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칼럼] 소련의 등장을 예언했던 디스토피아 소설
20세기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라 꼽히는 예브게니 자먀틴의 『우리들』을 오늘날 다시 읽기
글 : 정보라
202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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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미래 사회가 있다. 이성과 합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완벽한 ‘단일국가’다. 그래서 이 ‘단일국가’는 기술과 과학이 대단히 발전하여 역사상 첫 우주선을 개발하는 중이다. 주인공 D-503은 바로 그 역사적인 첫 우주선 ‘인테그랄’을 설계하는 일을 한다. 주인공은 이 완벽한 사회의 엘리트이며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를 마음속 깊이 믿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은혜로우신 분’에 대한 완벽한 신뢰다. 이 사회의 모든 규율과 법, 질서,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의 삶까지 모든 것이 ‘은혜로우신 분’의 결정이 완벽하다는 무조건적인 신뢰 위에 구축되었다. 


D-503은 사생활이라고는 없는 유리로 만든 투명한 건물에 산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생활을 감시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벽에는 ‘단일국가’ 모든 구성원의 생활을 일분일초 규정하는 시간표가 금빛 바탕에 적자색 글씨를 빛내며 주인공을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 ‘단일국가’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시간에 한 몸처럼 일어나 같은 시간에 일을 시작하고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고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성욕의 발산과 후세대 생산을 위해 성관계를 할 수 있는 ‘개인적 시간’도 정해져 있다. D-503은 규정에 따라 ‘개인적인 시간’에 자신에게 ‘신청한’ O-90과 성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일하면서 혼자 생각할 때 일기를 쓴다. 그 일기가 이 작품이다. 그 외에 D-503은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은혜로우신 분’과 완벽한 사회의 영광을 위해 우주선을 설계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단체활동에 참여하는 데 쓴다. 주인공은 모든 면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생이다.


그러던 주인공에게 변화가 찾아온다. 계기는 사랑에 빠지면서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인공은 이성과 합리에 의존해 살아왔던 안정되고 건조한 삶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게다가 주인공이 사랑하게 된 I-330은 알고 보니 저항군이다. 주인공은 ‘200년 전쟁’이 지나간 뒤에 세워진 ‘녹색 벽’ 너머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배웠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녹색 벽’ 뒤에는 ‘단일국가’에서 쫓겨난 자들의 후예인 ‘메피’들이 살고 있다. 주인공은 인생 최대의 혼란에 빠진다. 사랑을, 감정을, 자신의 자아를 택할 것인가, 전체를, 사회를, 이성과 합리를 택할 것인가?



예브게니 자먀틴의 『우리들』(Мы, 1920)은 모든 면에서 20세기 디스토피아 소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단일국가’는 ‘은혜로우신 분’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독재국가이다. 여기에 개인은 없다. 등장인물 모두 알파벳과 숫자로 무슨 자동차 번호판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개인성도 고유함도 말살된 채 오로지 개체를 구분한다는 실용적인 목적만 남긴 것이 알파벳과 숫자 조합의 이름인 것이다. 


개성도 감정도 없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개인이 다른 개인과 진정으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사랑이나 신뢰 등 모든 긍정적인 감정은 오로지 ‘은혜로우신 분’과 ‘단일국가’만을 향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모든 순간 사랑과 신뢰와 충성심만 느끼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분노나 슬픔, 좌절감, 짜증 등 모든 부정적인 감정은 국가가 관리하는 집회에서 국가가 지정한 사회의 적들을 향해 발산하도록 정해져 있다. 한 마디로 ‘단일국가’ 구성원은 삶의 모든 순간에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을 느끼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전부 정해진 대로 따르면 된다. 여기서 벗어나는 개인적이고 고유한 경험은 모두 악(惡)이다.

 

고대 세계에서는 우리의 유일한 (비록 무척 불완전하긴 했으나) 선조인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점을 이해했다. 겸양은 미덕이고 자만은 악이며 ‘우리’는 신에게서 왔고 ‘나’는 악마에게서 왔다는 것을. (『우리들』 61쪽)

 

참고로 ‘녹색 벽’ 바깥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인 ‘메피’(Mefi/Мефи)는 악마의 이름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의 약어다. 자연, 개인, 감정, 자아는 기술, 사회와 집단, 이성과 합리, ‘단일국가’와 맞서는 가치이며 작품 안에서 그 이름만 보아도 정말로 “악마에게서 왔다.”


『우리들』은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1948년 작 『1984』와 구조적으로 상당히 비슷하다.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살아가는 세계를 지배하는 ‘빅 브라더’는 『우리들』의 ‘은혜로우신 분’에 상응하는 독재자이다. 그리고 윈스턴 스미스는 줄리아와 사랑에 빠지면서 세상과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고 저항집단인 ‘형제단’과 접촉하게 된다. 이런 전개도 『우리들』의 D-503이 I-330과 사랑에 빠지며 ‘메피’와 접촉하는 전개와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들』이 좀더 무서운 점이라면 주인공 D-503이 ‘단일국가’와 ‘은혜로우신 분’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1984』의 윈스턴 스미스는 고문 끝에 줄리아를 배신하지만 『우리들』의 D-503은 감정과 자아를 빼앗기고 자신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고 여긴다. 『1984』의 세계는 초라하고 냄새나고 모든 것이 언제나 부족한 사회이며 윈스턴 스미스는 이런 삶에 지쳐 있다. 반면 『우리들』에서 D-503은 물질적 부족함이 없으며 정신적으로도 ‘은혜로우신 분’을 진심으로 믿고 우주선 ‘인테그랄’을 개발하는 데서 삶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을 찾는다. 『1984』의 오세아니아가 과거의 실제 공산주의 사회와 비슷하다면 『우리들』의 세계는 번쩍이는 사이비종교 합숙소 같다. 


저자 예브게니 자먀틴(1884-1937)은 러시아 정교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수학을 전공하고 선박 설계하는 엔지니어로 일했다. 『우리들』에서 우주선을 설계하는 작업의 구체적인 묘사와 ‘단일국가’와 ‘은혜로우신 분’에 대한 종교적 신앙심에 가까운 신뢰와 충성의 고백은 아마도 이런 삶의 경험이 반영된 부분들일 것이다.  


『우리들』은 스탈린 치하 소련을 예언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제는 전체주의 공포정치가 지배하는 독재국가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고 통제하는지 명료하게 보여주는 디스토피아 문학의 귀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디스토피아에 갇힌 개인이 자신은 완벽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며 스스로 세뇌하려 애쓰는 과정이 바로 디스토피아의 본질을 보여준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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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예브게니 자마찐> 저/<석영중> 역

출판사 | 열린책들

1984

<조지 오웰> 저/<정회성> 역

출판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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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SF와 환상 문학을 쓰고 번역도 한다.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선정됐다. 지은 책으로 『문이 열렸다』, 『죽은 자의 꿈』 등의 장편 소설과 『저주토끼』 『왕의 창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