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이랑만큼 새로움의 최전방에 서 있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걷는 걸음마다 쉬이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겠지요. 이랑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첫 앨범 《욘욘슨》 발매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지금, 그는 뮤지션으로서 세 장의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가사-말 산문집 『기타를 작게 치면서』는 그 모든 노랫말에 대한 풀이를 담고 있는데요. 그것은 그가 곡을 쓸 수밖에 없었던 ‘분노와 슬픔’이라는 힘을 선명하게 내려쓴 성실한 기록입니다. 책 곳곳엔 이랑이 그동안 써온 수십 권의 몰스킨 수첩 속 메모와 끼적임이 삽입돼 있습니다. 그 흔적을 따라 읽으며 우리는 이랑의 노래가 생존 분투였음을 깨닫게 되죠. 노래는 이랑에게 밥을 먹게 하고, 월세를 내게 하고, 고양이 준이치를 키우게 하고, 이랑 자신을 삼킬 수도 있었던 분노와 슬픔을 다스리게 해주었으니까요. 최근 대만 활동에도 활발한 이랑은 언젠가 대만 아티스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고 말합니다. “나는 생존하는 게 직업이야.” 값을 정확히 매길 수 없는 예술로 생존하며, 쉼 없이 일하는 이랑의 대답은 더없이 명징하게 눈부십니다. 그를 ‘뮤지션’으로도, ‘작가’로도 부르는 것이 부족해 그의 이름 ‘이랑’으로 그를 지칭하는 것이 온전하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 그를 일본에서는 “표현자”라고 부른다고 해요. 정말이지 그에게 꼭 맞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표현자 이랑은 오늘도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앞으로 “주문 같은 노래를 만들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주문이 통하는 세상을 벌써 기대하게 된다면, 아직 지어지지 않은 이랑의 노래가 지닌 힘은 얼마나 놀라운 것일까요. 그의 새로운 노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내일을 기꺼이 재촉해봅니다.
‘가사를 살아온 분노와 슬픔’으로 빼곡한 이랑의 이야기
한동안 출판 시장에서 이랑의 이름만큼 출간 점유율이 높았던 저자가 있었나 싶어요. 그러다 조금씩 뜸해진 것 같고요. 이랑의 이름이 사라진 적은 없지만, 단독 저서로는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는 항상 영업 중이긴 했어요.(웃음) 음악뿐 아니라 소설 연재 같은 것도 했는데, 단행본 작업이 오랜만이라 그렇게 느끼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측면에서 공백기라고 할 수 있는 지난 4~5년의 세월은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시기였어요. 제 친구 도진이가 아프다 죽고, 제가 아프고, 언니가 죽은 그 릴레이 시간들이 너무 힘들었고, 이 책엔 그런 시간들 속에서 탄생한 글들이 모여 있어요.
그렇게 출간한 가사-말 산문집 『기타를 작게 치면서』는 ‘뮤지션 이랑의 음악 인생을 노랫말로 풀어썼다’는 측면에서 엄청난 기록이라고 느껴졌어요. 장정이 가벼운 데 반해 밀도 있고 묵직하죠. 어떻게 시작하게 된 작업인가요?
이 책의 시작은 2021년이에요. 당시 아침달 편집자이자 제 작업실 동료였던 송승언 시인의 제안으로 출발한 책이었어요. 이 원고를 경향신문에 8회 정도 연재했었는데, 아무래도 더는 못 하겠어서 송승언 시인에게 메일을 쓰기도 했어요. “나는 못할 것 같아.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 너무 괴롭고 도저히 쓰지 못하겠어”라고요. 그랬더니 그가 “너는 그런 괴로움 속에서도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야. 믿는다”라는 거예요. 진짜 못 하겠다고 보낸 메일에 그런 답장을 받았으니…(웃음) 그 뒤로도 내내 지지부진하다가 작업에 속도를 가하게 된 건 몇 개월 안 됐어요. 지금 이 책의 책임 편집자는 서윤후 시인님인데, 다시금 의기투합하고 나서는 의외로 후루룩 쓰게 됐어요.
