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그는 화면에 떠오르는 다섯 글자를 보고 싶었다. 책 귀퉁이에서도 발견하고 싶었다. ‘번역 : 황석희’라는, 손 닿지 않을 것 같은 로망이었다. 꿈은 현실이 된지 오래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그의 이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데드풀> <캐롤> <작은 아씨들> <보헤미안 랩소디> <파친코>는 그의 이름과 나란히 기억됐다. 그리고 ‘번역 : 황석희’는 책의 언저리가 아닌 중심에 기록됐다.
18년을 번역가로 살다 보니 세상이 다 번역으로 보인다는 황석희는 “사실 우리는 누구나 번역가”라고 말한다. 모두가 각자의 언어로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에세이 『번역 : 황석희』에서 영화와 영화를 번역하는 일과 관객과 동료에 대해 말한다. 가족과 친구와 그들을 둘러싼 사회와 그 안의 일상을 생각한다. 황석희의 번역으로 만나는 세상의 또 다른 이야기다.
의미가 큰 다섯 글자예요
이번 책을 꽤 오래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오래 걸렸어요. 한 4~5년 걸렸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게을러서 못 쓴 거죠. (웃음) <데드풀> 첫 편이 많은 반향이 있었을 때 출간 의뢰가 많이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일주일 하면 황석희만큼 번역한다’ 같은 기획들이 많았는데, 저는 번역 지식에 대한 책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고 제 깜냥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제가 서른일곱, 서른여덟 쯤이었는데 최소한 마흔은 넘어서 쓰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다 고사했어요. 그러다 흐지부지하다 보니까 마흔이 된 거예요. (웃음)
거절할 수 없는 때가 되었군요. (웃음)
사실 그런 마음도 있었어요. 이쯤 되면 <데드풀> 첫 편 때 꼈던 거품들도 다 가라앉고 나를 찾지 않을 거라는. 그런데 거품이 몇 년에 걸쳐서 계속 쌓이니까 마흔 때까지도 출간 제안이 계속 오는 거예요. 이제 마흔이 넘어서 쓰겠다는 변명도 못하겠고, 어떡하지 하고 있는데, 달 출판사에서 처음으로 진지한 에세이를 제안해 주셨어요. 편집자님이 저한테 (독자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저는 ‘사람들이 내 생각과 일상을 궁금해 할까?’ 하고 조금 이해가 안 됐는데, 편집자님은 그럴 거라고 하셨지만,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어요. 서서히 고사하는 분위기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편집자님이 너무 흥미롭게 말씀을 해 주시는 거예요. 듣다가 귀가 팔랑팔랑해져서 저도 모르게 계약을 하고 왔어요. (웃음) 그런데 책을 쓰려고 각잡고 앉으면 한 글자도 안 써지는 거예요.
이유가 뭐였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잘 쓴 글’의 기준이 되게 높거든요. 저는 그 기준만큼 못 써요. 김혜리 기자님, 이동진 평론가님, 이슬아 작가님 같은 분들의 글을 좋아하는데, 그분들의 글을 보다가 제 걸 보면 오징어인 거예요. 왜 이렇게밖에 못 쓰지? 싶고, 원고를 다 갖다 버리고 싶고.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원고를 (출판사에) 드리는 것도 계속 주춤하게 됐어요. 아마 그쯤부터 SNS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텐데, 그런 글은 후루룩 써지는 거예요. 마음 편하게 쓸 때는. 각잡고 앉아서 ‘내 기준에 좋은 글을 써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한테도 민폐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오히려 책을 더 못 쓰게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시간이 길어지고 게으름까지 겹쳐져서 벌써 4~5년이 지났네요.
“제목 참 얄궂어요.” 프롤로그의 첫 문장인데요. (웃음) 작가님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다섯 글자는 없지 않을까요?
처음에 저는 너무 낯간지러워서 몇 번을 말렸어요. (웃음) 제가 좋아했던 제목은 따로 있었는데 ‘이 말이 번역될 리는 없을 테고’ 같은 거였어요. 출판사에서 다른 후보도 주시고 여러 분한테 의견도 들으셨는데, 출판계 분들은 다 지금의 제목을 고르셨대요. 저는 지금의 제목을 제일 피하고 싶었어요. 에세이인데 저렇게 대담하고 오그라드는 제목을 붙여도 되나, 무슨 위인전도 아닌데... 너무 전위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건 안 되겠다고 두어 번을 뺐어요. 그런데 제가 어떤 일이든 전문가들의 말을 신뢰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결국 믿고 따르기로 했는데, 프롤로그를 쓰면서 생각해 보니까 ‘내가 ‘번역 : 황석희’라는 문구가 적힌 책을 갖고 싶어서 번역가를 시작했는데’ 싶은 거예요. 그 생각이 떠오르고 나니까 ‘신기하다. 내가 생각도 못한 방식으로 ‘번역 : 황석희’가 적힌 책을 갖게 되는구나’ 싶더라고요.
