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섬별 칼럼] 애도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삶을 계속 같이 살자 ⑨ : 우리를 이해하는 것은 애도의 다섯 단계가 아니라 '투명 고양이설'이다.
글 : 송섬별
202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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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 뒤에 우리는 폴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란 폴이 죽고 나서 마치 어린 가족을 잃은 부부처럼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어졌다가, 수년에 걸친 각자의 고군분투 끝에 마침내 재결합한 D와 나다. 우리가 폴의 유해가 묻혔다고 알려진 곳을 함께 찾아갈 용기를 낸 건 6년 만의 일이다.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눈여겨봐 두었던 꽃집 계정에 DM으로 주문서를 작성한다. 

 

주문자 : 송섬별

주문 상품 : 꽃다발 (대)

꽃 용도 : ?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어 쓴다. 

 

꽃 용도 : 무덤 방문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무덤 방문’을 ‘성묘용’으로 고쳐 쓴다. 물론 맞는 말은 아니다. 상대는 조상도, 어른도 아닌 서로 창문을 면하고 있는 집에 살던 친구니까. 그에게 성묘를 한다는 말은 꼭 나 자신을 추모한다는 말처럼 괴상하고 어색하게 들린다. 나는 내가 아직 성묘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거리를 얻지 못한 애도라든지, 이미 죽었음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나의 삶에서 떨어져 나가 주지 않은 나머지 어떤 때는 나도 죽은 것처럼, 또 어떤 때는 너무 많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내 친구를 부를 수 있는 적당한 말이 있는지 고민하려다가 그만둔다. ‘무덤 방문’보다는 ‘성묘용’이라고 쓴 주문서를 받은 플로리스트가 격식을 갖춘 꽃을 만들어 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그렇게 쓴다. 


주문서에 나는 이렇게 이어 쓴다. 

 

“전체적인 모양은 길게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케에 가까우면 좋겠고, 성묘용이지만 흰색이나 연한 색 파스텔 톤 보다는 팝(pop)한 느낌의 강한 색상이면 좋겠습니다. 물에 꽂는 것이 아니라 곧 시들겠지만, 하루이틀 정도는 예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머리가 크고 줄기가 튼튼한 꽃들로 구성하고 싶습니다. 녹색 소재의 경우, 주변 배경인 산소와 어우러져 잡초 느낌이 나지 않게 강하고 왁시한 종류를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화이트나 블랙 포장에 대조되는 색 리본을 간단히 묶어 주시고, 포장 째 묶어 두거나 화기에 꽂을 것이므로 줄기를 단단히 묶어주세요. (이하 사용할 꽃, 사용하지 않을 꽃 종류의 예시.)”

 

*


지난여름에 한의원에 갔다. 내과에서는 나에게 딱히 해소할 방법이 없다고 알려준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내 건강을 내맡긴 사람에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즈음 나는 어디서나 올리버 이야기를 했다. 물리적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내가 태워서 메모리얼 스톤으로 만들어 버렸으므로) 여전히 우리 집에서 결코 착각일 수 없는 묵직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는 투명한 올리버 이야기를 하자, 한의사 선생님이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여둘톡)>에 나온 ‘투명 고양이’ 이야기1를 들려주었고, 부항을 뜨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랐다. ‘올리버 투명고양이설’을 내가 발명한 줄 알았는데, 이것이 이미 누군가를 통해 정립되고 동의받은 개념이라고? 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내게 진실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이미 누군가가 느끼고 이야기하고 노래로도 만들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다.


*


반면 애도의 다섯 단계는 점점 더 거짓으로 느껴졌다. 여러 죽음을 겪으면서 나는 그 다섯 단계를 비롯해 죽음과 애도를 둘러싼 말들 대부분이 허위라고 믿게 되었다. 애도의 다섯 단계, 즉 이 비참하고 끈질긴 감정이 일시적인 것이고, 한 단계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며, 그 모든 단계를 마치면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분리되어 삶을 계속 살게 된다는, 애도에는 시간 제한이 있다는 규범에 매달리는 동안 나는 이 지옥 같은 감정들이 반드시 끝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마지막 단계인 ‘우울’에 전폭적으로 시달리는 순간을 기다리기까지 했지만 그게 나를 더 건강하게 해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를 다음 단계로 가지 못하고 미끄러지거나 자꾸만 같은 단계를 반복하는 애도의 실패자로 만들고, 죽음에 대한 ‘불건전한’ 집착을 품은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온갖 사회적 규범과 원칙과 불화하는 내가 관혼상제 중 그나마 허들이 낮은 ‘상’과 ‘제’조차 제대로, 적절하게, 올바르게 해내지 못한다고 느끼게 만든다. 


한편 ‘투명 고양이’는 죽음 이후까지 끊어지지 않는 우리의 뒤엉킴과 유대를 이야기한다. 나는 그게 내가 느끼는 애도의 시간성과 더 들어맞는다고 느낀다. 

 

*


아무튼 D와 나는 폴의 무덤을 방문한다. 그의 기일에는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고 우리는 조금 과장해 목숨을 걸고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에서 두 시간 떨어진 가족묘에 묻혀 있는 폴을 찾아간다. 딱히 폴과 무슨 연고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를 기릴 또 다른 상징적인 공간이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지 싶다. 폴이 살았던 곳은 어차피 셋집이므로 현재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내가 폴과 가장 깊은 시간을 보낸 곳은 우리 집 거실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매년 우리 집에서 친구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고려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역시 그 집에 계속 살아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어색하고 불편할 것 같다. 


