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우X정희원 칼럼] 세계 차 없는 날, 거대도시에서 이동하기
세계 차 없는 날은 자동차를 차량을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조건을 반성해 보고, 그렇게 반성한 내용에 따라 교통망의 이곳과 저곳을 조금씩 만져보면서 사회적 실험을 진행하는 날이다.
글ㆍ사진 전현우(교통, 철학 연구자)
20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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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 시대, 도시의 이동을 탐구하는 교통, 철학 연구자 전현우와
도시인의 이동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노년내과 의사 정희원의 크로스 에세이.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언스플래쉬
서울, 서울, 서울

9월 22일 오늘은 세계 차 없는 날(world car free day)이다. 자동차가 지배 중인 도시 속에서, 자동차를 덜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는 캠페인. 1950년대부터 도로를 점거하는 전술이 모색되었고, 이후 1990년대 공식화된 이 프로그램은 서울에도 2007년부터 도입되었다. 비록 이제는 그 이름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지만.. 마침 이날에 내가 쓰는 마지막 칼럼 <거대도시에서 이동하기>가 실리니, 감회가 새롭다. 

차 없는 날은 자동차를 파괴하자는 러다이트 운동의 날이 아니다. 오히려 이날은, 차량을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조건을 반성해 보고, 그렇게 반성한 내용에 따라 교통망의 이곳과 저곳을 조금씩 만져보면서 사회적 실험을 진행하는 날에 가깝다. 

이 실험과 비슷한 무언가를 이 연재는 시도하고 있다. 두 저자는 자신의 이동에서 출발해, 이들 이동의 조건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의미로 다가오는지 점검한다. 이런 점검을 밟아 나가다 보면, 인체와 인간의 삶을 지나, 도시를 넘어 일국의 변화, 나아가 행성 차원에서 진행 중인 기후 위기까지 도달하게 된다는 게 두 저자의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따로 놀고 있다. 두 저자는 이렇게 따로 노는 것들을 이어 붙이고 싶은 듯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공유한다고 해서, 모든 부분에서 생각이 같을 수야 없다. 서울, 서울, 서울이 문제이다. 내 생각에, 서울에 더 사람을 몰아넣는 건 쉽지도 않고 적절한 방향도 아니다. 

물론 세계 도시의 방향은 바뀌었다. 정보화와 함께 대도시 집중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사스키아 사센의 『세계경제와 도시』에서는 보통 규모의 국가들 말고 캐나다, 호주 등 대륙 규모의 거대 국가에서도 일극 집중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집중은 단지 도시 권역의 일이 아니라, 도시 중심부(city proper), 즉 도시권의 핵을 이루는 중심 도시 방향의 집중이기도 했다. 

한국에 세계의 방향을 대입하면 이런 식이다. 그냥 두면 서울 일극 집중은 오히려 더 커질 것이다. 정보화 덕에, 서울에서 생기는 일자리는 늘고 다양성 또한 더욱 높아질 것이다. 노동자로서는 다양성이 큰 일자리 시장과 가까이 있는 게 더 낫다. 그 덕에 중심 도시의 인구도 늘어날 것이다. 한편 이렇게 핵으로 더욱더 몰리는 사이, 경기와 인천의 인구는 상대적으로 진정될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서울의 인구는 줄고 있다. 절대 수치도 이제 정점(1990년, 1060만 명)에 비해서는 100만 명 이상 빠진 상태다. 물론 인천과 경기의 인구는 지금도 늘고 있다. 일자리는? 여전히 서울이 경기도보다 많다(21년도 기준, 456만:448만). 조금 더 뜯어보면, 남자 일자리는 경기도에 더 많은데 반해(253만:267만), 여자 일자리는 서울에 더 많다(202만:181만). 넓은 땅이 필요한 제조업, 그리고 도심에 밀집한 서비스업의 성별 및 공간 분포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상황은 이렇다. 서울에서 사람이 빠져나가는 건, 세계적 흐름은 물론 일자리의 분포와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그 덕에, 정희원이 말한 대로 집에 보호자가 상주할 수 없는 집이 늘어날 것이다. “가족 자유주의”를 고수하든, 단지 사람들의 통근 시간과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든, 서울에 살 수 있는 사람을 늘리자는 생각이 나오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서울은 좁다. 농담으로 산을 부수자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서울의 임야 면적(137㎢)은 대지(건물을 짓는 땅, 223㎢)의 절반, 도로(80㎢)보다 조금 넓은 정도일 뿐이다. 이렇게 임야를 모두 부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해도 그 면적에는 200만 명 정도 살면 다행일 것이다. 도로와 철도, 학교와 공원을 위한 면적도 필요하니.. 제1외곽순환고속도로 안쪽 공간을 서울로 바꾼다 해도 새로 개발할 만한 면적은 크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은 미래를 위해, 그리고 서울의 무분별한 확대를 막기 위해 설정했던 그린벨트를 싹 개발해 채워나가는 일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1인 가구를 위한 지원도 사실 논란의 여지가 크다. 효율의 공간인 도시, 그것도 서울에서 한 사람만을 위한 집이 넉넉한 규모가 될 수야. 1인 가구는 2인 이상 가구보다 인원당 화장실도, 가전제품도 더 많이 필요하니, 도시를 이루고 사는 이유 가운데 하나인 규모의 경제와 반대로 가는 길인 건 사실이다. 


