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소는 누가 키워?
설날은 무조건 좋은 날이었다. 세뱃돈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세월이 나와 세뱃돈 사이를 강제로 갈라놓으면서 설날은 그저 그런 날로 둔갑했다. 아니, 오히려 설날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일상보다 못한 날이 되기 일쑤였다.
201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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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은 무조건 좋은 날이었다. 세뱃돈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세월이 나와 세뱃돈 사이를 강제로 갈라놓으면서 설날은 그저 그런 날로 둔갑했다. 아니, 오히려 설날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일상보다 못한 날이 되기 일쑤였다. 해마다 설날 고속도로는 사람 인내력을 시험하는 장소로 변했다. 오랜만에 만난 집안 어른은 ‘아이고, 벌써 그렇게 (나이를) 먹었나’는 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진단했다. TV 뉴스는 설 명절을 맞아 형제끼리 칼부림한 사건을 보도했고 이때 평소보다 이혼 건수가 증가한다는 소식도 빼놓지 않았다.
세뱃돈과 멀어진 뒤 내게도 설날은 그리 유쾌한 날은 아니었다. 아침잠이 많은 탓에 기차 예매에 번번이 실패했고 고향으로 향하는 버스는 우리나라가 반나절 생활권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비웃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우리사회에 널리 존재하는 엄친딸, 엄친아의 검증되지 않은 신화를 들으며 열등감 폭발로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지워 갔다. 개똥이는 집을 샀대, 소똥이는 차를 샀대, 말똥이는 X르메스 백을 샀대…… 아니, 그렇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소는 누가 키워.
과거 소는 조상이 키웠다 - 영원불멸의 신화
그렇다. 소는 조상이 키웠다. 한국의 양대 명절인 설과 추석은 그 기원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상숭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설날에 지내는 차례나 추석 때 지내는 제사는 모두 조상에게 드리는 예(禮)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 제사에 관한 세부적인 규칙을 제정한 것이 유교다. 성리학을 집대성시킨 주자의 작품인 『주자가례』가 조선후기에 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 양인에게도 퍼지면서 제사는 한반도 전역에 스며든다. 한국의 유교가 주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원래 주자는 춘분, 하지, 추분, 동지 등 사절기에 행하는 제사를 으뜸으로 생각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오늘날에도 관찰되듯, 기일을 제외하곤 추석이나 설날에 행하는 의례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조상숭배에는 어떤 기능이 있을까? 단지 길흉화복을 내리는 주체가 조상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물론 묏자리를 잘못 써서, 제사에 들인 정성이 부족해서 집안이 망했다는 소문은 오늘날에도 흔하다. 길흉화복을 조상이 정해준다는 믿음은 과학문명이 메우지 못한 틈새시장에서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저명한 미국의 종교학자 머르치아 엘리아데의 논의를 빌려 오면, 제사는 영원불멸 신화의 동아시아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아데는 현대인과 고대인의 차이를 ‘영원’을 사는가 아닌가로 판단했다. 불로장생, 영원불멸은 인류의 꿈이다. 고대인은 영원회귀의 신화를 만들고 이를 실천하면서 영원 속에서 살았다. 이에 비해 계몽주의 이후 단선적 시간관을 갖게 된 현대인은 영원이라는 꿈을 잃었다. 실존을 찾으려는 실존주의가 결국 허무주의로 기우는 이유가 바로 영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신년의례는 고대인이 영원을 살기 위해 행하는 중요한 행사다. 고대인은 우주적 시간이 영원히 순환한다고 보았다. 태양은 빛이 강해지는 때가 있고, 약해지는 때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고대인의 시각에서 봤을 때 영원하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태양이 약해지는 시기에서 강해지는 시기(동지)에 성스러운 의례를 올리지 않으면 시간은 영원에서 역사로 변할지도 모른다. 역사는 언제든 끝날 수 있는 시간이다. 이때문에 신년의례는 시공간 맥락을 초월하여 중요하다. 크리스마스가 원래는 태양신 아폴론을 기념하는 날(동지)이었다는 사실은 신년의례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숱하게 많은 예 중 하나다.
