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수 인터뷰
0과 1로 집합된 디지털 세상은 언제나 빠른 결과를 원한다. 일은 물론이고, 사랑도, 우정도, 심지어 음식도 빨리 나와야 한다. 이런 속도에 길들다 보니 당장 결말이 안 나오면 과정이 어떻든 평가절하하기 일쑤다.
201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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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과 1로 집합된 디지털 세상은 언제나 빠른 결과를 원한다. 일은 물론이고, 사랑도, 우정도, 심지어 음식도 빨리 나와야 한다. 이런 속도에 길들다 보니 당장 결말이 안 나오면 과정이 어떻든 평가절하하기 일쑤다.
이렇게 조급함이 우선시되는 시대에서 사회가 열광하는 작품을 탄생시키는 인물들은 갑작스럽게 탄생하지 않는다. 슬로우 스타터. 남보다 조금 늦을 수 있지만, 그 시기에 다져진 공력은 반짝 스타가 아닌, 하나의 전성기를 이끌어주는 원천이 된다.
2000년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하나인 조영수는 그런 인물이다. <대학가요제> 입상 후, 앨범 실패와 입대라는 기나긴 어둠의 터널에서도 꿈을 놓지 않았고, 20대 후반이라는 뒤늦은 작곡가 데뷔에도 조급하지 않은 채 뚝심 있게 한 길을 걸었다.
그렇게 쏟아 부은 정성은 에스지 워너비(SG Wannabe )의 「사랑하길 정말 잘했어요」, 「내 사람」, 「라라라」, 씨야(SeeYa)의 「여인의 향기」 같은 미디엄 템포 발라드로 흥행을 이끌며 가요의 한 트렌드를 책임졌다. 그뿐인가, 2007년부터는 매년 평균 60여 곡 가까이 발표하면서 괴물에 가까운 집중력을 발휘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이런 부지런함에 그는 “다른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그냥 곡 쓰는 데에만 투자할 수 있어서 가능한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슈퍼스타 K2>의 반응이 좋을 걸 예상했나.
“전혀 생각 못했어요. 프로그램 출연은 시작 전부터 요청이 왔었는데 답을 못 내렸어요. 녹음이 많아 시간적 여유가 없고, 방송을 많이 안 해서요. 계속 거절하다가 부탁을 많이 해서 하게 됐는데 첫 미션, 리메이크 미션 등 중간에 여러 번 후회한 적도 많았어요. 결과적으로 끝에 「언제나」가 나오면서 허각이라는 가수가 잘됐고, 이렇게 시청률 높은 줄 몰랐는데 어딜 가도 다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허각의 「언제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방송이 원래 그렇잖아요. 시간이 촉박하고, 최후의 2인이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보면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장재인과 존박을 생각했었으니까요.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미션까지 써야 할 걸 알고 있어 구상을 많이 했는데, 곡을 미리 쓸 순 없잖아요. 누가 될지 모르니. 마지막 주에 결과가 딱 나왔는데 “아차” 싶었죠. 허각이었구나. 시간은 1주일 남았고, 허각과 존박을 생각하며 곡을 써야 할 시간은 이틀밖에 없었어요. 만약 이 프로그램이 대중적인 관심이 많지 않았다면, 좀 더 음악적인 곡을 썼을 것 같아요. 그게 맞는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이들이 화제가 되어서 10대 20대만의 음악이 아닌, 거창하진 않지만 “국민가요를 쓰자.”가 모토로 됐어요. 그런 면에서 “곡은 정말 쉽게, 대중적으로 아줌마 아저씨도 실망하지 않는 쉽게 부를 수 있는 곡을 만들자.”가 「언제나」였죠.”
당시 표절 얘기가 있었다.
“일단 발을 내디딘 신인가수에게 오점을 남긴 부분에서 허각한테 되게 미안했어요. 그 표절 시비가 났던 곡이 디셈버(December)의 「별이 될게」란 곡인데요. 그게 제가 가르치는 동생 곡이에요. 그래서 항상 곡을 쓸 때, 그 친구 곡을 손봐주고, 「별이 될게」도 손봐훁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 감성이 들어갔던 것 같아요. 보통 표절 시비가 오래가는데, 원작자가 해명해서 빨리 끝났다고 생각해요.”
조영수의 곡이 사랑받는 이유가 뭔가.
