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이 일상이기는 하지만, 근래 가장 열중하는 덕질이 뭐냐고 묻는다면 중국 숏드 덕질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숏드는 세로형 숏폼 드라마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미니 프로그램 숏드라고 불리기도 한다. 메신저인 위챗에 있는 미니 프로그램 등을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청자가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가 아니라 휴대전화로 볼 걸 염두에 두고 세로형으로 만든 드라마인데 보통 1화가 1~2분 정도이고, 회차는 수십 화에서 백화 정도이다.
<나는 80년대로 가 계모가 되었다> 포스터
내가 숏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중국에서 2024년 설날 연휴에 선보였던 <나는 80년대로 가 계모가 되었다>*가 대박을 쳤을 때였다. 촬영 기간 열흘, 포스트 프로덕션 비용 8만 위안(한화 1,600만 원 정도)으로 런칭 당일에만 충전액이 2,000만 위안(한화 39억 5천만 원 정도)에 달했던 드라마였는데(중국 숏드계에서는 런칭 당일의 충전액이 작품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다) 성공 신화로서 널리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콘텐츠 업계의 관심이 숏드 산업으로 몰리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작품이었다.
*이 드라마를 만든 제작사인 팅화다오(听花岛)는 그 뒤로도 꾸준히 성공작을 만들어냈는데 상업적 성공을 차치하더라도 영상 미학, 소재 선정, 클리셰 변주 등 여러 면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숏드계의 선구자랄까.
중화권 콘텐츠 덕후로서 당대 유행을 모를 수는 없었기에(?) 나는 빠르게 숏드 시청을 시작했고, 위챗 페이의 잔액도 여기에 다 털어 넣었다. 그렇다면 중국 숏드의 특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빠른 전개? 선명한 선악 구조? 강렬하면서도 과장된 감정? 자극적인 연출? 불륜, 살인, 납치, 학대, 강간 같은 막장이라고 쓰지만 범죄라고 읽어야 하는 설정들? (중국 시청자들은 숏드를 보고 ‘개 피狗血’라고 표현하곤 한다. 막장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모든 숏드가 다 이런 건 아니다. 백화제방과도 같아서 정말 온갖 작품이 다 있기 때문이다. 특히 폭발적인 양적 성장을 이룬 지금은 질적 성장을 추구하고 있기에 나오는 작품들도 각양각색이다)
사실 내가 가장 큰 흥미를 느꼈던 건 숏드 속에 녹아있는 중국의 모습이었다.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나는 80년대로 가 계모가 되었다>로 이야기해 보자.
오늘날의 대학생 여성이 80년대로 타임슬립을 했다. 정확히는 어떤 시신에 빙의했는데 눈을 떠보니 원래 몸 주인이 처한 상황이 가관이었다. 국영 공장의 부공장장 딸로 살아왔으나 알고 보니 이 집 딸이 아니었던 것. 빠르게 친딸을 찾아낸 양육자들은 친딸이 혼약에 묶여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를 몸 주인에게 대신 이행할 걸 강요했다. 결혼 상대는 농촌에서 돼지를 키우며 산다는, 애 둘 딸린 이혼남이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몸 주인이 죽음을 택하면서 주인공이 이 몸에 빙의했던 것이다. 개인사업자에 애 둘 딸린 서른 살 이혼남이라니.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도 이를 두고 수군거렸다.
때는 1980년대 중국. 개혁 개방이 시작되었지만 민간 경제가 아직은 활성화되지 않은 시기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개인사업자(个体户)는 믿음직스럽지 않은 신분이었고, 서른 살 이혼남은 마을에서 쉽게 용납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생이 보기에는 좀 달랐다.
양돈업을 크게 하는 개인사업자? 중국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할 때 재벌이 될 사람이네. 서른 살? 아직 한창이지. 서른이면 청년 아닌가.
이에 주인공은 더는 가족이라고 볼 수 없는 이들을,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곳을 떠나 약혼자를 찾아갔고, 그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약혼자의 잘생긴 외모를 보고 자기 선택에 기뻐하기도 한다) 그런데 약혼자의 아이들*이 무언가 이상했다. 알고 보니 약혼자의 친척이 아이들을 돌봐준다는 핑계로 생활비를 빼돌리고 학대를 했던 것. 주인공은 기지를 발휘해 맞서 싸우고, 친척들을 쫓아낸다. 그리고 아이들을 제대로 돌봐준다. 그 결과 아이들의 마음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약혼자와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게 다가 아니다. 주인공은 요식업에도 뛰어들어 약혼자처럼 경제적 성공까지 거둔다.
*참, 두 아이는 약혼자의 아이가 아니다. 실은 조카들이다. 또한 약혼자도 처음부터 개인사업자가 아니었다. 원래는 군부대에서 촉망받던 군인이었으나 누나와 자형이 사고로 죽으면서 조카들 양육을 위해 제대한 것이었다. 결말을 보면 남주가 군인 출신일 뿐만 아니라 고위급 군인 지인이 매우 많다는 게 나오는데 이 또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중국에서는 군계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남주는 욕망으로 빚어낸 판타지적 존재와도 같아 온갖 좋은 걸 몰아줘야 하기에 이러한 반전을 넣은 듯하다.
