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송라이터 박선주의 다섯 번째 앨범을 만나다
38살. 독신주의자. 지금까지 한 번도 음악 외의 길을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 가수들의 노래 선생님. ‘귀로’로 열아홉에 데뷔. 한국에 드문 여성 싱어송라이터 이런 수식어 외에도 박선주라는 가수 앞에는 바늘 가는 데 실 따라오는 것처럼 붙는 것이 있다.
2007.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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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살. 독신주의자. 지금까지 한 번도 음악 외의 길을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 가수들의 노래 선생님. ‘귀로’로 열아홉에 데뷔. 한국에 드문 여성 싱어송라이터 이런 수식어 외에도 박선주라는 가수 앞에는 바늘 가는 데 실 따라오는 것처럼 붙는 것이 있다. ‘노래 잘하는 가수’라는 수식어다. 가수 앞에 ‘노래 잘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역전 앞’처럼 유의어 반복처럼 느껴지지만, 박선주의 노래를 듣고 나면 ‘정말 노래 잘한다’는 말이 한숨처럼 나올 것이다. 노래를 잘하는 수준을 넘어서 노래를 갖고 논다.
2006년, 10년이라는 긴 공백을 깨고 발표한 4집 앨범 『A4rism』을 발표한 지 2년 만에 다섯 번째 앨범 『Dreamer』가 나왔다. 긴 공백 끝에 발표한 『A4rism』이 어딘지 모르게 기합이 들어간, 새로 산 옷 같은 앨범이었다면 『Dreamer』는 여러 번 입어 적당히 늘어난 청바지와 면 티셔츠처럼 편안하다. 라이너스의 담요처럼 편안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확장하는 싱어송라이터 박선주의 역량을 느낄 수 있다.
『Dreamer』는 4집에 비해 편하게 들린다. 어깨에 힘을 뺀 듯 편안하다.
편하게 만들었으니까. 지금까지 했던 음악은 흑인 음악이었는데 이번 앨범으로 백인 음악으로 넘어갔다. 브릿팝 스타일의 음악이다.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영감을 받은 대상이 있다면?
기타. 기타는 중학교 3학년 때 독학으로 배웠다. 『이정선 기타교실』이라는 책을 사서. 혼자 기타를 배웠기 때문에 어느 지점부터 한계를 느꼈다. 이걸로 밥 먹고 살기 힘들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스물하나 이후에는 기타와 멀어졌다. 이번에는 왠지 기타를 써서 작업을 하고 싶었다.
뭐랄까, 이소라에 락 느낌이 더해진 느낌이었다. 가사도 자기토로적인 것이….
음, 그런 평은 처음인데. 이소라 씨보다는 내 노래 쪽이 가사가 더 독하다. 내 노래들은 다 그렇다. 토로하고, 슬퍼하고, 쓰러지고, 상처받고. 이소라 씨 노래는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는 면이 있는데 내 노래는 그런 거에 신경을 안 쓴다. 거침없이 가는 스타일이라서.
대중에게 신경을 안 쓸 수 있나?
신경을 안 쓰는 게 아니라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마음대로 만든다.
소통의 욕구는 없나?
물론 남들이 듣고 즐기고 슬프고 느끼게 하기 위해 노래를 만든다. 나는 내가 즐기기 위해 노래를 만든 적이 없다. 내가 내 노래를 즐기지 않는다. 내 노래를 듣고 100% 만족해서 ‘아, 정말 잘했어.’ 이런 느낌도 없다. 난 내 직업을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한다.
4집이 10년 만에 나와서 그런지 5집은 빨리 나왔다는 느낌이다.
빨리 나온 게 아니다. 2006년 1월에 작업해서 올해 10월에 나왔으니 거의 2년이 걸렸다. 웬만한 가수들은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내지 않나? 그렇게 따지면 벌써 앨범 3개가 나왔어야 했다. 4집은 미친 듯이 몰아붙여서 꽉 눌러진 애플파이처럼 만들어졌다. 그게 그때 내 마음이었다. 지금 건 가볍고 좋은 마음이었다. 하림 씨랑 매일 홍대 클럽에서 술 먹고 기타 연주하면서 놀았는데 그때 만든 노래들도 앨범에 들어 있다. 하림 씨가 술 먹고 장난치며 만든 노래를 앨범에 넣느냐고 하면서 나보고 독하다고 그러더라.(웃음) 요번 앨범은 철저하게 내 스타일대로 가보자는 취지에서 스태프 둘과 나 셋이서만 작업을 했다. 3주 동안 서너 시간씩밖에 소파에서 자지 못할 때도 있었다.
