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적 자연주의자
‘자연주의자’ 다이앤 애커먼의 책들 또한 직간접으로 생태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때론 은근히 겁을 주면서 말이다.
2005.10.01
작게
크게
공유
얼마 전 환경에 관한 책을 몰아서 훑어볼 기회가 있었다. 행정자치부가 지원하는 시민단체 활동 프로그램의 하나로, 사단법인 ‘환경과 생명’이 시행하는 환경 책 서평집 발간과 보급 사업에 실행위원 및 서평자로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필자가 리뷰를 맡은 환경 책 17권 중에는 이미 읽은 것도 있었지만, 이번에 처음 접한 책이 약간 많았다.
10여 권의 환경 책을 새로 읽으면서 생태?환경 위기의 심각성을 다시금 절감했다. 그런데 지구의 앞날도 불투명하긴 하지만, 인류의 미래는 암담하기 그지없다. ‘자연주의자’ 다이앤 애커먼의 책들 또한 직간접으로 생태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때론 은근히 겁을 주면서 말이다.
‘애커맨’이 『내가 만난 희귀동물(The Rarest of the Rare)』(강미경 옮김, 세종서적, 1996)의 서문에서 인용한 폴 에를리히의 비유만 해도 그렇다. (Diane Ackerman의 우리말 표기는 번역서마다 약간 차이가 난다. ‘다이앤 애커먼’으로 통일되는 추세이긴 하나, 여기서는 개별 단행본의 이름 표기 방식을 존중하기로 한다.) “어느 한 종을 잃는다는 것은 비행기 날개에 달린 나사못을 뽑는 것과 같다.” ‘애커맨’의 부연 설명이 이어진다.
“날개의 나사못을 몇 개 뽑는다고 해서 그 비행기가 반드시 추락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행기가 추락하려면 얼마나 많은 나사못을 뽑아야 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기꺼이 그 비행기에 타려는 기술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1백 개 정도까지는 커다란 부담 없이 뽑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나사못과 그렇지 않은 나사못을 신중하게 고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하나를 더 뽑을 경우, 비행기가 곤두박질 칠 시기는 과연 언제일까?” 아무튼 “우리는 회복이 불가능한 시점이 언제 닥칠지도 모르면서”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갉아먹고 있다.” 이 책은 그녀가 희귀 동물과 생태계를 조사하기 위해 세계 여러 지역을 탐사한 결과물이다.
수많은 동식물이 씨가 마를 위기에 놓여 있다. ‘애커맨’이 멍크물범, 짧은꼬리알바트로스, 황금사자타마린원숭이 등 개체 수가 급격히 준 동물 세 종, 아마존 지역과 플로리다 관목림의 위험에 처한 생태계 두 곳, 그리고 왕나비의 집단 이주 현상에 초점을 맞춘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생태?환경 위기가 심각하게 드러난 현장이 너무 많아 다 둘러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생명의 다양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서, 가능한 한 많은 생명체들이 지구상에 존재하기를 바란다.” 그럼, 왜 우리는 희귀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가? 우선은 우리가 “서로에게 협조적인 생물체의 긴 대열에서 진화”한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이들 모두를 가치 있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또한 ‘애커맨’은 생물학적 다양성을 지닌 유전학적 팔레트가 “지구 생명체의 생존뿐만 아니라 우리의 건강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는 실리의 측면을 덧붙인다. “수많은 식물과 곤충, 물고기들이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완벽한 해독제를 제공하기 위해 지구상에 출현했다는” 시각을 ‘딱딱한 도덕극을 보는 관점’이라 경계하면서도, 열대 다우림의 약전(藥典)에 있는 풍부한 치유 기능을 직시한다. 이건 우리 모두가 얽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각기 다른 독립체로 바라본다. 그러나 분자 수준에서 본다면, 그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거의 없다. 그들은 동일한 재료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세포와 조직, 유동체로 이루어져 있다. 지구의 화학적 요소는 우리가 여러 가지 색소를 한데 뒤섞을 때처럼 서로를 소멸시키기도 하고, 자극하기도 하고, 중화시키기도 하고, 안정되게 만들기도 하고, 왜곡시키기도 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원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멸종 또는 그럴 위기에 처한 생물 탐사기는 드물지 않았다. 거친 구분을 무릅쓴다면, ‘애커맨’의 『내가 만난 희귀동물』은 데이비드 쾀멘의 『도도의 노래』(푸른숲)와 더글러스 애덤스의 ‘멸종 위기 생물 탐사’ 『마지막 기회』(해나무) 사이에 위치한다. 현장성이 『도도의 노래』에 가깝다면, 문학성은 『마지막 기회』에 근접한다. 『내가 만난 희귀동물』은 글발과 현장감이 균형을 이룬다.
