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후에야 ‘잃어버린 6년’이 비로소 끝났고, 그는 다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천국의 신화』를 완결 지었고, 어린이를 위한 한국사 만화도 그렸다. 두 여자 골퍼의 경쟁과 사랑 이야기를 그린 『버디 1부』로 2007년 대한민국 만화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타난 그가 활짝 웃었다. 그간의 마음고생을 다 씻어버리듯.
그는 6년 동안의 침묵을 보상이라도 하듯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우고 있다. 골프 만화 『버디 1부』에 이어 2부를 연재하면서 동시에 『창천수호위』『만화 세계사 넓게 보기』도 출간 중이다. 만화 말고는 별로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그가 유일하게 즐기는 취미가 골프다. 일주일에 한 번은 필드에 나가 골프를 즐긴다.
『버디』 1부는 드라마 같고, 2부는 영화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버디 2부는 PGA 투어가 배경이죠. 미국이 배경이니까 훨씬 더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훨씬 더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끌어낼 수 있어요. 또, 1부에서 골프에 대한 예비지식을 대부분 설명했으니까 2부는 좀 더 스토리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점도 있고요.
1부와 2부의 다른 점은 그림만 봐도 느껴질 겁니다. 여성들의 이야기인 1부가 가늘고 깔끔한, 정리된 선이라면 2부는 역동적이고 다소 거친 느낌이 드는 선이죠. 남자들 이야기니까요. 터치를 의도적으로 강하게 갔죠.
『버디』는 골프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스포츠를 통해 경쟁하면서 성장하고 화해하는 이야기죠. 1부는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골프를 하는 여자와 재능을 비롯한 모든 것이 갖춰진 여자. 너무 대조적인 두 여자가 골프를 통해 성장하고, 자신의 인생과 화해하고, 친구가 되는 이야기를 그려보자고 해서 시작했습니다. 2부도 모든 것이 대조적인 두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성격부터 골프 스타일까지 닮은 구석이 없지만 동전의 앞뒤처럼 뗄 수 없는 숙명으로 엮여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죠.
『버디』는 기존 선생님 작품보다 덜 독하다고 평하고 있는데요.
하하하. 나이 들었으니까 성격도 누그러지고, 세상과도 화해하게 되나 봅니다. 40대에 그렸다면 전혀 다른 만화가 되지 않았을까요.
『버디』를 그리시면서 특별히 공을 들인 장면이 있다면 어떤 장면인가요?
심리전 묘사에 공을 들였습니다. 골프는 멘탈 스포츠라고 하거든요. 플레이어가 필드에서 공을 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만 묘사하면 골프의 재미를 반만 보여주는 겁니다. 선수들이 심리적인 갈등에 말려들어 자멸하기도 하고 그것을 극복해 훌륭한 경기를 펼치기도 합니다. 그 심리적인 부분을 독자들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스포츠 만화는 대부분 과장이 심한 편인데, 『버디』는 과장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그리려고 했습니다. 『버디』는 골프라는 스포츠가 소재인 만큼 전문성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스윙하는 장면은 교본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확하게 그렸지요.
1부에서 스토리를 맡았던 최성현 작가와 2부에서도 함께 작업하시게 되었는데요.
『버디』를 기획하면서 함께 일할 스토리 작가를 찾았어요. 그런데 만화 스토리를 쓰는 분 중에 골프를 하는 분이 별로 없었어요. 작가들이 골프를 해도 숨기고 있고. 아직까지 골프에 대해 ‘돈 있는 사람이 한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거든요. 특히, 만화가와 작가들 사이에 그런 생각이 강해요. 그래서 스토리 맡길 사람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최성현 씨는 예전부터 스토리를 잘 쓰는 작가로 눈여겨봐 두고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경주고 15년 후배였어요. 경주에서 자라서 나와 정서도 비슷하고. 그런데 문제가 뭐였느냐면 이 친구가 골프를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중계도 본 적이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 친구가 그래요. ‘선생님, 권투 해 본 사람만 권투 스토리를 잘 쓸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골프를 안 했어도 얼마든지 스포츠 드라마로 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알았다. 대신 조건이 있다. 오늘부터 골프 연습장에 등록해서 골프를 배워라. 네가 골프를 어느 정도 알 때까지 골프에 대한 부분은 내가 맡겠다.’ 그랬습니다. 지금은 뭐, 골프 마니아가 다 됐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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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쯤 시작했습니다. 고향 친구가 골프연습장을 열어서 친구 도와주는 셈치고 등록한 게 시작이었죠. 처음엔 골프가 너무 재미없는 겁니다. 한여름 뙤약볕에 골프 치는 사람들 보고 ‘저 사람 미친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니까. 배우다 말고, 배우다 말고 하다가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정말 좋아하죠.
