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완성형 명사가 아니라 실천형 동사였으면“
“안녕.” 우리가 지나온 시절에 대해 안부를 묻는 김애란의 인사.
글 : 신연선 사진 : 표기식
202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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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이후 팔 년. 김애란 작가의 새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가 열어 젖힌 세계는 ‘질문’이 아닐까 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홈 파티」, 24쪽),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좋은 이웃」, 141쪽)와 같은 묵직한 질문이 몸에 착 붙어 떨어지지 않아요. 여행지의 노동자에게 갖는 복잡한 마음(「숲속 작은 집」), 직장 후배에게 자신이 꼰대일 수 있겠다는 날카로운 감각(「이물감」), 엄마와 자신이 놓인 확연히 다른 현실의 인식(「레몬 케이크」) 등 작가가 그리는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선 그래프 위에서 달라진 좌표를 깨닫고 놀랍니다. 김애란 작가는 “인물의 독백이나 번뇌가 출발일 수 있다”고 말하는데요. 과연 나는, 서로는, 이 사회는 ‘안녕’한가. 『안녕이라 그랬어』에 수록된 일곱 편의 이야기를 따라간 후 끈질기게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들을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고민도 실천의 한 종류”라는 김애란 작가의 말에 기대서요. 

 


약간은 못생긴 마음


『안녕이라 그랬어』에 수록된 작품은 2019년부터 2024년까지 발표했던 단편들이에요. 코로나 팬데믹과 부동산, 주식, 코인 광풍 등 이 시절을 떠올리면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는데요. 이 시기, 작가님께는 어떤 장면의 마찰감이 있었나요? 

단편집은 8년 만이지만 말씀처럼 작품이 집중적으로 모인 시기는 팬데믹 시기가 많이 겹쳐 있어요. 제게 이 시기는 동시대 많은 사람들이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부에 몰두했던 시기로 기억돼요. 생존 욕구로써 부에 몰두했던 시기가 없지는 않았지만요. 이전까지는 노동을 통한 부의 축적과 정착에 대한 욕망이 비교적 건강했던 것 같거든요. 근면함이나 노동, 성실과 같은 가치에 자긍심을 가진 채 사회가 변해왔던 것 같은데요. 거의 처음으로 노동 소득 혹은 노동 가치에 대한 멸시와 부에 대한 열망이 번졌던, 조금 특별했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욕망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욕망을 다루는 것이 제 직업이기도 하고요. 다만 때때로 그 욕망과 이웃의 생명 혹은 안전을 저울질해야 하는 순간들이 오잖아요. 그럴 때 부등호의 크기가 지나치게 욕망 쪽으로 커졌던 시기, 그래서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뜻밖의 형식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을 통해 이 책의 주제가 ‘돈과 이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그 시기를 목격하고 지나오는 동안에 돈 그리고 이웃이라는 주제가 자꾸 찾아왔던 건가요? 

지역별로 차이는 있더라도 어릴 때 배웠던 ‘이웃 사촌’ 같은 이웃의 느낌은 많이 흐려졌죠. 그런데 나쁜 이웃과 좋은 이웃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선명한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는 함께라 여겼던, 또 실제로 함께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모이기도 했던 이웃들이 어느 순간 다른 선택을 하는 것 같거든요. 그 둘이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인정 혹은 혼란을 다루고 싶었어요. 돈, 이웃보다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낱말도 있지만 같은 뜻이더라도 한글로 된, 좀 더 소박한 어휘처럼 느껴져서 두 키워드로 묶었는데요. 이 단어도 크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돈’과 ‘이웃’이라고 하면 조금 덜 거창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본이나 공동체 같은 말보다는 돈과 이웃이라는 소박하고 큰 단어로 묶었습니다. 

 

「숲속 작은 집」 주인공 ‘나’는 ‘메이드’가 팁을 주지 않아 혹시 해코지를 하진 않을지 상상하다 “그런 상상을 했다는 데 곧 부끄러움을 느꼈”(68쪽)어요. 이처럼 소설에는 섬세한 마음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마음에 분명히 스치지만 쉽게 날려버리는 마음 같은 것들이 점점이 박혀 있거든요. 작가님이 소설 속에 붙잡아두려고 했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듣고 싶어요.  

