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현의 기원전 산책
[정기현 칼럼] 선사인과 시간 여행
10년 전 소설 습작을 하던 정기현 작가는 카페 창밖으로 우연히 맘모스를 보았습니다. 맘모스는...선사문화축제 퍼레이드 행렬에 참여 중이었죠. 올해 정기현 작가는 직접 선사문화축제 퍼레이드에 참가하며 일종의 시간 여행을 합니다.
글: 정기현
2025.10.30
작게
크게

 

졸업 후에 긴 여행을 가고자 6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으던 시기가 있었다.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동네 카페 네 곳을 돌며 책을 읽고 빵을 먹고 소설을 썼다. 번갈아 가던 카페 네 곳은 저마다 분위기가 무척 달랐다. 들어가자마자 사장님이 알은체를 해 오는 집 근처 작은 카페. 교회 근처 식물이 많은 중간 크기의 카페. 갈 때마다 요거트스무디를 먹었던 스터디카페. 마지막으로 두 면이 통창으로 되어 있는, 사거리 대형 카페.

 

대형 카페에 가면 창가에 앉아 이런 생각을 한다. 카페를 나가 직진을 하면 한강에 갈 수 있고 오른쪽으로 걸으면 선사유적지에 갈 수 있다. 한강에 가면 커다란 물이 있고 억새가 있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있다. 선사유적지에 가면 수십 그루의 수양버들이 있고 신석기 시대 움집들이 있고 움집 안에서 불을 피우는 선사인의 모형들이 있다. 그곳에 가면 마음이 엄청 시원하겠지? 노트북을 이고 진 채 실제로 한강이나 선사유적지에 가는 일은 드물었지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든든하기도 하였다.

 

그 시절을 돌아보자면 이상하게 늘 심각하고 진지했던 것 같다. 쓰던 소설도 이런 내용의 것들이었다. 여행 중 국경을 넘는 야간 버스를 탄 주인공. 사고를 당했는데 눈 떠 보니 천국이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젤리처럼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뭉쳐진 채 느리게 흘러다니고, 그 덩어리는 부침개처럼 납작해지더니 잘게 찢어져서는 마지막으로는 빛이 된다는 결말……. 당시 내가 쓴 것 중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여기던 소설이었지만 글을 보여 주는 친구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언젠가는 그런 글을 쓰고 읽으며 또 하루 창문 앞자리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창밖으로 맘모스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내가 한강이며 선사유적지며 상상으로만 가던 사이 대체 무슨 일이……. 간다 간다 마음만 먹고 도통 가지를 않으니 이제 선사시대가 내쪽으로 걸어오는구나. 맘모스 뒤에는 정체 모를 거대 동물들이 뒤를 이었고 구름 같은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선사유적지에서 해마다 개최하는 축제 시즌이었던 것이다. 

 

창밖으로 맘모스며 선사인들이며 6천 년 전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는데 카페 안의 사람들은 무심히 자기 할 일을 했다. 창문에 붙어 행렬을 구경하거나 뛰쳐나가 행렬에 동참하거나 하지를 않고. 나는 난데없는 퍼레이드에 무척이나 흥분하였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리를 지켰다. 다만 카페를 지나 사라지는 행렬을 눈에 꼭꼭 담아 두었다. 선사유적지 축제야 어린 시절 가족들과 몇 번 가 본 적이 있지만 그때는 포장마차에서 음식을 사 먹거나 초청 가수들의 공연을 보거나 했던 것이 다였다. 이런 퍼레이드라니, 알았더라면 시간을 빼 구경을 갔을 테다.

 

올해는 1925년 선사유적지가 발견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퍼레이드가 재개되는 첫 해이기도 하다. 선사문화축제는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 나는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미리 적어 두고(10월 18일 토요일 오후 4시) 30분 전부터 퍼레이드 기점인 신암초등학교로 가 기다렸다. 선사인 분장을 한 사람들이 거리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었고 자리를 잡고 잠시 서 있자 곧 부족 소개가 시작되었다. 강동구에 속한 모든 동을 물, 불, 흙, 바람 네 개 부족으로 나누어 동 이름을 호명하면 역시 각자 해석한 선사인 복장을 입은 축제 참여자들이 춤을 추며 등장하였다. 사이사이 맘모스며 코뿔소며 여전히 이름 모를, 주작을 닮은 새와 같은 거대 동물 모형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삼바 축제 복장을 한 사람들과 젬베 공연팀과 군악대는 행렬 맨 앞에서 대기하였다. 그리고 곧 이 모두가 섞여 든 덩어리 같은 행렬이 행진하기 시작하였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선사유적지까지 행진하는 동안, 10년 전 창문을 통해 퍼레이드를 보았던 카페 자리를 지나게 되었다. 카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수협은행이 들어와 있었으나 나는 선사인과 걷고 있다는 기이한 감각에 힘입어 순간적인 시간 여행을 하였다. 안녕…… 10년 전의 나…… 그때의 너는 안에서 밖을 보았지만 나 지금은 이렇게 밖에 있다…… 행렬 안에 있다…… 맘모스 뒤에서 걷고 있다…… 고대 코뿔소 뒤에서 걷고 있다…… 너 그때 이렇게 걷고 있는 내 모습은 못 보았겠지……. 퍼레이드와 함께 덩어리져 있던 행인들은 서서히 사이를 넓히더니 점이 되어 제 갈 길을 갔다. 나 역시도 그러하였다.

 

그런데 올해가 선사유적지 발견 100주년이라. 유적지가 1925년에 발견되었다니 왜인지 기시감이 든다. 우리역사넷에 접속하여 찾아보니 선사유적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으며, 1971년부터 1975년 사이 국립중앙박물관의 본격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1979년에는 대한민국 중서부 지역 신석기인의 삶을 보여 주는 주요 유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267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다만 신석기시대 유물뿐만 아니라 백제시대 유물도 함께 발견되었기에 선사유적지 대신 ‘서울 암사동 유적’을 공식 명칭으로 하였다고. 

 

응? 을축년 대홍수와 백제대 유물? 알고 보니 서울 암사동 유적은 기원전 산책 1화에서 다루었던 풍납동토성과 함께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발굴 동기였던 것이다. 을축년 대홍수가 잠들어 있던 과거의 시간들을 얼마나 많이 깨운 것인지. 강동구 일대를 돌아다니며 유적들의 볼기짝을 철썩철썩 때려가며 일어나 학교 갈 시간이다— 하기라도 했던 걸까. 

 

선사인과의 시간 여행. 10년 사이 새로 알게 된 것도 잊어버리고 만 것도 여전한 것도 또 그만큼 변한 것도 있다. 당연한 생각.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0의 댓글
Writer Avatar

정기현

2023년 문학 웹진 《Lim》에 「농부의 피」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걷고 뛰고 달리고 나는 존재들이 등장하는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