이랑의 음악을 좋아해서 음반도 샀고, 스트리밍으로도 자주 듣는데요. 『기타를 작게 치면서』를 읽고 많이 놀랐어요. 이토록 괴로운 상황 속에서 탄생한 음악이었다니. 그동안 이런 배경을 모르고 신나게 듣기만 한 제가 너무 성의 없는 리스너였나 싶었고요. 그래서 다른 독자분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으실지가 무척 궁금해요.
독자분들이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아요. 어떤 분들이 읽어주시려나.(웃음) 지난 주말에 공연을 했으니 관객분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창작자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공연장에서 영감을 주고받는 느낌이 커요. 그게 훌륭한 소비라는 생각이 들고요. 서로 무언가를 만들고 그걸 응원해 주고, 봐주는 것이 좋은 소비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만큼 좋은 소비란 어떤 것일지 고민도 많고요. 그런 측면에서 아이돌 팬덤에 대해 생각하면, 대다수가 종속적인 관계인 것 같아요. 내 최애의 모든 걸 소비하고, 사랑해야 하고, 이 (종속적) 관계를 위해 최애의 삶의 향방이 정해지고, 팬들의 행동도 정해지고요. 저는 이런 소비는 불편한 것 같아요.
아티스트는 아티스트의 삶을, 관객은 관객의 삶을 살면서 서로의 삶을 존중해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은 아티스트와 팬 관계의 가장 큰 부작용은 아티스트가 실수하면 그 길로 끝장날 수 있다는 거예요. 저는 이런 식으로 무대 위에서 고립되고 외로워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제 공연을 보는 분들이나 팬분들께 주의를 많이 드렸는데, 이런 거예요. “제 얼굴이나 몸에 대해서 얘기하지 마세요. 특히 칭찬이나 추앙하는 말들을 하시면 저는 듣기 힘들고, 불편하고, 그로 인해 무섭고 외로워집니다.” 왜냐하면 저의 실상은 팬분들이 기대하는 모습과 일치하지 않고, 그런 저에게 실망해 가차 없이 돌아서고, 심지어 공격하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런 주의를 부탁드린 것인데, 그런 이유로 팬덤 확장이 안 됐나 싶어요.(웃음)
공연과 북토크는 많이 다를 텐데요.
토크를 너무 좋아하는데, 관객이 있는 상태에서 라이브로 말하는 건 무섭긴 해요.
쓰는 것은요?
쓰는 건 제가 가장 오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노래는 오래 못할 것 같아요.
그럼 이랑의 아티스트 정체성으로는 ‘나=쓰는 사람’이 더 강한 편인가요?
사람들이 인식하기에는 뮤지션 정체성이 제일 큰 것 같아요. 데뷔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걸 음악으로 제일 먼저 했다고 알려져 있는 것 같거든요. 사실은 그보다 먼저 영화도 찍었고, 글을 쓴 건 더 오래되었는데도요. 이 책에서도 자기소개에 “말과 노래의 쓰임을 고민하는 아티스트”라고 썼는데, 저 스스로도 ‘말을 다루는 사람,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1년의 절반은 일본에서 활동하는데, 일본에서의 제 타이틀은 ‘표현자’예요.
꼭 알맞는 이름 ‘표현자 이랑’
표현자요?
네. 음악가, 작가, 영화감독 같은 직함이 아니라 ‘표현자’라는 말로 저를 불러요. 그 말이 좋고 제게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뭔가 표현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무언갈 만들어 내는데, 일본은 그걸 그 자체로 받아들여 주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똑같은 책인데도 안 팔리는 게 있거든요. 그게 소설인데, 일본에서는 잘 팔려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뤄보면, 한국에서는 뮤지션이 에세이 쓰는 건 괜찮지만 소설을 쓰는 건 용납해 주지 않는 것 같아요. 애초에 제가 뮤지션으로 각인돼서 그런지, 심지어 제가 그동안 글로서도 다양한 시도를 해온 사람임에도, “왜 뮤지션이 소설을 써?”라고 반응하더라고요. 그게 책 판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요.
