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대한민국 미술 주간은 예술을 향유하는 가장 역동적인 시기다. 전시와 강연, 다양한 분야의 비엔날레와 아트페어가 도시 곳곳을 채우며 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이 축제 속에서, 작품의 이면을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 바로 “컬렉터”다.
오늘날 컬렉터는 단순한 소장가를 넘어 시대의 미감을 기록하고, 미래의 예술 지형을 만들어가는 조력자다. 컬렉터가 선택한 작품은 세상의 시선을 끌고, 때로는 작가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요즘 미술계에서는 세계적인 스타들이 작품을 수집하며 미술을 보다 가까운 언어로, 보다 친근한 방식으로 대중에게 전달하고 있다. 2025년 미술 주간을 맞아 전 세계 컬렉터들의 세계를 조명해 보자.
미술계를 바꾼 광고 천재 ‘찰스 사치(Charles Saatchi)’
찰스사치 갤러리 전경 © Saatchi Gallery
광고업계의 전설적 거물로 알려진 찰스 사치는 1970년대 동생과 함께 ‘사치 앤 사치 (Saatchi & Saatchi)’ 광고 회사를 설립하며 대중의 감각을 뒤흔든 인물이자, 현대미술을 세계적 무대에 올린 컬렉터다. 그는 1969년 뉴욕의 미니멀리스트 작가 솔 르윗(Sol LeWitt)의 작품을 구입하여 미술 수집을 시작했고, 1985년 자택 인근 페인트 공장을 개조하여 기존의 런던에 있는 갤러리들과는 차별화되는 ‘사치 갤러리(Saatchi Gallery)’를 개관해 미국 미니멀리즘부터 동시대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도발적이고 논쟁적인 작품들을 소개하며 런던 미술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영국에서 가장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로열 아카데미에서 열린 《Sensation》 전시는 박제상어를 유리관에 넣은 데미안 허스트의 <살아있는 자가 상상할 수 없는 육체적 죽음>, 자기 피를 얼려 자화상 조각을 만든 마크 퀸의 <셀프>, 트레이시 에민 <나와 함께 잤던 모두 1963~1995> 등 충격적인 작품을 통해 대중적 관심을 끌었고, 그의 소장품과 작품 대여를 통해 30만 명의 관람객을 유치하는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데미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등 yBa(Young British Artists) 세대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으며, 컬렉터의 힘이 단순히 작품을 소유하는 것을 넘어, 한 시대의 예술가를 형성하고 세계적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과 개인적 직관으로 작품을 수집하는 미다스의 손. 사치의 선택은 곧 시장 가격 상승과 국제 전시 초청으로 이어져, 작가들에게는 성공의 지름길이자 미술계에 새로운 흐름을 제시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왼쪽) 《Sensation》 전시 포스터 © Royal Academy of Arts, (오른쪽)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 © Damien Hirst
찰스 사치의 컬렉션은 단순한 작품의 집합을 넘어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현대미술의 아이콘을 담아내며, 한 시대의 미술사를 기록하는 장이 되었다. 그의 직관과 취향은 현대미술의 흐름을 규정하고, 컬렉터가 어떻게 예술의 궤적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다.
명품과 예술을 연결한 거장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
루이비통과 크리스찬 디올, 펜디 등 수많은 명품 브랜드를 거느린 LVMH 그룹의 회장인 아르노는, 단순한 기업인이 아니다.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컬렉터 중 한 사람이며 그의 눈길은 언제나 예술로 향했고, 그의 수집과 지원은 현대 미술계의 흐름을 바꾸는데 깊숙이 작용한다.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Foundation Louis Vuitton) © Gehry Partners
그의 예술적 안목은 의외의 순간에서 드러났다. 1982년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모네의 말년작 가 경매에 나왔을 때, 아무도 입찰하지 않던 이 작품을 그는 과감히 낙찰받았다.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치를 포착하는 그의 본능적인 직관이었다. 이 선택을 시작으로 마티스, 피카소, 그리고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까지 그의 컬렉션은 확장되고 있다. 초기에는 모던아트에 집중했으나, 이후에는 전 파리 시립 박물관 관장인 수잔 파제 (Suzanne Page)의 조언으로 이어지는 그의 아트 콜렉션은 컨템퍼러리 아트로 방향을 넓혀 나가며 대중과 호흡하고 있다.
유튜브 Exposition "David Hockney 25" | Bande Annonce ⓒ Fondation Louis Vuitton
아르노의 이름을 더욱 각인시킨 것은 파리에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Fondation Louis Vuitton)’이다. 파리에 세워진 이 공간은 단순한 브랜드 홍보를 넘어 미술과 명품을 연결한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다. 데이비드 호크니 회고전처럼 400여 점에 달하는 대규모 전시는, 이미 이름을 알린 작가를 대규모로 조명하여 예술이 럭셔리 경험 속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또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아르노의 철학이 곧 LVMH의 문화적 전략과 맞닿아 있음을 증명한다.