한편, ‘동참’의 정도는 ‘애커맨’이 가장 적극적이다. “내게 있어 동참이란, 자신의 삶을 송두째 바친 과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원래의 서식지에서 사는 동물들을 목격하는 것이다.” ‘애커맨’의 적극성은,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그해 태어난 멍크물범 새끼들에게 꼬리표를 달아 주고 어미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프로젝트에서 잘 드러난다. 그녀는 멍크물범 암컷 새끼의 지느러미에 맞아 얼굴이 피와 모래로 범벅이 되면서까지 멍크물범의 유전자 분석을 위한 피부 조직 채취에 몰두한다. 그러면서도 모험가의 열정보다는 자연주의자의 성찰이 더 빛난다.
“임신한 멍크물범이 하와이 섬의 인기 있는 해변에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이 이따금씩 목격되곤 한다. 관광객들은 자기네는 몇 시간씩 일광욕을 즐기며 누워 있다가도 멍크물범이 그러고 있는 걸 보면 길을 잃었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거라고 단정을 짓고는 그들을 바다로 쫓아 버린다. 그러나 그 단순한 행동이 멍크물범과 뱃속에 든 새끼를 죽일 수도 있다.”
“잘못은 생각이 짧은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생명은 움직임이라는 암묵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다. 뭍으로 올라온 멍크물범은 이러한 신념에 따라 지나치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에 의해 죽음의 길로 내몰리기도 한다.”
“자연은 자비를 베풀지도 않거니와 아예 기대하지조차 않기 때문에 우리 같은 이른바 자연주의자들은 폭력에 단련되어 있다. 우리는 자연의 방식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원 가꾸기는 자연의 방식에 껴드는 것인가? 아닌가? 또 원예는 환경 친화인가? 반환경인가? 적어도 『나는 작은 우주를 가꾼다- 어느 자연주의자의 정원 이야기』(손희승 옮김, 황금가지, 2003)에 나타난 원예가 다이앤 애커먼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생태 친화형이다.
사실, 자연에서 생장하는 꽃과 나무를 뜰에다 가꾼다고 해서 필수지방산이 트랜스지방산이 되거나, 불포화지방산이 포화지방산으로 바뀌는 식의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니다. ‘자연을 거기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원칙을 저버리며 원석과 야생 수목으로 자신의 정원을 꾸미는 게 문제일 따름이다.
애커먼이 미 뉴욕 주 이타카에 있는 자기 집 정원의 사계를 기록한 『나는 작은 우주를 가꾼다』는 우아하고 감미로운 책이다. 움트는 새싹과 더불어 날이 풀리자 정원으로 날아드는 철새들을 봄의 전령사로 묘사한 건 좀 의외다. “제일 먼저 돌아오는 철새는 대륙검은지빠귀다.” 이 지빠귀는 때로 검은찌르레기, 탁란찌르레기, 레드윙, 러스티 등과 무리 지어 오기도 한다. 파랑새, 울새, 명금, 딱따구리, 그리고 십여 종의 물새가 지빠귀에 이어 온다.
“새들이 암컷을 유혹하고 비열하게 겁주고 별것도 없이 우쭐거린다고 표현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새들은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노랫가락을 낸다고들 하니까.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차라리 딱따기?북?호루라기?장난감 피리?나팔 소리를 제멋대로 내는 유치원 합주단에 더 가깝다. 이 합주는 동트는 새벽이면 일제히 시작되곤 한다.”
봄꽃 개나리와 진달래에 대한 언급은 친근감을 주고, “나는 잡초를 좋아한다”는 애커먼의 고백은, 당시만 해도 초보 농사꾼이었던 윤구병이 『잡초는 없다』(보리)에서 펼친 ‘잡초론’을 떠올린다. 그녀가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과 정리해 본 창의력의 필수적인 요소도 눈길을 끈다. 20여 개 중 하나만 들자면, “어른의 세련됨으로 닦아진 어린이의 순수함”이 그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무엇보다 꽃과 나무와 동물, 그리고 원예가 성향의 인물에 관한 풍부하고 다채로운 읽을거리다. “정원을 가꾸는 이는 새로운 이야기를 심고 만들어” 내듯이, 꽃과 나무 관련 신화와 전설이 나오는가 하면, 유명 인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어떤 꽃이나 나무를 봐도 잃어버린 아름다움과 순수, 잃어버린 사랑과 삶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가 녹아 있다.”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열정적이고 박식한 식물학자이자 뛰어난 문필가였다.”
