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형 연출가의 생존기: 장르는 넘으라고 있는 것>
11월의 이야기: 창작 환경과 창작지원사업, 그 사이 어딘가
2009년 2월, 연극 연출가로 데뷔한 이기쁨은 올해로 16년째 ‘창작집단 LAS’를 이끌고 있다. 연극, 국악 극, 아동극, 뮤지컬, 콘서트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만들어온 그는, 그 어떤 한 분야로도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연출가다. 이기쁨 연출이 이처럼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생계형 연출가’로서의 현실 때문이다. 생활인으로서의 생존, 극단 대표로서의 책임, 그리고 연출가로서 작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삶이 얽히고설켜 고단한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주어진 작업을 하나하나 해나가다 보니, 어느새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필모그래피가 쌓여갔다. 화려한 능력으로 쌓아 올린 결과라기보다는,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행보였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성격은 이런 여정을 가능하게 했고, 그 속에서 이기쁨만의 배짱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금부터, 이렇게 고군분투하며 버텨온 이기쁨 연출가의 ‘생존기’를 매달 장르별로 하나씩 살펴보자.

사진: 아이스톡
나는 아직도 아날로그가 더 익숙한 사람이라 한 해가 시작할 때 늘 스케줄러를 사서 수기로 스케줄을 쓰며 관리한다. 바쁘게 사는 덕에 스케줄러는 늘 빼곡하다. 하지만 요즘은 공연과 연습 일정보다 각종 지원사업 공모 마감일이 더 자주 스케줄러를 채운다. 창작자라기보다 지원서 작성자에 가까운 하루. 내년을 살아내기 위한, 작지만 절실한 몸부림의 시기다. 살아가면서 경쟁의 구도에 놓이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해마다 꼬박꼬박, 복사해서 붙여넣기도 안 되는 각양각색의 지원서를 20년 가깝게 쓰다 보니 이골이 날 만도 하다. 하지만 늘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지원사업 공모부터 정독을 한다. 뭐라도 놓칠세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읽는다. 그렇게 공모 안내를 살피다 보면 ‘창작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말을 굉장히 자주 보게 되는데, 가끔은 그 환경이 창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사업을 위한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창작 환경 조성’이라는 문장은 듣기에는 안전해 보이지만 그것이 곧 ‘삶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창작을 둘러싼 조건은 분명 나아졌지만, 창작자의 삶은 여전히 그 안에서 흔들리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처음으로 ‘창작지원사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던 내게 그것은 세상을 여는 마법 같았다. 서류 몇 장과 포트폴리오만으로도 누군가가 내 작업을 ‘믿어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원’이라는 것은 그 당시 정말로 나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세상이 나를 향해 내민 손 같았으니까. 그 시절의 지원금은 지금 돌아보면 아주 적었다. 하지만 그땐 그것이 전부였다. 그 돈으로 조명 장비를 한 대 더 빌리고, 공연장을 하루 더 대관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이 작품은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건 단순한 금전적 도움 이상의 의미였다. 시간이 흘러, 나는 여전히 ‘창작지원사업’ 안에서 작품을 만든다. 제도의 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 버티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예전엔 적은 금액도 가능성을 비추는 불빛이었는데 지금은 훨씬 큰 지원도 어쩐지 숨이 차다. 아마도 제도가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이리라. ‘지원’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같은 뜻을 품고 있지만 이제는 그것이 단순한 도움을 넘어 ‘예술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를 묻는 질문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수많은 신작이 공공지원의 틀 안에서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유통된다. 작품의 형식, 예산의 구성, 협업의 방식까지 제도의 언어에 맞춰진다. 어느새 창작의 문법이 행정의 문장 속에서 조심스레 다듬어지고 있다.
