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래의 만화 절경] 더께 밑의 우리, 더께 너머의 우리
김미래 편집자가 소개하는 『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 돼?』. 어느 날 노부모와 함께 살게 된 딸이 쓴 유머러스하고 쌉쌀한 회고록.
글 : 김미래
202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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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의 팬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어떤 그래픽노블이 우리말로 번역되는 드문 호재가 생길 때, 그때 우리는 이미 그것의 원서를 가지고 있다. 그 원서는 이미 너덜너덜해졌거나 (우리의 게으름과 언어능력 부족으로 그것을 해지게까지는 못 했어도) 적어도 자연에 의해 재킷이 빛바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그래픽노블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순문학 작가가 그러듯이 ‘××개국 동시 출간!’되는 일보다는, 이미 한참 지난 뒤에, 그것의 진가를 수많은 전문가들이 인정(‘××주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명 비평가가 뽑은 ××권 중의 한 권’…)한 뒤에, 그것의 진면목을 알고 싶어 몇몇 호기심 있는 독자가 아마존으로 원서를 구매한 뒤에, 그러고서도 한참 지난 후에 번역되는 일이 더 잦다. 그러나 얼마나 시간이 지났든 한국어판 출간이란 우리 한 줌밖에 안 되는 그래픽노블 독자에게는 부정할 수 없는 호재이며, 약간은 서글프지만 그 결과물 중 상당수는 얼마 안 가 절판되고 만다. 


오늘 소개하려는 『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 돼?(We Talk About Something More Pleasant?)』 역시 내가 원서와 한국어판 두 가지로 가지고 있는 그래픽노블 중 하나다. 이 책은 비교적 한국어로 부지런히 번역되었지만, 지금은 절판되었는데, 당신에게 약간의 의지가 있다면 헌책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실 두 가지 판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원서 앞표지 중앙에 찍힌 memoir라는 장르를 언급하고 싶어서였다. 원서의 앞표지에 책 이름과 지은이 이름과 함께 놓인, 그것도 대문자로 찍힌 A MEMOIR. 우리말로는 회고록, 회상록, 자서전 등으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모종의 이유로 한국어판에는 ‘만화 에세이’라 옮겨졌다.) 자기 자신을 재료로 삼는 상당수의 그래픽노블을 좋아하는 사람은 memoir를 지나치기 쉽지 않다. 이 책은 라즈 채스트라는 딸이 아흔 살 넘은 부모와 함께한 마지막 몇 해를 기록한다. 하지만 라즈는, 내가 느끼기에 자기 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이고 자기 말을 어쩌다 하게 될 때면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라(엄마에 대한 비난이 될까 봐 부모 집을 청소하지도 못한다.), 독자는 그에 대해서보다는 그의 부모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게 된다. 절대적인 권력가형 어머니와 다정하지만 무력한 아버지는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시선을 독차지하고, 라즈는 같은 극에 출연하는 배우라기보다는 그 주인공들을 관찰하는 무대 밖 사람처럼 어정쩡 서 있다.



라즈 채스트, 『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 돼?』, 클, 22쪽


만약 이 원고가 아직 책이 아니었고, 내가 이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야 했다면, 그리고 저자에게도 딱히 이렇다 할 만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나는 이 만화에 ‘더께’라는 제목을 붙이자고 제안했을 것 같다. 더께는 내가 이 책에서 새롭게 배운 꽤 상징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더께란 과연 무엇인가. 찌든 것, 물건에 앉은 때, 겹으로 쌓인 것, 눌어붙고 덧붙은 것. 그것의 색상은 아마도 짙은 색, 새카만 색이겠지? 그런데 라즈의 표현을 따르자면 더께는 “평범한 먼지도 더러움도 1, 2주 닦지 않아 기름때가 낀 가스레인지도 아니다. 그건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껍데기”다. 어떠한 사물을 뒤덮은 투명한 껍질. “아마도 부모님이 늙고 지쳤기 때문에, 그래서 주변이 어떤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겼을 그 투명한 껍질은 모든 것, 어쩌면 라즈의 부모까지도 뒤덮었다.