“처음 음악 할 때는 어렸을 때부터 흑인 음악, 알앤비, 소울, 재즈를 정말 좋아해서 누구보다도 화성에 자신 있고 공부를 많이 했어요. 음악 시작 전에는 대중작곡가들 보면서 “코드가 왜 저럴까?” 생각했었는데, 만들고 나서부터는 시선이 바뀐 게, 가장 중요한 게 멜로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화성, 편곡의 화려함이 아니고 대중가요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편하게 듣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것에 가치를 두었어요.
결정적으로 2006년에 에스지 워너비(SG Wannabe )의 「내사람」을 썼을 땐대요. 후회가 많았는데, 택시를 타고 가다 어느 라디오에서 한 50대 부부 사연이 나왔어요. 남편분이 올린 거였는데, 젊었을 때 부인에게 해준 게 없다가 이제 좀 살만해졌다, 근데 아내가 암에 걸렸다, 시한부 인생이다, 부인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데 「내사람」이란 곡을 신청한 거예요. 너무 찡하고 감동적이고, 제가 음악 하면서 누군가 내 음악을 듣고 위로를 받고 위로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 이후부터 쉬운 음악으로 초점을 맞춘 것 같아요.”
멜로디를 어떻게 떠올리는가.
“곡 쓰는 스타일은 집중력인 것 같아요. 가끔 티아라(T-ara)의 「너 때문에 미쳐」도 그렇고 댄스곡, 콘셉트 있는 곡은 리듬부터 찍고 거기다 화성 넣고 스타일이나 멜로디 따로 입히고 이런 식인데, 제가 발라드가 많잖아요. 그런 곡 쓸 때는 피아노 치면서 동시에 멜로디를 떠올려요. 그렇게 안 되면 자꾸 꼬이더라고요.”
처음에 친 멜로디를 수정하나 아니면 그대로 믿고 가나.
“믿고 가는 경우도 있고, 다음날 스스로 들어봤을 때 아쉬우면 수정하고요. 대부분 중요한 후렴 부분은 처음 썼던 걸로 해요.”
작곡가로 봤을 때 본인의 곡 중 멜로디가 가장 좋은 노래는.
“<이 죽일 놈의 사랑>(2005)이란 드라마에 주제곡(「이 죽일 놈의 사랑」)을 이수영이 불렀는데, 데모 음반을 승훈 형이 듣고 말씀하셨어요. “이 곡이 지금 잘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가치를 인정받을 곡이다.” 그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곡보다 히트한 것은 아니지만, 일 년이 지나서 거짓말처럼 코코리(Coco Lee)가 리메이크하고 대만의 어느 가수가 리메이크하고, 3~4 가수가 리메이크를 다 하더라고요. 보통은 우리나라에서 히트한 곡을 리메이크 하는데, 그때 그 말이 생각났어요.”
조영수 곡의 핵심은 무엇인가.
“곡을 쓰면서 항상 생각하는 게 간결함이에요. 소박하다는 느낌은 아니고, 어떤 대선이 있으면 그걸 굉장히 중요시 생각해요. 더 멋있게 보이려고 리듬, 선율을 쪼개는 것 보다, 메인 멜로디 자체를 지키는 편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들었을 때, 간결하고 한 번에 귀에 남고 이런 느낌이 좀 있는 것 같아요.”
「라라라」의 마지막 부분. 그건 어디서 떠오른 건가.
“그건 가이드 할 때부터 “라라라”였어요. 작사를 안영민 씨가 했는데, 거길 살렸더라고요.”
너무 많은 곡을 쓰는 것은 아닌가.
“다른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그냥 곡 쓰는 데에만 투자할 수 있어서 가능한 것 같아요. 지금은 술도 끊었거든요. 먹어도 두 달에 한 번 정도. 그게 특별한 능력이나 재주는 아닌 것 같고요. 처음 시작할 때는 곡 쓰는 게 재밌고, 내 곡이 발표되어 길에서 나오고, 지하철에서 벨소리가 나오면 내 곡이고 해서 정말 재밌게 썼어요.”
가수와의 관계에서 어떤 점에 역점을 두나.