현재 소는 우리 조상이 키운다 - 민족주의
설날은 우리의 신년의례다. 죽음을 해결하기 위한 동아시아 문명의 해답이다. 유교적 제사는 장자 상속의 원칙을 확고히 하여 종법 질서를 다진다. 원칙상 제사의 주체는 장자이며 이는 주자가 천명한 성리학적 종법 질서의 핵심이다. 기독교가 천국을 통해서, 도교가 장생법을 통해서, 불교가 깨달음을 통해서 영원불멸을 실천하려 했다면 유교는 장자에서 장자로 이어지는 ‘상속’으로 영원을 얻으려 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조선사회를 피로 물들인 장자와 차자, 장자와 서자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과 달리 현대 가정은 성리학적 종법 질서에 의해 운영되지 않을뿐더러, 이성을 강조하는 서구 계몽주의가 힘을 받으면서 조상숭배를 미신으로 배격하기 시작했다. 일부 개신교도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치부하며 거부했다. 그럼에도 설이나 추석 등 농경문화의 유산이 잔뜩 묻어 있는 명절은 여전히 우리에게 나라 전체가 기념하는 날이다. 신화는 사라지고 의례라는 껍데기만 남은 신화를 죽은 신화라고 한다. 유생이 아닌 우리가 여전히 명절을 지키는 것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죽은 신화’라고 할 만하다. 그렇지만 성리학이라는 세계관에서 봤을 때는 죽은 신화라고 불러도 무방하지만 민족주의적으로 봤을 때 명절은 살아 있는 신화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은 종교의 역할을 민족국가가 하게 되리라 예언했다. 세속화가 진행된 유럽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리고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에도 적용 가능하다. 그는 종교의 권위를 민족국가가 행사하면서 여러 가지 상징을 동원한다고 지적했다. 국기, 국가, 국가 공휴일의 지정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설날은 대한민국이라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정한 공휴일이다. 전통사회에서 설날은 중화주의를 기반으로 한 성리학적 세계관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오늘날의 설날은 민족주의적으로도 작동한다.
민족주의 담론 하면 생각나는 또 한 명의 사람, 베네딕트 앤더슨. 그는 『상상의 공동체』에서 어떻게 종교 공동체가 해체되고 공동체 단위가 민족으로 재편되었는지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이 중 우리의 설날과 관련 있는 지적이 중앙과 지방의 구분이다. 앤더슨은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 관리가 여러 지방을 다스리면서 엘리트 관료가 민족주의라는 관념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한 기능을 오늘날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이 수행한다. 언니, 누나, 오빠, 형, 동생이 각지에서 생활하다 한자리에 모인다. 우리의 일상을 벗어난 다른 공간을 대한민국이라는 공통 분모로 치환하는 힘을 설날은 부여한다.
미래 소는 누가 키울까 - 모더니티의 위기
유교였든 민족주의였든, 우리 사회는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대규모 명절을 공동체 차원에서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점점 그러한 사정이 녹록지 않다. 전통적인 가족이 해체되면서 명절을 지켜낼 기층 공동체가 약해졌다. 필자만 해도 어릴 때 명절 때 장자 혹은 장손의 집에 오지 않는 사람은 유령밖에 없었다. 무조건 와야 했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해가 갈수록 이래서 못 온다, 저래서 못 온다 하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지금과 같은 명절 풍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재생산이 필요하다. 가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출산율은 뒤에서 세계 1위를 지키고, 그나마 있던 가정도 깨지는 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엘리자베트-게른샤임 벡과 그의 남편 울리히 벡은 모더니티가 모더니티의 위기를 가져 왔다고 분석한다. 계몽주의로 대변되는 근대성이 근대성에 위기를 가져온다는 역설 말이다. 가족의 해체와 관련해서 생각해본다면, 계몽주의가 드높인 기치였던 개인주의는 종전에 종교공동체가 자행한 억압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측면이 있지만, 이혼율의 급증이나 출산율의 저하와 같은 공동체 차원에서 부정적인 기능을 했다.
20년 전, 설날 큰집에는 수십 명이 모였다. 아버지가 8남매, 어머니가 4남매였으니 어른들께 인사만 드려도 연휴는 다 갔다. 큰아버지와 외삼촌께 받는 세뱃돈은 쏠쏠했다. 그 돈으로 평소 사고 싶은 책이나 듣고 싶은 음반을 샀다. 세월이 흘러 2011년 설. 사촌 중에는 결혼을 안 하거나 못한 사람도 많고 이미 가정을 깬 사람도 있다. 결혼해도 몇 년째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 : 결혼했으나 자녀를 갖지 않는 맞벌이 부부)을 표방하며 외국여행을 떠나는 사촌도 있다. 그들은 설 명절 때 친척끼리 모이는 자리에 끼지 않는다.
