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완선의 살다보니 SF] 0개국어 사용자의 위안
“땡큐Thank you”와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듣고 나는……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하이!”라고 대답했다.
글ㆍ사진 심완선(SF 평론가)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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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거리 한복판을 걸어가던 중이었다. 관광객 무리에 섞여 중국어로 쓰인 간판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관광객이 된 기분이었다. 저기는 무슨 가게일까 기웃거리고, 괜히 한글 티셔츠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다 눈동자 모양 간판을 발견했다. 동공 한가운데에는 ‘美瞳’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는 글자였으므로 의미는 바로 이해했다. ‘아름다운 눈동자’. 아마 컬러 렌즈를 취급하는 가게였나 보다. 발음도 알았다. 중국어로 읽으면 ‘메이동’(찾아보니 컬러 렌즈가 맞았다), 일본어로 읽으면 ‘우츠쿠시이 히토미’(이건 노래 가사로 익혔다). 그런데 정작 한국어로 어떻게 읽는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름다울 미’는 확실한데, 눈동자는…… 정? 동? 안? 나는 한국어가 모국어인데 왜 한국어 음독을 못하지?


외국어를 익히기 시작하면 0개국어 사용자가 된다는 농담이 있다. 머리에 새로 집어넣은 언어와 기존에 사용하던 언어가 충돌해서 말이 막히기 때문이다. 내 경우 일본어를 공부한 뒤로 몇몇 한자는 일본어로 보인다. 예를 들어 ‘돌아갈 귀歸’는 ‘카에로歸る’여야 친숙하다. ‘아침 조朝’는 조선일보의 ‘조’이지만 종종 아사히 신문의 ‘아사あさ’다. 몇몇은 위의 ‘눈동자 동瞳’의 경우처럼 한국어로 보면 오히려 말이 막힌다. 아무래도 한국어 한자 공부는 고등학생 때 끝났지만 일본어로는 한자를 계속 접한 탓이다.


더욱이 올해 초 일본에 다녀왔더니 며칠간 0개국어 상태가 되었다. 어떻게든 의사소통을 하려고 아는 영어와 일본어를 총동원하느라 외국어 모드를 켜둔 탓이었다. 평소에는 조용하던 언어들이 머릿속에서 불쑥불쑥 자기주장을 했다. 얌전히 한국어만 썼다면 금방 회복됐으련만. 이즈음 남산 근방을 걷다가 영어를 쓸 일이 생겼다. 딱 봐도 외국인 관광객인 분들이 날 붙잡고 영어로 “남산 케이블카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라고 물어보셨다. 나는 곧바로 외국어 총동원 모드를 다시 활성화했다. 다행히 어떻게든 설명은 할 수 있었다. 문제는 헤어질 때였다. “땡큐Thank you”와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듣고 나는……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하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네’도 아니고 ‘유어웰컴You’re wellcome’도 아니고 ‘하이はい’였다. 그분들은 일본어 ‘하이はい’가 영어로 ‘예스yes’라는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잠깐 의아한 기색으로 나를 보다가 멀어졌으니까. 그래요, ‘하이’라고 하면 영어 화자에게는 ‘하이Hi’로 들렸겠지요. 헤어지는 상황에 제가 왜 갑자기 ‘안녕하세요’ 하는지 의아하셨겠지요.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가설을 세워본다면, 당시 내 영어는 일본어와 연동된 상태였다.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말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연습하던 셈이었다. 언어를 익히고 또 사용하는 동안 우리의 뇌는 특정한 소리나 모양에 특정한 형태로 반응하도록 훈련된다. 뇌는 말소리와 같은 감각자극을 의미로 치환한다. 뉴런에서 뉴런으로 전기 신호를 보내며 물리적으로 반응한다. 동시에 신경 화학적으로도 반응한다. 위험한 말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신경이 곤두서고 심장박동수가 올라가는 식이다. 그러니까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 ‘하이はい’라고 말하도록 스스로 훈련한 거였다. 만일 두 언어 중에서 어느 한쪽에라도 능통했다면 영어와 일본어를 뒤섞을 필요가 없었을 테니 간섭이 훨씬 덜했을지도 모른다.