제 소설에도 ‘좌표’라는 말이 나오고요. 각 인물들의 사회적 위치나 경제적 위치라는 것이 있지만요. 그것이 반드시 고정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소와 시간이 바뀌면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고, 특히 해외에 나갔을 때에 돈의 위계나 언어 권력도 생기는구나 싶었거든요. 또한 하나의 계층만 다뤘을 때 보여주려는 세계가 다소 좁아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어요. 한 곳만 보여주면 자칫 피해의식처럼 보일 수 있잖아요. 때문에 인물을 여러 좌표에 놓아보자고 생각했어요. 「숲속 작은 집」 여성 주인공의 불안과 신경증이 피곤하게 느껴진다는 독자분도 계셨는데요. 그 피로나 불안 자체가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조건 같습니다. 

 

작가님을 계속 따라 읽어온 독자라 기성세대의 감각도 눈에 띄고 좋더라고요. 「이물감」에서 ‘기태’는 “점과 더불어 좌표도 같이 움직이는데다 다른 그래프와 충돌하며 곡선과 직선이 찌그러지고 휠”(175쪽) 것을 예상 못한 자신을 반추하고요. 「좋은 이웃」의 주인공 ‘나’는 남편에게 “우리는 조금이라도 쥔 게 있는 세대잖아. 감사하며 살자.”(121쪽)라는 말을 하죠. 그러니까 이 고민은 작가님의 것이기도 할까요? 

그렇죠. 산뜻한 중년이 되는 것에 대해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인물의 고백이 나오는데요. 저도 생각했던 문장이에요. 자연스레 저도 변화하더라고요. 방 한 칸에서 살던 청년 세대, 그래서 대체적으로 사회에 책임이 없고 가진 게 없어도 어떤 떳떳함과 건강함을 갖고 있었던 청년들을 등장시키던 데에서 『비행운』으로 가서는 30대, 즉 기성 세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결하지는 않고 구조 안에서 무언가에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물이 나왔어요. 그리고 40대에 이르러서 다른 세대의 눈치도 보고, 자신을 곱씹는 인물들이 나오는 듯해요. 


세대 갈등을 얘기할 때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나누고 가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언어들이 많잖아요. 특히 신문 기사 같은 곳에서 그렇죠. 그 언어대로 자원에 집중해서 서로를 보면 오해나 미움이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지난 겨울, 광장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각 세대가 서로에게 고맙다고 하는 장면이었어요. 이것은 ‘자원’을 열쇳말로 삼았던 시선과는 다른 자원, 다른 유산이죠. 속된 말로 ‘꿀빤 세대’라든가 정치에 무관심한 세대라고 했던 언어와 다르구나, 댓글 창으로 보면서 서로를 상상만 하지 말고 자주 만나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소설을 묶으면서 했어요. 어쨌든 보통 사람들 마음에 있는 이지러진 고민, 약간은 못생긴 마음을 다양하게 그리고 싶었어요. 

 

사실 언론의 언어는 상대적으로 갈등 같은 뾰족한 장면을 더 전달하잖아요. 그것에만 노출되면 다른 세대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강화될 거예요. 그래서 말씀처럼 만남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예전에 난민 관련 여론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는데요. 이주민에 대한 편견이 덜했던 계층이 뜻밖에 40-50대 블루칼라 계층이었어요. 직접 만날 기회가 더 있었던 거예요. 물론 이것은 좀 복잡한 문제고, 젠더적으로 갖는 두려움처럼 여러 가지가 섞여 있지만요. 구체적으로 만나봤던 경험이 중요했다는 걸 알았어요. 보통 이주민에 대한 의식, 인권 감수성이 어떤 계층에게 더 높을 거라는 편견이 있으니까요. 그건 세대도 마찬가지겠다 싶은데요. 서로 어려워하고, 불편해해요. 한편으로는 폐 끼치지 않고, 부담 주지 않으려는 마음에 못 만나고, 안 만나기도 하고요. 그럴 땐 소설로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너무 기승전’문학’ 같지만요.(웃음) 

 


여러 그래프 위에 올려보기


귀족적 천진함(58쪽), 내장의 관상(179쪽) 등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현도 절묘해요. “연민하던 대상이 혼자 반짝이는 세계로 가버렸”(130쪽)음을 보는 “허전하고 휑한”(130쪽) 마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을 테고요. 그리고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질문하게 되는데요. 작가님 안에는 어떤 종류의 답이 있는지 궁금해요. 

