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 천천히 읽기를 권함
그가 조금 색다른 책을 냈다. 『책을 읽는 방법』.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실용서다. 독서의 테크닉에 대한 책이다. 그는 특이하게도 책을 읽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8.05.15
작게
크게
※ 이 인터뷰는 <히라노 게이치로에게 묻다>에 독자 여러분이 덧글로 써주신 질문을 히라노 게이치로에 물어보았습니다. 히라노 게이치로 씨가 일본에 있는 관계로 이메일로 진행되었습니다.

***

한국에 프로 소설가 김연수가 있다면 일본에는 히라노 게이치로가 있다. 10년 전 문예지 〈신조〉에 투고한 소설 『일식』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면서 소설가로 화려하게 데뷔한 그는 10년 동안 『달』『장송』『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 등의 장편과 『센티멘털』『얼굴 없는 나체들』 등의 단편집을 발표했다.

그의 소설은 결코 쉽지 않다. 한국에서 지금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재미있는’ 일본 소설의 가장 먼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지하게 언어의 한계를 고민하며, 인간의 본질과 사회의 현상을 탐구한다. 그는 자기만의 소설 산맥을 쌓아가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를 이탈리아 바로크를 대표하는 천재 카라바조에 비유했다. 카라바조처럼, 그는 압도적인 소설을 쓴다.


소설가가 알려주는 책 읽는 방법

그런 그가 조금 색다른 책을 냈다. 『책을 읽는 방법』.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실용서다. 독서의 테크닉에 대한 책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쓴 실용서는 ‘글쓰기’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특이하게도 책을 읽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소설 쓰기에도 바쁜 그가 왜 이런 책을 냈을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일상생활의 템포가 빨라지고 대량의 정보가 흘러들어오는 현대사회에서는 책을 읽어도 천천히 음미하기보다는 하나의 정보로서 처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 때문에 모처럼 좋은 소설이 나와도 충분히 감상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일이 많죠. 소설가로서 그런 현상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책에서 그가 권하는 독서법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지독(遲讀)’ 즉 슬로 리딩이다. 읽어야 할 것이 많은 세상에 느리게 읽기를 권하다니 시대착오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그리고 여러 번 되풀이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는 속독법에 관심이 많던 사람이었으나 많은 속독법 책을 읽으면서 ‘속독법’이 굉장히 수상쩍은 독서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많은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바람을 겨냥해 수상쩍은 ‘속독책’이 유행하면서 천천히 책을 읽고 싶은 사람들이 열등감을 느끼는 분위기까지 생겨났어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책을 천천히 음미하며 감상하는 기쁨을 되새겼으면 하는 마음에서 독서의 ‘팁’을 소개하는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슬로 리딩’ 붐을 일으킬 만큼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을 읽고 이제껏 대강 훑어보고만 넘어간 책을 다시 읽어보았다고 한 분도 있고, 앞으로는 양이 아닌 질을 따져서 독서를 하고 싶다는 말씀하신 분도 많아서 책을 쓴 사람으로서 기뻤습니다.”


독서에도 숙성과정이 필요하다

『책을 읽는 방법』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개인적인 독서 이력이 담긴 책이기도 하며, 독서의 시행착오를 담은 기록이기도 하며, 평범한 독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천재’ 소설가로 불리는 그도, 평범한 독자들처럼 읽을 책이 쌓여서 ‘저 책을 언제 다 읽지.’ 하고 한숨을 쉬고, ‘뭐, 쉬운 길이 없을까’ 고민하면서 속독법을 기웃거리고, 귀가 얇아 남들이 좋다는 것은 다 해보기도 한다.

그쟀 독서 이력은 미시마 유키오에서 시작한다. “중학생 때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다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이게 도대체 뭘까?’ 하고 멍했습니다. 그 이후 미시마 유키오의 전 작품을 섭렵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미시마 유키오가 언급한 작가들의 책을 모조리 찾아서 읽었죠. 그렇게 토마스 만, 괴테, 실러, 도스토옙스키, 고골을 찾아서 읽었어요.”