일본은 저를 뮤지션으로만 보지 않거든요. 저를 애초에 표현자 혹은 멀티 아티스트로 보니까 제가 책을 내든 토크를 하든 가르치든 연기를 하든 뭘 하든 그냥 받아들여 줘요. 그게 너무 신기해요. 그러면서 동시에 한국이 보다 딱지 붙이길 좋아하는 사회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고, 뮤지션이 쓴 에세이는 읽어보고 싶은데 왜 소설은 읽고 싶지 않은 걸까 하는 물음도 샘솟았어요.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제가 하는 공연 형태가 단순히 콘서트에 그치는 방향이 아닐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공연을 보고 난 후에 관계자분들이 “음악 공연이 아니라 한 편의 극이었다”라고도 해주시고, 그중에서도 일본 뮤지션 친구는 “집단 카운슬링 시간이었다”라는 피드백을 주기도 했어요. 저랑 지금 협업하고 있는 기획자 프로듀서 분도 “이랑 씨는 콘서트를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지금의 공연도 극에 가깝다. 특히나 당신은 체력이 안 좋으니 두 시간짜리 콘서트 같은 걸 해내려고 하지 말고 70분짜리 극을 만들어봐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피드백이 무척 도움이 되었겠어요.
저는 독립 창작자니까 무대 연출이나 이런 것이 다 제 몫이거든요. 콘서트의 모든 요소, 이를테면 프로젝터, 무대 위 출연진 정렬, 사운드 등 전반적인 걸 체크해야 하는데, 영화 만들 때랑 좀 비슷해요. 다른 게 있다면, 배우까지 제가 해야 하는 것인데, 연출하느라 에너지를 많이 쓰거든요. 그렇다 보니 확실히 공연을 만드는 일이 극을 만드는 것에 가깝고, ‘준비가 다 됐으니 제발 다른 배우가 나가 줘’라고 생각하면서 노래할 때도 있어요. 최근엔 어떻게 하면 제 체력에 맞는 공연 형태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요. 공연 전까지 체력이 고갈되니, 정작 가장 중요한 공연에 쓸 체력이 부족해지는 게 문제거든요. 이제는 진짜 40대로 접어들기 때문에 노화로 인한 변화에도 적응해야 하고요. 성대가 정말 많이 안 좋아졌고, 다리도 진짜 아파요.(웃음)
운동하세요?
재활 느낌으로 조금씩 하고 있어요.
여러모로 이랑을 둘러싼 모든 게 크게 달라질 수도 있겠어요.
작년에 제가 연극을 하나 올렸어요. 낭독극이었고, 하면서 좋았어요. 제게 영화나 연극에 대한 경험치가 있으니 다른 형태의 공연을 만드는 건 자연스러운 변화 같아요.
