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어치 - 소중한 건 모두 공짜다
공기, 물, 부모로부터 받는 몸, 사랑, 이 모든 걸 돈 한 푼 내지 않고 무단 취득했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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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은 누구 닮은 것 같아?”
“엄마.”
“다른 사람들은 다 아빠 닮았다고 하던데?”
“나는 엄마 닮았다고!”

누가 봐도 아빠를 빼다 박은 딸아이가 아빠 닮았다는 소리가 싫은지 자꾸 엄마 닮았다고 한다. 본인도 아빠를 닮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말한다. 듣는 사람 마음이 별로다. 하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녀석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술 담배로 거칠어진 피부에 머리숱도 적고, 하도 웃어서 자글자글한 내 얼굴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게 본인에게는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겠는가. 억지로라도 아빠보다는 나아 보이는 엄마와 닮았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런 대답이다.

딸과 함께 거울을 보며 이빨을 닦다보면 솔직히 미안하다. 이목구비 어느 한 곳 예외 없이 닮았는데, 한 사람은 너무 젊고 한 사람은 너무 늙었다. 내가 녀석의 미래가 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돼서도 안 되지만, 왠지 아빠로서 주어야 할 것은 주지 않고 주지 않아도 되는 것은 준 것 같아서 미안하다. 물론 내가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딸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바라건대 이 이야기는 아내가 꼭 전해 주었으면 좋겠다. “네 아빠가 너 키우느라 젊었을 때 머리숱 몇 개는 더 빠졌단다.”라고.

밖에서는 돈 돈 돈 하면서 살지만, 사실 아이들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렇게 보석 같은 아이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머리숱이 다 빠져도 행복할 거라는 생각만 든다. 그 행복을 어떻게 돈으로 따질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소중한 것들은 공짜이거나 가격이 너무 저렴하다. 공기, 물, 부모로부터 받는 몸, 사랑, 이 모든 걸 돈 한 푼 내지 않고 무단 취득했다. 사실 이렇게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며, 그것만으로도 열심히 잘살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바쁘게 살다보니 이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다. 이참에 한꺼번에 만회해 볼란다. 고맙습니다 공기님. 정말 멋있어요 물님. 사랑합니다 덕수궁 돌담길님. 정말 눈부셨어요 남산 벚꽃님. 송구스럽습니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아참, 제사가 얼마 안 남았군요.


사실 첫째 딸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많다. 내 자식들 중에 우리 아버지를 본 사람은 첫째 딸이 유일하다. 자식 된 마음에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손자 한번 보여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정말 원하는 순간에 절묘하게 태어난 게 첫째 딸이다. 그 아이는 갓난아기 때 병상에 누워 계시던 우리 아버지 옆에서 두 팔 위로 올린 채 낮잠도 잤고, 한 손으로 아버지 얼굴을 가격하기도 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바로 그 순간 아버지가 보여준 행복한 미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아버지에게 구겨진 저고리 한 벌 사드린 적은 없지만, 그래도 생전에 당신을 닮은 손녀는 보여드린 셈이다.

조카 결혼식장에 갔다. 어느 할머니가 첫째 딸에게 다가와 “할아버지 눈을 가졌네”라고 말한다. 마음이 짠하다. 그렇지. 내 딸은 날 닮았고, 나는 우리 아버지를 닮았다. 젊은 아버지를 기억하는 노인들은 딸에게서 아버지 눈을 발견한다. 나를 닮았다는 소리에는 극구 부정하던 딸이 할아버지 닮았다는 소리에는 아무 말 하지 못한다. 기억도 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아버지와 그리고 할아버지와 이어져 있다는 사잽을 꽤나 흥미로워했다.

“내가 할아버지와 닮았어? 할아버지는 어디 있어? 아빠도 할아버지 닮았어? 할아버지는 왜 먼저 하늘나라로 갔을까? 보고 싶다.”

이 녀석은 누구와 결혼해 누굴 닮은 자식을 낳을까? 혹시 나를 닮지는 않을까? 나를 닮아 태어난 아이는 할아버지를 좋아할까? 아니, 그 애가 기억할 나이까지 내가 살 수 있을까? 하염없이 생각이 늘어진다. 사람이 죽으면 그냥 죽는 게 아니다. 자식이 살고 있고, 그 밑에 자식이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편안히 죽을 수 있다. 젊은이는 살고 늙은이는 죽고 이게 공평하다. 모든 게 먼 이야기가 아니다.

#30대
79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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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밤

2009.03.11

먼저 온 사람이 먼저 가고 나중에 온 사람은 먼저 온 사람보다 나중에 가는것이 공평하겠지요. 저도 어느새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모습을 닮아가는 엄마를 보며 가슴이 찡했던 기억이 납니다. 언젠가는 엄마도 외할머니처럼 그렇게 떠나버리실까, 더 잘해드려야지 하면서요.

오늘 아침에는 엄마가 뉴스에서 보신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구요. 고려대에 다니던 한 학생이 학비가 없어서 백방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가슴아프던지..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 공짜로 공기를 마시고 숲과 나무, 예쁜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편이 도움이 되겠죠.^_^;
그리고 가족이 함께 있어줘서 고마운 것도요. 값어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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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 맞습니다.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값없이, 평등하게 누구하나 구분없이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들의 아이라는 것이 그렇고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제가 하는 한 여인은 지체 1급지체장애로 힘들지만 온라인대학을 다니면서 하루하루 삶의 의미를 다져가고 있습니다. 힘들고 재정적으로 압박이 심하여 금방이라도 대학공부를 포기하고 싶었겠지만, 이 마저 포기한다면, 반복된 인생폐배자라는 생각이 굳혀질까봐 포기할 수 없다고합니다. 일반인에게 대학공부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1급장애인에게 공부는 소중한 삶을 다시금 일깨우는 연습과도 같았습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소중한 것이지만 소중한 것을 언제나 잊지않고 감사하며 귀하게 여기는 연습, 바로 그 점에 인생의 행복도 달려있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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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아빠

2009.03.01

내일이면, 첫 유치원에 가는 딸아이를 보며, 좀더 일찍 세상에 보여줄것 하면서 걱정이 앞섭니다. 30대 후반이라는 무게가 엄청 크게 느껴지지만, 이 글이 비슷한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가는것 같아 많이 위로가 되는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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