가 가장 목소리 높여 숙이를 억압하는 사람으로 강조됐는지도 궁금하네요.
할머니는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보이도록 묘사했습니다. 할머니는 가부장제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숙이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나는 모든 걸 희생하고 아들과 손주를 위해 살았는데 금숙이 쟤는 왜?’ 하면서요. 무엇보다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보니 남자보단 여성의 목소리가 더 많이 나오게 제작하고 싶었습니다.
남동생은 남자 형제가 있는 주변 여성들의 경험담에서 착안했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남자 형제들은 가정 내의 차별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여성)을 이유 없이 화가 많은 사람으로 바라본다’는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보단 자신의 야망과 안위를 중요시하는 존재입니다. 과거엔 결혼이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숙이의 엄마인 이권례와 중매로 결혼한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만약 해송 아버지가 제 또래로 이 시대를 살고 있다면 절대로 결혼하지 않았을 겁니다.
주인공 ‘숙이’가 사는 시골마을의 배경을 전주 외갓집을 모델로 하셨다고 들었어요. ‘전주’라는 장소가 작가님께 미친 영향은 어떠했나요?
제 어머니의 고향이자 외할머니댁이 있는 곳입니다. 어릴 적부터 제 삶의 일부분이자 가장 친숙한 공간이기에 전주로 설정했습니다. 여담으로 필남의 고향인 해남은 아버지의 고향을 토대로 했습니다. 만약 부모님의 고향이 타 지역이었으면, 그곳으로 모델을 잡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학교’, ‘영어공부’ 등 지식을 열망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요. 인물들에게 ‘공부’란 어떤 의미였다고 생각하시나요?
‘남에게 종속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발판’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시엔 여성들이 취업하고 자립된 경제력을 갖추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여성이 먹고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결혼이었다는 사실이 정말 슬펐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남편이 경제력을 상실함과 동시에 한 집안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경험이 있는데, 그 후 ‘일인분은 거뜬히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다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결심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주인공에게 투영했습니다.
숙이, 지민, 미자 모두 ‘동병상련’이지만, 동경과 자격지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잘 나타나 있는데요. ‘자매애’, ‘우정’에 독자들의 기대가 많을 것 같아요. 이들의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그려나가고 싶으신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여성들은 서로 미숙한 부분들을 채워주며 성장해갑니다. <시즌3>에서는 숙이가 비록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지만, 과거 지민과 필남, 미자를 만나면서 이룬 성장을 토대 삼아 대학 생활에서 부딪히는 난관을 이겨내고 더욱 우뚝 서가는 모습을 그릴 예정입니다.
*공명 2019년 3월. 제1회 당선 2019년 6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데뷔 2021년 현재. 버프툰에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연재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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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여자가 더 큰소리 치는 세상이라하는데 참 많이 좋은 시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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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작가님 화이팅
오 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