이랑은 새로운 개념 같은 걸 참 열심히 제시하는 사람이에요. 누군가는 그걸 천재라고도 할 테고, 힙스터라고도 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자기 삶의 변화로 인해 당면한 문제를 잘 돌파해 보려는 것이잖아요. 그런 사람에게 마음껏 시도해볼 수 있는 무대가 펼쳐져 있는 것은 다행인 것 같고요.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데 다소 경직돼 있는 한국을 생각하면, 일본과 이제는 대만까지 그 활동 영역이 확장됐고, 좀 더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공연 형태를 다양하게 시도해 보기엔 일본이 좀 더 수월해요. 우선 공연할 수 있는 곳이 많거든요. 제가 참 속이 상하는 부분은 공연 하나를 만드는 데 적어도 1년을 투자하는데요. 이렇게 공들여 만든 공연은 일본 등 해외 공연을 제외하면, 서울에서 2회 하고 끝나는 셈이 되는 거예요. 너무 아깝죠? 그렇다고 더 해볼 수도 없어요. 공연할 곳이 없거든요. 한국은 홍대에 있는 몇 군데의 콘서트장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작년에 『H마트에서 울다』를 쓴 미셸 자우너와 1년 동안 이웃으로 살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어요. 제 공연 횟수가 너무 적다고 생각했는지 “인디펜던트도 투어하면 되잖아”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200석 규모의 공연을 하는 인디 뮤지션이기 때문에, 이 정도 규모의 공연장들은 서울 외엔 구할 수가 없어서 투어 자체를 못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한국은 서울밖에 없어. 서울에서 끝나. 대전, 대구도 못 가”라고 답했죠. 미셸은 공연 하나를 만들면 1년을 쭉 하고, 그다음 몇 년을 쉬면서 다음 걸 준비할 수 있는 흐름으로 살고 있다고 해요. 앨범 하나, 공연 하나를 만들어서 미국, 유럽을 돌면서 열심히 일하고, 한바탕 쉬면서 재충전하고 글도 쓴다는데 그 삶이 너무 부럽더라고요.
미셸이 “진짜 이랑처럼 일 많이 하는 사람 못 봤는데”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이런 삶임에도 어떤 부도 축적할 수 없는 상황이 스스로 더 안타까운 거예요. 저는 올해도 당연히 마이너스거든요. 특히나 공연을 하면 수익이 나지 않는 구조이고…
듣는 내내 속상한데요.
제가 하는 일은 계속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 한 번 일해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당장 굶어 죽는 상황은 아니니까 하고 싶은 일을 존중받으면서 할 수 있음에 일단 감사하기로… 하지만 언제까지 감사만 해야 해? 언제까지 감사만 해야 해! 이럴 때도 많아요.(웃음)
새로움의 최전방에서 수행하는 생존 투쟁
책을 읽으면서도 내내 안타까웠던 것은 쉼 없이 일하는 이랑의 모습이 가득했기 때문이에요. 동시에 ‘가난’에 대한 가감 없는 실제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함께 화를 내는 심정이 되기도 했고요.
언젠가 한 번 스스로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한 적이 있어요. 골자는 ‘예술과 기술과 예능을 구분해야 한다’는 거였죠. 그러니까 기술과 예능은 돈을 벌 수 있어요. 제 입장에서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면, 연주자들은 기술자고, 아이돌은 예능인에 가깝죠. 하지만 예술가는 아니에요. 예술가가 예술로 돈을 벌겠다는 것은 예술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걸 전제하기 때문에 성립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한 곡을 만들기 위해 10년을 쓰기도 하고 20년을 쓰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그 곡을 ‘20억에 사시오’라고 할 수는 없어요. 제가 생각한 가치가 따로 있다고 해도 이미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가격들에 맞춰야 하니까요. 근데 그 가격이라는 건, 기술과 예능이 모두 뒤섞인 시장에서의 값을 의미하고요. 책도 마찬가지죠. 결국 가격이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기 어려운 일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그런 이유로 나라에서도 예술인을 돕는 지원 사업이나 복지 재단 같은 것을 만들었겠지만, 이 사업도 참 쉽지 않아요. 왜냐하면 무엇이 예술인지 판단 내리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니까요.
맞아요. 이랑은 어려운 분야에서 일하고 있어요.
하지만 뭐라고 해도 (예술인은) 진짜 재미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진짜 괴롭고 진짜 재미있는.
오랜만에 새로운 곡을 만들어 발표했어요. 이 곡을 둘러싼 내밀한 이야기가 책 말미에 실려 있고요. 더불어 이번 가을 서울과 일본 투어의 공연 제목이기도 합니다. 〈셰임〉, 그 수치심이 동반된 사랑 이야기에 대해 조금 더 여쭤보고 싶어요.