우선 곤란과 질문을 공유해 보자는 의미의 출발이 있었는데요. 어떤 면에서 한국은 계급 이동의 역동성이 있었기 때문에 촘촘하게 서로를 흘깃거리는 감각도 발달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 지금은 평점 문화로 또 촘촘하게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죠. 어느 면으로든 평가가 몸에 밴 사회가 된 것 같아요. 신형철 평론가님의 해설에 따르면, ‘상향 대결’ ‘하향 대조’처럼요. 그렇지만 한 가지 좌표에 머물러 한 가지 답을 내리기보다 내 자리를 여러 그래프 위에 올려보고, 스스로를 여러 방향에서 점검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요. 너무 엄격한 답과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하지도 않았으면 좋겠고요. 그러면 오히려 꼼짝 못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좋은 이웃’이라는 것이 완성형 명사가 아니라 실천형 동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답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40대가 되면서 질투도 덜 하게 되고, 응원도 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인터뷰를 봤어요. 생각해보면 이것은 연습이 필요한 일인 것 같고, 계속 경험해 나가야 되는 일 같은데요. 한편으로 각자가 처한 너무나 현실이 어렵기 때문에 그 경험을 쌓지 못하고 배타적인 마음이 되기도 해요. 

각자가 갖고 있는 자원은 달라도 어떠한 전망을 가질 수 있는가에 따라 그 사회의 건강함이 달라질 것 같아요. 모든 게 결정되어 버렸다고 느끼고, 이동의 가능성이 너무 낮아졌다는 느낌이 주는 절망감과 뾰족함, 원망 같은 게 몇 년 사이에 강화된 듯하거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에 대한 열망이 뭐가 나쁘냐는 말은 언뜻 자연스러워 보이지만요. 역사적으로 그것이 사회의 아주 커다란 목표가 되었을 때 뜻밖의 결과가 나왔던 것이 파시즘이었죠. 슬로건 자체는 네 이웃을 미워하라는 식의 폭력적인 말이 아니었잖아요. 당대 사람들도 그냥 부에 대한 열망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로 인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웃과 저울질하다 이쪽으로 부등호가 훨씬 커질 때에는 비록 의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파시즘에 대한 지지가 가능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141쪽)라는 문장도 함께 얘기해보고 싶어요. 방금 말씀하신 차원에서 이 문장이 몸에 확 붙는 느낌을 받았어요.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라는 것은 없을 수도 있고요. 어렵죠. 다만 그 말 자체를 지나친 결벽의 언어로, 자기 방어의 언어로 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문장이기도 해요. 기준이 높아버리면 도덕성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 어쩌면 구실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느 자리에서 ‘고민도 실천의 한 종류’라고 한 적이 있는데요. 제가 무엇을 하자고 소설로 주장할 수는 없지만 소설 속 인물의 이러한 독백이나 번뇌가 출발일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무거운 질문을 인터뷰에서 나누고 싶었던 것 같아요. 고민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가, 고민 없이 지나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이야기를 말이죠. 

책을 낸 뒤 독자분들의 반응을 접할 기회가 있잖아요. 많은 분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그 시절을 건너오셨구나, 깨달았어요. 다만 저는 그것이 앎이라는 형태의 고민이라 무지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요. 더 복잡하게 들어가면 연루의 현장이 누군가에게 생존의 현장이거나 노동 현장인 경우도 있잖아요. 그걸 다양한 앎의 방식으로 선물해 주는 것들이 있는데요. 편안한 무지보다는 그 앎의 어려움이 출발이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둘 다 모르는 장소에 가는 것

 