지옥철의 악순환

그렇지만 1인 가구로 산다는 것 역시 도시의 규모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생활에 필요한 많은 기능을 집 밖의 상업 시설에 외주할 수 있고, 쉽게 일자리를 구해 관련 비용을 조달할 수 있으며, 집 역시 어마무시한 양이 있어 선택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게 거대도시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달성해야 할 (소박한) 목표는 사실 무시무시한 귀결을 가진다. 개인의 충분한 공간, 나아가 녹지는 물론 기후 문제를 비롯한 장기적 미래까지.. 결국 함께 달성할 수 없는 모순적 목표들을 모두 달성하라는 압력이 소용돌이 치는 공간이 우리의 거대 도시인 셈이다. 

거대 도시 속의 길 역시, 이렇게 함께 달성할 수 없는 목표 속에서 헤맨다. 그동안 자동차가 가진 문제만 주야장천 욕했으니, 이번에는 철도 욕으로 그렇게 해 보자. 거대 도시의 철도에서 찾을 수 있는 문제 가운데, ‘지옥철’보다 욕하고 비난하기 좋은 현상은 없다. 모두가 힘들다고 말한다. 나 역시 러시아워는 피할 수 있다면 무조건 피한다. 

이렇게 열차에 사람이 많은 건 당연히 서울에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조금씩이지만 계속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데이터는, 이렇게 힘든 지옥철이 사실 과거보다 많이 나아진 상태라는 걸 보여준다. 

그림 1은 서울 주요 노선의 혼잡도 추이이다. 혼잡도 100%는 차량 설계 시 서 있는 사람을 감안해서 설정한 정원, 즉 160명/량을 기준으로 계산한다. 좌석은 54석/량, 긴 좌석이 7석에서 6석으로 줄어들고 나서는 48석/량이니 실은 100%라고 해도 사람들은 혼잡하다고 평가할 것이다. (실제로 전동차 무게로 혼잡도를 송출해 주는 장치가 사람이 꽤 많이 들어찬 객차의 혼잡도를 ‘양호’라고 띄워주자 혼동에 빠진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일단 150%가 정부의 혼잡 관리 기준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고 그림을 살펴보자.


서울 주요 노선의 혼잡도 추이. 전체 노선 가운데 최정점 구간 기준이다. 2, 3, 4호선은 서울교통공사(90년대 이전은 내부 자료), 1990년대 경인선은 당시 언론 보도, 2010년대 경인선 및 9호선은 철도통계연보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데이터의 시작점부터 혼잡도는 역대 최고를 기록한다. 실제로 언론에서 ‘지옥철’이라는 말이 처음 잡히는 것이 1989년이다. 이 시기는 1기 지하철(1~4호선)이 갖춰진 직후(완전 개통 1985년)인 만큼, 긴급한 필요성이 관측 기록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90년대 중반부터는 이런 혼잡이 조금씩 줄어든다. 자동차가 보급되고 도시고속도로(강변북로, 올림픽대로, 내부순환로)와 2기 지하철(서울 5~8호선), 추가 광역철도가 갖춰졌기 때문이다. 특히 3호선의 경우에는 1999년에 이미 150% 아래로 내려갔고, 4호선, 2호선도 일단은 정원의 2배 이하의 인원만 탑승한다. 2010년대 들어서면 상황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이때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이 9호선일 것이다. 과거 상황에 대한 기억이 없는 젊은이들은 9호선 때문에 지옥철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게다가 이 노선은 강남과 여의도를 직접 잇는 노선. 90년대 수준의 혼잡이 이런 ‘황금’ 노선에서 나타난 건 많은 사람들에게 나름의 충격이었을 것 같다. 