맥스 배리의 소설 『렉시콘』은 언어가 우리를 조종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서술한다. 작중 ‘시인’들은 단어를 이용해 타인의 내면에 침입한다. 상대의 유형을 알면 마음을 움직이기가 더욱 쉽다. 각각에 맞는 단어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명예욕이 강한 사람을 설득하려면 도발보다 명분을 제시하는 쪽이 효과적이다. 시인이 교묘하게 자아낸 단어들은 트로이의 목마처럼 상대에게 침투하며 뇌의 방어벽을 무효화한다. 시인을 양성하는 ‘조직’ 사람들은 “어떻게 단어들을 줄줄이 엮어서 필터들을 하나씩 못 쓰게 만들고, 마음의 자물쇠를 하나하나 열어 나가 결국 마음의 마지막 문까지 활짝 열어젖히는지”에 능통하다. 한 예로 ‘단어 제안’ 기술이 등장한다. 어떤 등장인물은 편의점에서 슬러시를 들고 카운터로 간다. 그리고 카운터 뒤에 서있는 남자에게 말을 건다. 자신이 생일을 맞이해 성년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마침내 자유free예요. (...) 길고 행복한 삶을 제게 줄give 자유free죠.” 이런 암시에 남자는 즉시 영향을 받는다. “그 슬러시 공짜free로 드릴게요give.” 그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안한 거라고, 어쩌다 마음이 내킨 거라고 믿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를 연마하면 우리의 사고와 정신과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렉시콘』은 맥락에 영향받을 수는 있다는 정도로 적은 범위의 변화만 인정한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가 어느 정도까지는 그 사람의 사고를 결정했다. 유사해 보이는, 혹은 유사하게 들리는 단어들이 나타내는 개념들 사이에서 미묘한 논리적 흐름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고로 예쁜 말을 속삭이면 양파가 잘 자라고 나쁜 말을 하면 물 분자가 뾰족뾰족해지는 세상이 재미있는 법 아닌가. 사람의 인식이나 개념이 언어에 좌우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은 언어학에서는 일찌감치 폐기됐지만 SF에는 종종 등장한다. 낯선 언어를 배우면 사람이 바뀐다니, 비록 틀렸더라도 좀 신나는 가설이다. 새뮤얼 딜레이니는 『바벨-17』에서 이를 알차게 써먹는다. 주인공인 ‘리드라 웡’은 천재 언어학자이자 위대한 시인으로서 ‘바벨-17’이라는 외계의 암호를 해독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녀는 바벨-17이 언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점차 습득한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은 그 언어가 내포하는 인식적 틀에 자신을 노출하는 행위다. 바벨-17은 ‘나’라는 1인칭 대명사가 존재하지 않는 언어이고, 바벨-17에 익숙해질수록 리드라 웡은 사고방식은 물론 신체 반응까지 달라진다.


<파리 리뷰>와의 2011년 인터뷰에 따르면 딜레이니는 사피어-워프 가설의 이름을 들어보기 전부터 언어가 사람을 좌우한다는 생각에 매료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아무런 공부를 하지 않고도 이를 믿었다(“이 지점에서 벌써 그걸 이론으로 보기엔 문제가 있다는 티가 나죠.”). 오히려 사피어-워프 가설을 제대로 접하고 나서 그게 틀렸다는 확신을 얻었다. 하지만 테드 창은 틀린 줄 알면서 써먹었을 듯하다.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당신 인생의 이야기』 수록)는 시기상 『바벨-17』보다 훨씬 나중에 등장한 작품이다. 주인공 ‘루이즈’는 언어학자로서 외계 지성체 ‘헵타포드’의 언어와 문자를 연구한다. 헵타포드의 언어에는 시제가 없다. 그들의 문자는 순서에 상관없이 모든 의미를 한꺼번에 표기한다. 인간이 시간을 선형적으로 경험한다면, 그들은 과거부터 미래까지 이어지는 모든 시간을 통합적으로 느낀다. 헵타포드의 방식에 익숙해질수록 주인공은 그들처럼 인식하는 능력을 얻는다. 그래서 현재 시점에는 아직 오지 않은 자신의 미래를 본다.