목에 무리가 가지 않나? 그렇게 작업을 하면.
무리가 가겠지. 그러나 정신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노래를 못 하겠다고 생각하면 못 한다. 이건 해야 된다, 하겠다고 생각하면 한다. 내가 고집도 세고, 뭐라 그래야 하나, 뭘 물면 놓지 않는다. 집착적이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그렇다. 더 심하다.
도망가는 제자는 없나?
물론 있다. 그럼 걔는 평생 도망만 치겠지. 정면으로 부딪쳐서 (자기 한계를) 깰 수 있으면 그만큼 성장하는 거고. 자기 벽을 깨지 못하면 주저앉는 거겠지. 그건 선생의 몫이 아니다. 어디나 그렇지만 가수도 생존 구조는 피라미드 구조다. 밑에 있는 그룹 중 일부가 올라오고, 그 안에서 또 실패자가 생긴다. 계속 그 구조의 반복이다. 아이들에게 그 구조에서 살아남자는 말을 많이 한다. 또, 일등으로 버틸 것이 아니라 이등으로 오래 살아남자 이런 이야기도 하고.(웃음)
가늘고 길게 가자는 건가?
그렇다.(웃음) 한국에 보컬 트레이너는 지금 여섯 명 정도? 보컬 트레이너라는 이름도 내가 처음 쓴 거다. 2001년도에 유학에서 돌아오고 나서 보컬 트레이너 일을 했는데, 그때 한국에서는 보컬 트레이닝에 대한 개념도 없을 때다. 그 이후로 시장을 많이 개척했다. ‘모래공장’은 보컬 트레이닝 학원이다. 밑에 연습실 있고, 위에 녹음실 있고. 나는 모래공장의 주인이지만 원장은 아니다. 그냥 그룹의 일원이다. 보컬 트레이닝에 관련된 교육, 비즈니스, 공연 등의 일을 한다.
음악을 만들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늘 네다섯 개의 일이 겹쳐진 상태라 바쁘다. 그렇지만 하루라도 쉬면 불안해진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즐겁다. 이기적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배우기 위해 가르친다. 가르치면서 제자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안 되는 부분을 반복해서 고민하다 보면 내 자신도 변해간다. 피와 땀을 흘려 가르친 제자들이 제 갈길 잘 가는 걸 보면 기쁘고 예쁘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박선주 2집, 3집을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평해진다는데… 그런 평을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
그런 말 많이 들었다. 건방진 이야기지만, 나는 내 모든 앨범을 다 걸작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주받은’이라는 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 타이밍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작품이 떨어졌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연애도 그렇지 않나?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신경 안 쓴다. 내 앨범에 대해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하면서 자세한 평을 쓴 블로그 글을 읽으면 재미있을 때도 있다.
그런 평을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실제 음악 작업에 영향을 미치나?
한 가지 단어밖에 생각 안 든다. 고맙다는…. 내 앨범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을 계속하는구나, 고맙다는 생각이다. 나는 (앨범을) 그때 내뱉어 놓고 나면 잊어버리는데… 뱉어놓고 놔두면 자랄 나무는 자라고, 썩을 나무는 썩고, 무너질 나무는 무너진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앨범이 나오면 내 손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다음은 대중들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앨범에 대한 평들에 대해 ‘왜 이런 글을 썼나?’ 하는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낸 앨범들의 수록곡은 모두 본인이 만들어 불렀다. 창작 작업에 타인의 도움을 받아보고 싶은 생각은 안 드는지.
창작 자체에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면 싱어송라이터가 아니다. 싱어송라이터는 결국에 자기가 만들고 쓰고 노래하고 아닌가? 다시 말해서 자기 몸은 자기가 잘 아니까. 어떤 스타일리스트가 그랬다. 사람들이 옷을 잘 입는다는 걸 스타일리스트가 되고 알았다고. 처음 일 하면서 겉으로 보기에 예뻐서 옷을 갖다 줬는데 실패할 때가 많았다고 했다. 본인의 눈이 제일 정확하게 옷을 골라낸다. 자기 몸을 자기가 잘 아니까,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어떤 옷을 입으면 예쁘다는 걸 단련해 온 셈이다.