나는 일종의 파동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 적확하다고 생각한다. 철도 같은 인프라 투자는 두 방향으로 기준을 벗어날 수 있다. 예측보다 이용량이 너무 많은 게 한 쪽이다. 반대 방향은 예측보다 이용량이 너무 적은 경우다. 전자는 지옥철로 이어진다. 한편 후자는 과잉 투자라는 비난으로 이어진다. 이런 평가는 다음 세대의 투자 규모에 영향을 미친다. 지옥철 시대 뒤에는 당연히 그걸 풀고자 하는 요구가 빗발칠 것이다. 한편 과잉 투자가 이어졌다면 당분간은 대규모 투자를 중단해야 한다는 압력도 커져, 작은 규모의 노선만 건설될 것이다. 

초기 투자 이후, 지옥철 파동이 한차례 지나간 것이 90년대의 상황이다. 한편 2000년대는 철도는 과잉 투자라는 평가가 상대적으로 지배적이었다. 서울 5호선 역사 구조물의 크기를 생각해 보면 느낌이 올지 모르겠다. 이 노선은 정말 어쩔 수 없는 몇몇 역을 빼면 웅장할 정도로 널찍한 통로와 역사로 이뤄져 있다. 이미 개발된 여러 지역을 통과해, 부지가 별로 없음에도 그렇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실제 수요(하루 약 60만, 승차 기준)보다 배 이상 많은 사람들이 타리라고 예측을 했기 때문이다. 건설 부채도 많이 생겼고, 도로 규모도 줄었고, 살얼음이 얼기 딱 좋은 복공판 위를 위험하게 지나다니도록 시민들을 내모는 고생을 해 가며 뚫었는데 실적이 이렇다? 규모를 효율화하는 게 좋다는 논의가 나오는 게 자연스럽다. 당시에는 버스가 오히려 더 중요하고 우선이라는 이야기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 덕에, 2010년대는 다시 지옥철이 온 거 같다. 

그럼 2023년의 상황은? 90년대보다는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나아졌다. 아마도 2000년대보다도 대체로 나아진 거 같다. 그렇지만 2010년대보다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2000년대 볼 수 있었던 규모의 개선을 확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과잉 투자를 막기 위해 발달한 각종 제도 덕분에, 90년대만큼 광범위한 투자가 이뤄지지도 않았고, 그렇게 망이 확장된 결과 사람들의 이동 범위 또한 넓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지옥철’은 수도권 곳곳에 다시 돌아왔다.

이런 방향에 대한 한 대응이 바로 새 철도에 대한 열광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저 지옥철과 무관한 새로운 철도는 정희원이 말하는 ‘노동자 마진 스프레드 스퀴즈 현상’을 완화할 수 있는 길로 보였을 것이다. 토지가 싼 지역에 철도를 새로 놓으면, 적당한 가격의 주택까지 더 빠르게 도달할 수 있어 주택 공급을 확대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일을 좀 덜 해도 신도시의 쾌적한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게 이런 시각의 핵에 있다. 

그러나 철도 투자만으로 이런 악순환을 벗어날 수는 없다. 돈도 돈이지만(그래서 과잉 투자 아니냐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지만) 돈을 어떻게든 만들어 내도 열차 역시 한계가 있는 수단이다. 2복선을 깔아, 10량 열차를 나란히 20량씩 공급해도 사람이 많으면 결국 열차는 꽉 들어 찬다. (혼잡도 100% 정도라도 결코 사람이 적다고 느끼는 밀도는 아니다) 경인선처럼 말이다. 게다가 기존 노선 주변은 오래된 만큼 개발을 벌이기에도 한계가 있다. 경인선 주변 2km 이내에는 20년 전에도 200만 명이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결국 새 축이 필요하지만 서울과 수도권에서 그런 땅이 있을 리가 없다. 더욱 빠른 열차로 더 먼 곳에 신도시를 짓는다면? 당연히 더욱 비싼 열차가 필요하게 된다. 인천에서는 일부러 서울에서 먼 곳에 지은 신도시, 송도를 위해 비싸고 과잉 투자가 될 가능성이 큰 GTX B를 계속 추진하고 있을 정도.1)  결국 길은 사람의 돈을 먹어 치우고, 미래를 준비할 여유를 먹어 치운다. 