참고로 닐 스티븐슨의 『스노 크래시』는 언어를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활용한다. 특히 고대의 수메르어와 해커들이 쓰는 컴퓨터 언어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사서 데몬은 주인공 ‘히로’에게 수메르어의 특별함을 설명한다. “만일 인간이 익히는 언어가 발달하는 뇌의 실제 조직에 영향을 미친다면 수메르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현재 인류와는 전혀 다른 뇌를 가졌을 겁니다. 그들은 오늘날 존재하는 어떤 언어와도 본질이 다른 언어를 사용했으니까 말이죠.” 수메르어를 활용한 언어 형태의 바이러스는 사람들의 정신을 무력화한다. 다만 해커들은 다양한 컴퓨터 언어를 구사하며 뇌 구조가 특수하게 발달하기에 쉽게 당하지 않는다. 이들은 ‘멍청하고 생각 없는’ 부류와 다르다. 스티븐슨은 사이버펑크에 능하긴 하지만 『스노 크래시』는 뭐랄까, 좀…… 재수 없다. 딜레이니의 말이 다시금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이 지점에서 벌써 그걸 이론으로 보기엔 문제가 있다는 티가 나죠.”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면 주술의 영역이다. 유대교에 전승되는 ‘골렘’은 명령어로 움직이는 인공물이다. 명령어를 입력하는 방식이 기계 언어가 아니라 주술이라는 점이 다르다. 사람 형태로 빚은 진흙 덩어리에 랍비가 일종의 부적을 붙이면 골렘이 완성된다. 골렘을 정지시키려면 부적에 쓰인 명령어를 바꾸면 된다. 나아가 대상의 진정한 이름을 쥐면 그것을 조종할 수 있다는 믿음은 곳곳에 등장한다. 테드 창의 다른 소설 「일흔두 글자」 (『당신 인생의 이야기』 수록)를 예로 들면, 작중 세상에서는 ‘명명학’이 매우 세밀하게 발전한다. 이곳의 자동인형은 골렘처럼 글자로 움직인다. 어떤 사물과 그에 조응하는 진정한 이름을 접목하면 특별한 힘이 발생한다. “모든 것이 신의 반영이듯, 모든 이름은 신성한 이름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대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이름을 찾는다면 그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기대가 들어 있다.