결국 장점도 단점도 본인이 아니까 커버하고 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만든 곡을 부르는 게 승률이 제일 높다.
그래도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긴 힘들지 않나?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누구나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객관적이지 않아야 되지 않나? 음악의 색깔은 주관적이다. 음악에 객관성이라는 게 0.01%라도 생기면 그때부터 힘들어진다. 방향을 잃어버리니까. 객관성과 주관성은 사실 말싸움이 되기 쉽다. 아티스트가 주관성을 잃는다면 그건 아티스트가 아니다. 그건 장사꾼이다. 어떤 면에서는.
활동 기간에 비해 앨범수가 적은 편이다.
할 이야기가 없었고, 유학생이어서 시간도 없었다. 할 말도 없는데 앨범을 내는 건 싱어송라이터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싱어송라이터라는 옷을 벗고 만들어진 가수의 세션으로 들어가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그래서 동료 가수들의 앨범에 많이 참여했다. 그 일 덕에 어느 정도 경제적인 부분도 해결됐고.
7년이라는 긴 유학 생활을 거쳤다. 후배들에게도 그런 긴 유학을 권하고 싶은가?
주변에 적극 권하고 있다. 하다못해 여행이라도 떠나라고 부추긴다. 이예린 씨, 얼마 전에 앨범을 냈는데, 몇 년 전에 심각하게 ‘유학을 갈까, 말까’ 고민하기에, ‘더 늦기 전에 가라’고 했다. 동경해서가 아니다. 저쪽 동네에서 뭘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다. 동네가 달라지면 자기의 식견이 넓어지고,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많다. 사람은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자기 주변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렇기 위해서는 자기와 다른 것들 다른 문화를 접해야 한다. 언어에 대한 벽도 느껴보는 게 중요하다.
유학에서 배운 것 중에 지금까지 제일 잘 써먹고 있는 게 뭔가?
오기다. 나는 가난한 유학생이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야 했다. 1집이 성공했지만 나는 계약금 500만 원 받은 게 전부였다. 레코드사는 건물을 지었지만. 그 당시 가수들은 다 그랬다. 음반 제작에 참여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학비 대기에는 빠듯했다. 뉴욕에서 유학 생활을 했는데 <섹스 앤 더 시티>의 분위기를 상상했다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런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다. 다들 뉴욕이라면 뭔가 환상을 갖는다.
유학 생활이 내게 줬던 건 오기다. 끝을 봐야 했으니까. 그전까지는 그런 게 없었다. 유학 가기 전의 나는 버릇없는 제멋대로 애였다. 끈기도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게 없어지고 오기, 인내, 현실적인 상황 판단이 생겼다.
유학에서 얻은 것이 음악적인 부분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음악 공부라면 한국에서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존 레넌이나 비틀즈의 음악이 한국에 안 들어와 있는 게 아니지 않나?
테크닉적인 건 어떤가?
테크닉은 테크닉이고, 경험이다. 경험 말고 좋은 것이 없다. 테크닉은 별게 아니다. 운전과 비슷하다. 운전 테크닉이 별 거 있나? 결국 오래 운전한 사람이 운전을 잘한다. 노래도 그렇다.
가장 이상적인 팬과의 만남이 어떤 거라고 생각하나?
나는 열심히 음악을 만들어 주면 팬들이 그 음악을 듣고 행복해하는 것,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팬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가장 좋다. 내년 2월부터 장기 공연을 소극장에서 한다. 그때 직접 무대에서 팬들을 만날 예정이다.
팬층은 어떤가?
내 공연장을 찾는 사람의 80%는 20대 후반의 여성과 그들을 따라온 남자다.(웃음) 드물지만 10대 팬들도 있고, ‘귀로’를 좋아하시는 4.50대 팬 분도 공연장을 찾는다.
거의 가수 생활을 20년 동안이나 했다. 그동안 좋은 일뿐만 아니라 힘든 일도 많았을 텐데. 계속 가수 생활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 뭐라고 생각하나?
