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보이지 않는 노동이다. 번역가가 글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순간, 그 작품은 새로운 창작물로 다시 태어나지만 사람들은 착각한다. 번역은 그저 언어를 바꾸는 일일 뿐이라고. 안톤 허는 이런 세상을 향해 되묻는다. “왜 번역가는 겸손해야 하죠? 조금은 뻔뻔스러워도 되지 않을까요?” 부커상 국제부문 1차 후보에 두 권의 책을 동시에 올린 번역가이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첫 번째 한국인 번역가인 그가 에세이를 펴냈다. 안톤 허의 문장들은 번역의 기쁨보다 슬픔에 방점이 찍혀 있지만, 시종일관 유쾌한 매력이 있다.
거창하게 포장하고 싶지 않았어요
집필하게 된 계기보다, 다 쓰고 난 후의 소감을 묻고 싶은 책이었어요. 책을 쓰는 경험이 어땠나요?
재밌었어요. 책을 쓰면서 제 삶에 여러가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거든요. 사실 출간제의를 받고 맨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걸 누가 읽어?’였어요. 편집자님께서 번역에 대한 실용서가 아니라 저의 일상이 담긴 에세이집을 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죠. 온종일 집에서 번역이나 하는 삶이 재미있을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막상 쓰기로 결정하고 나니 책에 실린 에피소드들이 연달아 벌어지더라고요. 저를 사칭한 번역 사기꾼이 나타나는가 하면, 『저주토끼』와 『대도시의 사랑법』이 부커상 국제부문 롱리스트에 오르고, 옥스퍼드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등에서 강연까지 하게 되면서 그 이야기를 모두 책에 실을 수 있었죠. 마치 책을 쓰기 위해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에요(웃음).
‘이런 책을 누가 읽어’라는 생각이 ‘한 번 써보자’로 바뀐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요.
내 존재의 정당함을 알리고 싶은 의도가 제일 컸어요. 한국문학 번역가로 일하는 동안 부당한 일들을 많이 겪으면서 나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내가 이뤄낸 몫에 대해 공공연하게 떠들지 않으면 그 스포트라이트가 백인이나 한국문학번역원 같은 엉뚱한 곳에 비추어지니까요. 도착어 시장인 영미권뿐 아니라, 출발어 시장인 한국에서도 번역가로서 나의 이미지가 있어야 앞으로 일을 할 때 좀 더 수월해질 거라는 생각이 가장 컸어요. 국내 언론사 인터뷰에 응하고, 책을 쓰는 활동은 결국 나라는 번역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었죠.
작가 서문의 마지막 구절이 생각나요. “내가 주어진 이 일이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하고, 힘든지 어떻게든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다(7쪽).”라고 썼죠.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이 무엇이었나요?
‘고상한 책은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제가 고상하거나 거창한 사람으로 보이는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번역 일은 하나도 우아하지 않아요. 합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번역 사기꾼이 나타나는 등의 황당한 사건도 일어나죠. 처음에는 내 존재를 알리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오더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누구를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지 생각했어요. 결국 젊은 시절의 나를 위해서 쓴 글이 된 것 같더라고요.
젊은 시절의 안톤 허를 위해서요?
저는 일곱 살 때부터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 완강해서 법대를 갈 수밖에 없었고, 이루지 못한 꿈에 후회가 남아서 세 군대의 대학을 전전했죠. 제가 10~20대때 ‘하기 싫은 건 안 해도 돼’라는 에너지를 가진 책을 읽었다면 제 삶을 더 잘 헤쳐나갈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 책에는 번역 자체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어요. 번역이라는 일을 하기 위해 제가 겪어온 수많은 경험에 대한 이야기죠.
표지에 그려진 이모티콘을 보고 웃음이 났어요. 책의 내용과 너무 잘 어울리는 캐릭터라서요.
표지 디자인을 3개 받았는데 그 이모티콘을 보자마자 선택했어요. 웃고 있지만, 짜증난 표정이 저랑 똑같더라고요(웃음).
이 책의 매력은 아이러니함에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문학 번역은 맨땅에 헤딩을 견뎌야 하는 답답한 일이라고 내내 토로하면서도, 그 일을 너무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거든요. 어린 시절부터 한국문학을 좋아했나요?
영문학을 너무 좋아해서 영미문학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요.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은 뒤늦게 찾아왔죠. 우리나라는 학교에서 문제집 풀지 않고 소설책 읽고 있으면 혼나는 분위기잖아요. 그래서 학창시절에는 국문학 작품을 책보다 국어 과목의 지문으로 많이 읽었는데요. 외국에서 산 경험 때문인지 이육사 같은 저항시인의 시를 특히 좋아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때 논술 수업에서 기형도 시인의 시 「입 속의 검은 잎」을 처음 읽고 충격을 받았죠. ‘와 우리나라에 이렇게 좋은 현대시가 있다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웃음). 본격적으로 한국 문학을 열심히 읽기 시작한 건 대학생이 되어서였어요.
독자에서 나아가 한국문학 번역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요?
저는 번역이 독서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책을 정말 좋아하고, 그 작품을 더 깊이 읽고 싶으면 번역을 하게 되거든요. 일종의 필사인 셈이에요. 번역가 ‘故 그레고리 라바사’는 번역가의 리딩이 번역을 통해 그대로 보존된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 말에 무척 동감해요. 번역가는 자기가 읽은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독자인 거죠. 결국 저는 문학이 너무 좋아서, 문학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번역가가 된 것 같아요. 아마 어떤 문학 번역가에게 물어도 비슷한 답을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이게 내 인생이야!