30대 초중반까지 저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민을 하지 못했어요. 그런 걸 고민하기 전에 사회에서 제 얼굴과 몸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읽어냈기 때문에, 제가 어떤 몸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 과정에서 제 인생은 이만큼 흘러왔고, 그동안 저는 제 몸을 마구 썼어요. 아끼지 않으며 쓰다 보니 어느 순간 아프고 약해졌죠. 그래서 이렇게 죽어야 하나 싶기도 했는데, 계속 살기로 한다면 이 몸으로 살아야 하잖아요?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제 몸을 인지하게 됐어요.
이전에는 사랑하고 연애해도 수치스러운 일이 없었어요. 저도 제 몸을 버려둔 상태였고 누군가를 만나서 무슨 짓을 하든 당하든 당연히 제 몸 안에 무언가 쌓였을 텐데, 그걸 들여다보고 고민할 여유 없이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까 생각이 마비된 상태로 긴 시간을 지나온 거예요. 그러다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이 이어졌고, 저 역시 병에 걸리면서 선택의 기로에 섰어요. 제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마음과 동시에 누군가를 향한 끌림이 생겨났고요. 그렇게 〈셰임〉이라는 곡을 쓰게 됐어요.
고통도 동반되었네요.
『기타를 작게 치면서』가 세상에 나온 지금 이 시점에 새 공연 일정도 재개돼 정말 바빴어요. 그래서 책이 출간된 기분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요. 일이 겹쳐서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공연 준비도 만족스럽게 진행되지 못했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해보는 리허설을 런스루라고 하는데, 그걸 한 번도 못 한 거예요. 공연 전 연습으로 합주를 네 번 했는데 내내 안 맞았고, 공연 전날까지 런스루도 못 하고… 이 미진함의 책임은 제게 있으니 이걸 채워내느라 제 개인 연습도 제대로 못 했고요. 심지어 가사를 다 못 외운 곡도 있었거든요. 그러니 너무너무 불안한 상태에서 공연 날이 임박했는데,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일단 욕조에 들어갔어요. 힘들면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몸을 뉘거든요, 저는. 그때 처음으로 『기타를 작게 치면서』를 쭉 읽었어요. 그러고 났더니 마음이 내려놔지더라고요. ‘그냥 망했다고 생각하자. 살아 있는 게 어디냐.’(웃음) 책을 읽는 내내 살아 있음에 감사하자 싶어졌어요.
이 책에 살아내기 위한 분투가 가득 담겨 있으니까요.
그러니까요.(웃음) 아시다시피 최근에 저는 대만 활동을 늘리고 있어요. 대만은 일단 동성혼 합법화가 된 나라답게 길거리에 헤테로가 귀할 정도로 동성 커플들의 애정 행각이 정말 많이 보여요. 남녀 커플이 돌아다니면 오히려 관광객인가 생각할 정도죠. 그런데 한국을 보면, 여전히 너무 많은 게 비틀린 사회잖아요. 퀴어가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죠. 또 대다수 퀴어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그 때문에 스스로 대차게 꼬여 있고요. 자기 혐오로 똘똘 뭉친 이들 각자의 문제도 심각한데, 게이와 레즈비언 커뮤니티는 쉽게 융합이 안 되고요. 이런 사회적 맥락에서 제 정체성을 드러내는 활동을 하니 해외에서 보기엔 제가 어떻게 이러고 사나 싶나 봐요. 그래서 취재 요청을 정말 많이 받아요. 정작 한국에서는 제가 하는 일이 촘촘하게 알려지지 않았고 큰 관심도 못 받는데, 올해만 해도 네덜란드 방송국에서도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왔고, NHK와도 인터뷰를 했고, 이달엔 CNN과 인터뷰도 잡혀 있어요.
