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서] 서윤후X최다정 - 내 방 사용 설명서
서윤후 시인과 최다정 한문학자가 ‘내 방’을 주제로 서로 에세이를 주고 받습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내 방, 초등학생들이 뛰노는 소리가 넘어오는 내 방, 책상의 자리로는 창문 곁이 제격인 내 방의 이야기.
글ㆍ사진 서윤후
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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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세운


*이 글은 2025년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선보이게 될 <둘이서> 산문집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두 작가가 같은 주제를 가지고 함께 한 권의 산문집을 완성할 예정이에요. 


서윤후

고양이를 키우고 난 이후로 방 문을 한 번도 닫아본 적 없다. 방 문을 굳게 닫으면서 비로소 시작된 것들이, 나를 길러왔었는데. 이제 내겐 닫힌 문 앞에서 구슬프게 우는 고양이가 있다.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이 되어 방에서 침묵을 지키려고 할 때마다 열심히 음악을 듣는다. 여행을 다니며 사 오거나 귀한 선물로 받은 LP를 선곡하여 틀고, 판 뒤집는 일도 잊는 고요가 비로소 찾아들면 나는 열심히 기계식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원고가 잘 되지 않을 땐 반투명 유리가 달린 낡은 원목 서랍에서 편지를 꺼내어 읽는다. 그날의 포춘쿠키처럼. 미안하지만 누가 썼는지 알 길이 없는 편지도 있다. 안절부절 읽게 된 우연한 편지 안에는 흔하고 단정한 안부가 적혀 있다. 이번 주에는 비가 많이 내린대요. 우산을 잘 챙기세요. 비가 들어 있지 않는 구름을 지나면 내 방 창문 밖에서 세탁기 돌리는 소리가 들린다. 세탁 당번은 동생의 몫이므로, 창문 너머로 동생의 실루엣을 종종 보며 안도한다. 여기는 내 집이구나. 나의 방이구나.

고양이 동생의 방은 내 책상 밑에 있다. 반쯤 갈기갈기 찢겨진 스크래쳐 소파에 앉아 낮잠을 자는 고양이. 고양이가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면, 귀신같이 일어나 방 문 앞에서 운다. 밀폐된 공간을 싫어하면서도 밀폐된 공간을 찾아다니며 누비는 고양이의 심보에 나는 반쯤 열린 세계에서 반쯤 문을 닫는다. 잠든 이를 깨우는 건 너무나도 민망한 일이므로, 다리를 떨거나 책상에 떨어뜨린 볼펜에 저절로 얼음이 된다. 기계식 키보드가 시끄럽게 울리는 것 정도는 견뎌주는 고양이기에, 나는 신사적으로 할 일을 한다. 책상 뒤에는 책들이 한가득 쌓여 있다. 이 방으로 이사 오기 전, 포장이사를 신청하고는 가지고 있는 가구, 책의 분량 등을 구체적으로 말하여 견적을 내는 일이 있었는데, 숫자에 약한 나는 무언가가 많다고 느끼면 대략 백 개쯤이라고 짐작하고는 아무 생각도 없이 책도 백 권 정도 있다고 말해 버렸다. 포장이사 당일, 경력 26년 차 베테랑 사장님은 백 권이 아니라 천 권 정도 되는 것 같다면서 나를 사기꾼 취급하였는데 수치스러웠다. 내 많은 장난감을 보고 “이 집에 애가 있어요?”하고 물었던 것만큼. 언젠가는 세로로 꽂혀 있는 책보다 가로로 누워 있는 책이 더 많은 날을 불행한 날이라고 여겼다. 쌓아 두기만 하고 꽂아 두지 않는 정돈의 문턱에서 아무것도 돌보지 못하며 보낸 날들의 증거이기도 하니까. 내 방은 내 마음을 모사하는 것만 같다.

호기롭게 산 인테리어용 수동 달력은 매일 날짜 카드를 꺼내어 갈아 줘야 하는데, 지금은 5월 5일 어린이날에 멈춰 있다. 휴일 어느 날, 매일을 다짐하며 끼워 둔 날짜를 그대로 두었다. 중국 쇼핑몰에서 산 무소음 탁상시계는 미싱을 돌리듯 잘도 돌아가고, 선물 받은 문진들이 그 옆에서 영롱하게 빛난다. 구절초나 민들레 홀씨를 영원히 간직하며, 펼친 책의 들판에 내려앉는다. 무구한 마음으로 뛰어다니는 일은 오직 책 위에서뿐이다.