미시마 유키오의 책은 그가 가장 많이 재독한 책이기도 하다. 『금각사』를 비롯해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은 많이 되풀이해서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책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데, 최근에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되풀이해서 읽었어요.”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인간은 처지와 성장수준에 따라 책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에 겐자부로의 말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 선생님이 ‘독서에는 시기가 있다.’라는 말씀을 어느 소설에서 하신 적이 있어요. 처음 읽었을 때는 재미가 없었는데 몇 년 후에 읽으면 의외로 재밌을 때가 있거든요. 또, 독서에도 적당한 숙성과정이 필요합니다. 재독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성장을 측정해볼 수 있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책이라면 5년, 10년 후에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에게 독서란, 재독(再讀)과 지독(遲讀)을 의미한다. 소설가가 된 후 그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소설가가 된 후에 독서습관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처럼 책에 푹 빠진 독자로 책을 읽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저 역시 소설을 쓰면서 남들이 보기에는 웃을지도 모르지만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타인의 소설이나 글을 읽을 때도 작은 부분까지 주목해서 읽게 됩니다. 또, 읽으면서 ‘왜’ ‘어째서’라는 질문을 많이 하죠. ‘왜 이런 테마로 글을 썼을까?’ ‘어째서 이런 식으로 문장을 구사할까?’ 하는 식으로요. 이런 질문을 갖고 책을 읽게 되면서 보다 깊숙이 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장송』에 이어 또 하나의 대작 『결괴(決壞)』를 쓰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 어, 중국어로 번역되고 있다. “최근 들어 예전보다 더 번역에 대해 의식하고 있습니다. 번역에 의해 어떤 부분이 사라지고 어떤 부분이 남게 되는지, 일본 이외의 독자들에게 작품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런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이 생각하고 글로 쓴 것이 다른 나라의 언어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정말로 감동적인 경험입니다.”

그가 소설가로 가장 애착을 가지는 작품은 역시 『장송』이다. 『장송』은 경애하는 예술가들의 생애를 통해 저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를 시간을 들여 천천히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는 『장송』 완성 직후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고 망설임 없이 단언할 만큼 작품의 완성도에는 완전히 만족하고 있고, 이 이상의 무언가를 내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라고.

『장송』은 꼬박 4년의 시간을 투자해 썼다. 『장송』 집필 중에는 1846~1849년 달력을 만들어 매일 그 꾳짜에 따라 생활했습니다. 현대의 일본과 19세기의 파리. 두 개의 세계에서 동시에 살아가는 기분이었죠. 3년 가까운 시간을 들인 고독한 작업이었지만 그만큼 충실감도 컸습니다.”

『일식』『달』『장송』으로 이어지는 장편들과 그의 단편들은 소재들이 파격적이다. 『일식』은 연금술에 대한 것이었고, 『달』은 메이지 시대를 무대로 한 탐미적인 소설이었으며, 『장송』은 19세기 프랑스의 두 예술 거장의 삶을 다루고 있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며 그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한 상상력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 그 상상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리고 왜 그런 소설을 쓴 것일까?

“일상생활에서 느낀 것, 책을 읽고 생각한 것, 그림과 영화, 음악 같은 다른 장르를 통해 자극 받은 것 등 여러 가지입니다. 생각난 것을 그대로 쓰는 게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하면 작품화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일식』『달』『장송』은 우리들이 왜 지금 현재의 세계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살게 되었는지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현대는 자기 자신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의 근거가 흔들리고 있는 시대니까요.”

올 6월 30일 일본에서 장편 『결괴(決壞)』가 출간된다. 『결괴(決壞)』는 ‘독자’와 함께 간다는 생각으로 쓴 작품이다. 그는 이전에는 자기 나름의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을 완벽하게 완성해서 독자에게 건네면 독자가 그 작품을 어떻게 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작품은 독자가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에도 작가가 함께 달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도록 썼다고 했다.

“『결괴(決壞)』는 제 10년간의 작가 생활을 집대성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작품에 흥미가 있는 분이라면 제일 먼저 읽어 주길 바랄 정도입니다. 살인을 테마로 해서 ‘나’는 무엇인가, ‘타인’은 무엇인가, ‘악’은 무엇인가, ‘용서’란 무엇인가 등, 현대인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에 소개되면 독자 여러분도 언젠가 꼭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히라노 게이치로 #천천히 읽기를 권함
13의 댓글
User Avatar

앙ㅋ

2012.04.03

ㅎㅎ 장송을 읽다보면 모리 오가이의 문체가 많이 느껴져요. 음, 가장 존경하는 작가를 위한 오마주인가요. 무엇이든지 천천히 읽고 음미하면 그글속에 체화 된다는것 ! 생각나는데로 의식의 흐름데로 주절주절쓰지 않고 하나의 오롯한 작품으로 형상화 시키며 쓴다는 사실이 놀랍네요. ㅎㅎ 다시 읽어보고 싶어져요.
답글
0
0
User Avatar

