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시간, 늘 나를 지켜주었던 책
지난봄, 유독 심했던 봄앓이를 하며 꺼내 들었던 책은 윤대녕의 소설집이었다. 따뜻해진 바람에도 그저 마음이 가라앉기만 했던 봄밤, 어쩌자고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애잔하고 고독하고, 또 슬펐으니 말이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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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삶이 계속되는 한 그리움은 계속되고 또한 누군가 조용히 숨어 글을 바라고 쓰는 일도 계속될 것이다.” (윤대녕의 『제비를 기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지난봄, 유독 심했던 봄앓이를 하며 꺼내 들었던 책은 윤대녕의 소설집이었다. 따뜻해진 바람에도 그저 마음이 가라앉기만 했던 봄밤, 어쩌자고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애잔하고 고독하고, 또 슬펐으니 말이다. 그런데 고독한 인물과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따뜻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당신만 고독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

대학 시절, 그저 아무 감흥 없이 다가왔던 그의 소설이 그 희미해진 시간을 뒤로하고, 지난봄 나를 이상하리만큼 따뜻하게 다독여주었다. 그의 소설 속 인물처럼 나도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면서 그렇게 삶의 속내를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삶이 이처럼 고독한 일이고, 또 외로운 일임을 깊게 알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그의 말처럼 내 그리움이 어쩔 수 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면 그저 혼자서만 끙끙 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나처럼 고독한 누군가가 쓰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겠다고.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을 애써 참으며 먹먹해진 가슴을 진정시키려 할 때에도, 지나간 시간들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밤에도, 시간이 흘러도 그저 켜켜이 쌓여가기만 하는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는 날에도 늘 윤대녕의 소설집을 펼쳐들었다. 그렇게 그의 소설과 함께 나는 봄을 무사히 보냈다. 그렇게 한 시기, 한 계절 어떤 책은 나를 살아내게 하고, 견뎌내게 한다. 스무 살, 내게로 왔던 책이 그렇게 해주었던 것처럼.

스무 살 무렵, 나의 아늑한 도피처는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의 고요한 서가에 발을 디딜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져 오곤 했다. 오래된 책의 냄새도 그저 향기롭게만 느껴지던 공간. 그곳에서 나는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오래도록 서성거리곤 했다. 이름 모를 작가의 새로운 작품을 탐색할 때면 떨리는 흥분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렇게 수업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들어가듯 파고들었던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책,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이 책이 남길 여운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갈 때, 내 마음은 얼마나 떨렸었는지.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가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는 또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했었는지. 그의 문장 속에서 자칫 길을 잃을까 나는 또 얼마나 불안했었는지.

아직도 기억난다. 불안하고 두려운 손으로 이 책의 문장을 일기장에 베껴 적던 스무 살의 내가. 그리고 소설 속의 문장처럼 수증기처럼 쉬이 사라질 것만 삶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던 그 시절의 내가. 이 책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애잔한 아픔으로 일렁거렸던 것도 기억난다. 읽을 때는 몰랐다가, 책장을 덮고 나서야 덮쳐 오던 그 아련한 아픔들. 책장 사이를 유령처럼 배회하면서 나 자신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바로 이 책 속에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가 아팠고, 그가 자신의 기억을 찾게 될수록 만나게 되는 그 누군가가 아팠고, 그 기억을 따라 함께 걸어 들어가고 있는 내가 아팠다.

“지금까지 모든 것이 내게는 어찌나 종잡을 수 없고 어찌나 단편적으로 보였는지. … 몇 개의 조각들, 어떤 것의 한 귀퉁이들이 갑자기 내 수사의 과정을 통하여 되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인 모양이지요. … 과연 이것은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중에서)

그렇게 아프게 이 책을 읽었으면서도 그 후로 자주 이 책을 꺼내 들곤 했다. 단편적인 조각들로 자신의 삶을 추적해나가는 남자의 삶의 모습이 내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과 자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그저 흐릿하고 불안하기만 했던 나의 스무 살 무렵의 시간을 지켜주었던 건 바로 이 책이었다는 것을.

‘내 인생의 특별한 책’이라는 주제를 받아들고서, 숱한 사연과 이야기가 숨어 있는 책이 가지런히 꽂힌 책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나를 잠 못 들게 했던 책이 떠올랐고, 늘 가방 안에 넣어 다니면서 습관처럼 들여다보던 책도 떠올랐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 비밀암호처럼 베껴 적곤 했던 책도 떠올랐다. 힘들었던 시간, 친구에게 선물 받았던 책도 떠올랐고, 힘들 때마다 보면 위로가 되는 책도 떠올랐다.