지금 『번역 : 황석희』라는 제목을 보면 어떠세요?
저한테는 의미가 너무 크죠. 사실 케이블TV 번역을 8년 동안 하면서 가장 보고 싶었던 장면이 ‘번역 : 황석희’ 다섯 글자가 스크린에 떠 있는 거였거든요. 지금 OTT에서는 번역과 자막 작업을 누가 했는지 표기하는 게 규정이에요. 그런데 제가 일할 때는 케이블TV에서든 어디에서든 뭘 번역하든 (이름이) 아무데도 안 올라갔어요. 제가 했다고 어디다 외칠 데가 없는 거예요. 실버 스크린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는 건 상상도 못했어요. ‘번역 : 황석희’ 다섯 글자가 올라가 있는 걸 언젠가 볼 수 있을까? 로망처럼 꿈처럼 생각했어요. 그런 점에서도 저한테 되게 의미가 큰 다섯 글자이기도 해요. ‘번역 : 황석희’를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너무 생생하고...
그때 어떤 기분이셨어요?
그때 기분은... 현실감이 없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방에 누워서 천장에 손을 뻗으면 안 닿잖아요. 당연히 안 닿는 거리니까 ‘그러네, 안 닿네’ 생각하는데, 갑자기 침대가 쑥 올라와서 손이 닿을락 말락 되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내 손이 진짜 천장에 닿은 건가? 닿았나?’ 싶잖아요. 그런 비현실적인 기분이라고 할까요? ‘내가 방금 내 이름을 (스크린에서) 보고 나온 게 맞나? 내 이름이 떴나?’ 할 정도로 비현실적이에요. 너무 오래 기다렸던 광경을 보고 나면. 그렇게 오랫동안 번역하면서 기다렸던 장면이니까, 안 잊히죠.
아무리 생각해도 거품 같아요
앞서 ‘거품’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만, 작가님의 번역을 새롭다고 느낀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그러면서 큰 관심과 주목을 받으셨는데, 그때는 어떤 느낌이셨어요?
그냥 거품이구나, 잠깐 나를 찾는 거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 인지도 같은 것들이 저만의 것이 아니고 영화랑 겹쳐서 오는 것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영화에 대한 관심이 식으면 나에 대한 관심도 식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번역가가 이렇게 관심을 받는다는 게, 저는 아직도 이해가 좀 안 돼요. 저한테 번역가는 그냥 욕을 먹는 직업이에요. 아직까지도. 한국은 영어 교육을 오랜 시간에 걸쳐서 받는 나라이기도 하고요.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인터넷 문화도 굉장히 과격한 편이에요. 분위기에 따라서 하루아침에 어떤 사람이, 요즘 말로 떡상하기도 하고 떡락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걸 매일 보면서 ‘언젠가 나도 말 한마디 삐끗하거나 오역 하나 하면, 아니면 아무 관계도 없는 상황 때문에 갑자기 떡락하지 않을까? 욕을 먹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그게 그냥 괜찮은 거예요. 왜냐하면 번역가는 그냥 욕먹는 직업이니까. 그래서 늘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해요. 사람들이 좋아해 주시고, 번역 칭찬도 해주시고, 심지어 제가 쓴 글까지 읽어주시는 게 되게 신기해요. 그러니까 항상 거품이라고 이야기하는 거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거품 같아요.
거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요.
다른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생각할 때는 거품 같아요. 어떻게 보면 제가 스스로한테 만족을 못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들에 대한 저의 기준이 굉장히 높은데, 그 기준에 한참 모자라는 제가 왜 관심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 간극 만큼이 거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에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를 제일 잘 아는 건 저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언젠가 거품이 터지고 나면 사람들이 내 맨살을 보겠구나, 그래도 괜찮아, 나는 원래 욕먹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고 그게 익숙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는 케이블TV 번역을 8년 동안 했잖아요. 거기는 진짜 힘들거든요. 저는 정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정글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저는 밑으로 추락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수입이 떨어지는 게 좀 걱정이겠죠, 다른 건 딱히 걱정되지 않아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언제고 (거품이) 꺼질 것 같아요.
왜 그런 생각을 버릴 수 없는 걸까요?