“에스지 워너비나 기존의 가수 분들은 너무 잘 알아서 상상만 해도 곡이 나오는데, 처음 작업할 때는 그 가수의 1집부터 모두 들어봐요. 그래서 어떤 음역이 좋고 왜 이 사람을 좋아하나 나름의 판단을 해요. 그걸 부각해서, 더 극대화하거든요. 어떤 감성을 좋아하는지 나름 분석하고 파악하죠.”
다시 해보고 싶은 가수는.
“인연을 소중히 여겨서 보통 한 번 작업한 가수는 계속 가는 경우에요.”
많은 곡이 사랑을 받았다.
“2007년도에는 순위 1, 2, 3, 4, 5, 7, 9위에 제 노래가 올라간 적이 있었어요. 1위가 이기찬의 「미인」, 2위가 씨야(Seeya)의 「미워요」, 3위는 에스지 워너비의 「가시리」, 4위가 PK헤만과 이지혜가 부른 「Evergreen」 등.”
그럴 때, 행복과 동시에 부담되지도 않았나.
“기분 좋은 부담감인데요. 다음에 또 이럴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을 했어요.”
지금까지 같이 작업한 가수 중 인상적인 가수는 누구인가.
“제가 평가하기엔 좀 그렇지만, 누구나 다 아는 이승철이요.”
본격적인 작곡가 생활 이후, 단기간에 상당히 많은 제의가 들어왔다.
“정말 운인 것 같아요. 제가 데뷔하자마자 공동 작업을 많이 했어요. 박근태 씨랑 작업하면서 많이 인정들을 해주셨고, 기회를 많이 준 거죠. 그래서 소문이 많이 났고, 제작자가 모이더라고요.”
후회되는 작품은.
“딱 하나 있는데요. 이효리의 「그녀를 사랑하지마」. 미디엄 템포 한창 할 때 쓴 곡인데, 원래 이효리에게는 「미인」을 줬지만, 김광수 사장님이 발라드 말고 미디엄 템포를 원해서 다시 쓴 게 「그녀를 사랑하지마」에요. 그 당시 소몰이 때문에 스트레스 많았어요. 이효리만은 안 하길 바랬죠. 분명히 주면 욕을 미친 듯이 먹을 거고. 그래서 반대했는데, 당시 제작자의 관계도 그렇고 기를 꺾을 순 없었어요. 곡이 나온 날도 제가 썼지만 듣기 싫은 기분이었어요. 근데 또 타이틀을 그걸로 민 거예요. 저는 미칠 것 같았죠.”
의뢰에 대해 거절을 많이 하는가.
“거절 정말 못 해요. 곡을 많이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떻게 보면 되게 우유부단인 것 같아요. 싫은 말도 잘 못하고 누가 부탁하면 “해볼게요.” 이렇게 대답하거든요.”
드라마 O.S.T에 매년 참여하고 있다.
“평균적으로 일 년에 1곡정도 참여하고 있는데, 보통 제가 작업하는 양에 비해선 많이 안 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많이 하고 싶어요.”
<대학가요제> 대상 이후, 상당한 공백 기간에도 음악의 끈을 놓으려 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다.
“1996년도, 21살 때 <대학가요제>에 나갔었고, 음반도 냈었어요. 그때 완전히 망했죠. 그 뒤로 음악을 너무 하고 싶은데, 길이 없는 거예요. 이후 입대했고, 군대에서 이어나갈 수 있었던 건 중대장님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작곡할 수 있도록 건반을 갖고 오게 허락해주셨죠. 상병 때부터는 밤만 되면 자유 시간에 키보드로 곡을 쓰고 그랬어요. 26살 때 제대하면서 바로 복학했는데, 공부는 너무 하기 싫고, 마음은 음악에 가 있었죠. 그때는 막막해서 직업으로 음악 할 생각도 못했어요. 제 주위에 음악 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고요. 그 길이 나에게 열릴까 하는 고민 탓에 졸업 잘하고 회사 다닐 생각 했는데, 그런 와중에 노래하는 친구 몇을 알게 됐어요. 앤드(AND)를 만나면서 그는 노래하고, 저는 곡을 쓰고 하다가 그때 그 친구 음반 프로듀서를 박근태 씨가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박근태 작곡가를 처음 알게 됐고, 근태 형이 저에게 되게 잘해주셨어요. 음악 들으시더니 고민도 안 하시고 바로 했던 게 옥주현 싱글이었어요. 그때부터 대중가요의 길을 들어선 거죠. 운이 좋았던 거예요.”