책에는 한국문학 번역가로 일하면서 겪은 부당함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어요. 번역가로서 가장 화가 나는 순간이 언제인가요?
무보수로 일을 요구받을 때가 많아요. 이를테면 최근에 제가 번역한 책이 출간되었는데, 그 작가의 인터뷰를 번역해달라는 거예요. 한두 번은 출판사의 요청을 들어주고, 번역 지원금을 신청하라고 일렀는데 바뀌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솔직히 말하고 추가 업무를 거절했죠. 내 역할은 여기까지이고, 이 작품을 위해서라도 더이상 공짜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해요. 이번 경우는 운 좋게 책이 출판되어서 번역비라도 받았지만, 제가 샘플 번역한 작품이 외국계 출판사와 출판 계약을 맺지 못하면 그동안 들인 돈과 시간, 노력은 모두 날아가는 셈이 되죠.
지금은 어때요? 『저주토끼』가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생긴 변화도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번역할 책을 스스로 찾아다녔다면, 지금은 출판사로부터 의뢰가 들어온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인 것 같아요. 한 마디로 저의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수고를 덜게 된 거죠. 저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고, 한국에 거주하고, 대학과 대학원도 한국에서 나왔어요. 해외에서 산 기간도 그리 길지 않고요. 그러다 보니 서류상으로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확고한 증명서가 생겼죠. 아마 편집자 입장에서도 저에게 번역을 맡기기가 더 수월해졌을 거예요. 이전에는 왜 이 번역가를 선택했는지에 대해 내부적으로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일을 하기가 훨씬 편해진 건 사실이죠.
작가님의 마음가짐은 어때요?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부커상은 관례상 출판사가 후보작 작가와 번역가에게 런던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하는 경비를 지원해요. 저도 여기에 대비해서 한국문학번역원에 지원금을 신청한 상태였는데요. 번역원에서 지원금을 후불로 지급한다고 하는 바람에 시상식 참석 비용을 제 카드로 먼저 결제했어요. 그리고 한달 후, 한국문학에 관한 일로 미국 출장을 가게 됐는데,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려고 신용카드를 내밀었더니 사용 한도 초과라고 결제가 거절되더라고요. 그 순간 ‘역시 이게 내 인생이야!’ 싶었어요(웃음). 사실 시상식에 앉아있던 순간에도 정보라 작가님과 함께 ‘이건 환상이고,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직업인이라면 으레 ‘좋아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견뎌야 하는 작업’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작가님의 경우는 어때요?
우선 번역을 할 때가 제일 좋고요. 번역을 위해 책을 읽는 것도 너무 좋아요. 번역할 책을 선정하려면 요즘 어떤 작품이 나오는지 알고 있어야 하거든요. 신인 작가가 등장하면, 그 작가의 글을 몇 줄이라도 읽어봐야 하고요. 이 과정이 너무 재미있어요.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는 여러 개의 평행우주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외에 나머지 일은 다 싫어요(웃음). 특히 메일은 그만 쓰고 싶어요. 사람들이 저에게 번역가가 어떤 직업이냐고 물으면 “메일 쓰는 직업”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하루의 60% 이상은 메일을 쓰느라 허비하곤 해요. 그래도 올해부터는 상황이 나아졌어요. 제 글을 담당하는 런던 에이전트가 저의 번역까지 담당하게 되었거든요. 번역과 관련해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을 에이전트에 위임한 덕분에 스트레스가 많이 줄었어요.
일을 지속하려면 정신 에너지를 아끼는 방법을 찾는 게 정말 중요하죠.
처음에는 원고료의 몇 프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에이전트에 들어가야 하나 싶었는데, 지금은 너무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에이전트가 번역가를 담당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인데요. 저는 이 모델을 넓히고 싶어요. 그러려면 성공 사례가 있어야 하니까 제가 더 열심히 원고를 팔고, 번역가의 문제를 담론화시켜야겠죠. 이게 번역가로서 이루고 싶은 저의 다음 과제예요.
올해 영문 장편소설을 계약했다고요. 축하드려요!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이루어졌네요.
감사합니다. 작업실로 통근하는 동안 지하철에서 쓴 소설이에요. 소설을 완성하고 에이전트 리스트를 만들어서 보냈는데 대부분 거절을 당했거든요. 그런데 1년 후에 한 에이전트에서 혹시 계약을 했는지 물어보는 연락이 왔어요. 제가 소설을 보낸 에이전트 중에서 가장 저명한 곳이었죠. 내년 7월쯤 하퍼콜린스(HarperCollins) 출판사의 하퍼비아(HarperVia)라는 임플린트에서 책이 출간될 예정이에요.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가 독자들에게 어떤 책으로 읽히기를 바라나요?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특히 문학이나 콘텐츠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 분들이 읽기를 바랍니다. 저는 문학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가족, 선생님, 지인 등 수많은 어른들로부터 안 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해냈어요. 자신만의 꿈을 가진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하고 싶은 걸 다 해도 된다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안톤 허 한국문학 번역가. 그가 번역한 정보라의 『저주토끼』,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1차 후보에 동시 지명되었고, 『저주토끼』는 부커상 최종 후보에 진출했다. 신경숙의 『리진』, 『바이올렛』, 강경애의 『지하촌』, 황석영의 『수인』, 백세희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오션 브엉의 시집 『총상 입은 밤하늘』을 한국어로 옮겼다. 제13회 홍진기 창조인상 문화예술 부문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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