교외의 세 종족

결국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있다. 모두가 도시를, 그것도 콕 집어 서울을 원한다. 청년이든 노년이든, 1인 가구든 정상 가족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난뱅이든 부자든. 그렇지만 서울은 좁고, 길 역시 철도조차 지옥철 신세를 면치 못한다(도로의 부실한 용량 가지고 이런 거대도시를 지탱할 수야 없다). 사람들이 원하는 수준으로 혼잡도를 낮춰주려면 주요 축은 모두 2복선을 깔았어야 했을 것이다. 이 와중에 교외의 배출량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그에 따라 거대도시를 담고 있는 기후 시스템은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다. 

손을 놓고 있을 수야 없다. 그럼 어디서 다시 출발해야 할까? 그럼에도 여전히, 수도권을 기준으로도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절대다수는 아니라는 점에서 출발하는 게 필요할 거 같다. 저번 회차에서 본 김포라면, 서울 3도심(4대문, 영등포-여의도, 강남)으로 출근하는 사람은 전체 출근자의 10% 정도이다. 분당 등 다른 여러 신도시에서도 20% 미만의 숫자다. 이들이 물론 신도시의 씨앗이자 서울의 영향을 이들 도시로 퍼뜨리는 끈 같은 기능을 하지만, 그럼에도 80%는 도심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같은 도시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고(김포는 60% 정도). 많은 사람들이 벌이는 통행의 방향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거리 역시 꼭 길지는 않다.   

모빌리티 연구를 참조해 보면 이들을 조금 더 풍성하게 분류할 수도 있다. 파리 교외 주민들의 이동 패턴을 세 범주, 아홉 종류로 나눈 로돌프 로디에의 연구를 잠깐 확인해 보자. 2)

(1) 거주지 속박형. 

  1. 내향형. 출퇴근 이외의 이동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들. 
  2. 은둔자. 정기적으로 이동하지도 않고 독립적인 이동 수단을 보유하지도 않은 사람들. 
  3. 포로. 독립적인 이동 수단은 있으나 충분한 돈이 없어 주변 도시로 자주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 

(2) 소도시 활용형.

  1.  마을사람형. 통근 이외의 활동은 대체로 자기가 사는 소도시에서 처리하는 사람. 
  2. 다재다능형. 중심도시뿐만 아니라 주변 소도시도 생활 속에서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사람.  

(3) 외부지형형. 

  1. 중심지 통근자. 중심 도시로 매일 통근하며, 주말에도 오가는 사람.  
  2. 외곽 방문자. 중심 도시의 외곽부로 통근, 방문, 출장을 하며, 도심에는 잘 들어가지 않고 순환도로를 이용하는 사람. 
  3. 과잉 이동자. 하루 중 긴 부분을 이동에 소비하며, 외곽의 집에는 잠만 자러 들어오는 사람.  
  4. 부재자. 타 지역에 직장 등 거점이 있고, 주말이나 휴가 등에 가끔만 교외에 방문하는 사람. 


거주지 속박형 사람들의 모빌리티 구조 도해. 크리스토프 게이 등, 근교의 복권, 48쪽

소도시 활용형 및 외부지향형 사람들의 모빌리티 구조. 크리스토프 게이 등, 근교의 복권, 49~50쪽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사실 조금 딱딱해 보인다. 서로 겹치는 데다, 실제로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 답하기 곤란한 경우도 있겠다 싶다. 그렇지만 이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존재하는 게 교외이고 신도시라는 인천 변두리 출신 사람들의 직감을 믿고, 한 번씩 (자신이 교외 사람들이라면) 자신과 가족이, (자신이 서울 사람이라면) 교외에 사는 친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맞혀 보면 좋겠다. 성격 유형처럼 테스트를 만들어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 확인해 보는 것도 재미는 있을 것 같다.  


자동차의 힘, 그리고 세계 차없는 날

이들 세 종족, 아홉 아종족 모두에게 유용한 수단이 있다. 바로 승용차. 교외 신도시를 돌아다니든, 주변 소도시를 방문하든,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가든 모두 승용차는 이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 그것도 개인에 맞춰서. 바로 그 덕분에, ‘자동차 지배’는 바로 이들 종족이 모여 사는 교외에서, 그리고 비수도권에 만연해 있다. 

이 연재에서 두 저자는 바로 이 자동차 지배 주변을 정찰하며 그 틈을 찾아왔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향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도 된다면, 상황은 사실 생각보다는 쉽다. 서울 내부의 경우 자동차 지배가 기후와 무관하게 이미 약해지고 있으니. 수단도, 방법도 지금 있는 걸 강화하면 된다. 혼잡통행료, 주차료, 교통유발부담금, 유료도로… 그렇지만 서울로 향하는 건 역시 한계다. 적어도 서울이 거주 인구를 늘리기에 너무 좁다는 것만은 명백하다. 아마 출생률도 서울 인구를 다시 늘리면 더 낮아지지 않을까? 대도시에서 출생률이 낮다는 건 상식이니. 출생률이 낮아진 사회는 사실 미래 세대의 목소리와 피부로 부대끼지 않는 걸 택한 사회라는 점에서 기후 대응의 이유도 떨어질 것이다.