어떤 시간 우연하게, 그리고 운명처럼 내게 다가와서 나를 다독여주는 책이 있었기에 나는 숨죽이며 울다가도 씩씩하게 울음을 그칠 수 있었고, 조금 더 힘차게 아침을 시작할 수도 있었고, 잠들지 못하는 밤 우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도 있었다. 내 곁에 있는 책 덕분에 나는 혼자서만 아파하는 일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처럼 이렇게 아파하는 사람이 있구나, 이렇게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아픈 마음을 다독이는 것이다. 그렇게 같이 아프고 나면 나는 조금 더 씩씩해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때로는 지나간 그리움 속으로 불러들이기도 하고, 지나간 시간 속을 서성거리게도 만들지만 그 책들을 읽는 것은 이상하게 힘이 된다. 아프지만 따뜻한 책. 그런 책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같이 울어버리고 나면 좀 더 씩씩해지도록 만들어주는 책. 그런 책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언젠가, 내 인생의 순간순간을 책으로 떠올려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내겐 그 책이 있었어, 라고 하면서. 책의 줄거리나 이야기는 잘 떠오르지 않더라도, ‘참 따뜻한 느낌이었는데’ 하고 떠오를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그 순간 그 책이 있어 참 다행이었다고. 그리고 그 순간, 나를 지켜주었던 건 바로 그 책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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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의 저자 알베르토 망구엘처럼 열정적인 독서가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고, 미국의 대표적인 서평가 마이클 더다처럼 그동안 읽어온 책으로 자서전을 쓰고 싶다. 서점에서 새로 나온 책을 처음으로 만나게 될 때나 고요한 도서관 서가를 누비며 알지 못했던 책을 만나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그렇게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듯,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잠시 현실을 잊는 것을 좋아한다. 책을 사거나 읽는 방법 대신, 언젠가 내가 한 권의 책의 주인공이 되는 일을 꿈꾸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가장 멋진 도피처를 제공해줄 수 있기를. 그래서 내 인생의 특별한 책 이야기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책 #힘든시간 #시간 #윤대녕 #김민웅
58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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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9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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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9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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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7

제비를 기르다를 읽고 윤대녕 작가의 책을 관심있게 보게 되었다.
아내, 엄마의 사랑과 관심에 목마르고 애태우는 두 남자의 힘든
과정들이 가슴에 아프게 남는다.
우리 모두는 너무나도 외롭다.
얼마만큼 고독을 잘 다스리는지가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을까?

독서일기를 보면서 좀더 많은 책들을 접하고 깊이 읽기, 반복해서 읽어가며
적어두고 늘 곁에 놔두어야 할 책의 목록이 많아 지는것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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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저/<강수정> 역

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출판사 | 창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저/<김화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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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196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단국대 불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원」이 당선되었고, 1990년 [문학사상]에서 「어머니의 숲」으로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출판사와 기업체 홍보실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94년 『은어낚시통신』을 발표하며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 책을 통해 존재의 시원에 대한 천착을 통해 우수와 허무가 짙게 깔린 독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르며 '존재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그려나가고 있다. 오늘의 젊은예술가상(1994), 이상문학상(1996), 현대문학상(1998), 이효석문학상(2003), 김유정문학상(2007), 김준성문학상(2012)을 수상했다. 2019년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은 전혀 뇌리에 남아 있지 않다는 그의 최초의 기억은 조모의 등에 업혀 천연두 예방 주사를 맞기 위해 초등학교에 가던 날이다. 주사 바늘이 몸에 박히는 순간 제대로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일곱 살 때 조부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 들어갔다. 입학도 안 하고 1학년 2학기에 학교 소사에게 끌려가 교실이라는 낯선 공간에 내던져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에게 한자를 배웠다. 한자 공부가 끝나면 조부는 밤길에 막걸리 심부름이나 빈 대두병을 들려 석유를 받아 오게 했다. 오는 길이 무서워 주전가 꼭지에 입을 대고 찔끔찔끔 막걸리를 빨아먹거나 당근밭에 웅크리고 앉아 석유 냄새를 맡곤 했던 것이 서글프면서도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독서 취미가 다소 병적으로 변해,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 우연히 '동맥'이라는 문학 동인회에 가입한다. 그때부터 치기와 겉멋이 무엇인지 알게 돼 선배들을 따라 술집을 전전하기도 하고 백일장이나 현상 문예에 투고하기도 했고 또 가끔 상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거의 한 달에 한 편씩 소설을 써대며 찬바람이 불면 벌써부터 신춘 문예 병이 들어 방안에 처박히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는 자취방에 처박혀 롤랑 바르트나 바슐라르, 프레이저, 융 같은 이들의 저작을 교과서 대신 읽었고 어찌다 학교에 가도 뭘 얻어들을 게 없나 싶어 국문과나 기웃거렸다. 1학년 때부터 매년 신춘 문예에 응모했지만 계속 낙선이어서 3학년을 마치고 화천에 있는 7사단으로 입대한다. 군에 있을 때에는 밖에서 우편으로 부쳐 온 시집들을 성경처럼 읽으며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때 군복을 입고 100권쯤 읽은 시집들이 훗날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대 후 1주일 만에 공주의 조그만 암자에 들어가 유예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을 투명하게 보려고 몸부림쳤다. 이듬해 봄이 왔을 때도 산에서 내려가는 일을 자꾸 뒤로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뻔한 현실론에 떠밀려 다시 복학했고 한 순간 번뜩,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문학이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데뷔 이래 줄곧 시적 감수성이 뚝뚝 묻어나는 글쓰기로 주목을 받은 윤대녕은 ‘시적인 문체’를 지녔다는 찬사를 받는다. 그의 글에서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그만의 시적 색채가 느껴지는 문체가 있어서이다. 동시에 그의 글에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일상을 마치 스냅사진을 찍듯 자연스럽게 포착하여 그려내는 뛰어난 서사의 힘이 느껴진다. 윤대녕은 고전적 감각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동시대적 삶과 문화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들을 지향점을 잃어버린 시대에 삶과 사랑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젊은 세대의 일상에 시적 묘사와 신화적 상징을 투사함으로서 삶의 근원적 비의를 탐색한다. 내성적 문체, 진지한 시선, 시적 상상력과 회화적인 감수성, 치밀한 이미지 구성으로 우리 소설의 새로운 표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으로『남쪽 계단을 보라』,『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대설주의보』를 비롯해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추억의 아주 먼 곳』,『달의 지평선』,『코카콜라 애인』, 『사슴벌레 여자』, 『미란』 등을 발표했다.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누가 걸어간다』, 『어머니의 수저』,『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