같은 책,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15, 118, 121쪽


당신이 알아야 하는 것: 신체 상태는 최고점에 이르면 점진적으로 하락한다. 매년 당신은 조금 느려지고 살이 조금 처지고 그러다가 90세가 된다. 90세가 되면 상황은 훨씬 빠른 속도로 나빠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120살까지 살 방법을 찾고 싶다는 이들을 보면 묻고 싶다. “이보세요, 정신이 나갔어요?”


어찌 됐든 이것은 만화고, 우리를 웃게 하며, 그 웃음 중에는 배꼽이 빠질 만한 것도 수두룩하다. 대조적으로, 이것의 주제는 가볍지 않고, 상황은 한층 나빠진다. 시계는 늘어지고, 아버지는 선다우닝을 겪으며 이웃을 나치로 의심하고, 어머니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다가 이유 없이 무릎이 꺾여 낙상하며, 경찰 두 명이 오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못한다.(아버지의 도움을 기대했다면, 당신은 이 두 분의 나이를 잊은 것이다.)



같은 책, 146쪽


노인은 나쁜 소식을 듣고 또 듣게 되며(뇌가 기억하지 못하기에), 쇠약함은 날로 더해지고, 돈은 바닥을 드러낸다.



같은 책, 151쪽


부모가 사그라드는 과정을 지켜보며 라즈는 이제까지 상상해 온 한 인간의 ‘마지막’ 시기를 3단 만화로 그리기에 이른다. 그중 가운데 컷이 가장 길고 끈덕지고 비싸다는 것 또한 배운다. 지면의 한계가 없었다면 그 컷이 펼침면을 통과해 몇 페이지고 내달렸으리라. 



같은 책, 154쪽


그의 부모는 나이를 고려하면 상당히 건강한 편으로, 심장병이나 당뇨, 암도 없지만 95세에 이른 두 사람의 정신과 신체는 예외 없이 허물어지며, 더는 자신들의 아파트에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렇게 복지시설로 옮아간 그들의 방을 포근하게 꾸며주면서, 라즈는 독립한 자식의 첫 집을 꾸며주는 감정을 느낀다. 


모든 고통의 시기가 그렇듯 라즈의 이 시기에도 달콤한 찰나들이 박혀 있다. ‘배꼽까지 옷을 벗은 여자가 날아다니는 황새한테 심장을 찔’렸다는 어머니의 백일몽 시리즈와 간간이 써 내려간 시 연작의 첫 독자가 되는 것은 기껍다.



같은 책, 99쪽


우리 중 누구도 우리의 미래를 들여다볼 수는 없다. 늙어가는, 더 정확히는 죽어가는 어머니를 지척에서 관찰하여 그린다는 것은, 머잖아 딸인 자신이 맞닥뜨릴 미래를 미리 보는 셈이 된다. 그래서 라즈의 눈과 눈썹은 섬뜩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것을 향하듯 그렇게 시종일관 치켜 있는지도 모른다. DNA 상당수를 공유하는 몸과 정신을 지닌 이의 마지막 시기를 목격하는 것은 회고록을 넘어 자기 미래에 대한 예언이 되고, 이때 memoir는 1인칭 복수의 것으로 자리 잡게 되니까. 게다가 ‘우리’라는 감각을 이처럼 여실히 전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기호화된 2등신 만화체부터 진중한 데생, 낡은 텍스처가 그대로 드러나는 스냅까지, 복수의 목소리를 한데 담을 수 있는 매체가 바로 그래픽노블이기 때문이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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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래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2010년 문학교과서 만드는 일로 경력을 시작했고, 해외문학 전집을 꾸리는 팀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총서를 기획해 선보였다. 책을 둘러싼 색다른 환경을 탐험하고 싶어져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의 출판 분야에서 매니저로 지냈고, 현재 다양한 교실에서 글쓰기와 출판을 가르친다. 출판사뿐만 아니라 출판사 아닌 곳에서도 교정·교열을 본다. 편집자는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재료를 모아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다만 방침을 만들고 따르는 일에 힘쓰면서도, 방침으로 포섭되지 않는 것의 생명력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려고 한다. 직접 레이블(쪽프레스)을 만들어 한 쪽도 책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낱장책을 소개한 것도, 스펙트럼오브젝트에 소속되어 창작 활동을 지속해 온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창작자, 기획자, 교육자 등 복수의 정체성을 경유하면서도 이 모든 것은 편집이므로 스스로를 한 우물 파는 사람이라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