얼마 전 ‘연극·뮤지컬 창의인재사업’ 멘토링에 다녀왔다. 젊은 창작자들의 눈빛은 여전히 반짝였다. 그 눈빛을 보면 내가 처음 연출을 시작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비가 새던 연습실에서 밤을 새우며 ‘세상을 바꿀 이야기’를 꿈꾸던 그때의 나처럼, 의지와 호기심이 충만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도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보다 ‘어떻게 뽑힐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하고 있었다. 지원서가 작품보다 먼저 완성되어 있는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창의인재사업은 분명 소중한 제도다. 누군가의 첫 무대와 첫 협업, 첫 실패를 가능하게 하는 자리니까. 다만, 그 자리가 점점 ‘심사 기준표’로 둘러싸이게 된 현실을 떠올리면 마음이 조금 무거워진다. 창작을 돕는 시스템이 어느 순간 창작의 방향을 정해주는 구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창의성’이 점수가 되고, ‘예술적 완성도’가 항목이 되었다. 창작의 다양성은 여전히 강조되지만, 현장에서는 오히려 비슷한 문장과 비슷한 주제가 늘어난다. 창의인재사업이 작품을 개발하고 창작자들의 첫 발걸음을 지원하는 사업이라면, 그 외에도 수많은 지원제도가 존재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공연예술 지역유통 지원’,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창작활동지원’, 그리고 각 지방문화재단의 다양한 레지던시 프로그램들. 이름도 다양하고, 대상도 세분화 되어 있다. 어떤 사업은 완성된 공연을, 또 어떤 사업은 창작 과정이나 개발 단계를 지원한다. 이 제도들 역시 분명 창작자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현장의 감각으로 보면, 서로 다른 이름 아래 비슷한 구조가 반복된다. 프로젝트 단위의 예산, 단기 성과 중심의 보고, 해마다 달라지는 평가 지표. 덕분에 창작자들은 매년 ‘사업의 언어’를 새로 익혀야 한다. 어떤 해에는 ‘혁신’, 그다음 해에는 ‘포용’, 또 그다음에는 ‘지속가능성’이 핵심 단어가 된다. 그러다 보면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보다 ‘지금 어떤 단어가 유효한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지원 가능한 예술’의 범주 안에서만 상상하게 되는 습관. 제도의 다양성이 반드시 예술의 다양성을 보장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어쩌면 가장 조용한 형태의 검열일지도 모른다. 지원사업이 많아진 것은 분명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만큼 ‘예술의 문법’보다 ‘행정의 문법’이 앞서게 된 것도 사실이다. 창작의 시간은 줄고, 행정의 시간이 늘어났다. ‘창작 환경이 좋아졌다’는 말은, 어쩌면 예술가가 행정적으로 더 능숙해졌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리허설 중간에 지출 내역서를 확인하고, 회의 중에 온라인 지원서를 업로드하며, 창작의 완성보다 증빙의 완벽함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이제 예술가는 ‘창작자’ 이자 ‘행정 담당자’, ‘회계 관리자’, ‘자기 홍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어느새 우리는 ‘창작노동자’이자 ‘창작서류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요즘의 나는 창의인재사업의 멘토, 또는 지원사업의 심사 위원으로서, 그리고 여전히 지원서를 써야 하는 연출가로서 그 자리들을 오갈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자주 돌아보게 된다. 멘토로서 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연출가로서는 “결과가 없으면 다음 지원이 어렵다”는 현실을 알고 있다. 이 모순된 두 언어 사이에서 예술가는 늘 균형을 잡으려 애쓴다. 제도는 분명 필요하지만, 그것이 예술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창작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시스템이 마련된 건 사실이지만, 그 환경이 ‘예술가를 위한 것인지’ 혹은 ‘사업의 효율을 위한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지원은 늘었지만, 창작의 자유는 여전히 불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은 살아 있다. 좁은 연습실에서 새벽까지 노래를 맞추고, 작곡가는 건반 위에서 악보를 고쳐 쓰며, 연출은 텅 빈 무대를 상상으로 채운다. 불안함 속에서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실험을 반복하며 작은 성공과 실패를 함께 겪는 동료들의 존재는 가장 큰 힘이 된다. 오래된 지하 연습실의 냄새나 어둑한 조명, 건반 하나가 망가진 피아노조차도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배움과 위로의 공간이 된다. 멘토링 자리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창작자들에겐 어떤 창작 환경이 좋은 환경일까요?” 나의 답은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좋은 환경은, 내가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환경입니다.” 이 답은 나 스스로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진짜 창작 환경은 제도나 예산의 문제를 넘어, 한 사람의 창작자가 자기 언어로 숨 쉬며 서로에게 기대며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대단한 최신식 극장일 필요도 없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웃고, 함께 버티는 동료들이 있는 곳이 바로 좋은 창작 환경이라 생각한다. 그 속에서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의 시선과 경험과 맞닿으며 조금씩 구체화 되고, 미숙했던 생각도 서로의 손을 빌려 살아난다. 때로는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때로는 실패가 반복되지만, 그 과정 자체가 또 다른 배움과 가능성을 만든다. 불편함과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이 더 이상 창작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긴장과 몰입이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 작은 품 안에서 우리는, 제도가 요구하는 틀과 평가 기준표를 잠시 내려놓고 오롯이 작업에 집중할 수 있다.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서로의 리듬을 맞추며, 함께 상상하고, 또 함께 무대 위로 옮기는 경험이 쌓여간다. 그 안에서 환경은 더 이상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장이 된다. 창작 환경은 제도의 규모나 지원금의 크기로만 측정되지 않는다. 한 명의 창작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다른 이와 마음을 나누며,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순간마다, 그 환경은 충분히 ‘좋은 환경’이 된다.
나는 오늘도 또 하나의 지원서를 쓰면서 마음속으로 나의 동료들을 떠올린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만든다.’ 불완전하지만 살아 있는 환경, 부족하지만 서로를 믿고 기대는 환경.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되고 작품은 조금씩 빛을 얻는다. 아마도 이것이, 생계형 연출가가 살고 있는 창작의 현실이자, 동시에 가장 든든한 생존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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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쁨 (연출가)
공연 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