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생각했던 제주의 삶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제주에 오면 도시에서 쓰던 것과는 다른 글을 쓰게 되리라 생각했다. 도시의 감수성과는 다른 뭔가를 쓸 수 있으리라 믿었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글은커녕 노트북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물론 낯선 곳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대해 쉽게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강지혜 시인님의 첫 산문집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에서 한 부분을 읽어드렸습니다. 제주로의 과감한 이주, 강아지 ‘신지’와의 만남, 어느 날 찾아온 소중한 아이. 2016년, 제주로 이주한 강지혜 시인님은 그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무수한 순간들을 만납니다. 이 놀라운 ‘시작’들은 시인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요? 첫 시집 『내가 훔친 기적』 이후 첫 번째 산문집인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를 출간하신 강지혜 시인님을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에 모십니다.
<인터뷰 – 강지혜 편>
오은: 첫 산문집이에요.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가 출간된 지 사흘 만에 중쇄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인기를 실감하시나요?
강지혜: 제주도에 있어서 잘 몰랐는데요. 요즘은 소셜미디어에 리뷰 올리는 분들도 좀 계시더라고요. 인기를 실감한다기보다, 무척 기분 좋은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은: <릿터>에 산문을 연재하셨었잖아요. 혹시 그 글들을 묶고, 추가 원고를 더해 나오게 된 책인가요?
강지혜: 맞습니다. <릿터>에서 ‘안녕 서른, 안녕 제주’라는 이름으로 6회 정도 연재를 했고요. 이후에 원고를 더 써서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연재 때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용사’ 컨셉이 시작되기 전이었고요. 그냥 일상 이야기를 자유롭게 푼 글이었어요.
오은: 강지혜 시인님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역할이 참 많아요. 시인이자 엄마이자 아내이기도 하고,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기도 하죠. 하루가 굉장히 빽빽할 것 같은데요. 일과가 어떻게 되나요?
강지혜: 키우는 강아지 ‘신지’의 밥과 배변 챙기는 일을 먼저 시작해요. 보통 아침 6시쯤이고요. 그 시간에 하루를 시작했다가 다시 조금 자고, 아기를 등원시키죠. 등원시킨 후에 집 정리하고, 운동 갔다가 펜션 청소를 하러 가고요. 아기가 하원해서 집에 오면 케어를 하죠. 그 사이에 강아지 산책을 꼭 시키고요. 그러다 남편이 집에 오면 같이 저녁 먹고, 아기 보다가 재우고요. 재우고 나면 출근입니다. 작업실로 출근해서 새벽 2-3시, 늦으면 5시까지는 작업하고 다시 잠드는 패턴이네요.(웃음)
오은: 쉬는 날이 없겠어요. 이제 강지혜 시인님 소개를 해드릴게요. “시인. 엄마이자 자영업자. 프리랜서 문화기획자. 장손 집안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딸이 태어난 데 실망한 할아버지는 이름을 ‘옥경이’로 하라고 했는데 그 말에 열 받은 엄마가 옥편을 뒤져 뜻 지, 밝을 혜 자를 쓴 ‘지혜’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풍선공포증이 있는데도 흰 풍선 좀 흔들던, H.O.T를 좋아했던 학창시절이었고, 지브리 덕후였다. 이상형은 하울. 대학 때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은 “짜증난다”였다. 온갖 일을 계획해서 처리하던 20대. 별명은 추진만 잘한다고 해서 '강추진만'이었다.
스무 살, 처음으로 시 다운 시를 썼을 때, 교수님의 목소리로 그 시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을 때, 부끄러운 동시에 느낀 희열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를 읽고 쓰는 순간이면 무채색으로 무심히 흐르는 시간 속에 화악 색이 번졌다. 신사동에 위치한 잡지사에 다니던 시절,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출판사에 직접 문학상 응모 원고를 들고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직원에게 홀린 듯 원고를 건네는 방식으로 응모했다. 신인상 수상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을 때, 강지혜는 회사 옥상으로 올라가 "내가 세상의 왕이다!"하고 소리쳤다.