얼마 전에야 ‘나는 음악만 했구나, 왜 나는 펀드매니저나 장사꾼이 되지 않았을까? 나는 왜 딴 걸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음악 말고 딴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내가 왜 음악을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음악을 했다. 그냥 하는 거다. 한 번도 거기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앨범을 낼 때마다 변하는 부분이 있고,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변하는 부분은 성장이나 성취일 테고… 변하지 않는 부분은 무엇인가?
음악이라는 테마, 음악을 즐기는 테마는 바뀌지 않는 것 같다. 그때 그 순간 내가 마음이 내키는 대로 곡을 쓰고 노래를 하는 게 내 스타일이다. 그래서 지금 음반이 나오고, 다음 음반이 언제 나올지 모르지만 그때 가장 하고 싶은 걸 하게 되겠지. 싱어송라이터라는 이름으로.
2006년, 10년이라는 긴 공백을 깨고 발표한 4집 앨범 『A4rism』을 발표한 지 2년 만에 다섯 번째 앨범 『Dreamer』가 나왔다. 긴 공백 끝에 발표한 『A4rism』이 어딘지 모르게 기합이 들어간, 새로 산 옷 같은 앨범이었다면 『Dreamer』는 여러 번 입어 적당히 늘어난 청바지와 면 티셔츠처럼 편안하다. 라이너스의 담요처럼 편안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확장하는 싱어송라이터 박선주의 역량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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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만들었으니까. 지금까지 했던 음악은 흑인 음악이었는데 이번 앨범으로 백인 음악으로 넘어갔다. 브릿팝 스타일의 음악이다.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영감을 받은 대상이 있다면?
기타. 기타는 중학교 3학년 때 독학으로 배웠다. 『이정선 기타교실』이라는 책을 사서. 혼자 기타를 배웠기 때문에 어느 지점부터 한계를 느꼈다. 이걸로 밥 먹고 살기 힘들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스물하나 이후에는 기타와 멀어졌다. 이번에는 왠지 기타를 써서 작업을 하고 싶었다.
뭐랄까, 이소라에 락 느낌이 더해진 느낌이었다. 가사도 자기토로적인 것이….
음, 그런 평은 처음인데. 이소라 씨보다는 내 노래 쪽이 가사가 더 독하다. 내 노래들은 다 그렇다. 토로하고, 슬퍼하고, 쓰러지고, 상처받고. 이소라 씨 노래는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는 면이 있는데 내 노래는 그런 거에 신경을 안 쓴다. 거침없이 가는 스타일이라서.
대중에게 신경을 안 쓸 수 있나?
신경을 안 쓰는 게 아니라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마음대로 만든다.
소통의 욕구는 없나?
물론 남들이 듣고 즐기고 슬프고 느끼게 하기 위해 노래를 만든다. 나는 내가 즐기기 위해 노래를 만든 적이 없다. 내가 내 노래를 즐기지 않는다. 내 노래를 듣고 100% 만족해서 ‘아, 정말 잘했어.’ 이런 느낌도 없다. 난 내 직업을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한다.
4집이 10년 만에 나와서 그런지 5집은 빨리 나왔다는 느낌이다.
빨리 나온 게 아니다. 2006년 1월에 작업해서 올해 10월에 나왔으니 거의 2년이 걸렸다. 웬만한 가수들은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내지 않나? 그렇게 따지면 벌써 앨범 3개가 나왔어야 했다. 4집은 미친 듯이 몰아붙여서 꽉 눌러진 애플파이처럼 만들어졌다. 그게 그때 내 마음이었다. 지금 건 가볍고 좋은 마음이었다. 하림 씨랑 매일 홍대 클럽에서 술 먹고 기타 연주하면서 놀았는데 그때 만든 노래들도 앨범에 들어 있다. 하림 씨가 술 먹고 장난치며 만든 노래를 앨범에 넣느냐고 하면서 나보고 독하다고 그러더라.(웃음) 요번 앨범은 철저하게 내 스타일대로 가보자는 취지에서 스태프 둘과 나 셋이서만 작업을 했다. 3주 동안 서너 시간씩밖에 소파에서 자지 못할 때도 있었다.
목에 무리가 가지 않나? 그렇게 작업을 하면.
무리가 가겠지. 그러나 정신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노래를 못 하겠다고 생각하면 못 한다. 이건 해야 된다, 하겠다고 생각하면 한다. 내가 고집도 세고, 뭐라 그래야 하나, 뭘 물면 놓지 않는다. 집착적이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그렇다. 더 심하다.