‘코어 콘텐츠 미디어’와의 인연은 상당한 것 같다.
“아무래도 김광수 사장님과는 콤비였죠. 에스지 워너비, 다비치, 씨야, 티아라, 초신성 등. 고마운 사람이고, 어떻게 보면 저에게 가장 많은 기회를 주고 가장 많이 믿어줬어요. 보통 제작자와 작곡가 사이에서 10곡이 다 히트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한 번 안 되면 다른 사람 찾거나 하기 마련인데, 사장님은 끝까지, 지금도 저를 믿어줘요.
아마 작년까지 제가 쓴 곡이 80~90퍼센트가 김광수 사장님과 한 곡이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음악 범위가 그것 때문에 더 적어질 거란 생각을 했어요. 아무래도 좀 더 다양한 곡을 쓰려면 조금은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년부터는 의도적으로 다른 제작자의 의뢰도 받고 있어요. 제가 재밌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매년 등록되는 곡수가 엄청나다. 이게 진정 가능하단 말인가.
“작년까지는 그랬는데요. 올해부터는 나이도 조금 들었고, 건강도 신경 써야 하고, 주위 사람도 챙겨야 할 때가 됐고, 그전에는 앞만 보면 달려야 했거든요. 지금은 제 주변의 동생분과 같이 잘되는 거에 초점을 맞추려고 해요.”
음악의 길로 인도한 아티스트와 음반이 있다면.
“보이즈 투 멘(Boyz II Men)의 요. 그전까지는 클래식 아니면 재즈를 좋아해서 재즈나 아카펠라 음반은 거의 다 들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고1 때 같은 반 아이가 이어폰을 계속 꽂고 있는 거예요. 수업시간에도 음악을 몰래 듣는 녀석이었는데, 뭐냐고 물어보니 보이즈 투 멘 1집이었어요. 아카펠라가 딱 흘러나오는데, 그게 첫 흑인음악을 접했을 때고 완전히 미쳤었죠. “세상에 이런 음악이 있구나!!!” 딱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 뒤로 그 친구와 계속 흑인 음악만 찾아 듣고 고2 때 <별밤 뽐내기 대회>에 아카펠라로 나갔어요. 아마 그 친구를 안 만났더라면 지금 음악 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 있더라도 재즈나 클래식 같은 다른 분야의 사람일 수도 있겠죠. 후에 그 친구와는 <대학가요제>도 같이 나갔어요.”
현재 작곡가 중 최고는 누구라고 생각하나.
“국외는 너무 많은 것 같아요. 흑인 음악 하는 사람은 다 좋아하니까요.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의 음악을 듣고 자랐고, 베이비페이스(Babyface)나 퀸시 존스(Quincy Jones)는 절대 우상입니다. 국내 작곡가 중에선 현재는 박진영씨. 무엇보다 센스가 있는 것 같아요. 그분은 직접 노래하고 춤을 추는 가수고, 연예인이고, 인기란 개념에서 사람들이 뭘 좋아할 거라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인데요. 제가 가지지 못한 거죠. 단순히 음악적으로 작곡을 얘기하기 전에 전체적인 작곡 프로세스 봤을 때 너무 센스 있게 잘하는 것 같아요.”
소몰이 열풍의 핵심이었다.
“지금 와서 후회하지 않아요. 항상 트렌드라는 게 있는 것이고, 지금은 걸 그룹이잖아요. 비판한다고 해서 그게 바뀌는 것도 아니고. 대중들이 원하니까, 그만큼 많이 사랑받은 부분에서 스스로 점수를 더 주고 싶어요.
물론 제가 대표로 욕먹는 느낌도 들어요. 제가 쓴 곡보다 다른 작곡가들이 따라서 쓴 곡이 더 많은데 욕은 저에게 가장 많이 왔으니 말이죠. (김)진호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에스지 워너비가 최고고 대표였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죠. 그건 정말 모순 같아요. 약간 기분 나쁘기도 하지만, 대표가 됐으니까요. 그리고 2007년부터는 그런 스타일의 곡을 잘 안 썼어요. 「미인」 쓰면서 발라드 곡을 썼는데, 그런 글을 봤어요. 다른 발라드에 제 이름만 들어가면 다 미디엄 템포다. 뭐 그냥 무작정 욕을 하는 사람이 꽤 많은 것 같아요.”
