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존슨 저/박아람 역 | 기이프레스(giyi press)
이런 책도 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듯이 이런 책도 있는 것이다. 데니스 존슨의 『예수의 아들』, 작가의 이름도 작품의 제목도 모두 생경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낯섦은 책을 다 읽은 뒤에도 썩 시원하게 가라앉지 않는다. 느낌표를 안겨주는 책도 있지만, 이 책은 물음표다. 왜냐하면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재미에 대해 얘기하자면, 『예수의 아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200쪽이 안 되는 비교적 얇은 두께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진도를 빼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11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연작 소설이지만, 그 하나하나의 허들을 뛰어넘기가 버겁다. 이것은 데니스 존슨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작품들을 써낸, 미국의 포스트모던 작가들에게 모두 적용되는 혐의다. 가장 훌륭한 미국 작가 중 한 사람인 팀 오브라이언의 작품도 그런 면모를 지니고 있다. 참으로 절륜한 작품이지만 모든 이들을 위한 소설은 아니다. 해체된 서사(마치 점프 컷으로만 진행되는 영화 같다고 할까?), 모호한(환각적인) 문장, 가사(假死) 상태의 인물들. 확실히 오락으로 즐기기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특징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책도 있다는 것을.
데니스 존슨의 『예수의 아들』과 닮은 작품을 찾자면, 놀랍게도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49년에 (서독에서) 태어난 존슨은 CIA 연락 업무를 담당하던 아버지를 따라 일찍이 전 세계를 떠돌았다. 14살 무렵이었을까, 필리핀 마닐라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처음 술과 환각제를 접한 존슨은 그 뒤로, 청춘 내내, 그 악마 같은 것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의 연보에서 20대 시절이 통째로 비워져 있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이오와 대학교에 들어가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글을 쓰고, 또 레이먼드 카버에게 사사한다.(잭 케루악의 말에 따르자면, 존슨은 카버를 만난 뒤로 헤밍웨이 같은 기백을 잃고, ‘연민’에 경도되었다고 한다. 물론, 우리가 직접 확인해 볼 문제다.) 1992년, 존슨은 마침내 『예수의 아들』의 발표하며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이 책은 그의 기나긴 숙취 같은 청춘의 끝자락에서 피어난 ‘악의 꽃’이었다. 일단, 『예수의 아들』을 펼치기에 앞서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악의 꽃』에 수록된 「만물조응」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어린이 살결처럼 신선한 향기, 오보에처럼/ 부드러운 향기, 초원처럼 푸른 향기들에/ -썩고, 풍성하고, 진동하는 또 다른 향기들이 있어”(보들레르, 황현산 옮김)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조르주외젠 오스만이 만들어 낸 새로운 파리, 그 표백된 세계를 맞닥뜨리고 경악했다는 보들레르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우리 삶에 자리한 비참, 절망, 우울, 비겁, 인간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그 모든 것들을 싹 밀어 버리고 그 위에 번쩍이는 아이싱을 두텁게 펴 바른, 그 우스꽝스러운 천국. 그리하여 보들레르는, 단테처럼 길잡이도 없이, 진실하고 지고한 빛을 밝히기 위해 온갖 너절한 것들로 들끓는 지옥으로 거침없이 하강했고, 끝내 ‘꽃’을 피워 냈다. 우리들이 애써 외면하거나 정상 혹은 보통이라는 경계 밖으로 밀쳐 낸 저편에, 가령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향기로 치장한 삶의 이면에 “썩고, 풍부하고, 진동하는 또 다른 향기들이 있”음을 직접 증명해 낸 것이다. 존슨의 『예수의 아들』도 이와 비슷한 봉오리를 지니고 있다고, 감히 생각해 본다. ‘예수의 아들’이라는 제목 자체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Heroin’에서 따온 것(그 황홀한 기운이 밀려들면/ 내가 예수의 아들이 된 기분이야.)임을 생각하면 더욱 의미심장하다. 『예수의 아들』은 이 같은 약물적 환각 속에서 피어난 거룩한 계시다.