이 책에서도 원예가의 편집광적 열정보다는 담백한 철학적 성찰이 예의 빛난다.
“어디서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찰나의 아름다움과 수명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지는 꽃을 보는 사람은 더 애절함을 느낀다.”
“삶은 진정 복수형이다. 삶은 자신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면서 순례를 떠나는 것이다.”
“성장은 변화를 뜻하며, 변화는 다른 욕구와 다른 서식지를 뜻한다.”
“생물학적이건 개인적이건 성장은 완만하다.”
애커먼이 제시한 원예가가 갖춰야 할 세 가지 예절 덕목이 흥미롭다. 첫째, 남의 정원 일에 참견하지 말라. 둘째, “다른 사람의 정원에서 시든 꽃을 꺽지 마라.” 셋째, “견본이라도 친구의 정원에서 훔치지 마라.” 아울러 “온화한 비란 없다”는 단정적 표현이 맘에 쏙 든다. 인명 손상과 재산 피해 없이 가뭄 해소에 보탬이 된 태풍을 일컬어 ‘효자’ 운운하는 것은 철딱서니 없는 작자들의 망발일 뿐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특별히 더 아프거나 덜 아픈 것이 있으랴 마는 굳이 사람의 다섯 가지 감각의 경중을 가린다면? 애커먼의 『감각의 박물학』은 『열린 감각』(임혜련 옮김, 인폴리오, 1995)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다. 이 책과 함께 ‘자연사(自然史, natural history) 시리즈’로 보이는 『열린 사랑 1 ? 2(A Natural History of Love)』(임혜련 옮김, 인폴리오, 1997)도 번역됐는데, 다음은 『열린 감각』의 책 날개에 붙은 『열린 사랑』에 대한 소개 글이다.
“비극으로서의 사랑, 에로티시즘으로서의 사랑, 종교적인 사랑, 사랑의 화학 등 사랑의 모든 측면을 작가 특유의 박학한 지식과 감미로운 문체로 엮은 책.” 인폴리오 번역판의 이름 표기는 ‘다이안 애커만’이다. 원서의 부제가 A Natural History of My Garden이라는 점에서 『나는 작은 우주를 가꾼다(Cultivating Delight)』 또한 ‘자연사 시리즈’의 한 권으로 볼 수 있다. 다이앤 애커먼은 미 코넬 대학에서 영문학과 인문사회학을 가르치는 시인이자 수필가이다.
10여 권의 환경 책을 새로 읽으면서 생태?환경 위기의 심각성을 다시금 절감했다. 그런데 지구의 앞날도 불투명하긴 하지만, 인류의 미래는 암담하기 그지없다. ‘자연주의자’ 다이앤 애커먼의 책들 또한 직간접으로 생태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때론 은근히 겁을 주면서 말이다.
‘애커맨’이 『내가 만난 희귀동물(The Rarest of the Rare)』(강미경 옮김, 세종서적, 1996)의 서문에서 인용한 폴 에를리히의 비유만 해도 그렇다. (Diane Ackerman의 우리말 표기는 번역서마다 약간 차이가 난다. ‘다이앤 애커먼’으로 통일되는 추세이긴 하나, 여기서는 개별 단행본의 이름 표기 방식을 존중하기로 한다.) “어느 한 종을 잃는다는 것은 비행기 날개에 달린 나사못을 뽑는 것과 같다.” ‘애커맨’의 부연 설명이 이어진다.
“날개의 나사못을 몇 개 뽑는다고 해서 그 비행기가 반드시 추락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행기가 추락하려면 얼마나 많은 나사못을 뽑아야 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기꺼이 그 비행기에 타려는 기술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1백 개 정도까지는 커다란 부담 없이 뽑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나사못과 그렇지 않은 나사못을 신중하게 고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하나를 더 뽑을 경우, 비행기가 곤두박질 칠 시기는 과연 언제일까?” 아무튼 “우리는 회복이 불가능한 시점이 언제 닥칠지도 모르면서”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갉아먹고 있다.” 이 책은 그녀가 희귀 동물과 생태계를 조사하기 위해 세계 여러 지역을 탐사한 결과물이다.
