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배우의 연기는 자연스럽다
경쟁력보다 경쟁심이 충만한 배우가 널려 있지만 김혜자와 고두심은 수십 년간 부단히 연기력을 키워가는 희귀한 존재들이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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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열매 서로 부호

이름과 실상이 서로 꼭 맞다.
알려진 것과 실제의 상황이나 능력에 차이가 없다.

땅에 묻힌 지 50년도 넘은 미국 배우가 아침저녁으로 대한민국 TV 속을 서성거린다. 제임스 딘이다. 살아 있는 조인성의 어깨를 무심히 스치고 지나간다. 그를 끄집어낸 건 과학의 손이지만 그 중심엔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예술의 힘이 버티고 있다.


죽은 지 올해로 30년 된 엘비스 프레슬리. 들썩이는 무대(All Shook Up)에서 여전히 객석을 뜨겁게 달군다. 로맨틱이 클래식이 되는 과정은 발효와 닮았다. 그들은 이성의 사막에서 썩지 않고 감성의 바다에서 삭는다. 대중예술의 영웅은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기억되는 자다.

“드라마 속 어머니 하면 누가 떠오르십니까?”

주관식을 싫어하는 시청자도 이 물음엔 수월히 답한다. 만인의 연인은 때마다 바뀌어도 만인의 어머니는 좀체 달라지지 않는다. 확실히 설렘보다는 뭉클함이 오래간다.

3퍼센트의 구조조정 소문에도 냉기가 감도는 게 직장의 풍속도다. 칼바람 부는 대중문화계에서 오랜 세월 퇴출되지 않는 몇 사람. 연기자 김혜자도 그들 중 하나다. 그녀를 만나면 짓궂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고두심이 당신의 자리를 위협하는데…….”

자의식 강한 그녀는 뭐라고 답할까?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요?”

이게 그녀를 오랫동안 마주한 나의 예상 답안이다.

그녀에게 들은 말 중 가장 선연히 남는 게 ‘좋은 배우의 연기는 자연스럽다.’라는 평범한 명제다. 덧붙인다면 ‘자연스런 연기는 관객을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이야말로 부담감이 아닌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방송 80주년 특집 프로에서 시청자 천 명에게 물었더니 여성 연기자 부문은 고두심이 일 등, 김혜자가 이 등이었다. ‘고두심이 우리 시대 어머니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게 주최 측 해석이다. 아마 방송 70주년 프로에선 김혜자가 일 등이었을 것이다. 이보다 앞서 ‘더 퀸’이라는 외화 개봉을 앞두고 영국 여왕 자리에 어울리는 배우를 묻는 다소 엉뚱한 설문에선 김혜자가 1위, 고두심이 그 다음 순이었다.

실제론 딱 열 살 차이인 김혜자와 고두심은 ‘전원일기’에서 오랫동안 고부 사이였다. 세대교체의 논리라면 며느리에게 자리를 양보하슴 게 순리다. 사람들은 왜 순위에 이렇듯 연연할까. 우유라면 일 등급이면 충분한데도 사람은 반드시 일 등을 가려야 직성이 풀린다. 방송 100주년 특집에서 누가 일 등을 하건 이 두 배우는 부정할 수 없는 일 등급이다. 경쟁력보다 경쟁심이 충만한 배우가 널려 있지만 김혜자와 고두심은 수십 년간 부단히 연기력을 키워가는 희귀한 존재들이다.

이 봄엔 연기의 여왕을 무대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 김혜자는 ‘의심’이라는 뜻을 지닌 연극 ‘다우트의 앙코르 공연’에서, 고두심은 제목만 들어도 안기고 싶은 연극 ‘친정엄마’로 관객을 맞는다. 유명무실이 판치고 무대 밖에서도 거짓 연극을 일삼는 세태에서 순정을 의심할 여지없는 두 배우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는 건 퍽이나 운 좋은 일이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출판사의 사정으로 이번 회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철환 #사자성어 #김혜자
99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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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4.06

전원일기 김혜자는 기억하지만 고두심은 기억 못한다는.. 그런데 실제 나이 차가 열살밖에 안되는데 고부 사이를 연기할 수 있다니 그거 대단하네요. 적어도 20살 정도는 차이가 나는 게 보통 고부 사이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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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2.03.31

