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여름에 『월간 채널예스』 창간 4주년 특집 대담에 참여했다. 망원역 근처에 있는 공유 사무실 겸 공유 거주공간에서 프랑소와 엄 편집장, 나,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편집자 두 분이 만났다. 기사를 보며 그때의 대화 내용을 2년여 만에 복기해 보니 기분이 새롭다.
당시에 나는 한국 출판계 최고의 마케터는 방탄소년단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에 『뉴욕 타임스 북 리뷰』 같은, 적당히 지적이고 적당히 대중적이면서도 문학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서평 매체가 없어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그 사이에 『서울 리뷰 오브 북스』가 생겼다.
대담을 마치고 헤어지기 전에 프랑소와 엄 편집장에게서 『월간 채널예스』 칼럼 연재 제안을 받았다. 주제나 소재와 관련해 특별한 요청이나 제한은 없었다. 나는 다음날 “그냥 제가 소설가로 살다가 겪는 일들, 글 쓰거나 출판 관계자들 만나서 겪는 소소한 해프닝 같은 것들을 써보면 어떨까요” 하고 메일을 보냈다.
처음에는 연재 코너 제목을 ‘소설가라는 우스운 직업’이라고 지었다. 그러다 며칠 뒤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으로 바꿨다. 소설가가 하나의 직업이고, 소설가가 속한 ‘업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직업과 업계에 어딘지 우습거나 이상한 구석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왜 새삼 소설가가 직업임을 강조하고 싶었나? 문학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문학 창작자를 보는 시선에 환상이 많이 끼어 있다고 느껴서다. 남다른 계시를 받는 사람이라고, 속세의 돈벌이에서 몇 걸음 물러난 종자들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런 낭만적인 포장에 가장 휘둘리고 그래서 피해도 가장 크게 입는 사람들은 예비 작가와 신인들이다.
그 직업의 어느 부분이 우습고 이상한가? 밥벌이이고 돈벌이인데도 그렇지 않은 척 굴어야 하는 부분이 우습고 이상하다. 예비 작가와 신인들이 그런 인식에 가장 깊이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금전 문제를 협상해야 할 때 주도권을 잘 잡지 못한다. 아예 말을 못 꺼내는 이도 흔하다. 그런 분위기는 업계가 우스워지고 이상해지는 데 한 몫 한다.
나라고 큰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거 뭔가 웃기고 이상한데, 하고 고개를 갸웃할 감각은 있었다. 전업 작가가 되기 전에 직장 생활을 해본 덕분이다. 『채널예스』와 칼럼 분량과 연재 기간을 확정할 때 내가 보낸 메일에는 ‘아슬아슬하다 싶은 이슈도 나올 듯하다’고 적혀 있다. 인세와 강연료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번 제대로 쓰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렇게 연재를 시작했다. 여태까지 해본 모든 연재를 통틀어 가장 즐거웠다. 한국 소설가들 이렇게 산답니다, 요즘 저 이런 직업적인 고민을 하고 있어요, 이런 관행은 답답해요. 그렇게 수다를 떨고 싶었다. 주문 받은 분량은 2000자 안팎이었는데 프랑소와 엄 편집장에게 보내는 원고는 갈수록 점점 길어졌다. 나중에는 6000자 가까이 썼다.
연재를 시작하고 몇 달 뒤부터 이내 작가가 일러스트를 그려주었다. 그 그림들을 사랑했다. 매번 원고를 보내고 어떤 삽화가 나올지 궁금해 하며 게재일을 기다렸다. 처음 계약한 기간이 끝나갈 즈음 『채널예스』에서 연장을 제안해 왔다. 몇 달 뒤에는 내가 추가 연장을 졸랐다. 신뢰하는 편집자, 미디어창비의 에디터 리 팀장이 도와주었다.
다음 원고는 무슨 소재로 쓸지 궁리하는 게 즐거운 놀이였다. 마감 관리, 작가 후기 쓰기, 낭독하기와 오디오북, 교정 교열, 언론 인터뷰 요령, 방송 출연, 동년배 소설가의 작품을 읽는 일, 문단 중심부를 향한 승인 욕망과 인정 투쟁, 웹소설과 종이책 기반 문학이 어떤 식으로든 합쳐질 지 아니면 투트랙으로 갈지……. 언젠가 풀어보고 싶은 얘깃거리들이다.