도망가는 제자는 없나?
물론 있다. 그럼 걔는 평생 도망만 치겠지. 정면으로 부딪쳐서 (자기 한계를) 깰 수 있으면 그만큼 성장하는 거고. 자기 벽을 깨지 못하면 주저앉는 거겠지. 그건 선생의 몫이 아니다. 어디나 그렇지만 가수도 생존 구조는 피라미드 구조다. 밑에 있는 그룹 중 일부가 올라오고, 그 안에서 또 실패자가 생긴다. 계속 그 구조의 반복이다. 아이들에게 그 구조에서 살아남자는 말을 많이 한다. 또, 일등으로 버틸 것이 아니라 이등으로 오래 살아남자 이런 이야기도 하고.(웃음)
가늘고 길게 가자는 건가?
그렇다.(웃음) 한국에 보컬 트레이너는 지금 여섯 명 정도? 보컬 트레이너라는 이름도 내가 처음 쓴 거다. 2001년도에 유학에서 돌아오고 나서 보컬 트레이너 일을 했는데, 그때 한국에서는 보컬 트레이닝에 대한 개념도 없을 때다. 그 이후로 시장을 많이 개척했다. ‘모래공장’은 보컬 트레이닝 학원이다. 밑에 연습실 있고, 위에 녹음실 있고. 나는 모래공장의 주인이지만 원장은 아니다. 그냥 그룹의 일원이다. 보컬 트레이닝에 관련된 교육, 비즈니스, 공연 등의 일을 한다.
음악을 만들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늘 네다섯 개의 일이 겹쳐진 상태라 바쁘다. 그렇지만 하루라도 쉬면 불안해진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즐겁다. 이기적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배우기 위해 가르친다. 가르치면서 제자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안 되는 부분을 반복해서 고민하다 보면 내 자신도 변해간다. 피와 땀을 흘려 가르친 제자들이 제 갈길 잘 가는 걸 보면 기쁘고 예쁘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박선주 2집, 3집을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평해진다는데… 그런 평을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
그런 말 많이 들었다. 건방진 이야기지만, 나는 내 모든 앨범을 다 걸작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주받은’이라는 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 타이밍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작품이 떨어졌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연애도 그렇지 않나?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신경 안 쓴다. 내 앨범에 대해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하면서 자세한 평을 쓴 블로그 글을 읽으면 재미있을 때도 있다.
그런 평을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실제 음악 작업에 영향을 미치나?
한 가지 단어밖에 생각 안 든다. 고맙다는…. 내 앨범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을 계속하는구나, 고맙다는 생각이다. 나는 (앨범을) 그때 내뱉어 놓고 나면 잊어버리는데… 뱉어놓고 놔두면 자랄 나무는 자라고, 썩을 나무는 썩고, 무너질 나무는 무너진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앨범이 나오면 내 손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다음은 대중들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앨범에 대한 평들에 대해 ‘왜 이런 글을 썼나?’ 하는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
창작 자체에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면 싱어송라이터가 아니다. 싱어송라이터는 결국에 자기가 만들고 쓰고 노래하고 아닌가? 다시 말해서 자기 몸은 자기가 잘 아니까. 어떤 스타일리스트가 그랬다. 사람들이 옷을 잘 입는다는 걸 스타일리스트가 되고 알았다고. 처음 일 하면서 겉으로 보기에 예뻐서 옷을 갖다 줬는데 실패할 때가 많았다고 했다. 본인의 눈이 제일 정확하게 옷을 골라낸다. 자기 몸을 자기가 잘 아니까,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어떤 옷을 입으면 예쁘다는 걸 단련해 온 셈이다.
결국 장점도 단점도 본인이 아니까 커버하고 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만든 곡을 부르는 게 승률이 제일 높다.
그래도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긴 힘들지 않나?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누구나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객관적이지 않아야 되지 않나? 음악의 색깔은 주관적이다. 음악에 객관성이라는 게 0.01%라도 생기면 그때부터 힘들어진다. 방향을 잃어버리니까. 객관성과 주관성은 사실 말싸움이 되기 쉽다. 아티스트가 주관성을 잃는다면 그건 아티스트가 아니다. 그건 장사꾼이다. 어떤 면에서는.