내 실력이 사람들이 칭송할 정도가 아니고, 내 인성이 사람들이 되게 선하다고 말할 정도도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내가 뜻하지 않게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위치에 있게 됐는데, 이건 내가 탐하면 안 되는 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되게 많이 들어요. 언젠가 절벽으로 떠밀리거나 거품이 터졌을 때, 혹시 내가 트라우마를 겪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또 모르잖아요. 그 두려움이 계속 있어요. 그것에 대해서 많이 찾아봤는데 가면 신드롬, 사기꾼 신드롬이라고 하는 게 있더라고요. 내가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실 저한테는 번역 일이 가장 수익이 되는 일이었고, 현실적인 업(practical job)이었고, 그걸 안 놓치려고 아득바득 매일같이 일하다 보니까 어쩌다 이렇게 된 것뿐이에요.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올려치기가 돼버리니까 ‘이래도 돼?’ 싶고, 비자발적인 사기꾼이 된 것 같은 생각도 들고 그래요. 그래서 지금도 걱정이 커요. 늘 그것 때문에 초조합니다.
“나는 작품마다 매번 시험을 보고 적게는 수만 명, 많게는 천만 명에게 시험지를 검사받는 기분이다.”라고 쓰셨습니다. “자꾸 절벽 끝으로 떠밀리고 스스로 구석에 몰아넣는 자학적인 삶”이라는 표현도 쓰셨는데요. 그런 상황 속에서 일을 지속하는 건, 전혀 괜찮지 않은 일이잖아요.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요?
저도 아직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못 찾았어요. 그래서 ‘결과물을 냈을 때 채점 받지 않는 직업’이 가장 부러워요. 결과물이 있으면 평이야 하겠죠. 거칠게 말해서 ‘후져’ 아니면 ‘좋아’ 이렇게 평을 할 텐데, 차라리 그런 평을 받으면 좋겠어요. 제가 하는 일은 채점을 할 수가 있잖아요. O, X, X, O, X... 그렇게 채점이 되고, 사선이 그어진 것들 중에 굉장히 중요한 대사가 있다면 큰 잡음을 낼 수도 있고 실질적으로 제 클라이언트에게 해가 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번역과 자막에 민감한 나라가 한국이에요. 반박의 여지가 없어요. 서구권은 자막을 잘 안 보고 더빙을 봐요. 프랑스 영국 미국 그리고 유럽에서도 자막을 안 봐요. 아시아에서 일본도 좀 자막에 민감한 나라이기는 해요. 그래도 한국만큼은 아니에요.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자막에 민감한 관객들을 갖고 있는 나라예요. 이게 장단이 있어요. 그런데 번역가의 입장에서 굉장히 괴로운 시장인 건 맞죠. 갈수록 더 괴로운 시장이 돼가고 있기도 하고요.
“채점”의 기준이 점점 높아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게 거의 저주처럼 느껴졌어요. 이 일을 하는 한 나는 평생 채점 받을 인간이구나, 평생 채점 받고 틀린 거에 대해서 혼나고... 혼나는 정도가 아니고 인민재판을 받잖아요. 틀린 거에 대해서. 그런 상황을 매번 겪는구나 싶었어요. 제가 1년에 영화 50편 가량을 번역하는데, 그러면 1년에 50번 인민재판을 받아야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 상황에 놓였다고 생각하면 공황이 와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관객들이 그렇게 비판할 수 있는 것도 영화에 대한 그리고 영화라는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간 것이거든요. 수준이 올라가서 생긴 장점도 있어요. 자막이나 번역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올라가거든요. 그래서 ‘왜 저렇게 번역할 수밖에 없었고, 왜 저렇게 함축했고, 왜 저 단어를 뺐는지’ 이런 것들을 제가 설명을 안 해도 이해하시는 분들이 되게 많이 생겼어요.
전에는 어설프게 비판하시는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면 지금은 비판도 되게 전문적으로 하시고, 저를 옹호하시는 분들도 논리를 제대로 갖추고 옹호해 주세요. 예전에 저는 막연하게 ‘관객들의 이해도가 올라가면 비판만 쭉 올라가겠구나’ 했는데, 옹호하는 쪽이랑 같이 올라가요. 그런 걸 보면 어쨌든 관객들의 수준은 올라가고 있고, 제가 생각한 것만큼 마냥 괴로운 상황은 아니에요. 지금은 오히려 번역가를 이해해 주시는 분들도 많이 생겼어요.
