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김청귤, 천선란, 저우원, 청징보, 왕칸위 저/김이삭 역 | 래빗홀
육체는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사이버펑크의 대표작이자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을 만든 작품답게 소설은 가상현실의 현란한 풍경을 묘사한다. 육체에 관한 묘사는 지하수처럼 소설의 표면 아래를 흐르다 때때로 분출된다. 사이버스페이스를 빛처럼 누빌 때는 육체를 느낄 새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살아있는 한 육체에 제약되므로, 주인공은 먹고 자고 자신의 몸을 느껴야 한다. 육체는 분명 감옥이다. 동시에 생명을 유지시키는 근간이자, 인간의 의식 바깥에서 파도치며 실존하는 무엇이다. 주인공은 비육체적 세계를 한껏 헤매다가도 결국 육체적 접촉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감각을 경험한다. 이는 “인식을 넘어 존재하는 거대한 것이었고, 나선 구조와 페로몬 속에 암호화된 정보의 바다였으며, 육신만이 강력한 맹목으로 읽어 낼 수 있는 무한대의 복잡성”이다.
SF 소설을 읽다 보면 몸을 향한 복잡한 감정을 종종 만난다. 예를 들어 기억과 인격을 복제할 수 있다는 설정은 대개, 신체는 껍질일 뿐이고 사람은 그와 별도로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이때 정신과 신체는 깔끔하게 분리된다. 로봇, 안드로이드, 클론은 인공적으로 신체를 창조하는 기술과 관련이 있다. 유전자 조작이나 페로몬 합성 등은 인간이 자기 신체를 자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도록 만들어 주는 기술이다. 말하자면 신체를 의식의 지배 아래로 복속시키는 권능이다. 육체적, 본능적, 자연적인 영역에 속하던 문제는 인위적으로 조작 가능한 것으로 변한다. 타고난 유기체 신체에 연연하는 건 고리타분한 태도처럼 묘사된다. 수많은 작품이 인간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는 자유로운 미래를 그렸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간단할까?
인간 대뇌의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은 신체의 경험과 함께 발달한다. 정신, 이성, 영혼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매우 육체적으로 형성된다. 이런 문제의식 역시 SF 소설에 종종 등장한다. 예를 들어 그렉 이건의 「내가 행복한 이유」는 ‘나’의 정체성과 ‘몸’이 매우 질척하게 얽혀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주인공은 뇌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행복감을 임의로 조절하는 능력을 얻는다. 그는 자신이 무엇에 얼만한 행복감을 느낄지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다. 자연히 느끼는 쾌감이나 호감이라는 개념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일관적인 취향, 개성, 정체성도 없다. 그의 감상은 모두 스스로 신체를 조작한 결과이므로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여기에 진심으로 빠질 수는 없다. 「적절한 사랑」의 주인공도 자신의 감정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주인공은 남편의 치료를 위해 그의 뇌를 태아처럼 자궁에 품고 있어야 한다. 비록 신체적, 감정적으로는 임신과 유사한 상태에 놓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착각이다. 치료가 끝날 즈음엔 주인공은 더 이상 신체가 보내는 신호에 속지 않는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한다는 감정에 취하지도 못한다. 자신이 사랑을 느낀다는 생리적 반응은 “최악의 최루성 신파 영화의 약삭빠른 수법 못지않게 무의미하고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이런 긴 맥락을 고려하면 ‘몸’에 집중하기를 요하는 『다시, 몸으로』라는 제목은 매우 현대적인 제시어로 보인다. 몸은 그저 껍질로서의 육체가 아니고, ‘나’라는 존재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몸으로』의 추천사를 고민하며 나는 이렇게 썼다. “몸을 버리거나 바꾸는 이야기는 이미 친숙하다. 그동안 SF의 신기술은 인간이 어떻게든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몸으로 인한 제약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몸을 거추장스러워하는 관점은 이젠 어쩌면 디지털 시대라는 말만큼 낡고 있는 것이지 않을까. 