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1견 가구인 우리 집에서 테리어 믹스 아로하는 산책 팀장을 맡고 있다. 돈을 벌고 차도 운전하고 요리, 빨래, 청소를 하는 나는, 산책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팀의 수장이다. 그러나 둘의 생활에서 산책은 나머지 카테고리를 다 합친 것만큼 중요하다. 가령 아로하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도, 내가 원고 쓰기를 서둘러 해치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산책을 최고로 만끽하기 위해서니까. 산책이야말로 도구적 시간이 아니라 삶 자체와 가장 유사한 자족적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아로하의 산책 팀장 자격에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일단 체력과 활기에 있어 아로하가 압도적이다. 나의 무기력한 성품을 평생 구경해 온 친구는 우리집을 방문할 때면, 두 식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혀를 차곤 한다. “어느 모로 보나 아로하가 나가서 돈을 벌어오고 네가 집에서 쉬어야 하거늘.” 둘째로 이 개는 어찌 된 일인지 10년 이상 같은 행정구역에 거주했고 구글 맵을 휴대폰과 시계에 설치해 놓은 나보다 길눈이 밝다. 이 재능을 처음 깨달은 것은 불규칙하게 가지 친 골목을 따라 아로하한테 멋모르고 끌려가다 보니 자주 들르던 빵집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 날이었다. 아로하는 익숙한 경로를 역순으로 찾아가는 데에 머뭇거림이 없고 심심하면 응용력을 발휘해 새 지름길을 발명한다. 생전 처음 간 도시에서도 이틀째면 앞장을 선다. 구획이 불분명한 난지천 공원 같은 장소에서도 ‘네비개이터‘는 위풍당당하다. 심지어 인간이 만든 교통 체계에도 꽤 적응했다. 신호등의 파란 불, 빨간 불을 위치로 구분하는 걸 깨우치더니, 이제 사거리에 다다르면 어느 차로의 차들이 몰려가고 난 뒤 우리가 건널 차례라는 걸 알아 멀리서부터 걸음을 재촉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오토바이에 놀라면 등에 대고 왕왕 짖어 항의하지만, 버스가 다가오면 슬쩍 내 뒤에 숨어 강약약강의 마음가짐을 들키기도 한다. 나는 모른 체 해준다.
나의 첫 개 수지는 장수했지만 산책을 자주 하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개의 생애에서 산책이 갖는 중요성에 무지한 시기였다. 게다가 20대 초반의 나는 더 중요하다고 믿는 세상 일이 많기도 해서 스스로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 바빴다. 결국 우리 가족은 수지의 산책이라 하면 주로 슬픈 기억을 갖게 됐다. 처음 계단 앞에 멈춰서서 안아 달라고 올려다보던 시선, 한강 둔치에서 엄마가 반환점을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주저앉던 포즈 같은 것들이 가슴에 사금파리처럼 박혀있다.
세대주로 독립해 처음으로 입양한 타티는, 인간에 대해 체념한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숲길 공원의 억새 풀밭 앞에서 처음으로 세모입을 하고 웃었다. 이 모습은 다행히 사진으로 남아있다. 소위 인간 기준으로 볼 때 영리한 개, 인간의 의사를 빨리 이해하고 동조하는 개였던 타티는 입양 이틀 만에 산책 기미가 보이면 리드 줄을 물어와 놀라움을 자아냈다. 한편 아로하로 말하자면 산책의 낌새를 알아채자마자 장난감 바구니를 헤집어 삑삑이를 귀청 떨어지게 연주하고 인형을 물고 흔들다가 내 앞에 패대기친다. 타티의 줄 배달이 산책 채비 시간을 줄여주는 합목적적 행동이라면, 기분에 충실한 아로하의 그것은 산책 준비를 방해한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논리일 뿐. 아로하에게는 자축 세레모니가 우선이다. 말하자면 아로하는 이미 산책을 시작한 것이다. 아로하가 내게 오고 나서, 나는 곰 푸우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퍼 로빈의 마음을 이해한다. “이 바보 녀석!” 하는 소년의 다정한 핀잔에는 엷은 존경도 들어있음을 안다.