고(故)박서보 화백과 협업한 Louis Vuitton ArtyCapucines’ 컬렉션 전시 전경 ⓒ Louis Vuitton
그의 컬렉션은 단순한 개인적 취향을 넘어, 예술과 브랜드가 공존하는 지표로 기능한다. 루이비통이 현대미술과의 소통을 통해 더 많은 대중에게 문화예술을 경험하게 하는 것도, 1854년부터 이어져 온 브랜드 헤리티지인 ‘여행의 예술(Art of Travel)’을 확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아르노가 세운 미술관과 전시는 럭셔리와 예술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하며, 현대 문화의 흐름을 읽는 언어로 작용한다. 그는 단순히 작품을 소유하는 수집가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시대적 미학을 제시하는 또 하나의 창조자다.
프랑수아 피노 (François Pinault)
명품 산업과 미술계를 동시에 움직이는 거물, 프랑수아 피노는 생 로랑, 구찌, 발렌시아가 등을 거느린 케링(Kering) 그룹의 창립자이자, 세계 최대 미술품 경매사 크리스티의 소유주다. 그러나 그가 세계적인 컬렉터로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한 재력 과시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도시와 사람을 연결하는 공간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명품 재벌이자 컬렉터로서, 그는 베르나르 아르노와 함께 ‘럭셔리와 예술을 동시에 선도하는 세대’를 상징한다. 베니스의 팔라초 그라시(Palazzo Grassi)와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를 미술관으로 바꿔놓으며, 피노는 자신의 컬렉션을 ‘저장고’가 아닌 ‘문화적 장치’로 확장시켰다.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 – Palazzo Grassi, Pinault Collection – Bourse de Commerce 전경
© Pinault Collection
피노의 컬렉션은 규모와 가치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소장품 목록에는 몬드리안, 피카소, 제프 쿤스를 비롯해 이우환, 쿠사마 야요이 등 20세기와 동시대의 대표 작가 작품 2천여 점이 등록되어 있다. 그 가치는 한화로 약 1조 5천억 원에 달한다. 그는 몬드리안의 < Tableau Losangique II >를 880만 달러에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98년 미술품 경매사 크리스티를 인수하면서, 피노는 컬렉터이자 시장의 구조 자체를 움직이는 결정적 영향력을 갖추게 되었다.
부르스드 코메르스(Bourse de Commerce) < Carte blanche à Kimsooja > (2024) 전경 © Pinault Collection
그의 컬렉션 철학은 ‘강렬한 감정’을 출발점으로 한다. 작품을 통해 사회와 예술가가 던지는 질문을 마주하게 하고, 관객과의 긴밀한 경험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파리의 ‘부르스 드 코메르스(Bourse de Commerce) 피노 컬렉션’은 이러한 철학이 응축된 공간이다. 18세기 곡물 거래소 건물을 안도 다다오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전시장은 역사와 현대가 겹치는 장소에서 관람객에게 단순히 작품을 보는 행위가 아닌, 공간과 감각을 경험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피노는 “예술이 던지는 질문을 대중과 공유하는 것”을 자신의 문화 프로젝트의 진정한 의미라고 밝히며, 상업에서 출발해 예술을 감정과 성찰의 장으로 확장해 왔다.
그의 컬렉션은 강렬한 감정의 기록이자, 동시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프랑수아 피노는 럭셔리와 예술의 만남을 넘어, 현대 컬렉터가 어떻게 예술의 의미를 확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인물로 동시대 사회와의 대화로 이어지며, 컬렉터가 한 시대의 미학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국 미술의 아이콘, 여성 컬렉터 ‘홍라희 (Hong Ra-hee)’
한국 미술계에서 여성 컬렉터의 상징적 존재이자 삼성 리움미술관 명예 관장인 홍라희는 국내외 미술의 가치를 알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홍라희 명예 관장은 세계적인 미술 전문 매체 ‘아트넷(Artnet)’이 선정한 세계 200대 컬렉터에 매년 이름을 올려왔고, 국내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혀왔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의 유족들이 국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에도 그의 안목과 조언이 반영되었다.
리움미술관 입구 전경 ⓒ 리움미술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학을 전공하여 재력과 함께 안목까지 갖춘 그는 1995년 호암미술관으로 취임하였으며 2004년 개관한 리움미술관 초대 관장으로서 동서양의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균형 있게 아우르는 전시로 한국 미술관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며, 개관 당시부터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한국 미술이 국제적 담론 속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고, 리움은 곧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와 소통하는 창구로 자리 잡았다.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전시 전경 ⓒ 국립현대미술관
그가 소장한 작품에는 김환기, 이우환 같은 국내 거장부터 앤디 워홀과 마크 로스코 등 세계적 거장의 작품을 소장하며 동서양 미학의 대화를 만들어왔다. 고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아우르는 홍라희의 컬렉션은 단순히 작품의 집합이 아니라, 한국 미술의 역사와 현대 미술의 흐름을 아우르며 국제적으로 한국 미술을 알리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한다. 그가 수십 년간 컬렉션에 돈과 시간, 애정을 쏟아부은 선택은 예술을 향유하는 대중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명품 재벌에서부터 광고 거물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컬렉터 이들의 컬렉션은 단순한 ‘취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시대의 미감을 기록하고, 새로운 예술 지형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행위이자, 문화와 대중을 연결하는 다리다. 2025년 가을 대한민국 미술 주간, 우리는 이 다섯 명의 컬렉터를 통해, 미술이 단지 미술관과 갤러리의 이야기 아니라, 우리 일상과 생각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언어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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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예 (큐레이터)
성신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각종 문화예술기관에서 큐레이터 활동을 통해 문화예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폭넓게 전파하고, 예술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