ㅎㅎ 이번엔 한자는 반듯하게 명!실!상!부! 혜자님의 모습에서 찾아볼수 있나요. 요즘 너무 혼신을 다해 연기하셔서 그런지 현실적인 캐릭터에서 더욱 다가선 빙의 된 모습이 비춰져서 ㅎㅎ 살짝 섬뜻한 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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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전

2011.08.15

호사가들의 입방정 비교프레임에 환장(?)한 언론과 사람들이 만들어낸 1등놀이에 김혜자님이 2등으로 각인되었군요.워낙 화끈한 all or nothing식의 사고가 우리에게 주는 쾌감이 있어서 그런지 익숙한 듯 보입니다. 얼핏보면 김혜자님이 자존심도 상할법한데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요?'라 대답하는 저 cool한 모습~ 이러한 모습을 보이려면 대단한 내공을 쌓아야 할듯 합니다. 인생이 묻어나와야 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 아닐까합니다. 조금 늦게 이 연재물을 보았는데 다른 것에 비해 연재물이 극히 적네요. 당시에 출판사 사정이 있었나 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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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환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어 교사로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MBC 방송사에 입사해 [일요일 일요일 밤에], [퀴즈아카데미], [우정의 무대], [대학가요제] 등 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연출했다.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OBS 경인TV 사장, JTBC 대PD,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아주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있다. ‘재미있게 살고 의미 있게 죽자’는 그가 40여 년간 고수해온 좌우명으로, 지금껏 좌우명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자부한다. 감사한 사람들 덕분이고,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고 재미있는 시와 노래를 흥얼거리며 살다 보니 어느새 인생의 의미를 짚어보는 나이가 되었다. 남은 날들을 더 재미있게 살다가 의미 있는 죽음을 맞는 것이 목표다. 방랑자였던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상상력이 남달랐다. 축구 명문이었던 학교를 다니면서도 그늘에 앉아 응원만 했고 악보도 못 그리면서 제멋대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실력 있고 정 많은 국어선생님을 만나면서 자신도 일찌감치 국어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했고 2년 반 동안 교단에서 문학도, 팝송도 즐겁게 가르쳤다. 제대 말년에 우연히 본 방송사 시험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신나게 연출하다가 틈나면 글 쓰고, 시간 나면 강단에도 서더니 언제부턴가 포털 사이트에 ‘유명한 PD’라고 치면 연관검색어로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뜬다. 사람들은 그를 [일요일 일요일 밤에], [우정의 무대], [대학가요제] 등을 연출한 전설의 ‘스타 PD’로 기억한다. ‘누군가 꿈을 이루면 그는 다시 누군가의 꿈이 된다’고 대학교수로 7년 반 동안 많은 방송인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살아있다’는 건 ‘꿈이 있다’는 거라고 속삭이는 그는 오늘도 꿈의 공장에서 30년째 현장을 서성이고 있다. 아직은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야 하는 희망과 행복이 있다고 믿는다. 한국방송대상 우수작품상(1990, 1991)을 비롯하여, 백상예술대상 우수작품상(1995), 방송위원회 선정 이 달의 좋은 프로그램상(1996), 경실련 선정 시청자가 뽑은 좋은 프로그램상(1998), 방송위원회 프로그램기획부문 대상(1997), 한국여성단체연합 평등방송 디딤돌상(1999),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가 주는 공로상(2002) 등의 수많은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그동안 『오블라디 오블라다』,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 『청춘』, 『사랑이 없으면 희망도 없다』, 『퀴즈아카데미 1, 2』, 『30초안에 터지지 않으면 채널은 돌아간다』, 『PD는 마지막에 웃는다』, 『주철환 프로듀서의 숨은 노래 찾기』, 『상자 속의 행복한 바보』, 『시간을 디자인하라』, 『나는 TV에서 너를 보았다』, 『스타의 향기』, 『거울과 나침반』, 『PD마인드로 성공인생을 연출하라』 등 15권의 책과 2장의 앨범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