활동 기간에 비해 앨범수가 적은 편이다.
할 이야기가 없었고, 유학생이어서 시간도 없었다. 할 말도 없는데 앨범을 내는 건 싱어송라이터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싱어송라이터라는 옷을 벗고 만들어진 가수의 세션으로 들어가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그래서 동료 가수들의 앨범에 많이 참여했다. 그 일 덕에 어느 정도 경제적인 부분도 해결됐고.
7년이라는 긴 유학 생활을 거쳤다. 후배들에게도 그런 긴 유학을 권하고 싶은가?
주변에 적극 권하고 있다. 하다못해 여행이라도 떠나라고 부추긴다. 이예린 씨, 얼마 전에 앨범을 냈는데, 몇 년 전에 심각하게 ‘유학을 갈까, 말까’ 고민하기에, ‘더 늦기 전에 가라’고 했다. 동경해서가 아니다. 저쪽 동네에서 뭘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다. 동네가 달라지면 자기의 식견이 넓어지고,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많다. 사람은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자기 주변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렇기 위해서는 자기와 다른 것들 다른 문화를 접해야 한다. 언어에 대한 벽도 느껴보는 게 중요하다.
유학에서 배운 것 중에 지금까지 제일 잘 써먹고 있는 게 뭔가?
오기다. 나는 가난한 유학생이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야 했다. 1집이 성공했지만 나는 계약금 500만 원 받은 게 전부였다. 레코드사는 건물을 지었지만. 그 당시 가수들은 다 그랬다. 음반 제작에 참여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학비 대기에는 빠듯했다. 뉴욕에서 유학 생활을 했는데 <섹스 앤 더 시티>의 분위기를 상상했다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런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다. 다들 뉴욕이라면 뭔가 환상을 갖는다.
유학 생활이 내게 줬던 건 오기다. 끝을 봐야 했으니까. 그전까지는 그런 게 없었다. 유학 가기 전의 나는 버릇없는 제멋대로 애였다. 끈기도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게 없어지고 오기, 인내, 현실적인 상황 판단이 생겼다.
유학에서 얻은 것이 음악적인 부분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음악 공부라면 한국에서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존 레넌이나 비틀즈의 음악이 한국에 안 들어와 있는 게 아니지 않나?
테크닉적인 건 어떤가?
테크닉은 테크닉이고, 경험이다. 경험 말고 좋은 것이 없다. 테크닉은 별게 아니다. 운전과 비슷하다. 운전 테크닉이 별 거 있나? 결국 오래 운전한 사람이 운전을 잘한다. 노래도 그렇다.
가장 이상적인 팬과의 만남이 어떤 거라고 생각하나?
나는 열심히 음악을 만들어 주면 팬들이 그 음악을 듣고 행복해하는 것,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팬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가장 좋다. 내년 2월부터 장기 공연을 소극장에서 한다. 그때 직접 무대에서 팬들을 만날 예정이다.
팬층은 어떤가?
내 공연장을 찾는 사람의 80%는 20대 후반의 여성과 그들을 따라온 남자다.(웃음) 드물지만 10대 팬들도 있고, ‘귀로’를 좋아하시는 4.50대 팬 분도 공연장을 찾는다.
거의 가수 생활을 20년 동안이나 했다. 그동안 좋은 일뿐만 아니라 힘든 일도 많았을 텐데. 계속 가수 생활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 뭐라고 생각하나?
얼마 전에야 ‘나는 음악만 했구나, 왜 나는 펀드매니저나 장사꾼이 되지 않았을까? 나는 왜 딴 걸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음악 말고 딴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내가 왜 음악을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음악을 했다. 그냥 하는 거다. 한 번도 거기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앨범을 낼 때마다 변하는 부분이 있고,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변하는 부분은 성장이나 성취일 테고… 변하지 않는 부분은 무엇인가?
음악이라는 테마, 음악을 즐기는 테마는 바뀌지 않는 것 같다. 그때 그 순간 내가 마음이 내키는 대로 곡을 쓰고 노래를 하는 게 내 스타일이다. 그래서 지금 음반이 나오고, 다음 음반이 언제 나올지 모르지만 그때 가장 하고 싶은 걸 하게 되겠지. 싱어송라이터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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