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서] 서윤후X최다정 - 내 방 의자에 앉아서
서윤후 시인과 최다정 한문학자가 ‘내 방’을 주제로 서로 에세이를 주고 받습니다. 앉았던 의자에서 다음 의자에게로 나를 보내 주는 일, 새것 티를 벗지 못한 의자가 낡아질 때까지 오래도록 쓰는 일에 관하여.
글ㆍ사진 서윤후
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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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최세운


서윤후


나고야 국제공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동전을 처리하기 위해 여러 자판기를 돌아다니다가 신기한 것을 보았다. 나무를 촘촘히 엮어 만든 사람 키만 한 파티션 안으로 안락한 의자가 놓여 있는 풍경이었다. 처음엔 코인을 넣어야 하는 안마 의자로 생각했는데,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의자였다. 의자 옆에 적힌 설명서를 번역해 보니 <생각하세요, 쉬어 가세요>라고 적혀 있었고(지금 생각해 보니 의자 광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곳에 어색하게 앉아 보았다. 소란스럽던 풍경이 단숨에 차단되어 작은 방에 홀로 놓여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기나긴 공항 벤치에 앉아 있었더라면 아마도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텐데, 나는 생각하고 쉬어 가는 혼자만의 의자에 앉아서 그 시절에 꼭 필요했던 생각과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의자는 생각을 재료로써 다룰 수 있도록 돕는 가구 중 하나다. 의자에 앉으면 일단 대기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맛집 앞에 놓여 있는 불편한 플라스틱 의자, 병원 벽마다 놓여 있는 기나긴 의자, 오래된 사진관에서 증명사진 찍을 때 앉는 식탁 의자, 쇼룸에 단정히 놓여 있는 원목 의자……. 앉았던 의자에서 다음 의자에게로 나를 보내 주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좋은 의자를 하나 구매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의자란 비싼 의자가 아니지만,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의자의 조건을 그나마 가장 많이 갖춘 의자라고 할 수 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의자 받침이 푸짐하리만치 크고 쿠션감이 있어야 한다는 점, 바퀴가 달려 있지 않아야 한다는 점, 지금의 원목 책상과 어울리는 브라운 계열의 색상이어야 한다는 점, 거추장스러운 팔걸이가 없어야 한다는 점 등에서 가장 적합한 의자를 고른 셈이었다. 좋은 의자란 오랜 생각에 안성맞춤인 의자. 집에 새 의자가 생기게 되어 기존에 있던 인테리어에만 충실한 딱딱한 원목 의자를 처분해야만 했다. 동네 중고 거래 앱에 의자를 헐값에 올려놓고 연락을 기다렸다. 한 사람이 곧바로 말을 걸어 왔다. 10분 내로 갈 수 있어요. 10분 내는 제가 곤란해요. 혼자 들 수 있는 무게인가요? 가볍지만 튼튼합니다. 동문서답을 하고 난 뒤, 나는 의자를 열심히 닦고 나갈 채비를 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한 사람은 홀로 서 있었다. 꼭 의자가 필요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정말 의자를 들고 갈 셈인가? 그는 의자 상태를 보더니 주머니에서 준비한 지폐를 꺼내어 건네주고는 의자를 거꾸로 세워 머리 위에 얹었다. 그런 광경은 학교에서 벌받을 때 보고 처음이어서 괜히 머쓱해지고 말았다. 의자를 들고 가는 사람이 내 시야에서 멀어지며 실루엣이 될 때, 꼭 머리가 솟은 우주 괴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생각 난 시가 있어서 시집을 펼쳐 읽었다. 모서리가 접혀 있었던 시. 강지혜 시인의 「의자 들고 전철 타기」였다.

 

“나와 의자는 슬펐다. 그리고 의자는 분명히 외로웠다.”


기형도 시인의 「겨울 판화」 연작 중 「너무 큰 등받이의자」를 상정해 트리뷰트 작품을 쓰는 청탁을 받았던 어느 겨울에, 나는 홀로 겨울 공원 벤치에 자주 앉아 보곤 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등받이의자는 어디에 있을까 헤아리다가 겨울 공원에 깔린 나무 벤치를 떠올렸다. 생각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같이 온 사람이나 날씨에 따라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는 나무 벤치를. 언젠가 집에 이런 벤치를 하나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크면 꼭 올 사람이 있거나, 이미 살고 있는 사람이 많아 보일 수 있으니까 적당한 길이로. 그 시는 아버지에 관한 시이기는 했지만, 내게 의자는 기다림으로 읽혔다. 기다림이 어떤 존재로 태어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큰 등받이의자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 시를 써 내려갔었다.