원고를 쓰는 동안 첫 번째 독자로 상정한 그룹은 역시 예비 작가와 신인들이었다. 내가 예비 작가였던 시절 궁금했던 사항들에 대해 답해주고 싶었다. 문예지 등단 → 단편 작업 → 젊은작가상 수상 외에도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떤 것은 잘 따져보라고, 어떤 것은 미신이니 무시하라고, 부족한 경험이나마 전하고 싶었다.
그러는 사이 나 역시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해 숙고하고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니, 직업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직업은 돈벌이고 밥벌이다. 그걸로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 그런데 직업은 돈벌이와 밥벌이 이상이기도 하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격언을 오랫동안 기이하게 여겼다. 그 말은 현실을 반영하지도, 이상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현실에서 내가 보아온 사람들은 다들 자신과 배우자의 직업으로 방문판매원보다는 대학 교수를 선호했다. 그렇다고 우리의 이상이 단타 전업투자자와 학교 선생님, 나이트클럽 지배인과 경찰이 똑같이 존경 받는 사회인 것도 아니다.
내 생각에 그 격언은 남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다잡을 때 약간 쓸모가 있다. 직업을 핑계로 타인을 멸시하고 싶은 충동이 일 때, 혹은 본인이 돈이 급해서 얼마간 굴욕적인 일을 해야 할 때. 그 외의 상황에서는, 현실에서도 이상에서도 직업에 귀천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직업은 소방관이다. 의사와 간호사도 고귀한 직업이다. 하지만 흉부외과의 심장수술과 피부과의 미용 레이저 시술을 같은 선에 놓을 수는 없다.
최근 나온 신간 중에서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불쉿 잡』이라는 책이 눈길을 끌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영어 원서 전자책을 내려 받았다. 언제 다 읽게 될지는 까마득한데, 이 책 저자는 현대 사회 직업의 무려 40%가 불쉿(bullshit), 그러니까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허튼’ 일자리라고 주장한단다.
저자가 예로 드는 직업들이 뭔지 따로 거론하지 않겠다. 상당히 과격한 목록이다. 다만 그의 논지 중 몇 가지는 분명 부정할 수 없다. 세상에는 그저 고용주나 상관을 돋보이게 하는 게 존재 이유인 직업이 있다. 어떤 조직이 실제로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고 둘러대기 위해 만든 일자리에서 형식적인 서류만 양산하는 사람도 있다.
소설가는 어떤가. 소방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굉장히 매력 있는 직업이다. 신문사와 건설사에서 길고 짧게 일해 본 경험과 비교하면, 적어도 내게는 분명히 그렇다. 원고 작업은 가장 괴로운 순간에도 내 삶을 갉아먹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라고 느낀다. 그 힘은 돈벌이, 밥벌이와는 관련 없는 측면에서 나온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불쉿이 아닌 이유를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 우선 소설가는 주체적으로 일한다. 원고 안 풀린다며 머리 쥐어뜯을 때에도 그는 자기 일의 주인이다. 그는 매번 매 순간 새로운 도전을 하고, 그건 만만찮은 모험이라서 꽤 흥분된다. 드물지만 상쾌한 몰입의 순간도 찾아온다.
그는 자신의 개성이 듬뿍 담긴, 스스럼없이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결과물을 생산하며, 어떤 순간에는 틀림없이 온전한 보람을 맛본다.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고, 그걸 스스로 느끼고, 가끔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평가해준다. 희박한 확률이라도 대박을 꿈꿀 수 있고, 그래서 전망을 품을 수 있다. 거대한 의미의 흐름에 참여함을 느낀다. 부속품이 되는 것과 다른, 기분 좋은 감각이다. 헌신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확신이 든다.