왜 골프를 좋아하시나요?
뭐, 사람들은 골프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말하는데, 나에게 골프는 소풍입니다. 만화가는 매일 책상에 앉아서 눈을 혹사시키는 직업이잖아요. 주말에 골프 약속을 잡으면 일주일이 정말 신나고 설레요. 소풍가기 전날처럼. 골프 치는 것보다 골프장에 가서 나무와 풀을 보고, 바람을 쐬고, 걷고 그러는 걸 정말 좋아하죠. 비가 와도 좋고, 햇볕이 따가워도 좋고. 골프장 다녀오면 일주일 동안 컨디션이 진짜 좋아요.
골프라는 운동의 매력은 열여덟 개의 홀을 돌면서 한 번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공이란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니까. 열여덟 개의 홀을 돌다 보면 화가 날 때도 있고, 짜증 날 때도 있고, 너무나도 재미있을 때도 있죠. 하지만 중간에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걸 견뎌야 해요. 그런 점이 인생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골프도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끝까지 가야하고 인생도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끝까지 살아내야 하잖아요. 사는 게 지겹고 힘들다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회피잖아요.
또, 골프는 혼자 하는 게임이지만 홀은 여럿이서 같이 도니까 좋다고 웃을 수도 없고, 안 된다고 화를 낼 수도 없습니다. 골프는 매너게임이니까. 스코어보다 매너가 열 배 이상 중요합니다. 골프를 쳐보신 사람은 아마 아실 거예요. 어떤 사람이랑 치면 유난히 스코어가 잘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또 반대로 같이 치자고 할까 봐 겁나는 사람도 있죠.
어떤 타입의 골프 선수를 좋아하시나요?
여유 있는 선수가 좋습니다. 프레드 커플스(Frederick Steph Couples)를 좋아해요. 게임을 즐기고 매너도 좋은 선수죠. 매력 있는 선수라고 하면 존 댈리, 타이거 우즈, 아놀드 파마, 잭 니콜라우스 다 매력 있죠. 매력 있는 선수는 많지만 좋아하는 선수, 정말 그 선수와 한 번 라운드를 하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선수는 프레드 커플스가 유일해요. 그 사람의 인생 이야기도 정말 좋고요.
프레드 커플스는 요즘은 별로 성적이 좋지 않지만 90년대 초에는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선수였죠. 그런데 이 친구가 결혼한 후에 아내와 갈등이 깊었어요. 골프 선수는 투어를 다녀야 하는데 아내가 그걸 싫어했거든요. 그래서 이혼을 하고 다시 다른 여자를 만났는데, 이 여자가 암에 걸렸어요. 결혼 후에는 병간호 때문에 연습도 못하고 하니까 성적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프레드 커플스는 ‘투어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로하며 함께 골프를 치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말해 전 미국인을 감동시켰죠. 지금도 성적은 좋지 않은데 매치게임의 왕자예요.
스포츠물에서 역사와 신화, 여성문제를 다룬 작품까지 안 그린 소재가 드물 정도로 다양한 소재로 작품을 그려왔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잘 맞는 소재는 어떤 건가요?
액션 쪽이 잘 맞습니다. 마초 이현세의 로망을 충족시켜 주니까요. 몽상가에다 호기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많이 건드려보는 편이에요. 소재 때문에 고민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지금도 세 작품(『버디 2부』『만화 세계사 넓게 보기』『창천수호위』)을 하고 있지만 또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어요. 천 년 신라의 마지막 날의 풍경은 어떨까,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새 작품에 들어간 날 밤에 ‘아, 다음엔 이걸 그리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리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일반적으로 작가가 그렇게 되면 지금 하고 있는 작품에 싫증이 나서, 하고 있는 작품을 미완성으로 두고 그다음 걸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나마 다행인 건 나는 어느 정도 성실성을 타고난 것 같아요. 집착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끝을 내지 않으면 잠도 자지 않으니까요. 배가 고파도 원고를 끝내고 밥을 먹어요.
