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 제임스는 1962년 『그녀의 얼굴을 가려라(Cover Her Face)』를 통해 애덤 달글리시 경감을 주인공으로 한 미스터리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는 “양차대전 사이 흥미진진하면서도 뛰어난 장인의 솜씨로 완성된 ‘누가-그 사람을-죽였는가’ 미스터리와, 점차 현대적으로 진화한 영국 탐정 이야기 사이의 다리 역할”(존 코널리, 디클런 버크 엮음, 『죽이는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제임스는 1973년, 새로운 탐정 코델리아 그레이가 등장하는 작품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발표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출간된 미스터리 소설 중 ‘최고의 제목’을 꼽는다면 개인적으로 한 표를 던지고 싶은 근사한 제목을 달고 있을 뿐 아니라, ‘고전’ 추리소설로부터 훌쩍 진화한 형태에 대한 완벽한 예시라는 사족을 덧붙이고 싶은 작품이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은 버니 프라이드의 자살로 시작한다. 런던경시청 강력범죄과 소속 경찰이었지만 지금은 사설탐정으로 일하는 버니는 전직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했다. 그 자부심이 버니에게는 전부였고, 그의 과거는 그의 현재와 미래보다 훨씬 중요하고 빛났다. “버니의 계획은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고 성공적이었다. 그를 좌절시킨 것은 늘 현실이었다.” 임시 파견직으로 버니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천애고아 코델리아 그레이가 탐정 업무를 조금씩 배우다가 아예 동업 제안을 받고, 명판에 ‘프라이드 탐정 사무소(공동대표: 버나드 G. 프라이드, 코델리아 그레이)라고 이름을 올린 게 불과 두 달 전의 일이다. 하지만 버니는 죽어버렸고, 스물두 살의 코델리아 그레이는 다시 한 번 혼자가 되었다. 주변에선 “자기, 이제 새 직업을 구해야겠네? 어쨌든 혼자서 그 사무실을 유지할 수는 없잖아.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니까. (...) 자기 어머니가 혼자 일하게 허락하지 않을 거 아니야”라는 충고(라고 포장된 오지랖)를 던지며 은근히 코델리아의 불행을 즐긴다. 코델리아는 단호하게 대꾸한다. “아직은 아니에요. 당장은 새 일자리를 알아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사건 의뢰가 들어온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중퇴한 청년 마크가 입술에 희미한 립스틱 자국을 남긴 채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됐고, 아버지 로널드 칼렌더 경은 아들을 자살로 몰고 간 원인을 찾고 싶어 한다. 코델리아는 반드시 이 일을 잘 해내겠다는 결의를 다지면서, 버니가 고안한 ‘범죄 현장 감식 장비 가방’을 꼼꼼하게 챙긴 다음 길을 나선다. “이런 사전 준비 작업이야말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 중 가장 흡족한 부분이었다. 아직은 지루함이나 불쾌함이 끼어들기 전이고 기대가 환멸과 실패로 바스러지기 전이었다.”
코델리아 그레이가 탐정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가 여성 탐정이라는 것뿐만이 아니다. ‘어린 여성’ 직업 탐정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코델리아 이전, 보통 ‘황금기’라고 불리는 고전 미스터리가 왕성하게 발표되던 시기의 유명한 여성 탐정으로는 당연히 애거사 크리스티의 제인 마플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제인 마플은 크리스티가 활동하던 시기에 가장 ‘무난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여성 탐정이었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영국의 젊은 남성들이 전쟁터에서 수없이 사망했고 홀로 된 여성들의 수가 급증했다. 크리스티는 그같은 동시대 현실을 활용하여 그중에서도 누가 봐도 ‘숙녀’라 불릴 만한 음전한 노년의 독신 여성을 내세웠다. ‘무해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날카로운 추리와 냉혹한 통찰력을 발휘하는 존재. 그러나 제인 마플은 어디까지나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아마추어 탐정이다.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와 눈썰미로 끔찍한 범죄의 본질을 파악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마땅한 찬사를 겸손한 자세로 사양하는 아마추어 탐정. 반면 코델리아 그레이는 직업인으로서의 사설탐정이다. 그는 이 일을 잘해내서 적절한 보수를 받아 자립해야만 한다. 게임처럼 추리를 즐기는 아마추어의 취미 영역으로 남겨둘 수 없는, ‘사수’로부터 짧은 시간 동안 훈련받은 게 전부인 ‘신입사원’으로서 성실한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 직업인인 것이다.