여러 거주 형태를 지내다 보니, 내가 의자의 주인이 된 일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누군가 쓰던 옵션 중 하나인 의자였던 일이 많았고, 공간이 협소해 접이식 의자를 자주 사고 자주 버리기도 했다. 견고하고 반듯한 나만의 의자를 처음 가진 것은 2017년. 그렇게 셈하니까 인생을 본격적으로 산 시간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의자는 가구 중에 가장 보행 수가 많다. 식탁 의자에게는 귀엽고 앙증맞은 양말도 신겨 준다(층간 소음 방지 의자 다리 커버). 내가 좋아하게 된 한 카페는 커피가 특출나게 맛있어서가 아니라, 의자 다리마다 테니스공이 끼워져 있다. 의자의 고요한 걸음을 돕는 디테일이 아름다워(향수를 자극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곳에 자주 가게 되었다. 그래서 의자를 움직이는 가구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정확히는 움직여서 가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에 가깝다. 사람이 지닌 신체의 바깥을 가장 잘 구현한 사물이기도 하고, 사람의 신체를 지탱하는 척추와 엉덩이, 다리 등에 깊숙이 관여하는 실루엣이기도 하니까. 어떤 자세를 보편적으로 말하게 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고, 한 사람의 예절이나 습관을 드러내는 방식이 되기도 하면서 나와 가장 오랫동안 붙어 있는 사이. 의자에게 이름을 지어 줄 자신은 없지만, 할부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는 의자에게 고마운 마음 정도 표하고 싶다. 물티슈로 의자의 구석구석을 닦아 주면서? 의자가 방에서 가장 고립된 구역이 아니라, 그 방에서 가장 바깥 세계에 관여하는 뱃머리라고 한다면? 내 편이 되어 나를 돕는 의자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 책상 안쪽으로 의자를 밀어 넣을 때의 기분처럼.



최다정


의자는 방에서 제일 처연(凄然)하다고 느껴지는 사물이다. 다른 각도와 시점에서 응시할 때 문득 안쓰럽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고, 의자도 그렇다. 앉았던 내가 일어난 의자에는 몸의 흔적이 맴돈다. 몸무게를 감당해 내느라 찍힌 자국과 체온이 식지 않은 의자. 아직 몸을 기억하는 의자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의자에 앉았던 것은 몸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몸에 눌린 방석과 따뜻해진 등받이 온도는 마음이 애썼던 밤, 흘렸던 땀, 내쉬었던 한숨의 증명인지도 모른다.

작업실로 쓰고 있는 방 책상 곁엔 옷장이 있는데, 옷장을 열면 문 안쪽에 달린 거울이 나를 비춘다. 책상 앞 의자에 앉은 몸 전체가 담길 만큼 꽤 큰 거울이다. 어쩌다 깜박하고 옷장 문을 열어 둔 채 책상으로 돌아와 앉으면 거울을 통해 의자에 기댄 몸을 마주 보게 된다. 컴퓨터 쪽으로 굽힌 허리를 지탱한 등받이와 다리 꼰 하체를 앉힌 좌석. 마음이 온통 모니터 속 세계를 향해 애쓰는 사이 잊힌 몸을, 의자가 내내 받쳐 주고 있다는 사실이 매번 새삼스럽다. 나에 대한, 나아가 삶 자체에 대한 연민을 의자라는 사물로 이입하게 되는 것도 같다.

골목길 주택 대문 앞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식탁 의자나, 길가 쓰레기장에 버려진 사무용 의자 같은 것을 발견할 때 쓸쓸함이 밀려오곤 한다. 다른 가구였다면 느낄 수 없었을 감정이다. 보편적이지 않은 장소에 뜬금없이 존재하는 사물이 주는 생경함을 감안하더라도, 나는 의자를 보며 유달리 애달파졌다. 방 안에서 어엿하게 사용되었던 시간 끝에 바깥으로 옮겨져서도 여전히 사람을 앉히는 의자의 쓰임을 상상한다. 그래서 거리에 방치된 텅 빈 의자를 보면서 역시 의자에 앉은 이의 시선을 가늠하며, 의자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헤아린다. 의자를 사람과 무관한 물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다.