이런 설이 반복되다 보니 2011년 설, 큰집에 모인 사람은 한 자리수에 불과했다. 큰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TV를 켰더니 뉴스에서는 친척끼리 모여 한복을 입고 윷놀이하는 장면을 보도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 말씀 하셨다. “아직도 저런 집이 있구나”. 나 역시 그 장면이 신기하면서 부럽고, 약간 씁쓸하게 느껴졌다. 내년 설날에는 어릴 때 친하게 놀았지만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J형과 술 한 잔 꺾고 싶다.
세뱃돈과 멀어진 뒤 내게도 설날은 그리 유쾌한 날은 아니었다. 아침잠이 많은 탓에 기차 예매에 번번이 실패했고 고향으로 향하는 버스는 우리나라가 반나절 생활권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비웃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우리사회에 널리 존재하는 엄친딸, 엄친아의 검증되지 않은 신화를 들으며 열등감 폭발로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지워 갔다. 개똥이는 집을 샀대, 소똥이는 차를 샀대, 말똥이는 X르메스 백을 샀대…… 아니, 그렇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소는 누가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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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소는 조상이 키웠다 - 영원불멸의 신화
그렇다. 소는 조상이 키웠다. 한국의 양대 명절인 설과 추석은 그 기원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상숭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설날에 지내는 차례나 추석 때 지내는 제사는 모두 조상에게 드리는 예(禮)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 제사에 관한 세부적인 규칙을 제정한 것이 유교다. 성리학을 집대성시킨 주자의 작품인 『주자가례』가 조선후기에 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 양인에게도 퍼지면서 제사는 한반도 전역에 스며든다. 한국의 유교가 주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원래 주자는 춘분, 하지, 추분, 동지 등 사절기에 행하는 제사를 으뜸으로 생각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오늘날에도 관찰되듯, 기일을 제외하곤 추석이나 설날에 행하는 의례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조상숭배에는 어떤 기능이 있을까? 단지 길흉화복을 내리는 주체가 조상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물론 묏자리를 잘못 써서, 제사에 들인 정성이 부족해서 집안이 망했다는 소문은 오늘날에도 흔하다. 길흉화복을 조상이 정해준다는 믿음은 과학문명이 메우지 못한 틈새시장에서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저명한 미국의 종교학자 머르치아 엘리아데의 논의를 빌려 오면, 제사는 영원불멸 신화의 동아시아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아데는 현대인과 고대인의 차이를 ‘영원’을 사는가 아닌가로 판단했다. 불로장생, 영원불멸은 인류의 꿈이다. 고대인은 영원회귀의 신화를 만들고 이를 실천하면서 영원 속에서 살았다. 이에 비해 계몽주의 이후 단선적 시간관을 갖게 된 현대인은 영원이라는 꿈을 잃었다. 실존을 찾으려는 실존주의가 결국 허무주의로 기우는 이유가 바로 영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신년의례는 고대인이 영원을 살기 위해 행하는 중요한 행사다. 고대인은 우주적 시간이 영원히 순환한다고 보았다. 태양은 빛이 강해지는 때가 있고, 약해지는 때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고대인의 시각에서 봤을 때 영원하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태양이 약해지는 시기에서 강해지는 시기(동지)에 성스러운 의례를 올리지 않으면 시간은 영원에서 역사로 변할지도 모른다. 역사는 언제든 끝날 수 있는 시간이다. 이때문에 신년의례는 시공간 맥락을 초월하여 중요하다. 크리스마스가 원래는 태양신 아폴론을 기념하는 날(동지)이었다는 사실은 신년의례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숱하게 많은 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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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소는 우리 조상이 키운다 - 민족주의
설날은 우리의 신년의례다. 죽음을 해결하기 위한 동아시아 문명의 해답이다. 유교적 제사는 장자 상속의 원칙을 확고히 하여 종법 질서를 다진다. 원칙상 제사의 주체는 장자이며 이는 주자가 천명한 성리학적 종법 질서의 핵심이다. 기독교가 천국을 통해서, 도교가 장생법을 통해서, 불교가 깨달음을 통해서 영원불멸을 실천하려 했다면 유교는 장자에서 장자로 이어지는 ‘상속’으로 영원을 얻으려 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조선사회를 피로 물들인 장자와 차자, 장자와 서자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과 달리 현대 가정은 성리학적 종법 질서에 의해 운영되지 않을뿐더러, 이성을 강조하는 서구 계몽주의가 힘을 받으면서 조상숭배를 미신으로 배격하기 시작했다. 일부 개신교도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치부하며 거부했다. 그럼에도 설이나 추석 등 농경문화의 유산이 잔뜩 묻어 있는 명절은 여전히 우리에게 나라 전체가 기념하는 날이다. 신화는 사라지고 의례라는 껍데기만 남은 신화를 죽은 신화라고 한다. 유생이 아닌 우리가 여전히 명절을 지키는 것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죽은 신화’라고 할 만하다. 그렇지만 성리학이라는 세계관에서 봤을 때는 죽은 신화라고 불러도 무방하지만 민족주의적으로 봤을 때 명절은 살아 있는 신화다.