그런데 언어를 통해 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회적 차원으로 보면 꽤 사실이다. 언어는 사피어-워프 가설처럼 개개인의 인식에 강력히 작용하기보다는,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와 느릿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언어를 분석하면서 사회를 읽어낼 수 있다. 메리 도리아 러셀의 『스패로』에서 언어학자인 ‘산도즈’ 신부는 단순히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과 언어학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언어학적 분석은 “문법과 어휘에 숨어 있는 사고방식을 파악하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와 관련짓는” 일을 포함한다. 산도즈 신부의 일행은 외계 지성체의 신호를 포착하고 이들과 교류를 맺기 위해 우주로 떠난다. 그리고 언어적 차이 속에서 사회적 차이를 낱낱이 읽어내지 못한 나머지 치명적인 비극을 맞이한다. 또한 혁명의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이쪽 사회와 저쪽 사회의 만남은 양쪽을 들끓게 만든다.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들이 대화하다 보면 피진이나 크리올이 만들어진다. ‘피진’은 영어의 ‘비즈니스business’가 중국식으로 바뀐 것으로, 지금은 양쪽의 화자가 어떻게든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임의로 만드는 언어 전반을 말한다. 피진이 사람들의 모국어로 자리를 잡으면 크리올이 된다. 이런 혼성어는 언어가 섞일 때 발생하는 혼란과 충격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기존에 사용하던 언어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소통방식, 새로운 개념의 단어를 익힌다. 그리고 외국어를 자신들의 고유한 것으로 다듬는다. 어슐러 K. 르 귄의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지구인의 파괴적인 행위가 ‘애스시’를 바꾸는 과정을 다룬다. 극심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지구에서 생활하기가 어려워진 지구인은 애스시와 같은 외계 행성을 식민지로 삼아 자원을 조달한다. 이들은 양서류처럼 생긴 애스시인을 노예로 부려 그들의 나무를 착취한다. 그러면서도 애스시의 언어에 무지하다. 자기애가 극에 달해 지구인의(그것도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벗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애스시인은 자주 신체접촉을 나누는데, 지구인은 그들이 동성애에 탐닉하는 ‘호모새끼’들이라고 여긴다. 접촉이 애스시에서 자주 사용하는 언어라는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애스시인이지만 노예로 부려지는 동안 지구인의 방식을 터득한 ‘셀버’와, 지구에서 왔지만 문화인류학자로서 애스시의 언어를 익히는 ‘류보프’는 두 사회의 차이를 명확히 찾아낸다. “지구인들 사이에서 접촉이란 늘 위협, 공격의 뜻을 함축해서, 형식적인 악수와 성적인 애무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했다. 그 모든 빈 공간을 애스시 인들은 다양한 접촉의 관습으로 채워 넣었다. 신호와 확신을 뜻하는 애무는 그것이 어머니와 아이에게 또는 연인들에게 그러한 것처럼 그들에게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의미는 모성적이고 성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었다. 그것은 그들 언어의 일부였다.”


지구인은 애스시인에게 ‘살인’이라는 개념을 전파한다. 애스시인은 지구인에게 상대를 죽이지 않는 방법을 보여준다. 셀버는 지구인이 떠나더라도 애스시의 사회가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하리라고, 변화를 멈출 수는 없다고 예감한다. 애스시에서 신, 신성한 실체, 권능한 존재를 뜻하는 ‘샤압’이라는 단어는 통역자라는 의미도 지닌다.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는 언어는 상대편에게 신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무정하게 목숨을 거두는 사신死神이든, 생명을 부여하는 모신母神이든(이보다 성별중립적인 단어가 없을지 고심했는데, ‘생신生神’은 살아있는 신이라는 의미밖에 없었다.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


애스시 인은 소설의 독자에게도 언어를 전파한다. 이들의 사회에선 여자가 지도자를 맡고, 남자가 예언자를 맡는다. 이성, 합리, 실리의 언어는 여성스러운 것이다. 반대로 꿈, 환상, 감성의 언어는 남성이 주로 구사한다. 이는 지구, 특히 저자가 속하는 미국 사회와는 반대되는 방식이지만, 애스시에는 문제가 없다. 독자는 현실과 다른 세상을 본다. 비록 허구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사례, 표현, 의미로 다가온다. 낯선 언어는 우리를 변이시킨다. 나처럼 “땡큐Thank you”에 “하이はい”로 대답하는 일에서 무슨 거창한 의미를 찾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는 쪽보다는 낫지 않겠냐고 위안해 본다. 어조와 태도를 동원해 말하다 보면 다소 장벽이 허물어지지 않겠냐고.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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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SF 평론가)

책과 글쓰기와 장르문학에 관한 글을 쓴다. SF의 재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 및 사회적 평등과 문학의 연결 고리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SF와 함께라면 어디든: 키워드로 여행하는 SF 세계』 『우리는 SF를 좋아해: 오늘을 쓰는 한국의 SF 작가 인터뷰집』 『SF는 정말 끝내주는데』가 있고, 『취미가』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를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