만화가도 두 유형이 있어요. 나처럼 시작했으면 밤을 새우든, 밥을 굶든 끝부터 보는 사람이 있고, 계획적으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딱 끊어버리고,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고 나서 원고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 같은 사람은 건강을 까먹죠. 후자는 건강을 지키고.
예술 하는 사람들은 건강과 작품 완성도를 맞바꾸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요.
젊었을 때는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들고 보니 생각이 달라져요. 지금은 건강하고 만화를 맞바꾼 게 후회가 됩니다. 나이가 오십, 육십 넘어가면 이십 대 삼십 대보다 삶에 대한 애착이 훨씬 커져요. 나이가 들면 미래는 젊은 사람들 거고 나는 흙으로 돌아가는 준비를 하련다, 이럴 것 같죠? 전혀 아닙니다. 하루하루가 즐겁고 기뻐요. 내게 또 하루가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이건 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주변의 어떤 동료 만화가는 만화가로 이룬 게 많은 절 부러워해요. 그런데 나는 유유자적하게 만화를 그려온 그 친구가 부러워요. 내 삶에는 만화밖에 없는데 그 친구는 여행도 다니고 강연도 다니고 영화제 같은 데 초청받아 가기도 하니까. 정말 인생엔 정답이 없죠. 결국 자기 몫의 삶이 있는 거예요. 나처럼 죽어라 만화 그려서 당뇨병, 심장병 걸린 만화가도 있고, 작품이 몇 개 없어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만화가도 있고. (웃음)
병 때문에 많이 불편하시진 않으신가요.
협심증 때문에 담배를 끊었어요. 당뇨 때문에 술도 끊어야 하는데 그건 좀 힘드네요. 뭐, 내일은 어떻게 되겠지, 오늘은 먹고 보자. 그럽니다. (웃음) 원래 그런 스타일이에요. 병이 병이니 식사조절도 해야 되는데 잡곡밥 먹기 싫어 죽겠어요. 옛날에 먹던 하얀 쌀밥이 너무 먹고 싶어요.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젊었을 때 몸을 혹사했으니 당연한 결과인 거죠.
만화가로 살면서 그리고 싶은 것과 그려야 하는 것이 일치했나요?
대다수 일치했다고 봅니다. 다만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 프로덕션을 통해서, 대본소용 책을 낼 때는 제 의도대로 책이 나오진 않았어요. 8년 동안 그렸던 프로덕션 작품들 중에서는 기억도 못 하는 작품도 많습니다. 그 외에 화실에서 직접 제작한 것들은, 하고 싶은 소재를 아는 만큼 느끼는 만큼 그린 작품들입니다. ‘왜 그렸느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그 8년 동안 그래도 얻은 게 있다면 다양한 소재로 실험을 해봤다는 겁니다. 안 다뤄본 소재가 없을 정도로. 그게 지금의 내겐 재산입니다.
그림도 많이 달라졌는데요. 예전 그림과 비교하면 요즘 그리시는 그림은 어떠신가요.
자연스럽게 그리게 되었어요. 잘 그린다는 건 테크닉적인 걸 말하는 거고, 자연스럽게 그린다는 건 멋 부리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그린다는 건데, 요즘에는 눈에 보이는 대로, 정직하게 그리려고 합니다. 테크닉이나 애써 부린 멋이 아니라 군더더기를 뺀 자연스러운 그림에 감동받는다는 걸 알게 되죠. 그림뿐 아니라 다른 예술 장르들도 다 그런 것 같아요. 글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조각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고 결국은 꾸밈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원점으로,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게, 소박하면서도 진실의 여운이 가득하게 말이죠.
만화 독자들은 이현세가 40대에 완성했을 『천국의 신화』와 혹시 그렸을지도 모를 미지의 작품들을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다. 그 작품들은 우리 만화의 큰 손실이었다. 그가 만화를 그리지 않은 6년 동안 한국 만화도 침묵 속에서 퇴보했다. 다시 창작을 위한 붓을 든 만화가 이현세가 다시는 외부적인 이유로 붓을 꺾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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