내 책상의 볼거리는 노트를 꽂아 두는 노트꽂이가 있다는 것이다. 화장품 팔레트를 꽂아 두는 용도로 나온 투명한 꽂이를 요긴하게 쓰고 있다. ‘살림 꿀팁’이라고 나오는 숏츠를 보고 충동구매하였는데 무척 만족스럽다. 나는 수첩인간이기에. 동시에 쓰고 있는 수첩이 아홉 권 정도 된다. 그래서 단 한 권도 제대로 채워 본 적 없다. 통장 쪼개기를 하듯이, 기록하고 싶은 것들을 종류별로 나누어 쓰고 있다. ‘요리비결’이라는 노트에는 백종원식 레시피를 탈피하고자 만든 호기로운 노트였는데, 종갓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요리 비법 같은 것을 쓰고 싶었는데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마지막 요리 기록은 ‘김치찌개’인데, 평소 만들던 레시피와 조금 다른 시도를 해보았다가 함께 사는 동생에게 이런 한줄평을 받고야 말았다.

‘외국인이 한국에 관광 와서 체험 프로그램으로 처음 끓여 본 김치찌개의 맛!’

나는 도장이 많다. 도장을 스탬프라고 말하면 팬시해진다. 외국 여행에 가면 꼭 그 도시에서 스탬프를 사 왔다. 뉘른베르크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산 기린과 나무 도장, 치앙마이 선데이마켓에서 산 고양이 도장………. 그런 것들은 잃어버리지 않는다. 도장을 모아 두는 나무 상자는 회사에서 운영했던 서점에서 쓰던 엽서함이다. 서점 공간을 정리하며 가져 온 것이다. 한 칸이라도 소중한 조각을 가져올 수 있어 기쁜 마음에 소중한 것을 넣기 시작했다.

책꽂이 위로는 신발 상자들이 쌓여 있다. 신발을 사고 난 뒤 제법 튼튼해 보이는 신발 상자에는 그동안 받은 편지들을 넣어 두었다. 다시는 읽을 수 없을 것 같은 편지들이 훨씬 더 많다. 타인이 나를 대신해 받아 적어 준 시간의 각인이라 생각하면, 내 방은 꼭 시계태엽 안에 있는 기분을 선사한다. 세상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시계탑을 청소하는 사람이 된다.

물티슈 몇 장을 뽑아 구석구석 바닥을 닦는다. 방문을 닫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방 안에서 울지 않는다. 문을 세 개 닫았다고 혼내는 사람도, 바람이 그랬다면서 변명하는 사람도 없어서 이제는 일기장에 적는다.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은 기분, 방 안에 있어도 방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매달고 살아온 지 오래되었다. 검은 LP판에 달라붙은 고양이수염 한 가닥을 떼어 내고, 잠든 고양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작은 방. 고양이가 잔뜩 그려진 엽서를 벽에 계단식으로 붙여 놓고는 흐뭇해하기. 닫지 않는 문고리에는 작년의 크리스마스 리스가. 내일 입을 폴로 셔츠와 회색 슬랙스가 걸려 있는 유니크한 디자인의 간이 옷걸이는 사실 아동용이었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 알았다. 방은 아주 나중에 알게 되는 곳이다. 당장 외치고 싶은 말을 하게 되는 고해성사의 공간도 아니고, 내일 꿀 꿈을 미리 받아 적는 곳도 아니다. 나중에, 아주 나중을 알게 되는 곳이다.

뉴진스 신보와 쳇 베이커 베스트 앨범과 나카모리 아키나의 데뷔 앨범이 한데 모여 있는 곳. 여기저기서 나를 돕고 있었던 과거의 ‘나’들이 모여 다음 일거리를 기다리는 작은 인력사무소. 모르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듯 시를 쓰며 편지를 되풀이하는 곳. 1년 내내 어쩌면 5월 5일 어린이날일 수도 있는 곳. 가방에 열심히 매달려 있던 키링 인형들도 먼지 묻은 코를 닦고 쉬는 곳. 함부로 하트를 그리거나 스마일을 그려 넣어도 좋을 백지가 많아 백치가 되는 곳. 여백일수록 초조하고 빼곡할수록 수줍어지는 깜빡임으로 정체되는 곳. 이곳이 나의 방. 수도 없이 주소를 옮겨 오긴 했지만 변함없이 웅크림을 발명한 현장이기도 하다.