가구(家具)는 애초에 사람 없이 쓸모를 잃는다. 공간을 집[家]답게 갖추어 주는[具] 가구는 집에서의 쓰임에 따라 저마다 어떤 행위의 상징이 된다. 의자는 곧 <앉음>과 <쉼>을 상징한다. 어느 해 생일날, 친구는 의자 사진과 함께 <편하게 앉아 너를 축하할 수 있는 오늘이 되길>이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의자는 휴식을 형상화한 여러 이미지 중 하나일 테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운용한 생활에선 <의자에 앉음>이 곧 휴식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친구가 보낸 사진 속 짝이 없는 하나의 의자처럼 나에게 의자는 언제나 하나였다. 두 개 혹은 네 개가 똑같이 생긴, 짝 맞는 의자를 가져 본 적 없다. 내 방을 구성했던 최소한의 조촐한 가구 중 의자는 책상 의자뿐이었다. 그 의자에 혼자 앉는 시간. 의자는 공부하고 글 쓰는 자리, 업무를 처리하는 자리였을 뿐더러 동시에 밥을 먹는 자리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 의자를 찾아 앉았다.

그렇기에 방을 구성한 가구 중, 깨어 있는 몸과 정신의 시간이 가장 밀착해 깃든 것도 의자였다. 잠들고자 침대에 누이는 몸보다 힘껏 깨어 있으려고 의자에 앉힌 몸이 더 애틋하다. 침대와 의자를 견줄 때, 삶의 편에 가까운 걸 고르자면 의자이다. 의자는 망각이 아니라 각성을 도와주는 가구이다. 해가 뜬 세상으로 나가 당면하는 사건들을 애써 겪고 돌아온 캄캄한 방에선, 의자에 앉기를 건너뛰고 침대로 곧장 가 눕는 선택을 하기 십상이다. 의자에 안착(安着)하는 행위가 결여된 생활은 곧 잘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의 결핍으로 이어지다가, 기저에 잠자코 흐르던 불안의 물살이 거세지고야 만다. 사람들을 견디며 떠들썩한 시간을 지나온 뒤의 나는 어김없이 길 잃은 기분, 소중한 물건을 잃은 기분이 되었다.

생활이 위기에 처했음을 인지하고서 내리는 처방은 일단 내 방 책상 앞 의자로 돌아와 앉는 것이다. 시간을 따라 분주히 흘러만 가다 보면 무언가 중요한 약속을 잊은 듯 심장이 쿵쾅거리는 순간에 도달하지만, 이는 어쩌면 생활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도 같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시간의 마디 위에서 꼭 쥐고 가야 하는 게 무엇인지 상기해 내도록, 나를 의자로 데려오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심신을 의자에 앉혀 바닥에 짙은 자국을 새길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마침내 가라앉혀지는 것들이 있었다. 의식적으로 일부러 내 방 의자에 앉는 행위를 통해 되찾으려는 것은, 몹시 귀하지만 잠깐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머지않아 기어코 책상 앞 의자로 돌아가 앉아 글 안에서 차분해지리란 확신에 자주 기댄다.

지금 글을 쓰는 방 의자는 고무나무로 만든 짙은 밤색 의자이다. 의자는 한자로 <椅子>라 쓰고, 이때 <椅> 자는 의나무를 뜻한다. 다른 세간 살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과거부터 의자를 만든 가장 흔한 재료는 나무였다. 사용하는 이의 손길, 사용되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나무 의자는 반질반질 빛이 나기도 하고 결 따라 틈이 갈라지며 모서리가 닳아지기도 할 것이다. 여태껏 살았던 방에선 줄곧 전 세입자가 두고 간 의자를 그냥 쓰거나 저렴한 접이식 혹은 조립식 의자를 쓰기 일쑤였다. 처음으로 가져 본 지금의 고무나무 의자가 마음에 꼭 든다. 이 의자에 앉아서는 글만 쓰기로 정했다. 아직 새것 티를 벗지 못한 의자가 낡아질 때까지 오래도록 쓰고 싶다. 도달하고 싶은 미래 쪽으로 나를 데려가기 위해 앉아서 생활의 매무새를 가다듬어 글 쓰는 시간이, 이 의자에 고스란히 새겨질 테다.


*필자 | 서윤후

1990년에 태어나 전주에서 성장했다. 2009년 《현대시》로 등단했으며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등을 펴냈다. 제19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2022년생 코리안 숏헤어 고양이 ‘희동’이와 함께 살고 있다.

*필자 | 최다정

한자와 만주문자를 단서로 삼아 옛날을 탐구하고 있다. 여기 너머에 있는 옛 문자의 세계를 동경한다. 고려대학교 고전번역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한자 줍기』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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