수많은 동식물이 씨가 마를 위기에 놓여 있다. ‘애커맨’이 멍크물범, 짧은꼬리알바트로스, 황금사자타마린원숭이 등 개체 수가 급격히 준 동물 세 종, 아마존 지역과 플로리다 관목림의 위험에 처한 생태계 두 곳, 그리고 왕나비의 집단 이주 현상에 초점을 맞춘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생태?환경 위기가 심각하게 드러난 현장이 너무 많아 다 둘러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생명의 다양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서, 가능한 한 많은 생명체들이 지구상에 존재하기를 바란다.” 그럼, 왜 우리는 희귀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가? 우선은 우리가 “서로에게 협조적인 생물체의 긴 대열에서 진화”한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이들 모두를 가치 있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또한 ‘애커맨’은 생물학적 다양성을 지닌 유전학적 팔레트가 “지구 생명체의 생존뿐만 아니라 우리의 건강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는 실리의 측면을 덧붙인다. “수많은 식물과 곤충, 물고기들이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완벽한 해독제를 제공하기 위해 지구상에 출현했다는” 시각을 ‘딱딱한 도덕극을 보는 관점’이라 경계하면서도, 열대 다우림의 약전(藥典)에 있는 풍부한 치유 기능을 직시한다. 이건 우리 모두가 얽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각기 다른 독립체로 바라본다. 그러나 분자 수준에서 본다면, 그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거의 없다. 그들은 동일한 재료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세포와 조직, 유동체로 이루어져 있다. 지구의 화학적 요소는 우리가 여러 가지 색소를 한데 뒤섞을 때처럼 서로를 소멸시키기도 하고, 자극하기도 하고, 중화시키기도 하고, 안정되게 만들기도 하고, 왜곡시키기도 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원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멸종 또는 그럴 위기에 처한 생물 탐사기는 드물지 않았다. 거친 구분을 무릅쓴다면, ‘애커맨’의 『내가 만난 희귀동물』은 데이비드 쾀멘의 『도도의 노래』(푸른숲)와 더글러스 애덤스의 ‘멸종 위기 생물 탐사’ 『마지막 기회』(해나무) 사이에 위치한다. 현장성이 『도도의 노래』에 가깝다면, 문학성은 『마지막 기회』에 근접한다. 『내가 만난 희귀동물』은 글발과 현장감이 균형을 이룬다.
한편, ‘동참’의 정도는 ‘애커맨’이 가장 적극적이다. “내게 있어 동참이란, 자신의 삶을 송두째 바친 과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원래의 서식지에서 사는 동물들을 목격하는 것이다.” ‘애커맨’의 적극성은,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그해 태어난 멍크물범 새끼들에게 꼬리표를 달아 주고 어미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프로젝트에서 잘 드러난다. 그녀는 멍크물범 암컷 새끼의 지느러미에 맞아 얼굴이 피와 모래로 범벅이 되면서까지 멍크물범의 유전자 분석을 위한 피부 조직 채취에 몰두한다. 그러면서도 모험가의 열정보다는 자연주의자의 성찰이 더 빛난다.
“임신한 멍크물범이 하와이 섬의 인기 있는 해변에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이 이따금씩 목격되곤 한다. 관광객들은 자기네는 몇 시간씩 일광욕을 즐기며 누워 있다가도 멍크물범이 그러고 있는 걸 보면 길을 잃었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거라고 단정을 짓고는 그들을 바다로 쫓아 버린다. 그러나 그 단순한 행동이 멍크물범과 뱃속에 든 새끼를 죽일 수도 있다.”
“잘못은 생각이 짧은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생명은 움직임이라는 암묵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다. 뭍으로 올라온 멍크물범은 이러한 신념에 따라 지나치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에 의해 죽음의 길로 내몰리기도 한다.”
“자연은 자비를 베풀지도 않거니와 아예 기대하지조차 않기 때문에 우리 같은 이른바 자연주의자들은 폭력에 단련되어 있다. 우리는 자연의 방식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원 가꾸기는 자연의 방식에 껴드는 것인가? 아닌가? 또 원예는 환경 친화인가? 반환경인가? 적어도 『나는 작은 우주를 가꾼다- 어느 자연주의자의 정원 이야기』(손희승 옮김, 황금가지, 2003)에 나타난 원예가 다이앤 애커먼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생태 친화형이다.
사실, 자연에서 생장하는 꽃과 나무를 뜰에다 가꾼다고 해서 필수지방산이 트랜스지방산이 되거나, 불포화지방산이 포화지방산으로 바뀌는 식의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니다. ‘자연을 거기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원칙을 저버리며 원석과 야생 수목으로 자신의 정원을 꾸미는 게 문제일 따름이다.