『안녕이라 그랬어』 안에 다양한 현재 한국 사회의 사건들을 가지고 오셨죠. 「빗방울처럼」에서는 전세 사기 피해자가 등장하고요. 이러한 것을 쓰는 마음이 ‘작가의 말’에서 언급한 “때로는 그 ‘모름’의 렌즈로 봐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음”(317쪽)에 관한 이야기와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그렇게 사회파 작가는 아닌데요. 주제가 모이고 바깥에서의 생각을 보태면서 이야기가 들어오게 되는 것 같아요. 전세 사기는 많은 사람들이 갖는 공포 중 하나죠. 언제든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따라갔던 기사였어요. 말하면서도 제 작품보다 저의 말이 커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들기는 하는데요. 작품 안에 들어가는 것이 제가 공부한 것의 극히 일부라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야 된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다만 제가 지향하고 싶은 문학은, 창작 자체의 신비에 몰두해서 생각했을 때는 이렇거든요. 소설에 대해 제가 썼던 좋아하는 말이 ‘내가 아는 것과 독자가 아는 것을 합해서 우리 둘 다 모르는 장소에 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회파 작가가 아닌데요”라는 말의 뒷면에는 우리 둘 다 아는 걸 합해서 우리 둘 다 아는 장소로 가는 작업에 약간 답답함을 느낀다는 의미가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소설들도 분명히 필요한 이야기들이에요. 그런 작업을 좋아했고요. 그저 창작자로서의 욕심은 우리 둘 다 모르는 장소에 도착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이런 소설을 쓸 때조차 결국에 그냥 우리 둘 다 아는 장소에 도착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나, 하는 두려움과 불만족이 늘 있습니다. 

 

「좋은 이웃」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한 대목이 등장하잖아요. 과거의 현실과 지금의 현실이 연결되는 장면이라 무척 좋았는데요. 이 작품은 어떻게 선택된 것인가요?

어떤 산문에 ‘40대는 책 버리기 좋은 나이’라고 쓴 적이 있어요. 40대는 지금까지 읽은 책과 살아온 삶을 포개서 기준을 다시 세우는 나이, 어떤 가치들을 재조정하거나 선택하는 시기 같고요. 이사하면서도 그렇고, 여러 의미로 책 버리기 좋은 나이가 40대 같아서 「좋은 이웃」의 주인공 부부에게도 어떤 책인가를 버리게 하고 싶었어요. 버린다면 무슨 책이면 좋을까 고민했고요. 그 중 한국 근현대 문학사 안에서 의미가 있는 중요한 작품이면 좋겠다, 한 세대가 동의했던 혹은 사랑했던 문학이면 더 좋겠다, 생각했어요. 그러면서도 생명력 있는 문학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조세희 작가님의 작품을 쓰게 됐죠. 쓰면서 감수성의 변화도 그리고 싶었던 건데요. “우리 모두 난장이에요”라고 많은 분들이 읊조렸던 시기가 있었다면 팬데믹 시기에 유행했던 말은 난장이가 아니라 ‘부자 연습생’이었으니까요. 

 

「레몬 케이크」에서 다루는 모녀서사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쓰게 되더라고요. 저 역시 돌봄이라는 문제를 “너무 무겁고 괴로운 문제라 최대한 그 답을 미루고 있”(195쪽)는 형편이기 때문이에요. 이 작품으로 작가님께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돌봄 문제에 관심이 생겼는데요. 그 중 부모 돌봄을 생각하면 저는 이제 막 시작인 세대 같아요. 제가 부모 돌봄의 한복판에 있었다면 더 큰 용기가 필요하거나 엄두가 안 났을 주제였을 거예요. 하지만 막 시작하는 시기이고, 정면 돌파를 할 용기는 안 나서 약간은 스케치하듯, 크로키하듯 쓴 단편이에요. 그래서 아쉬움도 있기는 하고요. 다만 하나의 스냅 사진처럼 그 시기의 나에게 인상 깊었던 장면도 괜찮겠다, 그렇게 건너가는 시기도 있는 거지, 하고 썼습니다. 그런데 말씀처럼 따님들이 많이 공감하시더라고요. 워낙 정서적인 부분까지 많이들 감당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그렇다면 돌봄 문제를 조금 더 들여다보게 될까요? 

아마 그럴 수도 있을 텐데요. 다른 동료 작가님들도 많이 변주해 쓰시는 이야기고, 다채롭게 나오고 있잖아요. 같은 돌봄 문학이어도 퀴어 돌봄 문제도 나오고요. 대체로 늙은 부모에 대한 죄책감을 다뤘던 과거에 비해 훨씬 다양해진 것 같아요. 이런 작품들을 관심 있게 보고 있어요. 제가 조세희 작가님에게 종적으로 신세를 지고 있다면 지금 나오는 작품들에는 횡적으로 기대고 있는 것이죠.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것 


‘시절의 안녕과 모두의 안녕을 빌며’. 작가님의 서명에 적힌 문장입니다. ‘안녕’이라는 단어의 여러 겹을 생각하게 됐는데요. 어떤 마음을 담으신 건가요? 