헌신할 수 있는 일인가. 어떤 직업의 귀천은 그 질문으로 대강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직업이 임금의 대가로 종사자에게 시간을, 추가 노동을, 감정을, 가끔은 건강이나 그보다 더한 것까지도 요구한다. 그런데 사모펀드 CEO가 과로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혀를 끌끌 찬다. 뭣이 중한지 모른다며. 큰돈을 벌게 해주는 직업인지는 모르지만 몸을 해치면서까지 추구할 일은 아니라고 예리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지만 소방관의 희생을 우습게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화재 현장이 아니라 훈련 중에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리는 슬퍼하면서도, 소방관이라는 직업에는 그럴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다(그 희생이 괜찮다는 소리는 당연히 아니다). 그 가치는 높은 연봉과는 다른 무엇이다. 종사자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것.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 퇴근 뒤에도, 심지어 퇴직 뒤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나는 소설가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직업에 불쉿 업무는 어느 정도 포함돼 있다. 소방관들도 연말이면 자기역량 평가보고서 따위를 쓰면서 짜증내지 않을까? 신문기자를 예로 들자면, 대체로 보람 있는 직업이지만 어떤 부분은 확실하게 불쉿이다. 다음날 뻔히 공표될 정책 내용을 전날 미리 알아내려고 몸과 마음을 갈아 취재해야 하는 날들이 있다. ‘발표 자료 우리가 하루 앞서 먼저 빼냈다! 우리 매체가 이렇게 취재력이 대단하다!’ 이렇게 자랑하기 위해서.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불쉿 잡이 늘어나는 것이 현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데, 한 직업 안에서 불쉿 업무의 비중이 증가하는 것도 현대의 특징인 거 같다. 요즘 출판계에서는 초판 사인본을 제작하는 것이 유행이다. 몇몇 작가들은 1쇄 물량 전체에 사인을 해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출판사에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거절하련다. 며칠씩 사인 기계 노릇을 할 게 아니라 그 시간에 자기 글을 몇 줄이라도 더 쓰는 게 작가의 일이다.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한 헌신인가. 불쉿 업무와 불쉿이 아닌 업무는 이 질문으로 대충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마케터나 평론가에게 헌신하는 게 소설가의 일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 독자를 위해? 나는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위로나 공감이 소설가의 임무라고 보지 않는다.
나는 내가 만드는 물건이 단순한 소비재 이상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소비자 만족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아도 된다. 소설가가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하는 대상은 작품이다. 돈벌이와 밥벌이 얘기를 해야지, 하고 시작한 연재 2년 4개월 만에, 나는 솔직히 털어 놓는다. 돈하고 상관없이 이 직업 되게 뿌듯해요. 맞는 사람한테는 정말 잘 맞아요.
불쉿 업무를 없애면 소방관이라는 직업은 더욱 의미 있어 질 거다. 취객이 쓸데없이 119를 부르지 못하게 해야 하고, 소방 행정에 부조리가 있다면 개혁해야 한다. 소설가의 업계에도 부조리들이 있다. ‘등단’처럼 수십 년 묵은 이슈가 있고, 팬덤 비즈니스 같은 새로운 현상도 있다. 금전 문제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그런데 그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작가가 쓰는데 10년이 걸렸다는 책을 최근에 두 종 읽었다. 둘 다 엄청났다. 하나는 앤드루 솔로몬의 두 권짜리 논픽션 『부모와 다른 아이들』이다. 또 하나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경찰 소설 『64 육사』다. 그런데 벌써 5000자를 넘게 썼으니 두 책 소개도 언젠가 나중으로 미루고…… 그리고 『부모와 다른 아이들』은 소설이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그 두 책을 읽으며 이렇게 감탄했다. 와, 이건 정말 10년 걸려서 쓸 만하다. 10년이 아깝지 않다. 저자들도 그렇게 자부할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10년 노력이 아깝지 않은 일이 몇 가지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책을 쓰는 직업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건 헌신할 수 있는 직업 정도가 아니잖아. 헌신할수록 더 좋아지는 직업이잖아.
* 〈장강명의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연재를 다음 회로 마칩니다. 즐겁고 보람찬 연재였습니다. 아껴주신 독자 분들께 큰절 올립니다. 이내 작가님, 프랑소와 엄 편집장님, 에디터리 팀장님, 감사해요. 마지막 회에서는 독서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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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소설가)
기자 출신 소설가. 『한국이 싫어서』,『산 자들』, 『책 한번 써봅시다』 등을 썼다.
인위적위험
2021.12.03
글도 노동인데,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지!!!
항상 응원합니다!!! 화이팅!!!!!!!
요니
202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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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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