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하고도 또 어색하고도
2008.12.18

- 『리스본 쟁탈전』, 주제 사라마구
- 내 칼럼(을 빙자한 엉터리 잡설) 읽어?
- 그럼, 진규야. 것도 꼬박꼬박.
- 어떻게 생각해?
- 있잖아, 진규야. 참 인간적이야.
그때 깨달았다. 평소 내 글이 내 눈에 왜 그리도 어색했는지. 글을 이용한 위선이었다.

- 「그리스 사람」, 로맹 가리
맥락상 ‘공물’에서 두 가지 의미를 떼볼 수 있다. 하나는 공물供物. 신령이나 부처 앞에 바치는 물건을 이른다. 그러니까 종교적 예물이란 뜻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물貢物. 중앙관서와 궁중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여러 군현에 부과, 상납하게 한 특산물을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397 정축 태조 6년 8월에 수재를 당한 경상도 군현의 공물과 조세를 감면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고 공물이 국내용 물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중국으로 바치던 여인네들에게도 공식적으로 공녀貢女라는 명칭이 따라갔다. 그렇다면 내가 지불해야 하는 것은 공물供物과 공물貢物, 둘 중 어느 쪽일까? 원문에는 무어라고 되어 있을까? 대상은 달라도 ‘떡값’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둘 다일까? 하지만 나는 ‘제물’이라는 단어가 더 가깝지 않겠느냐, 그렇게 이해했다. 원래야 제사에 쓰는 음식물을 뜻하지만 비유적으로 희생물을 일컬을 때 더 많이 쓰이는 단어, 제물. 먹고 살기 위해 희생해 온 것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말이다.

- 『만년晩年』, 다자이 오사무
오래 전 우연히 보게 된 UCC 하나. 해외의 어느 한인교회 성가대가 예배 시간에 그룹 퀸Queen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부르는 동영상이었다. 이런, 불편했다. 서정적인 피아노 반주 몇 마디 후에 엄마, 나 막 사람을 죽였어요, 라는 고백이 주었던 충격을 잊지 못하던 탓이었다. 하긴 성서에서 죽고 죽이는 일이 뭐 그리 특별한 사건이라고, 그 정도쯤이야. 그래도 그렇지, 뭔가 겉돌고 있다는 느낌.
뒤이어 터져 나온 비스밀라Bismillah 부분에서는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비스밀라가 ‘베 에스메 알라’ 즉 ‘알라의 이름으로’의 줄임말 아니겠는가 해서. 잘난 척 좀 하자면 내가 전공한 페르시아어의 ‘베 너메 코더’와 통한다.
물론 안다. 하나님이 갓God이자 알라Allah라는 것. (알라는 하나님의 아랍어 표기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외국어로는 인도어의 데바Deva, 영어쟀 갓God, 한자어의 유일신唯一神, 라틴어의 데우스Deus, 히브리어로 야훼Yahweh 등과 같이 아랍어로 알라Allah입니다. 그러므로 ‘알라신’이란 말은 ‘하나님신’이란 뜻이니까 크게 잘못된 표현입니다. 이슬람의 신이 유일신이 아닌 다신교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어린이 이슬람 바로 알기』, 이희수) 그러니 어차피 같은 하나님을 부르는 거라면 종교 화합의 차원에서 God 대신 Allah가 등장한 것이 그리 몹쓸 짓만은 아니라는 것도. 그럼에도 느껴지는 어색함. 그것은 아마도 내가 심심유곡 사찰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를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아서 잠시 놀란 일을 무언가를 포용하는 데 있어 방해거리로 삼을 수는 없다. 크로스오버, 퓨전, 쓸 만한 명분도 많다. 그러니 편하게, 그렇게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나 어색함이 사람과의 관계로 들어가면 얘기는 달라진다.