최다정

대학에 입학하며 고향을 떠난 후 줄곧 월세살이를 했다. 월마다 정해진 날짜에 값을 치르면 최대 2년간은 내 방이라 부를 수 있는 보금자리가 생겼다. 혼자인 도시에서 세(貰)를 내고 잠시 빌린 방들을 전전해오며 여태껏 나를 무사히 지켰다. 들어갈 때보다 한 뼘이라도 더 자라난 모습으로 나올 때면, 어느새 방은 지나온 시절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도 이사를 했다. 또 한 마디 시절의 문을 닫고 월셋집을 떠나면서 눈에 밟혀 자꾸 돌아보았던 건 책을 읽고 글을 썼던 나의 공부방이다. 작은 옷방, 부엌, 화장실이 딸린 집에서 사는 동안 이 공부방에 제일 깊은 자국을 남겼다. 언젠가 마침내 떠나게 될 방이란 걸 늘 염두에 두고 살았지만, 이 방이 영원히 내 방이길 바란 적이 많았다. 여러 낮과 밤의 나를 안아 주고 덮어 주었던 고마운 방과 헤어지며, 이 공간의 새로운 세입자에게 내 방이었던 방을 살뜰히 사용하는 비법을 남겨 둔다.


책상의 자리로는 창문 곁이 제격이다.

조선시대 문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방에는 세 개의 창문이 있었다고 한다. 협소하고 어두운 방에서 그는 해가 잘 들어오는 창문 쪽으로 상을 옮겨 가며 글을 읽었다. 나에게 역시 책과 책상, 그리고 창문은 한 묶음이다. 공인중개사와 처음 집을 둘러봤던 날, 창문을 보자마자 곧장 계약을 결심했었다. 앞으로 나의 읽고 쓰는 생활은 햇볕과 하늘을 가득 품은 이 창문에게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겠구나, 생각했다. 책상에 앉아 있다 보면 창문은 기대 너머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이를테면 석양이 깃든 창문은 책상 옆으로 책을 쌓아둔 벽에 창문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초저녁 무렵 책탑 위에 떠오른 그림자 창문을 통해 잠깐 보였다 사라지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줍고 나면, 그 밤엔 더 귀한 마음으로 책과 마주 보고 앉게 됐다. 낮 동안 햇볕을 방으로 안내했던 창문은 별빛과 달빛도 잘 데려다주었다. 창문의 호위에 의탁한 책상에서 아득한 옛글들을 번역해 냈고 나의 글도 지을 수 있었다. 애호하는 창문 앞 책상으로 무사히 돌아오기 위해 기꺼이 매일 학교와 일터로 나갔다. 바깥에서 무거워진 심신이 귀가해 대뜸 내려앉은 자리는 언제나 창문 곁 책상 앞이었다.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는 의자를 방 한편에 두길 추천한다.

무척 작은 방에 살았던 때에는 친구가 놀러 오면 침대에 걸터앉게 해야 했었다. 외출복 차림으로 이부자리에 앉는 것을 미안해한 친구는 손사래 치며 기어코 바닥에 앉기도 했다. 좀 더 넓은 방으로 이사하면 초대한 손님이 편히 앉을 수 있는 자리를 꼭 마련해 두고 싶었다. 그 소망을 이 방에서 이루었다. 목을 젖혀 기댈 수 있는 접이식 안락의자를 사서 방 안쪽, 벽과 벽이 만나는 가장 아늑한 자리에 두었다. 방 전체를 조망하는 위치였다. 손님이 오면 자연스레 집의 중심인 이 방으로 데려왔다. 방에 입장한 손님이 안락의자에 앉음과 동시에, 방을 구성한 물건들과 풍경을 소재로 이야기의 물꼬가 트였다. 손님이 고른 LP판을 턴테이블에 재생시켜 배경음악 삼았다. LP판 한 면의 음악이 다 흘러나온 뒤 턴테이블이 멈춘 줄도 모르고 손님과의 대화는 쉽게 무르익었다. 나는 손님이 앉은 안락의자 쪽으로 책상의자를 돌려 앉아, 술을 나눠 마시기도 하고 아무 책이나 꺼내 어느 구절을 함께 읽기도 했다. 손님이 돌아갈 때면 공유한 음반과 책이든 책상 위에 오래 놓여 있던 색 바랜 소품이든, 무엇이라도 방에서 아끼는 것 하나를 손님의 손에 쥐어 주며 전송했다. 혼자의 방에서도 손님을 기다리는 의자가 한편에 놓여 있는 것만으로 방은 단란할 수 있었다.