애커먼이 미 뉴욕 주 이타카에 있는 자기 집 정원의 사계를 기록한 『나는 작은 우주를 가꾼다』는 우아하고 감미로운 책이다. 움트는 새싹과 더불어 날이 풀리자 정원으로 날아드는 철새들을 봄의 전령사로 묘사한 건 좀 의외다. “제일 먼저 돌아오는 철새는 대륙검은지빠귀다.” 이 지빠귀는 때로 검은찌르레기, 탁란찌르레기, 레드윙, 러스티 등과 무리 지어 오기도 한다. 파랑새, 울새, 명금, 딱따구리, 그리고 십여 종의 물새가 지빠귀에 이어 온다.
“새들이 암컷을 유혹하고 비열하게 겁주고 별것도 없이 우쭐거린다고 표현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새들은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노랫가락을 낸다고들 하니까.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차라리 딱따기?북?호루라기?장난감 피리?나팔 소리를 제멋대로 내는 유치원 합주단에 더 가깝다. 이 합주는 동트는 새벽이면 일제히 시작되곤 한다.”
봄꽃 개나리와 진달래에 대한 언급은 친근감을 주고, “나는 잡초를 좋아한다”는 애커먼의 고백은, 당시만 해도 초보 농사꾼이었던 윤구병이 『잡초는 없다』(보리)에서 펼친 ‘잡초론’을 떠올린다. 그녀가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과 정리해 본 창의력의 필수적인 요소도 눈길을 끈다. 20여 개 중 하나만 들자면, “어른의 세련됨으로 닦아진 어린이의 순수함”이 그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무엇보다 꽃과 나무와 동물, 그리고 원예가 성향의 인물에 관한 풍부하고 다채로운 읽을거리다. “정원을 가꾸는 이는 새로운 이야기를 심고 만들어” 내듯이, 꽃과 나무 관련 신화와 전설이 나오는가 하면, 유명 인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어떤 꽃이나 나무를 봐도 잃어버린 아름다움과 순수, 잃어버린 사랑과 삶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가 녹아 있다.”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열정적이고 박식한 식물학자이자 뛰어난 문필가였다.”
이 책에서도 원예가의 편집광적 열정보다는 담백한 철학적 성찰이 예의 빛난다.
“어디서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찰나의 아름다움과 수명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지는 꽃을 보는 사람은 더 애절함을 느낀다.”
“삶은 진정 복수형이다. 삶은 자신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면서 순례를 떠나는 것이다.”
“성장은 변화를 뜻하며, 변화는 다른 욕구와 다른 서식지를 뜻한다.”
“생물학적이건 개인적이건 성장은 완만하다.”
애커먼이 제시한 원예가가 갖춰야 할 세 가지 예절 덕목이 흥미롭다. 첫째, 남의 정원 일에 참견하지 말라. 둘째, “다른 사람의 정원에서 시든 꽃을 꺽지 마라.” 셋째, “견본이라도 친구의 정원에서 훔치지 마라.” 아울러 “온화한 비란 없다”는 단정적 표현이 맘에 쏙 든다. 인명 손상과 재산 피해 없이 가뭄 해소에 보탬이 된 태풍을 일컬어 ‘효자’ 운운하는 것은 철딱서니 없는 작자들의 망발일 뿐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특별히 더 아프거나 덜 아픈 것이 있으랴 마는 굳이 사람의 다섯 가지 감각의 경중을 가린다면? 애커먼의 『감각의 박물학』은 『열린 감각』(임혜련 옮김, 인폴리오, 1995)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다. 이 책과 함께 ‘자연사(自然史, natural history) 시리즈’로 보이는 『열린 사랑 1 ? 2(A Natural History of Love)』(임혜련 옮김, 인폴리오, 1997)도 번역됐는데, 다음은 『열린 감각』의 책 날개에 붙은 『열린 사랑』에 대한 소개 글이다.
“비극으로서의 사랑, 에로티시즘으로서의 사랑, 종교적인 사랑, 사랑의 화학 등 사랑의 모든 측면을 작가 특유의 박학한 지식과 감미로운 문체로 엮은 책.” 인폴리오 번역판의 이름 표기는 ‘다이안 애커만’이다. 원서의 부제가 A Natural History of My Garden이라는 점에서 『나는 작은 우주를 가꾼다(Cultivating Delight)』 또한 ‘자연사 시리즈’의 한 권으로 볼 수 있다. 다이앤 애커먼은 미 코넬 대학에서 영문학과 인문사회학을 가르치는 시인이자 수필가이다.
1개의 댓글
추천 상품
필자
최성일
clayjam
2005.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