이들과 이야기하다가 저는 막 울어요. 왜냐하면 그들 사회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여기에는 없을 뿐 아니라 자기 존재에 수치심을 느끼고 또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 때문에 죽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이 얘기에서부터 출발해 인터뷰를 하다보면 한이 맺혀서 절로 오열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 얘기를 듣던 대만 친구가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그럼, 넌 뭘 하는 사람인 것 같아?" 제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생존하는 게 직업이야.” 한국 사회에서 제가 다루는 이야기들은 존중받거나 추앙받기 어렵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 자체에 집중하는 게 우선이거든요. 살아 있기 위해서, 죽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일이 제 일이라는 생각에 이르니 생존이 일로 느껴졌어요. 그래서 콘서트 전날에 “여러분, 제가 살아 있는 걸 보세요” 하는 마음이 됐어요. 그렇게 이틀 공연을 하고 났더니 하혈을 한 거예요. 다음날 링거를 맞으면서 이 공연을 이번 주 일본에서 또 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트위터에 일본어로 "저는 생명을 불태워서 공연을 하기 때문에 제가 죽기 전에 공연을 보시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썼어요.(웃음)
“언젠가 다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만들자.”
아마도 그런 이야기들로 빼곡할 이랑의 수첩 이야기도 해볼게요. 책 곳곳에 이랑의 메모들이 삽입되어 있어요. 막막한 외침, 그럼에도 귀엽고 위트 있는 그림, 정제되지 않은 문장들… 수십 권에 이른다는 이 수첩들을 편집부에 다 전달하셨던 걸까요? 이 비밀스러운 걸 내보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았거든요.
그럼요. 당연하죠. 절대 공개할 수 없는 수첩들이에요.(웃음) 이 작업은 편집부와 함께했어요. 다 같이 책상 앞에 모여 앉아 제가 공개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보여드리면 촬영하는 방식으로 작업했어요. 아마 공개한 페이지는 다 합치면 50페이지 정도 될 것 같아요.
“언젠가 다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만들 것 같다”(209쪽)라는 말이 좋았어요. 이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는 어떤 노래를 만들게 될까요?
주문 같은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그동안 발표한 제 노래 중엔 따라 부르기 어렵고, 가사도 많고, 예술적인 것들이 있는데요. 물론 〈늑대가 나타났다〉 덕분에 민중 가수라는 이름을 얻게 됐지만, 이 노래도 어렵거든요. 아마 저 말고는 아무도 못 외울 것 같아요. 여러 날 고민해봤는데, 〈구지가〉처럼 구전으로 전해져서 어떤 사회에 변화를 촉발하는 노래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목표를 갖게 됐어요. 누군가 듣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으면서도, 그 노래로 인해 어떤 변화가 생기는 그런 주문 같은 노래를요.
진짜 마녀가 되는 길인데…
(웃음). 또 다른 방향으로 고민 중인 것도 있어요. 대만 가수와 함께 만든 곡이 있는데, 그 노래가 “고유한 삶”이라는 말로 끝나거든요. 그 대만 친구가 ‘삶’이라는 말과 소리가 너무 좋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한국어에 대해 새롭게 공부해 봤는데요. 한국인이 쓰는 말은 한국어와 한자어가 뒤섞여 있는데, 고유 한국어가 30% 정도 차지한다는 거예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지하고, 한국어를 곰곰이 들여다보니 한자어로 만들어진 단어와 달리 몸, 잠, 배움 같은 단어들을 보면 몸이 울리는 소리로 끝나는 규칙 같은 게 있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고유 한국어는 명사화될 때 자음 ‘ㅁ’을 종성으로 주로 쓰는 것 같아요. 그리고 ‘ㅁ’은 울림소리고요.
새삼 정말 좋은 거예요, 우리말이. 같은 뜻이지만 한자어와 우리말 생김새가 다르잖아요. 지식과 ‘배움’, 신체와 ‘몸’, 인생과 ‘삶’처럼요. 그렇게 새롭게 우리말을 인지하게 되면서 제 노래 중에 이와 비슷한 울림소리가 담긴 게 있는지 찾아보니 〈삶과 잠과 언니와 나〉가 있더라고요. 저는 이런 게 참 재밌어요. 이런 걸로 무언갈 만들어볼 궁리를 하는 거요. 제게 이런 재료가 주어졌으니 저는 이를 이용해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나아가 그 노래가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힘을 지녔으면 좋겠고요.