“몇몇 동네를 통과하고 승강장을 지나면서 이루지 못한 삶의 꿈이 나를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의 아들』, 데니스 존슨, 박아람 옮김)
『예수의 아들』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데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주인공 화자(Fuckhead)는 늘 약물과 알코올에 절어 있으므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또한 신기루 같다. 폭력과 죽음이 도처에 숨어 있고, 불의의 사고와 범죄는 마치 물에 젖은 신발처럼 그들 삶 속에 끔찍하게 들러붙어 있다. 가끔은 환상이 현실을 압도하고, 우리가 ‘인과적’이라 믿으며 살아가는 인생의 흐름 자체를 보기 좋게 따돌리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화자의 상황을 시비(是非)의 문제나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관점에서 따져 보는 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이런 책이 있듯이, 그런 삶도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가 이해하거나 말거나, 그들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 역시, 거의 본능적으로, 어떤 거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거북함이란 무엇인가? 실패하고 망가진 인간에 대한 혐오? 아니다, 오히려 그토록 쉽게 실패하고 망가질 수 있는 삶,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공포였다. 이따금 우리는 매일매일 안온하게 영위하는 삶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런 범주에 들지 못하는 이들을, 몹시 교만하게도,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당신과 내가 같은 인간이듯이, 그들과 우리의 삶도 결국 다르지 않다. 단지 한 걸음 차이로 벼랑 끝에 설 수도 있고, 급기야 추락할 수도 있다. 오직 한 걸음 차이일 뿐인 삶의 연약함과 인간의 취약함, 『예수의 아들』보다 이 같은 진실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은 아주 드물다.
『예수의 아들』이 중독자들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널리 읽힌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단지 ‘악’만을 폭로하는 작품이었다면 결코 그럴 수 없었으리라. 앞서 거듭 강조하였듯이, 이 작품은 ‘꽃’이다. 단지 한 걸음 차이로 상처받고 결핍되고 파괴된 사람들, 바로 그들이 우리들 자신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예수의 아들』은 그 자체로 회복력,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왜 하필 제목이 ‘예수의 아들’이었을까? 이 책 속엔 그 같은 제목을 가진 작품조차 없다. 그저 ‘헤로인’ 경험을 암시하고 싶었던 걸까? “예수의 아들”이 된 것 같은 그 느낌을? 사실, 정확히 무슨 의도로 이러한 제목을 붙였는지는, 이미 작고한 데니스 존슨만이 알고 있을 터다. 그럼에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종교적으로 과몰입하지 마시길 바라며) 예수에게 아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대속(代贖)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 예수에게 자손이 있다면 아마 우리들 자신일 것이다. 신성(완전무결함)과 인간성(취약함)을 동시에 지닌 우리가 예수의 자손이 아니라면 과연 누구이겠는가. 『예수의 아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 그들의 난폭한 삶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당신도 신성과 인간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아무리 인생이 우리를 괴롭히고 겁박하더라도 어둠 속에 빛이, 절망 속에 구원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끝으로, 『예수의 아들』은 꼭 종이책으로 읽어 보길 권한다. 책이라는 물성을 통해 작품의 주제를 이토록 훌륭하게 보여 줄 수 있다니, 그 자체로 경이롭다. 화면 조정을 하듯 깨지고 이지러지고 잡음이 어지럽게 진동하는 페이지가 곳곳에 삽입돼 있는데, 그 자체로 “예수의 아들이 된” 것 같은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유상훈 (편집자)
책을 읽고, 책을 만들고, 좋은 책을 찾아다닙니다.

![[에디터의 장바구니] 『빨래』 『비신비』 외](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1/20251121-aa8fb1bb.jpg)
![[리뷰] 소설에 대한 소설,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1/20251120-d6f8e835.jpg)
![[리뷰] ‘아름다움’의 어원이 ‘앓은 다음’임을 아시나요?](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1/20251119-0f51e138.jpg)
![[김이삭 칼럼] 중국에서 바라본 '한녀 문학(韓女文學)'](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1/20251118-e97b3258.jpg)
![[나이듦을 읽다] 말년성 개념을 지극히 범속하게 만들기](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1/20251118-c9cf887c.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