언제나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을 꿈꿔왔다.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데 가을 제주를 보고 반해, 덜컥 이주를 결심했다. 제주에 내려와서 처음 사랑하게 된 것은 ‘에어콤프레샤’. 이것만 있으면 벌레든 먼지든 싸워 이길 수 있었다. 설령 지더라도 싸울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강아지 ‘신지’의 생일만 되면 언젠가 바다 근처를 산책하다 만난 아저씨의 표정이 된다. 딸이 주인공으로 사는 인생을 슬쩍슬쩍 훔쳐보다가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죽고 싶다. 씩씩한 성격과 예민한 기질의 소유자. 파란꽃이 너무 좋다. 따분한 건 싫다. 위기에 처할 때면 '귀여움만이 나를 구원한다'는 주문을 외운다.” 장손 집안의 첫째 딸이라고 해요. 어릴 때부터 어깨에 져온 엄청난 무게가 느껴졌거든요. 실제로 어땠나요?
강지혜: 부모님도 저에 대해서 ‘쟤는 다부진해야 잘하는 애야’ 같은 생각을 항상 하셨던 것 같아요. 제게 어렸을 때부터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었다는 게 확실히 느껴져요. 아이를 키우면서 더 생각하게 되는데요. 제 과거를 돌아봤을 때 저렇게 해맑고, 자유롭게 지내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아이를 보면서 많이 하고 있어요.
오은: 이따 이야기 많이 나누겠지만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라는 책에는 무수히 많은 시작이 등장하잖아요. 어쩌면 시인님은 시작이라는 것이 가지고 오는 두려움보다는 설렘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에 ‘강추진만’이라는 별명도 붙었을 것 같아요.
강지혜: 맞아요, 저는 항상 ‘그 끝은 창대하리라’가 아니라 ‘그 시작이 창대하리라’인 편인 것 같아요.(웃음) 다른 사람들보다는 쉽게 시작하는 것 같고요. 한편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타입이기도 해요. 시를 쓸 때도 시작할 때는 확 진입했다가 마무리에서 조금 우물쭈물하거든요. 그렇게 안 하려고 노력해도 성격 자체가 그런 것 같더라고요. 지금은 이런 제 성격도 받아들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은: ‘딸이 주인공으로 사는 인생을 슬쩍슬쩍 훔쳐보다가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죽고 싶다.’고 소개를 드렸는데요. 이 문장이 왠지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를 관통하는 주제 같아요. 저는 이 책을 엄마 역할도 중요하지만 나를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지 고민하는 책처럼 느꼈거든요.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를 하면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먼저 시인님께 직접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강지혜: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라는 에세이는 서른 살에 한 명의 용사가 제주라는 섬에 떨어져서 땅의 보석과 하늘의 보석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어요. 땅의 보석은 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거고요. 하늘의 보석은 제게는 문화예술로 대표되고, 시로 대표되는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건데요. 그 두 보석을 찾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에세이입니다.
오은: 민음사 문학론 시리즈죠. ‘매일과 영원’의 두 번째 책으로 나왔어요. 시리즈의 문을 여는 책이기도 한데요. 제게는 문학론이라는 말이 좀 무겁고 멀게 느껴졌어요. 이렇게 내 이야기를 하면서 문학론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는 거구나, 책을 보면서 생각했고요. 아주 산뜻한 시도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시인님은 이 작업을 하시면서 어땠나요?
강지혜: 처음에 에세이를 연재했을 때가 ‘제비상회’라는 식당을 만들고, 식당 운영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저도 제 생활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보지 못했을 때였죠. 그런데 에세이를 연재하니까 생활을 돌아보게 되고, 정리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에세이가 이런 시의성이 있어서 좋다는 생각을 그때도 했는데요. 이것을 ‘매일과 영원’이라는 이름의 문학론 시리즈로 만들겠다고 편집자님이 설명을 해주셨을 때 정말 좋다고 생각했어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매일이 어떻게 영원히 기록되는가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그래서 이 ‘매일과 영원’이라는 이름 자체에 매료되어서 작업을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오은: 표지를 보시면 지하철 3호선 신사역이 적혀 있습니다. 신사역은 강지혜 시인님께서 예전에 근무하던 회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고, 신인상 원고를 투고할 때 그 출판사가 위치해 있던 곳이기도 하죠. 이야기를 어드벤처 콘셉트으로 하겠다, 결심한 계기도 듣고 싶었습니다.