사실 코델리아는 탐정 일을 놀랄 만큼 잘해낸다. 그에게는 이 직업에 잘 어울리는 지성과 용기,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가짐이 있다. 약점이라면, 경험 부족에서 나오는 미숙함이라든가 그것을 의식할 때 그를 엄습하는 자신감 부족뿐이다. “무릎을 점잖게 모으고 어깨가방은 발치에 내려놓고 거기 앉아 있자니 불행히도 프라이드 탐정사무소의 유일한 소유주이자 성숙한 직장 여성이라기보다는 첫 면접을 앞두고 열의에 가득한 열일곱 살 소녀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크 칼렌더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수록, 굽이굽이 맞닥뜨리게 되는 숨겨진 악의와 비틀린 내면은 코델리아 그레이의 영혼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보통 이런 것을 ‘성숙’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더 정확하게는 ‘타락’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악이 존재했다. 악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수녀원에서 받은 교육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악은 바로 이 방에 존재했다. 여기 사악함이나 무자비함, 잔인함, 탐욕보다 더 강력한 뭔가가 있었다. 악.”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과 (그리고 5년 뒤인 1982년에 출간된) 후속작 『피부 밑 두개골』에서, 인생의 쓴맛단맛을 다보고 환멸과 배신감과 상실감에 젖어 죽음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중장년들은 코델리아에게 훈계와 조언을 가장한 상처를 입히는 데 열중한다. 어떤 이는 “내가 아가씨였다면 (...) 다른 사람 일에 사적으로 너무 깊숙이 관여”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라고 충고하고, 끔찍한 일을 겪고 난 뒤 하룻밤 푹 자고 나서 체력을 회복한(“신체적으로만 보면 지난 보름 동안의 사건은 코델리아에게 어떠한 상처도 남기지 않았다.”) 코델리아를 향해 놀랍게도 분노 섞인 목소리로 “당신은 놀라울 만큼 건강해 보이는군요!”라고 책망하던가, 혹은 “당신은 아직 인간에 대해 발견하지 못한 게 많아, 그렇죠? 당신이 사악함이라고 부를 법한 그것이 바로 인간의 핵심이에요”라는 냉소적인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런 게 삶이라고, 인간라고, 충고를 가장한 질투 어린 험담을 주워섬긴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그런 닳고닳은 궤변을 받아들이지 않고, 항변하고, 거절한다. ‘난 아직 어리다’가 그에게 편리한 구실과 핑계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코델리아는 그 변명 뒤에 숨지 않는다. 끊임없이 비틀거리면서도 그는 자신에게, 타인에게 거짓말하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녀는 살았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생존자였다. 이번에도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많은 경우 미스터리 장르에서의 사설탐정은 30대 이상의 남성으로 설정된다. 무례한 타인의 침입이나 위계질서의 강요에 즉각 반발하며 빈정대는 유머로 외부 세계에 맞서는 인물, ‘비열한 거리’를 홀로 걸어가는 고독한 카우보이 같은 인물 말이다. “이 비열한 거리로 한 남자는 걸어가야 한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고, 타락하지도 않으며, 두려움도 없는 채로.”(레이먼드 챈들러,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그러나 P.D. 제임스는 가장 상처받기 쉬운 존재이자 즉각적인 위협과 조롱의 대상(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인 젊은 여성을 불러내, 그를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 위치시킨 다음 그가 장애물(이라고 남들이 말하는 것)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지켜본다. 감상적이지 않지만, 젊은 주인공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잃지 않은 채, 그에게 품위와 진실성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코델리아 그레이는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서처럼 『피부 밑 두개골』에서도 “젊은 여자의 상상력이란 너무 생생해서 악명이 높고”라는 편견과 조롱에 굴하지 않으며, “신경질적인 여자”라는 의혹에 찬 시선을 이겨낸다. 그는 타인의 시시콜콜한 평가 앞에 반듯하게 허리를 펴고 “나는 편안함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서요”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길을 홀로 간다. 이것이 비열한 거리를 걸어가는 정직하고 믿을 만한 사람의 초상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을 꼽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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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미스터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편집장. 『범죄소설』, 『문학소녀』 등을 썼고, 『코난 도일을 읽는 밤』, 『죽이는 책』 등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