조금 울적한 낮이라면 건너편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뛰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9층 방으로는 먼 곳의 소리도 잘 흘러와 닿았다. 새어 들어온 소리 중 제일 좋았던 건 근처 초등학교 어린이들 소리였다. 어릴 적 나의 학교에도 울렸던 익숙한 종소리가 번지고 나면 신난 아이들의 음성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박자에서 이탈해 장난치다가 금세 웃음을 터뜨릴 초등학생들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종일 함성과 음악이 메아리친 날에는 가을 운동회임을 가늠해 보기도 했다. 아이들 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리면 이는 길 건너 주택 옥상에 놓인 튜브에서 어린 남매가 물장구치거나 물총을 쏘며 웃는 소리였다. 아마도 막 하교했을 아이들은 집에 돌아와 또 재잘거리며 놀았다. 홀로 상경(上京)한 뒤 살았던 방에선 눕거나 앉아 고요히 있을 때 벽을 뚫고 들어온 것이 공사 소음이나 술 취한 어른들의 고성일 때가 많았다. 그런 방에서는 불을 켜도 어두웠고 자주 우울했다. 반면 나의 숨소리만 흐르는 방의 먹먹한 적막을 깨뜨린 천진한 아이들 소리는 언제나 반가웠다. 덩달아 방의 표정도 환해지곤 했다.


오늘의 달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하늘에 달이 떴더라도 아무 방에서나 달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창을 열면 길 걷는 신발들이 보인 반지하 방에선 달이 너무 멀었고, 겨우 A4 용지 크기만 한 고시원 창에는 가로등 불빛도 겨우 스몄다. 이 방에서는 달이 잘 보였다. 낮게 뜬 달과는 눈이 마주치기도 했고, 하늘 정중앙에 걸렸던 달이 지평선 쪽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고개 내밀어 관찰하며 오늘의 달을 배웅할 수도 있었다. 방 정면으로 마주한 북한산 봉우리는 밤의 어둠에 묻혀 형체를 잃게 됐지만, 달이 무척 밝고 높은 밤에는 눈을 크게 뜨면 산의 윤곽이 가깝게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겨울 달이 환한 하늘에서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포착하는 건 깊은 밤중에 깨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었다. 오래전 한문(漢文)으로 쓰인 옛글을 공부한 나의 밤들과도 달은 잘 어울렸다. 고인(古人)이 한자로 남겨 둔 암호 같은 글을 비추어 해독하는 데에 달빛은 유용했다. 달은 여기 아닌 장소, 지금 아닌 시간을 상상하게 했다. 먼 과거에도 어김없이 사람들의 눈동자 위로 떠올랐을 달이다. 오늘 내가 배웅한 달이 또 어딘가 언젠가의 누구에게 애틋한 인사로 닿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느 밤엔 뜬금없이 침대 아닌 방바닥에 누워 잠들어 봐도 좋을 것이다.

여름밤 씻고 나와 문득 바닥에 누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날이 있다. 민소매와 반바지 차림으로 팔다리를 뻗고 바닥의 감촉을 느꼈다. 선풍기 바람 안에서 축축함이 마를수록 바닥에 닿은 살도 시원해졌다. 그대로 깜박 잠이 들었다가 몸에 물방울이 튀는 느낌에 일어나 보니 거세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열어 둔 창틈으로 비가 들이쳐 방 안엔 여름비 냄새가 가득했다. 몹시 여름다운 장면이 연출되는 게 좋아서 그 여름 몇 번 더 바닥 잠을 잤다. 고단한 회식을 견디고 돌아온 어느 겨울 새벽엔, 옷 갈아입을 힘이 나질 않아 외투를 입은 채 방바닥에 누웠던 적이 있다. 몸을 누인 자리의 바닥은 보일러가 돌수록 점점 뜨거워졌다. 아침이 올 때까지 달궈진 푹신한 외투 속에 웅크리고 단잠을 잤다. 나뿐인 방이기에 아무 때나 아무거나 이불 삼아 어떤 모양새로든 잠들었다 깨어 또 한껏 마음대로 뒤척여도 괜찮았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방바닥을 거리낄 것 없이 뒹굴다가, 이 방에서의 생활이 부쩍 자유롭게 여겨지면 어쩐지 조금 신나는 기분이 되었다.


이사 온 집의 새로운 방에서 지난 방을 그려 보며 이 글을 쓴다. 아직은 여기의 방 창문, 책상, 책탑 위로도 떠난 방의 장면들이 겹쳐 아른거린다. 지금쯤 방은 나에게 보여 주었던 빛깔과 모양을 다음 세입자에게 뽐내고 있을 테다. 지나온 다른 월세방들도 그렇듯 이 방의 주소를 영영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지도를 보지 않고 찾아갈 수 있을, 언제든 당장 다시 돌아가도 될 것만 같은, 내 방이었던 방.


*필자 | 서윤후

1990년에 태어나 전주에서 성장했다. 2009년 《현대시》로 등단했으며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등을 펴냈다. 제19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2022년생 코리안 숏헤어 고양이 ‘희동’이와 함께 살고 있다.

*필자 | 최다정

한자와 만주문자를 단서로 삼아 옛날을 탐구하고 있다. 여기 너머에 있는 옛 문자의 세계를 동경한다. 고려대학교 고전번역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한자 줍기』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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