강지혜: 그것은 정말 편집자님의 선견지명이었어요. 용사 콘셉트를 처음에는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요. 편집자님께서 제가 일을 벌이고 헤쳐 나가는 과정이 용사가 게임 퀘스트 같은 것들을 넘으면서 결말을 향해가는 느낌이 든다는 아이디어를 주셨어요. 저도 그게 너무 마음에 들었고요. 저는 사실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고 잘하지 못하거든요. 용사 콘셉트를 생각했을 때 먼저 해리포터의 여정이 생각났어요. 그 이야기를 편집자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가면 좋겠다고 하셨고요. 결국 편집자님과 제가 의기투합해서 만든 콘셉트인 것이죠.
오은: 앞서 책을 쓰면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정리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사실 친분이 있지 않으면 알기 어려웠던 내밀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잖아요. “가난이 무서운 이유는 포기해야 하는 게 많아진다는 데 있다. 어린 나이에 포기를 알게 된 아이들은 마음이 일그러지기 쉬운 재질로 바뀐다. 일그러지는 모양이 각기 다를 뿐.”이라는 대목도 참 좋았는데요. 이런 문장은 과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만 쓸 수 있는 문장 같았어요. 이제는 유년시절을 그렇게 바라보실 수 있게 된 걸까요?
강지혜: 책을 쓰면서 내가 이정도는 바라볼 수 있게 되었나, 생각을 많이 했어요. 분명히 지금도 상처로 남아 있는 부분들, 아직도 작용하는 슬픔이나 고통도 있지만요. 책을 쓰면서 그래도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오은: 필연적으로 어떤 시작은 실패를 동반하기 마련인 것 같은데요. 시인님은 “자책하고 후회에 빠져 있을 시간에 그 실패를 기록하는 방법을 택한다”고 썼어요.
강지혜: 당연히 자책감만 잔뜩 있었을 시기가 있었어요. 특히 임신, 출산 때와 그 시기가 많이 겹쳤죠. 물리적으로 글을 못 썼던 시간 동안 제가 얼마나 구겨지는지를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때 구겨진 마음이 잘 안 돌아오더라고요. 아기를 낳고 나서도 그렇고요. 지금 생각하면 우울증이 약간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러다가 어떤 행사를 기획하게 됐고요. 오랜만에 노트북 앞에 앉아서 뭔가를 꾸리고 쓰는 시간에 제가 약간씩 펴지는 걸 느꼈어요.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까 사람이니까 실패할 수도 있지, 그동안 실패했던 경험들을 무조건 쓰는 힘으로 바꾸도록 하자, 어렵겠지만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더 쭉쭉 펴지는 때도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오은: 그때의 실패에서 강지혜 작가님이 새로 얻은 것이 있다면 뭘까요?
강지혜: 박막례 크리에이터를 되게 좋아해요. 박막례 님의 “실패가 뭐여. 했다는 증거여.”라는 말씀을 듣고 뼈를 맞은 기분이었어요.(웃음) 다행히 저는 쓰는 사람이니까 실패를 해도, 그걸 기록하는 데까지 가면 분명히 나한테 무언가 남아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패는 결과적으로 쓰는 사람으로서의 저를 좀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오은: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을 드릴게요. <책읽아웃> 청취자에게 영업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강지혜: 이번 책에도 소개한 책인데요. 『분노와 애정』이라는 책을 꼭 추천하고 싶어요. 이 책은 ‘모이라 데이비’가 만든 책인데요. 모이라 데이비는 사진작가고요. 이 사람이 도리스 레싱, 실비아 플라스, 에이드리언 리치, 어슐러 르 귄 같은 멋진 작가들이 ‘엄마됨’이란 무엇인가를 쓴 산문들을 모아서 만든 책이에요. 글을 엮은 순서와 글이 엮인 흐름 같은 것도 너무 좋고요. 여성 창작자, 그리고 엄마인 창작자가 한 번쯤 꼭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엄청 큰 고통과 위안을 얻을 수 있다(웃음)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뼈를 때리는 고통을 얻으실 거고요. 그것을 통해서 매우 시원한 눈물과 해소가 있을 수 있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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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