아주 넓게는 이 말이 들어간 제목의 단편을 표제작으로 삼았을 만큼 독자분들에게 안부를 묻는, 우리가 지나온 시절에 대해 안부를 묻는 의미가 컸고요. 안녕이라는 말은 작별 인사이기도 하고, 반갑다는 기척이기도 하고, 안부 인사이기도 해서요. 여러 단편을 담기 좋은 그릇이라고 생각했어요. 책이 나오고 독자분들께 친필 서명을 해드릴 일이 있어서 누구누구님의 안녕을 빌며,라는 문장을 오랫동안 썼어요. 그 말을 반복적으로 몇 시간 동안 쓰는데 뜻밖에 경건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진짜로 바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홈 파티」에 나오는 문장인데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24쪽)라는 질문은 결국 『안녕이라 그랬어』에 실린 모든 작품에 해당하는 말 같아요. 

어렵고, 저도 잘 못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직업병의 일종일 수 있지만 어떤 것을 요약하고 싶고, 핵심을 얼른 얻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이야기꾼으로서 내가 싸워야 할 것은 그런 빠른 서사와 충동 아닐까 생각도 해요. 다른 사람 자리에 서 보는 것이 중요하고, 저도 잘 안 되지만 그 노력을 놓아버리면 제가 얼마나 나의 편안함, 나의 편견 안에서 편안해질 인간일지 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직업으로라도 해보려고 하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옳음에 대해, 특히 소설 안에서 옳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거기서 멈추기보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대상이나 집단 안에 들어가서 살피고 구체적인 얼굴을 보고 심지어 연민까지 생기게 하는 작업이 참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어려우니까 잘하고 싶다, 잘 안 된다, 언제 잘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인물들은 “그리스신화 속 영웅”(24쪽)이라기 보다 “변명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약한 이들”(24쪽) 쪽에 가까워요. 이들은 작가님께서 꾸준히 바라보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작가님이 거듭 소설로 불러오게 되는 인물들은 어떤 존재들인지 이야기해주세요. 

편집자 분께서 이번 소설집의 주인공이 ‘공간’이라고 말씀해주시기도 했는데요. 이 책이 아니어도 대체로 저는 평범한 인물들을 많이 그렸어요. 단편에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편의점에서 네 캔에 만 원짜리 맥주를 비교하면서 고민하는, 그리고 돌아와서는 아내에게 직장 상사 흉도 보는 보통의 결함과 보통의 미덕, 생활력을 두루 갖춘 인물들에게 애정이 가죠. 그러다 때때로 뜻밖의 순간에 어려운 선택을 해서 미덕을 발휘하는 인물 말이에요. 상사 욕하고 맥주값 비교하던 사람이 때때로 하는 용기 있는 선택이라 조금 더 빛나 보이는, 그런 인물들에게 애정이 갔고요. 그리고 그냥 분투하는 사람들이죠. 인스타그램 염탐도 하고, 길에 쓰레기도 버리고, 물욕도 있지만 눈 감아줄 만한 결함 안에서 어쨌든 분투하는 인간들, 그런 인물에 애정이 갔습니다. 


물론 저는 장편에서는 좀 더 신비와 특별한, 현실적이지 않은 요소가 들어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요. 단편을 쓸 때는 좀 더 땅에 내려오는 것 같아요. 그래프로 치면 단편은 땅에 가까운 얘기를 쓰고, 장편은 그래도 심리나 모험이나 비일상적 요소가 들어가는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지금 2025년 여름을 지나고 계신 작가님은 어떤 장면을 자꾸 생각하시는지, 그것이 어떻게 작품에 담길지 궁금합니다. 

2년 전 챗지피티를 활용해 수상 소감을 했던 것이 갑자기 회자되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아마 많은 분들의 고민이자 유혹이자 관심이어서 그랬을 것 같아요. 저 역시 그에 관련한 관심이 계속 이어져 오고 있어요. 문학에서 오래 전부터 다뤄져 왔지만 지금은 우리 생활에 바싹 붙어버린 것 같거든요. 그런 챗지피티나 AI 프로그램에 계속 관심이 가요. 특히 기능적인 것보다는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사연을 고백할 때 생기는 풍경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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