뭔가 기대가 되는데요.
이런 게 진짜 재밌죠. 이런 걸 할 수 있는 직업이잖아요.
지난 2월 EBS 『공감』 ‘20주년 기념 특별기획 - 2000년대 한국대중음악명반 100 시리즈’에 출연했어요. 무려 “명반 특집”이에요.
무려 두 개(『신의 놀이』, 『늑대가 나타났다』)나 뽑혔고요.(웃음)
이런 일은 이랑에게 좋은 일인가요?
저에게 좋은 것보다는 저 외의 사람들에게 좋은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받는 특별한 영향은 없거든요. 다만 수상 같은 타이틀이 좋은 건, 저를 인지하는 데 발판 역할을 해주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낯설거나 모르는 것에 대한 경계가 심하잖아요. 특히나 제가 다루는 작업 자체가 접근성이 좋은 편은 아니니 이런 타이틀은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를 향해 오는 징검다리 역할로서요.
이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다음을 꾸준히 기대해 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라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네. 왜냐하면 저는 이 일이 너무 재밌거든요. 그런데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는데, 아무도 안 봐주고, 기대도 안 해준다고 하면 진짜 슬플 것 같아요.
어려운 시절을 지나 이랑이 비로소 본격 재가동하는 시기입니다. 계속해서 다음 행보가 예고돼 있고, 새로이 쉼 없는 활동을 기대케 해요. ‘그동안 이랑 없이 어떻게 지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만큼 이랑의 새로운 창작물을 많이 접하던 때가 있어서 이런 감각을 얻는 것 같아요.
그동안 일을 과하게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래서 병에 걸렸나 봐요.
그래, 맞아요. 몸을 아껴야 하죠. 지속 가능하려면요.
이제는 눈도 진짜 안 보여서 입으로 쓰거든요.
저도 노안이 엄청 심해졌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같은 또래이기 때문에…
그게 사실 저는 희귀병 진단을 받고…
아...!
수술도 여러 번 했는데 시력 교정이 안 된다고 해요. 병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에서 수술했고, 지금도 전반적으로 뿌옇게 보이고, 가깝고 작은 것은 당연히 안 보이고, 멀리 있는 것도 안 보여요. 시력이 정말 박살 난 거죠. 그래서 입으로 초고를 쓰게 됐어요. 음성 인식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하는 건데, 익숙해지니 신세계예요.(웃음)
또 다른 변화에 맞서 정면 돌파하고 있었네요.
진단명이 나오기 전까지는 진짜 화가 많이 났거든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했는데, 수술하고 나서는 ‘실명하지 않아 다행이다’의 마음이 되었어요. 양쪽 눈이 다 그런 상황이라 지금 일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입으로 글쓰기’는 이제 타자 치는 것보다 더 재밌고 편해요. 다만 시작이 좀 힘들어요. 왜냐하면 말 그대로 글이니까 문어체로 써야 하잖아요. 그래서 문어체를 발화한 걸 스스로 듣는 순간 소름이 끼치고 미칠 것 같아요. 처음 그 말을 내뱉을 때가 진짜 충격이에요. 이건 해봐야 알아요. (웃음) 이제는 이 방법에 익숙해지고 나니, 산책하면서 글 한 편을 뚝딱 쓸 수 있게 됐어요.
그렇게 쓴 글들이 차곡차곡 쌓여 세상을 만납니다. 이 책에도 그렇게 쓴 글들이 몇 편 실려 있을 테고요. 이 이야기가 어떤 분들에게 가닿기를 바라셔요?
모르겠어요. 그저 되도록 많은 분에게 닿았으면 좋겠어요. 정말 많은 분에게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기타를 작게 치면서
출판사 | 아침달
H마트에서 울다
출판사 | 문학동네

염은영
읽고 쓰고, 엮고 매만집니다. 만든 책으로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가 있습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