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잠자는 동생의 얼굴에 펜으로 장난을 쳤던 기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내 어른들께 들키게 되면 크게 혼이 나기도 했을 텐데, 그때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은 잠자는 사람의 얼굴에 장난을 쳐 놓으면 혼쥐가 나갔다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몸속에는 쥐가 들어있어서 잠을 자는 사이 콧구멍을 통해 나왔다 다시 들어간다고 한다. 그 쥐는 그 사람의 혼이 실린 동물이다. 만일 잠자는 사람의 영혼이 담겨있는 혼쥐가 다시 몸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은 영원한 잠에 빠져버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몸속에 쥐가 살고 있다니! 게다가 그 쥐에 우리의 영혼이 담겨 있다고?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았지만 영혼을 쥐로 설정해서 우리 몸을 드나들게 한다는 발상이 참 흥미로웠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우리의 옛이야기를 담은 책의 한 모퉁이에서 다시 혼쥐 이야기와 마주쳤다. 그런데 다시 봐도 신기한 혼쥐 이야기는 어릴 때 들었던 그 이야기와는 조금 달랐다. 두 마리인 줄로만 알았던 혼쥐가 세 마리씩이나 등장하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옛날에 한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이 매일같이 하는 일이라곤 도둑질밖에 없었다. 부인은 늘 그것이 못마땅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낮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의 콧구멍에서 쥐 한 마리가 톡 하고 나오는 게 아닌가. 옆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부인은 놀라서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남편의 콧구멍에서 나온 쥐는 너무 작아서 문지방을 넘어가지 못했다. 부인이 옆에 있던 자를 놓아주었더니 쥐는 그 자를 밟고 기어서 문지방을 넘어갔다. 그러고 나니 또 한 마리가 콧구멍에서 나왔다. 말로만 듣던 혼쥐라고 생각하고는 그 쥐에게도 역시 자를 놓아 문지방을 넘게 도와주었다. 그런데 세 번째 쥐가 또 콧구멍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혼쥐는 두 마리라고 들었는데 남편의 코에서 세 마리째 쥐가 나오는 것이 의아했다. 하지만 그 쥐에게도 역시 자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필시 무슨 연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쥐를 쫓아가 보기로 했다.
부인이 뒤따라가 보니, 쥐들이 개울가에 서서 찍찍거리고 있었다. 부인은 쥐들이 개울을 건너도록 나뭇가지로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얼마쯤 쥐들을 따라가다 보니 골짜기 사이로 커다란 집이 보였다. 쥐들은 그 집으로 들어가더니 세 번째 쥐의 진두지휘 아래 여기저기를 들락날락거리며 꼼꼼하게 살피듯 돌아다녔다. 그러더니 다시 그 집을 나와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부인은 미리 집으로 돌아와 문지방에 자를 놓고 기다렸다. 첫 번째 쥐가 문지방에 놓인 자를 타고 방으로 들어와 남편의 콧구멍 속으로 쏙 하고 들어갔다. 두 번째 쥐 역시 콧구멍으로 들어갔다. 세 번째 쥐 역시 콧구멍으로 들어가려고 쪼르륵 달려오고 있었다. 세 번째로 들어오는 쥐를 보고 부인은 갑자기 옆에 있던 자를 들어 세게 내리쳐 죽여버렸다. 세 번째 쥐를 죽이자마자 남편이 자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아이쿠, 무서워라!”
“아니, 여보, 왜 그러세요?”
“아니, 내가 꿈에서 어딜 갔는데 다짜고짜 어떤 인간이 나를 커다란 몽둥이로 패서 내가 죽는 꿈을 꿨다오.”
부인이 곰곰이 생각하니 꿈속에서 몽둥이로 남편을 때린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좀 더 자세히 물었다.
“높은 산을 넘고, 넓은 강을 건너, 골짜기 사이에 있는 큰 집을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집에 막 들어설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나를 때려죽이지 뭐겠소.”
그 이후로 남편은 이상하게도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도둑질을 하려고 하면 무섭고 오금이 저려서 감히 물건을 훔칠 생각조차 못하게 된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남편은 도둑질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며 착실하게 살게 되었다.
