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영의 <헤다 가블러>가 그 명성을 입증하고 있다. 때로는 서늘하게 조소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게 미소 짓는 이혜영의 헤다는 극 중 인물은 물론 관객의 마음마저 홀리며 그의 공허에 공감하게 만든다.
국립극단의 연극 <헤다 가블러>는 헨리크 입센이 1890년 발간한 희곡으로, 존재의 자유를 갈망하는 여성 헤다 가블러의 이야기다. 2012년 국립극단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헤다 가블러>를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렸고, 전회차 전석 매진됐다. 헤다 역을 맡은 이혜영에게는 제5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여자 연기상, 제49회 동아연극상 여자 연기상의 트로피가 주어졌다.
13년 만에 다시 돌아온 이번 공연에도 이혜영이 헤다 역으로 무대에 섰다. “처음 <헤다 가블러>라는 작품을 만났을 때 ‘이렇게 세련되고 충격적인 작품이 있다니’ 싶었다”고 털어놓은 이혜영은 “초연 때 혹시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을 보완하고, 공연을 완성하기 위해 다시 만났다. 모든 것을 해체하고, 새롭게 만들었다”고 했다. 일상을 지겨워하는, 권태와 공허 속에 살아가는 헤다는 표현하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이혜영은 헤다의 결핍과 억압, 욕망과 질투를 특유의 날 선 감각으로 풀어낸다. 덕분에 관객은 그러한 헤다에게 자연스럽게 공명하게 된다.
“인생에 한 번쯤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힘을 갖고 싶다”던 헤다는 죽음을 택하며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좌우한다. 그 자기파괴적 행위는 역설적으로 그의 실존 의지를 굳건히 하는 선택이다. 박정희 연출은 “죽음을 통해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그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라며 ”<헤다 가블러>는 여성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젠더를 초월한 한 인간 존재의 이야기다. 자신을 파괴하고, 창조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강렬한 총성으로 막을 올리는 오프닝, 나지막한 자장가와 함께 태워지는 원고, 느릿한 움직임 끝에 맞이하는 마지막…. 미학적 가치가 돋보이는 연출이 국립극단표 <헤다 가블러>의 매력을 배가한다. 적재적소에 사용되는 음악부터 헤다의 세계로의 몰입을 돕는 무대까지, 본질적인 연극의 맛을 제대로 알려주는 작품이다. 박정희 연출은 “관객분들이 헤다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좋겠다. 각자에게 거울 같은 작품이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공연은 오는 6월 1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이어진다. 이후 고양, 당진 등 지역 투어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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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솔희
뮤지컬 전문 매체 <더뮤지컬> 기자. 좋아하는 건 무대 위의 작고 완벽한 세상.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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