개와 인간의 산책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예전의 나는 산책에 필수적인 개의 목줄과 몸줄에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자유롭게 뛰어야 할 개를 노예처럼 묶어 다니는 것 같았고 주종 관계가 연상됐기 때문이다. 개와의 생활에 조금 이력이 붙은 지금은 달라졌다. 줄은 불가피하게 인간 위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반려견을 보호하는 도구다. 사람도 줄을 당기고 놓아 의지를 표현하지만, 개도 반려인과 줄을 통해 소통한다. 타티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은 이후, 매일 산책이 마지막이 아니길 기도했던 나는 산책하는 도중 눈물로 앞이 흐려지곤 했다. 뿌연 시야에 보이는 붉은 줄은 나와 타티를 연결하는 운명의 실처럼 보였다. 타티를 여의고 내게 온 명랑 소녀 아로하는 줄에 대한 발상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 아로하는 줄이 없으면 외출을 거절하는데 가만히 보면 자기가 줄을 묶어 나를 데리고 다닌다고 여기는 것도 같다. 산책을 완수하고 집이 가까워질 때 아로하의 피날레 세레모니는 줄을 입에 물고 펄쩍펄쩍 뛰며 남아있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다. 아로하에게 줄은 구속이 아니라 장난감의 하나다.
산책 팀장과 팀원의 일과로 돌아가 보자. 아로하 팀장은 매일의 산책 경로 결정권을 갖는다. 3년간의 데이터를 종합하면 패턴이 있다. 날씨가 온화한 기간에는 다양성 위주로 코스가 안배된다. 어제 대학가 쪽으로 갔다면 오늘은 시장으로, 내일은 공원 노선을 택한다. 각각의 길에서 아로하를 반겨주는 이웃 휴먼들을 챙기는 결정인지도 모른다. 산책 구역은 3,4개의 광역으로 나뉘는데, 흥이 오르면 A+b, B+c처럼 변형 확장판도 등장한다. 기본형에서 확장판으로 은근슬쩍 넘어갈 때는 여러 기교가 동원된다. 풀 냄새 맡는 시늉하며 모퉁이 돌기, 이웃 친구 개를 만나 인사하는 척하며 방향 전환하기 등등.
혹한이나 무더위에 흙과 풀이 있는 공원 노선이 선호되는 건 당연하다. 한데 아로하는 날씨 외의 변수도 접수한다. 팀원이 바빠서 심야에야 겨우 산책에 나서면 팀장님은 짧은 코스를 잡는 배려로 감동을 준다. 일과 일 사이에 의무방어적 산책을 하는 경우에는 인간의 초조함을 냄새 맡기라도 하는지 기어를 바꿔 빨리 걷고 용변을 초반에 완료한다. 아로하는 길눈도 밝지만 요일 감각도, 주간지 퇴사 후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반려인을 앞지른다. 특히 순대 트럭이 오는 월요일, 주 3일만 영업하는 정육점이 여는 날이면 귀신같이 그쪽으로 기수를 향한다.
얼마 전 산책팀장 아로하는 직권을 남용해 “걷다가 벤치가 나오면 팀원이 간식 한 개를 팀장에게 증정한다”는 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서울에 벤치가 얼마나 많은지 아시는지? 나도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세상만사가 그렇지만 개와 인간의 산책도 상당히 불공평하다. 점점 길어지는 여름과 겨울에 산책을 나갈라치면 인간은 많은 정보와 장비를 갖춰야 한다. 최고 기온과 최저 기온, 강수 확률, 미세먼지 농도를 검색할 뿐 아니라, 수시로 창밖을 기웃거리며 비나 눈이 멎는 틈새를 포착해야 한다. 방한화, 미끄럼방지 밑창, 마스크, 장갑, 핫팩, 귀마개, 썬캡, 이어폰, 폰, 반려견 패딩, 반려견 쿨링 스카프, 물통, 야광 램프, 간식, 우비, 경량 우산, 무릎 보호대, 손목 보호대, 해충기피제, 배변 봉투, 봉투 거치대 등등이 인간의 준비물이다. 반면 개는 이처럼 부산을 떠는 인간을 멀뚱히 바라보다 달랑 몸만 챙겨 현관으로 가면 끝이다. 억울하다.
그럼에도 불평할 수 없다. 개와 사람이 함께 하는 산책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특별함은 죄다 개의 천품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개와 함께 걷는 나는 더 주의 깊고, 재빠르고, 넓게 본다. 더 잘 웃고 친절하고 누군가를 도울 준비를 갖춘 사람이 된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김혜리
테리어 믹스 아로하 샨티 킴과 서울에서 살고 있다.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 <조용한 생활> 운영. 『묘사하는 마음』,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림과 그림자』 등을 썼다.
![[이길보라 칼럼] 아기와 산모를 둘러싸고](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0/20251028-7260d538.jpg)
![[김미래의 만화절경] 어제 뭐 먹었어?](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0/20251027-5031a641.png)

![[에디터의 장바구니] 『과학하는 마음』 『영릉에서』 외](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0/20251022-a6af176f.jpg)
![[김혜리 칼럼] 개론](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0/20251001-77bb7701.jpg)
kysong96
2025.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