부인은 자신이 죽인 것이 남편의 혼이 담긴 혼쥐였으며, 남편이 도둑질하는 버릇이 없어진 것은 쥐 한 마리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빙그레 웃으며 좋아했다고 한다.
몸속에 살고 있는 쥐가 세 마리였기에 도둑질을 일삼던 이가, 한 마리를 죽이자 겁이 생겨 도둑질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콧구멍을 드나들 정도니 아주 조그마한 쥐였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조그마한 쥐에 사람의 영혼이 들어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더 멋지고, 더 용맹스러운 동물들도 많았을 텐데 작고 볼품없고 꼬리만 긴 쥐라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여기 그 의아함을 풀어줄 아주 재미난 이야기가 한 편 더 있다.
선조대왕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대왕이 경연(經筵)에 참여했는데 그때 어전(御前)에 쥐 한 마리가 쪼르륵 지나갔다. 선조대왕은 불쾌해진 얼굴로 신하들에게 물었다.
“쥐란 짐승은 외모도 볼품없을 뿐더러 사람들에게 해를 많이 끼치는 동물인데 어찌하여 12간지 중 첫 번째에 놓여있는지 혹 아는 사람이 있는가?”
그때 유희춘이란 자가 대답하였다.
“쥐를 잘 살펴보면 앞발가락이 네 개이고, 뒷발가락이 다섯 개입니다. 음양에 따르면, 짝수는 음에 속하고, 홀수는 양에 속하는 수입니다. 이렇듯 한 몸에 상반되는 기운인 음과 양을 함께 지니고 있는 짐승은 쥐 외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자정을 축으로 앞쪽은 음기의 시간이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뒤쪽은 양기의 시간입니다. 그리하여 쥐가 음에 속하는 앞발을 내디딘 후에 양에 속하는 뒷발을 디딘다는 의미를 취해 열두 때 중 가장 꼭대기에 놓게 된 것입니다. 즉 음양이 공존하는 시간인 첫 번째 시간에 자시(子時)가 오게 된 것입니다.”
답을 들은 선조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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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가 왜 12간지 중 가장 처음에 오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흔히 약삭빠른 쥐가 소의 등을 타고 가다가 골인 지점에서 폴짝 뛰어내려 하느님이 주관한 달리기 시합에서 1등을 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그에 비해서 훨씬 철학적이다. 자시는 밤 11시에서 1시 사이를 가리키는데, 이는 하루의 시간이 끝나고 또 다른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살아간다는 것, 목숨이 계속된다는 것은 결국 오늘에서 내일로의 삶이 이어진다는 뜻이다. 우리의 몸속에 영혼이 있다는 것은 목숨이 붙어 있다는 뜻이며 삶이 지속된다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시간을 나타내는 동물이 쥐라는 것은 옛이야기에서 사람의 영혼이 실린 동물로 왜 쥐를 선택했는지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원래 사람의 영혼이 실린 쥐는 두 마리이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일진대 왜 사람의 영혼이 실린 쥐는 한 마리가 아니고 두 마리일까? 아마도 사람의 숨구멍, 즉 콧구멍이 두 개이기 때문일 것이다. 숨구멍이 막히면 죽게 되니, 콧구멍은 생명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니 영혼이 담긴 혼쥐들이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숨을 쉬는 통로인 코로 들락날락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며, 그 구멍이 공교롭게도 두 개인 탓에 영혼의 혼쥐는 두 마리였다. 우리가 잠들어 있는 사이 사이좋게 영혼을 나눠 담은 자그마한 혼쥐들이 두 개의 통로로 나란히 들락날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 이야기 속의 사내는 세 마리의 혼쥐를 지녔다. 놀부식으로 이야기하면 오장칠부를 가진 셈이다. 일반적인 사람이 갖고 있는 오장육부에 심술부가 하나 더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 번째 혼쥐는 이 사내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남의 물건을 훔칠 때 생기는 ‘겁’을 무마시켜줄 수 있는 ‘담력’ 정도가 아닐까. 사내는 두 마리여야 할 쥐가 세 마리여서 용기가 백배하여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니었던, 일명 간 큰 남자였던 셈이다. 그런데 그 세 번째 쥐가 죽었으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겁이 다시 생겨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옛이야기 속에 사람의 혼이 실린 것으로 설정되는 동물은 쥐뿐이 아니다. 다음 이야기를 보자.