단편집 『다시, 몸으로』는 ‘몸’의 무게와 함께 우리가 몸을 지니고 사는 존재이기에 대면하는 자유를 말한다. 여기에는 인지, 생물, 정동, 시간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첫 번째 수록작인 김초엽의 「달고 미지근한 슬픔」은 몸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묻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몸은 물질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작중의 인류는 이미 오래전부터 양자 컴퓨터가 만들어 내는 시뮬레이션 세계로 이주했다. 고대 인류와 달리 그들에게는 물질로 된 육체가 없다. 가슴이 뛰거나 눈물이 나는 등의 육체적인 반응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 춤을 추거나 숨을 쉬는 경험도 전부 허구다. 인류는 과거 육체로는 불가능했던 온갖 형태를 취하며 새로운 감각을 탐구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도무지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없다는 문제에 직면한다. 몸이 없기에 자신이 현존한다고 실감하기가 극히 어려워진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낀다.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실재하는 어떤 감각. 단하와 규은은 이런 현존감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닌다. 여행의 끝에는 새로운 몸, 새로이 받아들여야 하는 몸이 있다. 두 사람은 물질이 아니라 양자역학적 차원의 얽힘에서 실마리를 발견한다. 그들은 엄연히 살아 있다. 다만 ‘살아 있다’를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상태다. 육체를 탈피하는 미래에 도달하더라도 몸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다시 몸으로 돌아간다는 책의 취지에 부합하는 시작 지점이다.
몸의 존재에 관해 「달고 미지근한 슬픔」이 양자역학적 차원을 향한다면, 김청귤의 「네, 죽고 싶어요」는 사회적인 얽힘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인해 영혼 상태로 변한다. 그녀가 내미는 손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저 통과해버린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보이거나 만져지지도 않는다. 물리적으로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양이를 만지는(만지는 시늉을 하는) 동안 그녀는 닿지 않아도 무언가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백중날에 열리는 자리에서 만난 아이 역시 그녀를 직접 만지지는 못하지만, 마치 만지고 있는 것처럼 손을 구부린다. 이런 흉내는 실제 신체 접촉과 유사한 효과를 일으킨다. 포옹에 이르진 못하더라도 눈맞춤 정도의 사건은 충분히 일어난다. 몸의 종류가 다르거나 직접 닿지 않아도 어떤 연결이 가능하다는 경험은 신체 접촉의 수준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개인의 몸은 오로지 그 개인에게만 속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접촉하고 연결되는 가운데에서 존재가 발견되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왕칸위의 「옥을 다듬다」와 천선란의 「철의 역사」는 개개인이 몸을 통해 형성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옥을 다듬는다는 말은 관용적으로 덕을 닦는다, 인격을 연마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옥석이 하나의 옥으로 완성되려면 자르고 갈고 깎고 윤을 내는 절차탁마(切磋琢磨)를 거쳐야 한다. 소설에서 옥은 뇌에 이식하는 인공지능 인터페이스 ‘위鈺’를 가리킨다. ‘보배 옥’이라는 글자를 사용하는 이 장치는 개인의 감각 경험을 수집하고, 다른 사용자들에게 데이터를 전달해 상호작용을 일으켰다. 특히 고통, 두려움, 불편함처럼 부정적인 감각 경험에 집중했다. 다른 보조장치 제품들이 논리적 측면의 기능을 중시하는 데 비하면 특이한 선택이다. 소설은 절차탁마의 과정을 하나씩 보여주듯 “인류의 자아의식이 발달하는 데에 있어서 체화된 고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가정을 펼친다.