민족주의 담론 하면 생각나는 또 한 명의 사람, 베네딕트 앤더슨. 그는 『상상의 공동체』에서 어떻게 종교 공동체가 해체되고 공동체 단위가 민족으로 재편되었는지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이 중 우리의 설날과 관련 있는 지적이 중앙과 지방의 구분이다. 앤더슨은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 관리가 여러 지방을 다스리면서 엘리트 관료가 민족주의라는 관념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한 기능을 오늘날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이 수행한다. 언니, 누나, 오빠, 형, 동생이 각지에서 생활하다 한자리에 모인다. 우리의 일상을 벗어난 다른 공간을 대한민국이라는 공통 분모로 치환하는 힘을 설날은 부여한다.
미래 소는 누가 키울까 - 모더니티의 위기
유교였든 민족주의였든, 우리 사회는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대규모 명절을 공동체 차원에서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점점 그러한 사정이 녹록지 않다. 전통적인 가족이 해체되면서 명절을 지켜낼 기층 공동체가 약해졌다. 필자만 해도 어릴 때 명절 때 장자 혹은 장손의 집에 오지 않는 사람은 유령밖에 없었다. 무조건 와야 했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해가 갈수록 이래서 못 온다, 저래서 못 온다 하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지금과 같은 명절 풍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재생산이 필요하다. 가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출산율은 뒤에서 세계 1위를 지키고, 그나마 있던 가정도 깨지는 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엘리자베트-게른샤임 벡과 그의 남편 울리히 벡은 모더니티가 모더니티의 위기를 가져 왔다고 분석한다. 계몽주의로 대변되는 근대성이 근대성에 위기를 가져온다는 역설 말이다. 가족의 해체와 관련해서 생각해본다면, 계몽주의가 드높인 기치였던 개인주의는 종전에 종교공동체가 자행한 억압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측면이 있지만, 이혼율의 급증이나 출산율의 저하와 같은 공동체 차원에서 부정적인 기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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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설날 큰집에는 수십 명이 모였다. 아버지가 8남매, 어머니가 4남매였으니 어른들께 인사만 드려도 연휴는 다 갔다. 큰아버지와 외삼촌께 받는 세뱃돈은 쏠쏠했다. 그 돈으로 평소 사고 싶은 책이나 듣고 싶은 음반을 샀다. 세월이 흘러 2011년 설. 사촌 중에는 결혼을 안 하거나 못한 사람도 많고 이미 가정을 깬 사람도 있다. 결혼해도 몇 년째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 : 결혼했으나 자녀를 갖지 않는 맞벌이 부부)을 표방하며 외국여행을 떠나는 사촌도 있다. 그들은 설 명절 때 친척끼리 모이는 자리에 끼지 않는다.
이런 설이 반복되다 보니 2011년 설, 큰집에 모인 사람은 한 자리수에 불과했다. 큰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TV를 켰더니 뉴스에서는 친척끼리 모여 한복을 입고 윷놀이하는 장면을 보도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 말씀 하셨다. “아직도 저런 집이 있구나”. 나 역시 그 장면이 신기하면서 부럽고, 약간 씁쓸하게 느껴졌다. 내년 설날에는 어릴 때 친하게 놀았지만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J형과 술 한 잔 꺾고 싶다.
10개의 댓글
필자
손민규(인문 PD)
티끌 모아 태산.
나이기를
2012.03.21
prognose
2011.11.25
kenziner
201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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