비 오는 날은 창문을 열면 시끄럽고 창문을 닫으면 기묘하게 고요하다. 앞 차의 바퀴가 일으키는 물보라를 보면서 우리는 그냥 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알고 보니 D는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자신이 믿는 신과 더불어 폴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의외로 효과가 있어서  D의 중요한 기원은 대개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초월적인 기도를 이루어주는 것이야말로 소천한 (우리는 적당히 이런 단어를 쓰기로 한 모양이다) 친구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일 텐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여태 부처님한테만 빌었다. 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할 마음은 있지만 특정 소원을 내가 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주지는 않을 것 같아서 늘 모호한 대자대비를 빌어 왔다. 폴은 D와 내가 무엇을 원하고 우리가 어떤 특수한 욕망과 슬픔을 가지고 있는지 신들보다 잘 알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그런 이야기를 했으니까. 


우리는 소천한 친구의 가족묘에 도착한다. 우리가 모르는 폴의 조상들의 이름들 아래에 폴의 이름이 함께 쓰여 있는 곳이다. 준비한 꽃을 꽂지만, 플로리스트가 내 장황한 주문서대로 만들어준 꽃은 끔찍하다. 받아드는 순간 이토록 실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 사람도 아마 우리와 마찬가지로 ‘무덤 방문’과 ‘팝한 느낌의 강한’ 태도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던 모양이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우리한테 필요한 것 목록에 퀴어 장례와 추모에 특화된 플로리스트를 추가한다. 꽃은 정말이지 누구의 취향도 아니고 특히 폴의 미의식에는 크게 어긋난다. 우리는 폴이 이 꽃다발을 사양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원치 않는 선물을 거절할 권리가 사라지는 것 역시 소천하기 전에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점이다. 


오래 미룬 추모의식은 뜻깊지만 의외로 고역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망자를 기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여전히 모른다. 무덤 주위를 슬금슬금 걸으며 준비해 온 술(우리는 꼬냑 VSOP를 선택했다)을 무덤 주변에 뿌린 뒤, 각자 써온 간단한 편지를 읽고, 폴과 올리버 모두가 살아있을 때 찍은 사진을 적당한 곳에 놓는다. 그다음이 문제다. 우리가 어떻게 다 함께 살았는지에 대해 폴과 혈연으로 이어진 조상들이 듣고 있는 가운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건 우리가 애도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애도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해서다. 

  

*


폴을 잃었을 때 우리는 복합적인 상실을 겪었다. 우리는 가장 친밀한 공동체인 동시에 서로에게 사회적 안전망 노릇을 하고 있었다. 폴의 죽음은 우리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동시에, 이 죽음을 말하는 모든 자리에서 우리는 자꾸만 치밀한 판단을 해야 하는 입장에 내몰린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누가 폴에 관해 알고 있나? 우리는 그에 관한 사실들을 어디까지 드러낼 수 있나? 


사실 가족장과 가족묘에는 우리 자리가 원래 없었다. 우리는 비록 고인이 이제 이 자리에 없으므로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아무튼, 그가 자기 삶의 구성요소로 선택한 아주 중요한 사람들 중 하나라고 자꾸만 주장하고 추모의 공간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셈이다. 


장례가 기독교식인 것을 보고 나는 겁을 먹는다. 본능적으로 이곳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 삶에 관한 어떤 사실들을 누락하는 것은 우리가 아주 많이 해본 일, 따라서 모두가 썩 잘하는 일 중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민첩하게 고인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기로 한다. 그와 연관된 이야기에서 재빨리 부적절한 요소들을 전부 뺀다. 


별로인 걸 전부 빼고 나니 우리의 기억은 앙상하다. 폴의 ‘다른’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당연하다. 우리의 이야기에는 예컨대 끈질긴 외로움, 자해로 이어지는 고통, 폭력, 물질 사용, 규범을 벗어난 성적, 관계적 실천들 같은 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우리의 삶이 진짜 별로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투명하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 중에 진실한 것은 폴과 나와 D가 고양이 올리버를 너무나 사랑했다는 이야기뿐이다. 


그래서 나는 자꾸 그 이야기를 한다. 장례식장은 외롭다. 무덤 방문도 외롭다. 때로는 억울하다. 


난 우리의 이야기를 가족묘에 묻힌 조상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더는 할 일이 없어서 우리는 흡연구역으로 걸어온 뒤에 벤치에 앉아서 셋이 마지막으로 함께 보았던 영화 <코코>에 나오는 노래를 들은 다음에 차를 몰고 두부정식을 먹으러 갔다.  

 



1 김하나, 황선우의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여둘톡)>의 에피소드 20, "죽음이 삶을 찾아올 때"에 등장하는 ‘투명고양이’ 이야기는 림(LIM)의 <투명고양이>라는 노래로 만들어졌다.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소호한의원의 홍예원 원장님이다. 내가 생각한 ‘투명고양이’는 팟캐스트에 등장한 맥락과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이 팟캐스트는 너무 재미있지만, 고양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 슬퍼서 대충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투명고양이’가 조금씩 다를 수도 있고,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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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섬별

읽고 쓰고 옮긴다. 매일 일기를 쓰고 자주 시를 쓴다. 용감하게 살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다. 물루와 올리버라는 치즈 고양이의 식구다. 옮긴 책으로 <페이지보이>, <자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