옥의 연마와 반대로 「철의 역사」의 ‘신시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함으로써 완성된다. ‘총감칩’을 이식한 사람은 신체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 몸조차 제대로 감각하지 못하는 그들은 점차 감정적 반응, 나아가 개인적인 의견을 표출하지 않는 사람으로 완성된다.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인공지능의 지휘 아래에서 사람들은 개성을 지니지 못하는 모습으로 훈련된다. 개인성을 억눌러 평등을 달성하겠다는 사회는 SF로는 이미 친숙한 디스토피아다. 물론 고통이 없는 생활은 좋은 복지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시민은 불면증처럼 불확정적인 요소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래도 ‘삼’은 생생하고 시끄러운 감각에 휩싸이는 쪽을 택한다. 고통은 불유쾌할지라도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개개인의 몸에 귀를 기울이도록 주의를 끄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청징보의 「난꽃의 역사」와 저우원의 「내일의 환영, 어제의 휘광」은 매개로서의 몸을 본다. 「난꽃의 역사」는 지리적, 문화적으로 강한 혼종성을 지닌 푸젠성의 취안저우를 배경으로 삼는다. 취안저우는 신이 극히 많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주요 신만 해도 500위가 넘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집집마다 신을 가족처럼 일상생활에 포함시킨다. 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에는 신의 ‘몸’을 사당에서 꺼내 거리로 모시기도 한다. 신은 신성하고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 해도, 신의 몸과 인간의 몸은 단단히 연결된다. “반은 속세이고 반은 선계인 이 작은 지역에서는 신명이 모든 범인을 지켜주었고, 범인도 모든 신명을 지켜주”는 것이다. 신은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에, 일상에 임한다. 시간적 선후는 불분명해진다. 신앙은 행정 구획의 경계를 손쉽게 건넌다. 꿈에서 난꽃을 건네는 ‘임수부인’은 취안저우만이 아니라 바다 건너에서도 모시는 신이다. 작중 인물은 신을 매개로, 혹은 난초를 매개로 이리저리 연결된다. 소설에서 난초가 겹겹이 언급되며 복잡하게 중첩되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다.
흥미롭게도 난초는 다른 존재와 명백히 공생해야만 번식할 수 있는 식물이다. 난초 씨앗에는 영양분이 없다. 덕분에 난초 씨앗은 난초에 서식하는 특정한 균의 도움을 받아야 발아한다. 난초의 삶은 여러 생명체가 모호하게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다. 이는 인간이 사실은 미생물 군총과 상호작용하며 생활하는, 경계가 모호한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몸의 경계는 가변적이다. 저우원의 「내일의 환영, 어제의 휘광」에 등장하는 몸 역시 언어와 함께 가변적인 모습을 보인다. 소설에서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고유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급변한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대화하고 나면 금세 언어가 섞이고 변해버리는 것이다. 집단 차원에서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나야 할 변화가 삽시간에 개체 차원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언어와 함께 몸에 새겨지는 어떤 습관이나 정체성도 순식간에 희미해진다. 개인의 기억마저 유동적으로 변한다. 사람들은 언어를 매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몸을 흐물흐물하게 만든다.
저우원 작가는 『다시, 몸으로』의 출간기념 북토크를 준비하며 「내일의 환영, 어제의 휘광」과 「달고 미지근한 슬픔」의 유사성을 이야기한 바 있다. 두 이야기 모두 과거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느낌을 준다. 몸이 달라지고, 언어가 달라지고,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감각도 달라진다. 두 소녀가 함께 변화를 탐색하고, 세상보다 먼저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내게는 두 소녀 사이에도 이해가 이루어진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던 두 사람은 공통의 이해를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다시, 몸으로』는 한국 및 중국의 작품을 함께 묶으며 차이점과 공통점을 보여준다. 두 나라는 동아시아 국가라는 정체성, 한자에 기반한 언어, 문화적 관습 등을 유사하게 공유한다. 나아가 각 수록작은 여성 작가의 SF 소설이라는 점도 공유한다. 작가들은 분명 다른 관심사를 지니고 다른 이야기를 만들었지만, ‘몸’을 둘러싸고 교차하는 지점을 드러낸다. 우리의 몸처럼 다양하게 접속하고 분화하며 피어나는 이야기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심완선(SF 평론가)
책과 글쓰기와 장르문학에 관한 글을 쓴다. SF의 재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 및 사회적 평등과 문학의 연결 고리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SF와 함께라면 어디든: 키워드로 여행하는 SF 세계』 『우리는 SF를 좋아해: 오늘을 쓰는 한국의 SF 작가 인터뷰집』 『SF는 정말 끝내주는데』가 있고, 『취미가』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를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