옛날에 한 남자가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 하나가 산 위에서 내려오더니 그 남자의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밑에 마을에 가보니까, 큰 배나무가 있는 집에 과년한 처녀가 하나 있는데, 참 내 맘에 든단 말이야. 얼굴이 참 예뻐.”
이렇게 혼자 중얼대면서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중이 하는 말을 들은 남자는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가 중을 이리저리 훑어보는데, 갑자기 그 순간 중의 콧구멍에서 실뱀 한 마리가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남자는 깜짝 놀라 나무 뒤에 숨었다. 중의 코에서 나온 실뱀은 점점 커지더니 커다란 구렁이로 변했다. 그러더니 마을을 향해 빠른 속도로 기어갔다.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남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곰곰 생각해보니 큰 배나무가 있는 집은 바로 자신의 집 아닌가. 게다가 중이 말한 과년한 처녀는 바로 자신의 누이였다. 남자는 구렁이의 눈을 피해 지름길을 이용해 전속력으로 집까지 뛰어갔다.
“누님! 누님!”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자는 누이를 찾았다. 방에서 바느질하고 있던 누이는 갑자기 산에 나무하러 간 남동생이 다급하게 부르자 왜 그러냐며 문을 열었다.
“누님, 큰일 났어요! 죽게 생겼으니 아무 말 하지 말고 빨리 달거리한 속옷을 머리에 뒤집어써요.”
영문도 모른 채 누이는 죽게 생겼다는 말에 놀라서 동생이 시키는 대로 달거리한 빨간 속옷을 쓰고 방안에 앉아있었다. 누님에게 위험을 알린 남동생은 뱀이 오기 전에 다시 중이 누워 있던 산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 마당으로 구렁이가 꿈틀거리며 들어왔다. 방문으로 난 틈을 유심히 살펴보던 구렁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골목으로 나가버렸다.
한편 남자는 나무 뒤에 숨어서 자고 있는 중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얼마 후에 구렁이가 마을 쪽에서 오더니 점점 작아져 다시 실뱀으로 변한 뒤 중의 콧구멍으로 들어갔다.
“한숨 잘 잤다!”
실뱀이 들어가자마자 중은 잠에서 깨어나 또 중얼거렸다.
“아까 동냥하러 갔을 때는 그 처녀가 참 예뻐 보였는데, 방금 가보니 얼굴이 벌겋게 된 것이 너무 못났어! 내가 잘못 본 게야.”
그러고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산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여기서도 중의 코에서 빠져 나간 뱀은 그의 영혼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영혼은 단순한 영혼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함께 실린 영혼이다. 그래서 뱀이 될 수밖에 없었다. 흔히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그 영혼이 뱀이 된다고 한다. 이른바 상사뱀이다. 원래 상사뱀 이야기는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음에도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영혼이 뱀이 되어 다시 나타난다는 내용인데, 이 이야기는 특이하게 살아 있는 사람의 사랑하는 마음을 뱀으로 표현했다.
사실 죽은 사람의 혼이 동물에게 깃들어 있다는 설정은 우리 옛이야기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상사뱀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이고, 아홉 동생을 두고 죽은 누이가 억울하고 슬픈 사연을 담아 날아오르는 두견이에 영혼을 실어 밤마다 울었다는 것 또한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같은 이야기 중에서도 살아 있는 사람의 혼이 쥐에게 실려, 자고 있는 사이 콧구멍으로 나와서 활동한다는 혼쥐 이야기는 그 기발한 상상력 때문에 특히나 주목을 받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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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여신
2012.10.25
그런데 참 마침 그러한 물건이 있는우연이란 -_-;;;(사담)
쥐가 저렇게 음기와 양기를 다 가지고 있는 동물이란걸 처음 알았네요.
영험하다는 이야기는 몇 번 들어본 것도 같은데..참 영혼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가 많네요
prognose
2012.04.18
앙ㅋ
201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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