천사

2012.03.19

독서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것도 삶에서 제법 유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나 저와 같이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말입니다.
답글
0
0
User Avatar

kwonw008

2008.09.07

아~ 저도 책에 관심이 있을때 속독을 배우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꼭 사고 싶군요
답글
0
0

더 보기

arrow down
Writer Avatar

채널예스

채널예스는 예스24에서 운영하는 콘텐츠 플랫폼입니다. 책, 영화, 공연, 음악, 미술, 대중문화, 여행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Writer Avatar

히라노 게이치로

명문 교토 대학 법학부에 재학중이던 1998년 문예지 『신조』에 투고한 소설 『일식』이 권두소설로 전재되고, 다음해 같은 작품으로 제120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 당시 최연소 수상 기록으로, '미시마 유키오의 재림'이라는 파격적인 평과 함께 예리한 시각과 전위적 기법으로 차세대 일본문학의 기수로 자리매김했다. 아쿠타가와 상의 대학 재학생의 수상은 무라카미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이후 23년 만의 일이었다.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시각으로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바라보는 신세대 작가인 그는 1998년 스물셋의 나이에 '일식'으로 아쿠타카와상을 수상할 당시 화려한 한문투 문체와 장대한 문학적 스케일로 주목을 받았다. 일본소설하면 흔히 떠올리는 '가벼움'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으로 많은 국내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다. 밝은 문장으로 죽음을, 무거운 문체로 연애를 그릴 순 없냐는 그의 말에서 순문학 작가로의 포부와 자부심이 묻어난다. 1975년 6월 22일 아이치 현에서 태어났다. 중학생 시절 '금각사'라는 명작을 남긴 미시마 유키오(1925~1970)에 푹 빠져 지내면서 미시마가 책에서 조금이라도 언급한 작가는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때 접한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 토마스만, 괴테 등이다. 어린 시절의 독서가 오늘날 그를 소설가로 성장하게 한 든든한 자양분이 되었다. 교토 대학 법학부 입학하여 소크라테스에서 자크 데리다에 이르는 정치사상사를 공부했다. 문예창작과의 제도적인 문인교육을 받은 적은 없으며, 정치사상사를 문학 공부와 병행하는 것이 작가적 성찰을 얻는데도 도움이 됐다고 한다. 문학 교육이 아닌 다른 경험으로부터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흥미가 많은 그는 재즈 대담집을 발간하고 건축잡지의 책임편집을 맡는 등 문학 외적인 방면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2008년에는 모델 겸 디자이너인 하루나와 결혼했다. 이제는 등단 10년이 넘는 중견작가로, 1993년과 비교해 70% 정도로 규모가 줄어든 일본 순문학 시장에서 소설의 힘을 믿고 소설을 통해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며, '공감'을 통해 독자와 만나고자 한다. 해박한 지식과 화려한 의고체 문장으로 중세 유럽의 한 수도사가 겪는 신비한 체험을 그린 『일식』 작품은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再來)'라는 파격적인 평과 함께 일본 열도를 히라노 열풍에 휩싸이게 하며 일본 내에서 40만 부 이상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9년 메이지 시대를 무대로 젊은 시인의 탐미적인 환상을 그려낸 두번째 소설 『달』을 발표한 이후 매스컴과 문단에서 쏟아지는 주목과 찬사에도 불구하고 3년여 동안 침묵을 지키며 집필을 계속해, 2002년 19세기 중엽의 파리를 배경으로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대작 『장송』을 완성한다. 같은 해 특유의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시각으로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바라본 산문집 『문명의 우울』을, 2003년에는 이윽고 현대 일본으로 작품의 배경을 옮겨 젊은 남녀의 성을 세심한 심리주의적 기법으로 추구하는 등 실험적인 형식의 단편 네 편을 수록한 『센티멘털』(원제:다카세가와)을 발표한다. 2004년에는 더욱 심화된 의식으로 전쟁, 가족, 죽음, 근대화, 테크놀로지 등 현대사회의 여러 테마를 아홉 편의 단편으로 그려낸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을, 2006년에는 인터넷 성인 사이트를 소재로 삼아 현대인의 정체성을 파헤친 『얼굴 없는 나체들』을 연달아 발표하여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