아무튼, 그렇다면 결국 기후 위기 시대의 전장은 교외, 교외, 교외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동차가 지배하는 이 장소를 대체 어떻게 바꿔야, 오늘의 개인에게도, 먼 미래의 개인에게도, 그리고 미래 세대와 비인간에도 좋을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방향은 ‘깍지 모형’이었다. 도심부, 그리고 도심에서 뻗어 나온 대중교통 축 주변에 시가지가 발달하도록 하고, 그 주변에는 토지 이용 규제를 걸어 싼 땅값을 찾아 승용차 이용만 가능한 조건을 감수하려는 개발을 억제한다. 이렇게 되면 도심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의 손이 한  쪽에, 그리고 그사이에 손가락을 뻗고 아예 도시권 밖 대 녹지에 뿌리를 둔 녹지의 손이 한쪽에 서게 된다. 이들 두 손이 서로 맞잡은 모양을 이루고 있으니 ‘깍지’라는 말이 제격이다.

『납치된 도시에서 길찾기』 등에서 충분히 답하지 못한 질문이 물론 남아 있다. 오늘의 교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깍지 모형에 어떤 입장일까? 이들 입장을 유형화할 수 있는 기반이 로디에가 제안하는 세 종족이다. 외부 지향족은 토지 규제가 강화되고 승용차 이용 여건이 악화되는데 따라 손해를 보겠지만 철도가 체계적으로 갖춰져 주변 대도시로 가는 데 어려움이 크지 않고 역 주변이 보행 공간으로 재편되어 생활 기능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크지 않으면 전체적으로 큰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도시 활용족 중 마을사람형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한편 소도시 활용족 가운데 특히 주변 소도시 여럿을 오가는 사람들은 문제다. 소도시 사이에 철도는 듬성듬성하고, 토지 규제로 시가지 사이 간선도로 주변의 활용이 줄 수 밖에 없으니 손해가 클 것이다. 기존 간선도로 위에 버스를 투입하고, 환승센터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불만에 대응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거주지 속박족들은? 깍지 모형을 따르는 도시로 변화해서 큰 손해를 보지는 않을 듯 하지만, 직접 이익이 되려면 자전거, 보도 같은 실핏줄이 더 편안하게 되어야 할 것 같다. 

지금으로서는 모두가 자동차 지배 속에 잠긴 교외. 이들 지역에서, 차없는 날은 사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가까울 지 모른다. 지금처럼 시내 도로 뿐만 아니라, 며칠만은 교외 국도를, 고속도로를 운동장으로 바꾸자는 이야기이고, 그동안은 극히 빈약한 대중교통, 그리고 시민들 자신의 사지에 의존해 달라는 이야기이니. 그렇지만 기후 위기 상황에 대응하려면, 결국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해 내야만 한다. 차없는 날을 우리 동네에서도 진행해 보자는 말을 교외 신도시에서도 좀 더 쉽게 꺼낼 수 있는 그 조건이 무엇일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




1) 신도림역에서 4천명, 부평역에서 5천명 이용한다는 예비타당성조사 예측이 있는 노선이다. 환승객을 포함해 신도림역은 하루 40만 명, 부평역은 10만 명이 이용하는데도 이렇다. 이런 노선조차 사업이 계속되는 걸 보는 건 정말 괴롭고 끔찍한 일이다. 어디 구석진 지역의 노선도 아니고 전 수도권이 시끄러운 GTX 노선의 한 축이 이런 상태라면, 과잉 토건, 철도 패티쉬라는 비난에 사실 답할 말이 궁색할 수 밖에 없다. 

2) 크리스토프 게이,실비 랑드리에브,아나이스 르프랑-모랭,클레르 니콜라,리오넬 루제, 근교의 복권, 김태희 옮김, 엘피, 2021: 4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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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우(교통, 철학 연구자)

서강대학교에서 분석철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자연종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교통, 철학 연구자. 과학 철학을 연구하던 중, 대규모 자원과 에너지를 소모하면서도 사람들을 매일같이 끌어들이는 교통 시스템의 마력 덕에 본격적으로 교통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자연과학연구소에서 교통에 대한 관심을 더 발전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