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칼럼] 위대한 예언자이자 SF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
탄탄한 과학지식,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 그리고 번득이는 상상력의 대가, 스타니스와프 렘의 대표작을 살펴봅니다.
글 : 정보라 사진 : 정보라
2025.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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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렘(Stanisław Lem, 1921-2006)은 폴란드가 배출하고 세계가 사랑하는 걸출한 SF 작가이다. 그리고 렘의 삶은 그 자체로 폴란드 현대사에서 저항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렘은 현재 우크라이나 리비우, 당시 폴란드 동부 도시였던 르부프에서 유대계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렘 자신도 의사를 꿈꾸었으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에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전쟁 시기에 렘은 용접이나 자동차 수리 등의 일을 하면서 밤에는 몰래 저항군이 운영하는 대학 과정을 이수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크라쿠프의 유서 깊은 야기엘로인스키 대학교에서 의대에 다녔다. 그러나 1948년 폴란드가 공산화되어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자 렘은 일부러 졸업시험을 치지 않고 의사 자격을 거부한다. 이런 과정은 일부분 『우주비행사 피륵스』(Opowieści o pilocie Pirxie, 1968/1973)에 반영되기도 했다. 렘은 잠시 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기도 했으나 데뷔작 『우주비행사들』(Astronauci, 1951)에 이어 『에덴』(1959), 『솔라리스』(1961), 『우주 순양함 무적호』(Niezwyciężony, 1964) 등의 성공으로 곧 폴란드는 물론 동유럽 문학계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소련은 1957년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Спутник)를 쏘아 올리며 우주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스푸트니크 발사 성공은 전 세계적인 충격이었다. 소련 SF 작가 이반 예프레모프는 『안드로메다 성운』 서문에서 스푸트니크 발사 성공에 영감을 얻어 작품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렘은 소련 SF의 대표주자였던 스트루가츠키 형제와 함께 인공위성 발사 성공이 곧 ‘우주 보편적인’ 공산주의 승리를 상징한다는 소련 주도의 프로파간다에 정면으로 맞서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소련식 공산주의 유토피아 선동에 반대하는 작품들로는 대표적으로 『에덴』(1959)과 『우주 순양함 무적호』(Niezwyciężony, 1964)를 꼽을 수 있다. 양쪽 모두 인류가 발전된 과학기술에 힘입어 우주선을 건설해서 외계로 나아가 새로운 행성에 도착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에서 우주선 ‘무적호’ 승무원들은 낯선 행성을 탐사하러 나선다. 그러나 이 새로운 행성의 환경은 물리적으로 지구와 전혀 다르다. 새 행성이니까 지도도 없고 내비게이션도 없고 우주비행사들은 각자 알아서 위기와 장애물에 맞서야 한다. ‘무적호’ 승무원들은 그리하여 외계행성 탐사라는 이름 하에 죽을 고생을 겪는다. 

 


 

식민주의 시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연상되는 우주선 이름에 낯선 행성에 착륙한 지구인들이 고통과 위험에 노출되어 하나씩 죽어가는 이야기는 제국주의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같은 지구 안에서도 낯선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다. 그런데 인간의 빈약한 지식과 거대한 자만심만 믿고 지구 바깥으로 나갔다가는 정말 상상도 못 한 생물이나 환경을 마주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탐사’라는 이름으로 우주의 외딴 별에 남겨진 지구인들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가 없다. 지구에서 파견한 우주비행사들에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너무 끔찍할 것 같다.

 

『에덴』도 이와 유사한 관점을 표현하지만 좀 더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작품 속에서 지구 과학자들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외계 행성을 발견하여 오랫동안 관측해 왔다. 멀리 지구에서 관찰만 할 때에 이 행성은 자연환경이 풍요롭고 지구처럼 지성을 갖춘 하나의 생물종이 지배하지도 않아서 인간이 이주하기에 딱 좋은 낙원처럼 보인다. 그래서 지구 과학자들은 이 행성에 ‘에덴’이라는 별명을 붙인다. 그러나 실제로 우주비행사들이 ‘에덴’에 도착하여 탐사를 나서자 전혀 다른 실상이 밝혀진다. ‘에덴’에는 지적 생명체들이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발전시키며 살고 있다. 심지어 이 ‘에덴’의 거주자들은 인간보다 더 뛰어난 문명을 이룩한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하다. 지구 과학자들은 ‘에덴’의 사회가 이름과 달리 전혀 낙원이 아니며 독재자가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정치의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독재자가 자신이 지배하는 ‘에덴’ 거주자들에게 어떤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 짐작한다. 지구인 과학자들이 ‘에덴’의 거주자들과 접촉하면서 점점 그 참상이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나는 『에덴』에서 지구 과학자들이 외계인과 소통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무척 좋아한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서 그냥 결말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는 정도만 밝혀두겠다.