「농아라고 쓰시면 안 돼요」라는 꼭지에서 잘 드러나듯이, 관객들이 오류를 지적하면 최대한 바로잡으려 노력하시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책임의식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제가 내놓은 결과물인데 흠집 있는 결과물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다시 메꾸고 싶은 책임의식이 있고요. 또 하나는, 제가 실수한 걸 어차피 되돌릴 수는 없잖아요. 개봉했고 종영한 작품이면 이미 사람들은 다 봤고, 어쨌든 되돌릴 수는 없는 실수예요. 그런데도 되돌린 것처럼 하고 싶은 거죠. 되돌려지지는 않아요. 그런데 최소한의 수습이라도 해서 되돌린 것처럼 나도 마음가짐을 갖고 싶고, 관객들한테도 제가 실수한 것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마음에서 그렇게 하는 것 같아요.
빨리 사과하고 인정하는 게 좋아요
『번역 : 황석희』를 읽기 전에는 오역의 정의가 쉬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그 경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역가에게 오역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지금도 계속 고민하고 있고요. 최근에 <헝거게임 :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라는 영화를 번역했는데, 그런 대사가 있었어요. 주인공의 성이 스노우인데, 스노우 가문이 되게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이에요. 그 가문에서 가훈처럼 내려오는 말이 있는데 ‘snow lands on top’이에요. ‘눈은 꼭대기에 내려앉는다’라는 뜻이거든요. 제가 그 문장을 읽을 때 어떤 뜻인지 너무 명확했어요. 자기네 이름(snow)를 눈에 비유해서 ‘스노우 가문이 최고야’라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데, 저는 ‘눈은 언제나 꼭대기에 내려앉는 법이지’로 번역을 했거든요. 그런데 어제인가 그제인가 인터넷에서 그 번역이 잘못됐다 혹은 그 번역이 싫다고 말씀하시는 글을 봤어요.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분들은 ‘스노우 가문이 최고다, 스노우 가문이 꼭대기다’ 이렇게 번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는 원문이 굉장히 시적으로 표현한 구절이고, 스노우라는 성을 눈(snow)이랑 겹쳐서 표현한 문장이잖아요. 눈이 내릴 때는 그 위에 무엇을 얹든 무엇을 쌓든 제일 꼭대기에는 항상 눈이 자리하잖아요. 그걸 메타포처럼 이야기하는 건데, 원작자가 의도한 것일 테니까 번역자 입장에서는 살려줘야 되거든요. 그래서 ‘눈은 꼭대기에 내려앉는 법이지’라고 번역한 거예요. 근데 어떤 분들은 ‘아니야, 저렇게 하면 오역이야’ ‘스노우家가 최고다, 라고 번역을 해야 돼’ 이렇게 말씀하신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분들 기준에서는 오역인 거예요.
오역의 정의가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겠네요.
그분의 정의에 따르면 오역인 거예요.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는 오역이 아닌 거죠. 다른 관객들이 생각할 때도 오역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뭐가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번역가는 그 사이에서 계속 고민하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욕먹는 직업이라고 한 거예요. 이렇게 번역하면 이분들이 싫어하시고 저렇게 번역하면 저분들이 싫어하신단 말이에요. 축구 심판 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어쨌든 항상 선택은 해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오역에 대해서 매 작품마다 고민해요. 어떤 때는 되게 얄팍한 마음도 들어요. ‘그냥 직역해버리면 아무한테도 욕 안 먹잖아, 잡음도 안 날 거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아니고, 심지어 클라이언트도 나한테 뭐라고 안 할 거야.’ 고민하다가도 결국은 그렇게 못 써요. 성질머리가 그렇게 안 돼서, 결국은 도전적으로 써요. 도전적으로 써놓고 나면 싫어하는 분들도 계시고 이해하는 분들도 계신 거죠. 그렇게 갈등이 되는 순간에는 쉬운 길로는 안 가려고 하는 것 같아요.
제가 번역가로서 소명 의식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번역가로서의 오기인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할 때는 이게 맞아’라는 오기 같은 것. 그렇게 오기를 부려서 번역을 해놓고 나중에 보면 관객 분들의 말이 옳을 때도 있어요. (웃음) 그럴 때 되게 민망한데, 잘못했다고 하면 돼요.
훗날 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하셨죠. “아빠는 반성에 자존심 같은 거 없어.” 정말 멋있는 말 같아요!
