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캐번 저/박소현 역 | 민음사
지난번 독서 모임을 다녀오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그날 책을 가지고 나눈 담소보다 ‘미치도록 덥다!’라는 원초적인 고통이었다. 불판에 오른 작품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고, 날씨는 어느 누구든 괴로워할 만큼 몹시 무더웠다. 이 같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굳이 기억에 남은 질문이 하나 있었으니, 도대체 왜 이런 작품(『엘리펀트 헤드』)을 골랐느냐는 말이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던가? 기왕이면 책을 읽을 때나마 정말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은, 기이한 경험을 해 보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마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에는 실패한 듯싶다.
항상 있을 법하지 않은 일, 좀체 겪을 수 없거나 아예 일어날 수 없는 뭔가에 매료되었다. 특히나 누군가에겐 현실이지만 내겐 비현실인 이야기에 더욱 이끌렸던 것 같다. 집 밖의 세상과 낯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속은 늘, 격렬한 불안을 불러일으킬 만큼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저마다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기에, 아무리 애쓴들 수많은 삶과 드넓은 세계를 전부 누릴 수는 없으리라. 내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인생을 살아가는 일조차 얼마나 버거운가. 죽음이 내 앞에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 뭔가를 체득하고 경험하고자 하는 욕구는 차츰 조바심으로 바뀌어 갔고, 아마도 그 무렵에 책을 읽게 되었던 듯싶다. 인간의 유한성을 추월하여 어떤 특수한 현실과 타인의 입장, 심지어 환상까지 체험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픽션의 미덕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편집자로서 성공적인 전략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동안 내가 읽고 만들어 온 책들을 죽 훑어보니 나름대로 한 가지 원칙을 따르고 있었다. 새로운 경험! 오직 픽션만이 안겨줄 수 있는 경이와 충격! 요컨대,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작품들을 주로 선택해 온 것이었다. 그런고로 지난 독서 모임에서 들었던, “도대체 왜 이런 작품을 골랐느냐?”라는 한마디는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매우 익숙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난날 나는 어느 한 작품을 펴냈을 때(아니, 펴내기 전부터), 저러한 요지의 질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바로, 애나 캐번의 『아이스』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그야말로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같은 방식으로 시작하는, 이를테면 시대와 장소, 인물마저 제대로 호명되지 않는 까닭에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가늠할 수 없는, 그런 신기한 이야기다. 일단 이 대목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앞서 언급한 저 질문, “도대체 왜 이런 작품을 골랐느냐?”라는 합리적인 의혹으로 되돌아간다. 그럼에도 다시 『아이스』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 가자면, 어떤 비밀스러운 임무를 맡은 한 남자는 차갑게 얼어붙어 가는 황량한 세상을 질주하며 이렇게 읊조린다. “나는 길을 잃었다. (중략) 내게 현실은 언제나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스스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남자는,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여자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이 여자는 ‘교도소장’이라 불리는 엄혹한 남자에게 사로잡혀 있고, 주인공 남자는 기억과 공간을 넘어 한없이 흩어져 가는 그들 두 사람을 쫓아 끊임없이 방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인류세는 맹렬한 추위와 집요하게 치닫는 얼음으로 인해 저물어 가고 있다.(지금의 더위를 생각하면, 소설 속에 도래한 갑작스러운 빙하기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 듯하다.)
『아이스』는 정방향의 시간과 인과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굉장히 당혹스러운 작품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픽션에서 기대하기 마련인)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한 채, 어떤 불길한 고통을 은폐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미지들만이 마치 끊임없이 돌아가는 환등기의 영상처럼 무한히 증식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의식의 흐름’ 같기도 하고, ‘자동 기술’ 같기도 한 『아이스』의 낯선 글줄은, 오늘날 ‘슬립스트림’이라는 장르(이 책의 「서문」을 쓴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사실상 정의할 수 없음에도 슬립스트림은 “왜곡된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한, 또는 낯선 관점에서 익숙한 광경이나 사물을 마주한 듯한 ‘타자성’을 유발”하는 장르다.)의 전형으로 여겨지지만 이 점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물론 『아이스』는 슬립스트림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로 그러한 장르가 출현하기에 앞서 완성되었다. 이를테면, 애나 캐번이 이토록 기묘한 작법을 선보인 까닭은, (장르를 고려하지 않은) 이러한 글쓰기 자체가 작품의 핵심(서사 ‘파괴’가 곧 서사인 셈이다.)이기 때문이다.
애나 캐번의 『아이스』는, 더 나아가 그의 모든 글쓰기는 스스로의 불행과 고통, 절규로 가득한 삶을 반영하고 있다. 아버지의 자살, 어머니의 냉대, 끔찍한 결혼 생활(어머니의 강요로 어머니의 전 애인과 결혼해야 했다), 지옥의 밑바닥처럼 아득한 우울과 치명적인 약물 중독은 애나 캐번의 인생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단 몇 줄의 요약만으로도 듣는 이를 아연실색하게 하는 그의 일생은 모든 것이 불분명한, 매서운 눈보라 속으로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아이스』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게다가 평소 속도광(자동차 경주 애호가)이었던 캐번을 생각하면, 또 헤로인이 불러들인 쾌락의 악순환에 붙들린 수인(囚人)이었던 그를 생각하면, 그 절체절명의 감각 위에 올라탄 고통의 기억이 왜 『아이스』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에게 불행은 (『아이스』의 느닷없는 시작처럼) 불가피한 운명이었고, 글쓰기는 (『아이스』의 쉼 없는 흐름처럼) 오직 살아남기 위한 질주였다.
최후의 순간까지 주인공은 멈춰 서지 않는다. 소설 속의 누구든 잠시라도 머무를 수 없음을, 애나 캐번의 삶을 들여다본 뒤에야 비로소 이해했다. 작품을 체험하기 위해 반드시 작가의 삶을 참조할 필요는 없지만, 삶과 작품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이따금 도움이 되기도 한다. 종종 작가의 인생 자체가 작품을 떠받치는 ‘맥락’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무척 좋아한다. 이 뭉클함을 뭐라 표현해야 좋을까? 낭떠러지 끝에 서 있고, 바랄 수 있는 건 나락밖에 없는 상황에서 결연히 내 생명을 붙들어 줄 누군가의 손을 맞잡은 느낌이랄까? 나는 애나 캐번이 기나긴 고통의 끝자락(이 작품이 마지막 소설이다.)에서 한평생 고대해 온 찬란한 온기를 발견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이스』는 냉혹한 얼음 속에서 마침내 온기를 찾아내고야 마는, 불가능마저 초월한 소망을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픽션의 미덕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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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훈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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