-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토마스 만
외대 이문동 캠퍼스는 좁다. 재학생이나 졸업생이 아무리 눈 흘기며 웅성거려도 어쩔 수 없다. 좁은 건 좁은 거다. 널찍하니 호연지기를 키울 만한 고등학교에서 삼년을 버틴 나는 그 협소함을 더 크게 느끼고는 했다.
어떤 날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을 몇 번씩 마주친 적도 있었다. 강의실 복도에서, 분수대 벤치에서, 본관 앞길에서, 후문 식당에서 그리고 도서관 로비에서 하는 식으로. 해 떨어질 즈음이면 통성명의 유혹이 일면서 악수라도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외면 또 외면.
그렇다고 눈뿐만 아니라 말로도 이어가는 관계 속에는 어색함이 없느냐.

- 『시르트의 바닷가』, 쥘리앙 그라크
이모는 쌀쌀맞았다. 모르겠다. 엄마의 이복아우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고, 식모까지 부리고 살 만큼 여유를 누리는 자의 오만이었을 수도 있겠고, 성정 자체가 뾰족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모질었던 기억 몇 개.
일고여덟 살밖에 안됐던 나는 파를 못 먹었다. 몸에 좋은 건 꼭 가리려 든다고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그래도 엄마가 파를 내 입으로 쑤셔 넣는 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데 그 말을 들은 이모가 국대접에 다른 건더기 하나 없이 대파로만 삼분의 이를 채워놓고 먹으라고 했다. 국물이 줄지 않았다. 눈물로 도로 찼으니까.
이모네 근처에서 살던 내 또래의 친척남매가 놀러왔었다. 잘 먹고 잘 사는 게 분명한 멀끔한 도시 아이들이었다. 그 둘이 편을 먹고서 촌년인 나를 대놓고 놀려댔다. 너는 이런 거 모르지, 너는 이런 거 못 봤지, 기타 등등 레퍼토리를 바꿔가면서. 하지만 이모는 말리지 않았다.
잘 나가던 이모 집에는 진짜 전나무로 만든 크리스마스트리도 있었다. 70년대였다. 천장에 닿은 나무는 완벽한 환상이자 꿈이었다. 그 나무 앞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이 빠진 까만 얼굴에 비뚤어진 웃음이 가득한 커트머리 어린아이. 언니가 얼른 와서 나를 집으로 데려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이모 집이 힘들었다.

- 『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난 친척이 불편했다. 가족도 아니고 남도 아닌 그 어지중간. 파악할 수 없는 촌수의 헤아림 속에서 툭 툭 튀어나오는 수많은 아주머니와 아저씨들. 어려운 것이 지천이었던 유년에 그들이 아무런 위안이나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특히나 흉과 허물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만나서는 한껏 예의를 뽐내야 하는 그 시간이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싹수없는 년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나는 성공했다.
영 마뜩치 않은 종자, 그것이 오랜 친척들이 보는 여일한 나의 모습이다. 어쩌면 내 이런 무례하고 시건방진 태도의 원인이 내가 여직도 과거와 화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친척이 바로 그 과거의 영역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나는 삶 자체가 어색하다.

우리는 이런저런 도시에서, 이런저런 직업을 갖고, 이런저런 가정에 산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사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다. 우리가 진짜 살고 있는 곳은 우리가 하루를 보내는 그곳이 아니라, 무엇을 희망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희망하는 그곳이며, 무엇이 우리를 노래하게 만드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노래하는 그곳이다.
-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크리스티앙 보뱅
게다가,
말하자면 내가 당연하게 속할 만한 마땅한 사회 계층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기회에 자연스럽게 사람을 알게 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으며 그런 일이 있다 해도 내 자신의 잘못이긴 하지만 너무 피상적이고 냉랭했다. 그런 경우에 나는 자신 없이 뒤로 물러나 불편한 마음으로 타락한 화가하고라도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를 짧고 분명하게 말해서 나를 알아주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토마스 만
도리가 없다. 삶이 어색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수밖에. 예를 들자면 내 남편 같은. 또는 친구 B양이나 E양 같은.
5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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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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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2008.12.31
책방꽃방
2008.12.30
진달래
2008.12.24
그런 불편함을 느끼게 하시니 또 대단한 글입니다.
(잡설...이라뇨... 꼬박꼬박 찾아읽는 독자는 어찌합니까? ㅋㅋ
너무 하십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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