멋있는 걸 떠나서, 그게 편한 삶의 태도예요. 저도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45년 살아보니까 그게 대다수의 문제를 해결해 줘요. 그냥 인정해 버리고 사과하는 게 너무 편하고 정말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거든요. 그렇다고 생각보다 자존심에 생채기가 생기지도 않아요. ‘내가 사과하거나 인정을 해버리면 내 프라이드가 무너질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작은 흠집이 살짝 났다가 그냥 아물 뿐이에요.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고 변명을 하려다 보니까 오히려 일이 커지고 나중에 상처를 크게 받고 그러죠. 오히려 빨리 사과하고 인정하는 게, 도의적인 것을 떠나서 실용적인 면에서도 훨씬 도움이 돼요.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거든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좋습니다.
『번역 : 황석희』는 “일상을 번역하며 떠올린 상념을 엮어놓은 책”이라고 하셨습니다. 작가님에게 넓은 의미에서 번역이란 무엇인가요?
‘이해’ 같아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해한 것을 제 생각이나 말로 표현해내는 것이거든요. 아주 넓은 의미에서 이해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형태의 사고나 이미지나 말이나 분위기를 보고 제 안에서 프로세싱을 거쳐서 그 뜻을 이해하고 구현하는 것이 저한테는 번역이거든요. 생물학적으로 봐도 머리에 떠오르는 상념이나 생각들이 뇌 세포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전기 시냅스잖아요. 머릿속에서 그 전기 신호를 정리하고 번역해서 입으로 꺼낸단 말이에요. 그런 기본적인 단위에서부터 사람은 누구나 번역가라고 할 수 있거든요. 남들이 하는 말도 언어라는 체계를 통해서 알아듣고, 또 머릿속으로 들어가면 전기 시냅스끼리 신호 주고받아서 어떤 뜻인지 이해할 거란 말이에요. 그 와중에 오역도 있고 의역도 있고 직역도 있을 뿐이지,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다 번역가가 아닐까 생각해요.
근데 저는 사람들 사이의 번역은 마진이나 여지를 좀 넓게 두고 싶어요. 너무 그 사람 말을 지적하려고 하거나 내 뜻대로 의역을 해버리려고 하면 사고가 나더라고요. ‘틀릴 수도 있고 옳을 수도 있어’라는 마진을 넓게 두고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려고 해요. 좀 너그럽게 번역하는 ‘사람 번역가’가 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도 들려주셨어요. 10.29 참사와 관련해서 SNS에 쓰셨던 글이기도 하죠.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였을 텐데, 그럼에도 들려주신 이유가 분명히 있겠죠.
그때는... 정말 너무 답답했어요. 지금도 그때에 비해서 상황이 한 치도 나아진 것도 아니고, 유족분들 마음이 나아졌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제가 그 글에서 말했던 ‘종결’ 같은 게 전혀 주어지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게 너무 답답했어요. 그것도 제 오지랖 중에 하나인데, 인지도가 올라가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내가 한 말 때문에 나의 클라이언트나 가족이나 누군가가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들이 종종 생기거든요. 점점 말을 줄이게 되고, 전에 비해서 과격한 말이나 강한 의견을 내지 않게 돼요. 그런데도 못 참고 튀어나올 때가 있어요. 10.29 참사 때가 그랬던 것 같아요.
어쨌건 저도 사고로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이잖아요. (아버지를 잃은 사고에서) 사고의 주체가 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도로를 관리하는 정부의 책임이 훨씬 컸어요. 그런데 사실 개인이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리고 그것에 대한 종결을 제대로 주지도 않아요. 정말 아득바득 우기지 않는 한. 그런 것들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답답했어요. 또 한편으로는, 저도 부모잖아요. 상상이 안 되는 거예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자식을 잃는다는 게.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글을 쓰면서 들었던 생각이 있어요. 번역가로 오래 살아와서 그런지, 저는 머릿속에 뒤엉켜 있는 복잡한 상념 같은 것들을 문자로 구현해내는 재주는 있어요. 제가 구현해낸 결과물이 예쁘다거나 세련됐다거나 근사하다고 보장할 수 없어요. 사실 자신도 없어요. 제가 진짜 동경하는 김혜리 기자님이나 이동진 평론가님의 결과물처럼 예쁘고 근사하지 않을 거예요. 거기까지는 제 솜씨가 미치지 않아서. 그래도 제가 잘난 척을 할 수 있는 건, 상념들을 정리해서 글로 구현해내는 재주는 있는 편이에요. 아마 이 책에도 그런 내용들이 꽤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한 두 꼭지 정도 읽어보시고 ‘이 사람이 내가 생각하던 것들을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것처럼 정리해서 써줬어’ 이런 공감이 되시면, 이 책은 그분한테 정말 좋을 거예요. 그런 분들이 읽어주시면 너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남기권
2023.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