 

 

『솔라리스』는 렘 작품 중에서 아마 가장 유명할 것 같다.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1972년 영화로 만들었는데, 렘은 이 러시아 영화 「솔라리스」를 아주 싫어해서 시사회장에서 도중에 나가 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헐리우드에서도 2002년에 또 영화로 만들어졌다. 헐리우드에서는 로맨스 영화로 단순화시켜 버렸는데 사실 『솔라리스』는 1961년에 3D 모델링, 시뮬레이션, 복제 등의 개념을 소개한 탁월한 SF 소설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렘은 인간의 지식과 능력에 근본적인 의문을 표한다. 지구에서 인간의 경험에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완전히 낯선 것을 마주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솔라리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공포에 질려 미치거나 자살한다. 그래서 주인공 크리스 켈빈이 ‘솔라리스’ 우주정거장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해 솔라리스 행성으로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품 속에서 인간이 수십 년이나 솔라리스 행성을 관측하여 ‘솔라리스학’ 지식이 그만큼 축적되어 있다고 하지만, 정작 켈빈은 인간의 과학이 실제 우주에 나오면 너무나 빈약할 뿐이라는 사실만 매 순간 확인한다. 

 

이런 작품들은 당연히 혁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 인간의 과학과 지식으로 이상 사회를 완성시킨다는 소련식 공산주의 프로파간다에 정면으로 어긋났다. 렘은 인간의 한계, 한없이 약하면서도 강인한 인간의 다양성을 작품 안에서 핍진하게 부각시킨다. 그리하여 렘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질문하는 철학적인 SF로 현대 SF 문학계의 거장이 되었다. 렘의 매력은 탄탄한 과학지식과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에 바탕을 둔 번득이는 상상력이다. SF가 미래를 예언하는 장르라면 렘이야말로 20세기 폴란드가 낳은 위대한 예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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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스타니스와프 렘> 저/<최성은> 역

출판사 | 민음사

우주 순양함 무적호

<스타니스와프 렘> 저/<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공역

출판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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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SF와 환상 문학을 쓰고 번역도 한다.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선정됐다. 지은 책으로 『문이 열렸다』, 『죽은 자의 꿈』 등의 장편 소설과 『저주토끼』 『왕의 창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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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렘

과학소설 작가, 극작가, 미래학자, 문명학자, 과학 철학자, SF 평론가이자 아서 C.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 필립 K. 딕과 함께 20세기 SF를 대표하는 거인. 렘은 1921년 폴란드 르부프(현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유대계 의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성년이 될 무렵 2차대전이 발발하자 정비공, 용접공으로 일하며 폴란드 저항군으로도 활동했다. 전후 크라쿠프에서 의학을 공부하며 등단도 하게 되는데, 1951년에 발표한 『우주 비행사들』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렘은 통상 SF작가로 분류되지만 이는 광의의 SF로, 현대 SF 작가가 제시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이미 다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과학과 문학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 인간에 대한 성찰, 신에 대한 질문을 특징으로 하며, 사고할 수 있는 기계의 창조로 발생한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는 메타픽션의 전형을 창조해냈다. 주요 장편으로 『에덴』(1959)과 『솔라리스』(1961), 『별에서의 귀환』(1961), 『우주 순양함 무적호』(1964) 등이 있다. 특히 렘에게 단편소설은 예리한 비평 정신과 분방한 예술적 상상력, 치밀한 과학적 사고가 어우러지는 자유로운 실험의 장이었는데, 렘다움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이욘 티히의 우주일지』(1957) 외 이욘 티히 연작, 『사이버리아드』(1965) 외 로봇 연작, 『우주 비행사 피륵스 이야기』(1968) 등이 있다. 이외에도 렘은 존재하지 않는 책들에 대한 서평 모음집인 『절대 진공』(1971)과 이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않는 책들의 서문을 모은 『상상된 위대함』(1973)에서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폭넓은 필력을 과시했다. 문학사의 깊은 족적을 남기고 렘은 2006년 3월, 향년 85세 나이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