덕분에 시청자는 주인공이 승승장구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기쁨을 느끼는 게 아니라 주인공의 선택 자체에 통쾌함을 느낀다. 주인공이 알고 있는 ‘미래’가 실은 시청자도 알고 있는 정보니까. 그것은 가까운 과거이거나 바로 앞에 놓인 현재이다. 중국 숏드는 회차당 시간이 짧다. 시청자가 1분 혹은 2분 만에 빠르게 몰입해야 하기에 세계관을 찬찬히 풀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중국 숏드는 클리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기존에 만들어진 세계관을, 모두가 알고 있는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끌고 온다.
바로 중국이라는 세계관이다.
근현대 역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농촌 혐오, 차이리 문화(신랑 측이 신부 측에게 주는 돈), 남존여비와도 같은 사회적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 이는 숏드에서 세계관 설정이자 서사적 갈등 장치이고 그와 동시에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때문에 중국 숏드를 보면 오늘날 중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도파민 팡팡 터지는 극적 전개를 위해 과장해서 설정하거나 연출하는 면도 분명 존재한다)
오늘날의 중국인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사회적 문제로는 무엇이 있고, 어떠한 것을 혐오하는지,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가 어떻게 두드러지는지, 반대로 사회주의적 가치는 어떻게 강조되는지, 중·노년 로맨스 숏드의 유행이 중국 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할지 등등. 생각보다 숏드에는 많은 게 담겨 있다.
상업적 가치만 있을 뿐 통속적인 막장 콘텐츠다, 라며 비웃고 그냥 지나가기에는, 그 안에 담겨 있는 각양각색의 모습들이 너무 아쉽지 않을까?
함께 읽기
장아이링 저/문현선 역 | 민음사
숏드에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로 ‘백월광(白月光)’이 있다. 손으로 붙잡을 수 없는 존재. 닿을 수 없는 존재. 보통은 남주가 잊지 못하는 여성을 의미한다. 사실 ‘백월광’이라는 단어는 장아이링의 소설인 「붉은 장미 흰 장미」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찰떡같은 기원도 없을 것이다. 통속 소설에서 기원한 말이 100년 전 통속 소설만큼이나 통속적인 영상 콘텐츠에서 여전히 쓰이고 있다니. 참, 올해가 장아이링의 사후 30주년이다. 아직 장아이링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숏드만큼이나 재미있는 그의 세계를 만나보자.
쉬쿤 저/유소영 역 | 문예원
계약 결혼을 한 이들이 진짜로 사랑에 빠진다는 건 로맨스물의 클리셰이다. (#선결혼후연애) 보통 중국 숏드에서는 결혼하라는 조부모 혹은 부모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계약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어째서 윗세대는 결혼하라고 난리이고, 아랫세대는 계약 결혼이라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저항할까? 오늘날 중국인의 감정과 결혼, 윤리, 가치 등을 다룬 장편 소설을 통해 그 이유를 가늠해 보자.
『나는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 (절판)
류전윈 저/문현선 역 | 오퍼스프레스
채플링 저/홍영림 역 | 연극과 인간
그렇다면 계약 결혼 대신 위장 이혼을 하는 이들은 어떠할까? 이들은 어째서 위장 이혼을 할까? 계약 결혼을 했다가 진짜로 사랑에 빠지는 게 로맨스 클리셰인 것처럼 위장 이혼을 했다가 진짜로 이혼하게 되는 것도 로맨스 클리셰 중 하나이다. 가짜 이혼은 어쩌다가 진짜 이혼이 되었을까? 여기 아주 중국적인 이유가 나오는 작품이 있다. 중국의 산아 제한 제도 때문에 위장 이혼을 했던 한 부부의 이야기. (다만 이 작품은 로맨스가 아니다. 오히려 반反 로맨스에 더 가깝다. 그리고 1979년부터 시행된 중국의 산아 제한 제도는 저출생 문제로 2021년에 사실상 폐지되었다) 류전윈의 소설이 원작인데 한국어판 소설은 절판이 되었다. 대신 각색한 희곡은 여전히 한국어로 읽어볼 수 있다.
위화 저/최용만 역 | 푸른숲
중국은 개혁 개방 이후로 사회가 어떻게 변했고, 사람들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폐품 수집자가 대형 사업체를 굴리는 재벌이 되고, 철밥통으로 여겨지던 국영 공장에 다니던 노동자가 해고되어 가슴 커지는 약이나 파는 사기꾼이 되었다. 격변하는 중국 사회와 이에 휩쓸렸던 인민들의 굴곡진 삶을 전혀 닮지 않은 한 형제가 펼쳐낸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김이삭
평범한 시민이자 소설가 그리고 번역가. 중화권 장르 소설과 웹소설, 희곡을 번역했으며 한중 작가 대담, 중국희곡 낭독 공연, 한국-타이완 연극 교류 등 국제 문화 교류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한성부, 달 밝은 밤에』, 『감찰무녀전』,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 등이, 역서로는 『여신 뷔페』, 『다시, 몸으로』 등이 있다. 홍콩 영화와 중국 드라마, 타이완 가수를 덕질하다 덕업일치를 위해 대학에 진학했으며 서강대에서 중국문화와 신문방송을, 동 대학원에서는 중국희곡을 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