소속사를 설립하고 1호로 만든 가수가 숙희다. 어떤 점을 보고 결정하게 됐나.
“첫째는 목소리였어요. 숙희 처음 본 게 가이드 뜬 곡을 숙희가 불렀어요. 누가 소개해줘서 한 건데, 나카시마 미카(Nakashima Mika) 같은 감성이 있는 거예요. 「눈의 꽃」을 불렀는데, 정말 원작에 뒤지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하더라고요. 목소리 정말 좋다. 그게 처음이고, 제작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죠. 그때는 회사를 차리기 바로 직전 단계였는데, 여러 사정으로 거절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전에 여러 기획사 돌아다니면서 상처를 많이 당해서 겁을 좀 먹고 있었어요. 그 뒤로 3년 정도 계속 못 보다가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다시 물어봤는데, 그때 예스를 한 거죠.”
현재 가수로서의 욕심은 어떤가.
“처음부터 가수의 꿈은 없었어요. <아는 여자>(2004) OST를 부른 건 가수가 섭외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부른 거고,(2007)는 이유가 있었어요. 당시에 미디엄템포로 한 창 욕을 먹을 때라,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뭔지 보여주고 싶어서 아카펠라 곡을 불렀던 거예요.”
대학가요제 출신자로서 작년 대학가요제에 심사를 맡았다.
“<대학가요제>를 심사하면서 기분은 정말 최고였어요. 15년 전에 제가 나가서 봤던 심사위원들은 노영심, 김현철, 이문세 씨, 이런 분들이었는데, 그 꿈같던 자리에 제가 왔다는 자리에 너무 기분이 좋았고, 되게 뿌듯하고, 방송하기 전에 멘토 역할도 했어요. 저희 사무실 와서 편곡 같이 도와주고 코드도 좀 봐주고 그러면서 친해졌는데, 그런 과정에서 음악 선배로서 의미를 많이 찾게 됐죠.”
본인이 어떤 작곡가인 것 같나.
“현재로서는 대중이 원하는 음악을 하는 작곡가이고, 목표는 그게 아니지만, 후대에 봤을 때는 정말 “모든 장르를 잘하는 작곡가”라고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조영수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처음은 박근태 작곡가님 만난 것. 그다음엔 김광수 사장님과 에스지 워너비를 만나게 된 것. 그리고 이기찬의 「미인」 나왔을 때. 그때 스스로는 아닌데, 주위에서 “발라드도 대박이다.” 라고 했어요. 그전에는 제가 그런 곡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 안 했나 봐요. 형석 형이 이런 얘길 했어요. “너 이제 발라드도 하니?” 저는 원래 발라드를 많이 썼던 사람인데, 그때부터 스스로 자신감이 더 생겼죠.”
7년간 제일 힘들었던 때는.
“항상 그런 것 같아요. 언제가 딱 없어요. 곡 쓰기 바로 전. 너무 힘들고 죽을 만큼 힘들다가 곡을 다 쓰면 너무 행복하다. 그러다 또 힘들고. 항상 그게 반복이에요.”
3년 내리 랭킹 1위다. 그래서 정말로 돈을 많이 벌었나.
“작곡가 중에 제일 많이 벌었겠죠. (웃음)”
“노래의 제목은 곡이 나타내고자 하는 메시지나 감성이 담겨 있을 때 가장 좋은 제목으로 오랜 생명력을 얻게 된다.”라고 일간지에 쓴 적이 있는데, 그 부분에서 가장 만족하게 했던 곡은 무엇인가.
“「내 사람」이요. 「내 사람」이란 단어에서 찡한 느낌이 저는 있어요. 모든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고 하면서 “진짜 내 사람이란 사람이 있을까?” 고민했거든요. 내 사람이란 사람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다면 너무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요. 종속 관계가 아니고요. 진짜 나의 모든 걸 이해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좋거든요.”
공동 작업에 대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걸로 안다. 그렇다면, 금전적 부분을 제외하고 공동 작업 때문에 생기는 단점은 무엇인가.
“간혹 필요에 의해서 같이 작업할 때, 중간에서 누군가가 곡을 썼는데 작곡가에게 의사도 안 물어보고 다른 작곡가에게 줘서 탄생한 예도 있어요. 저는 없는데 그런 경우는 오히려 불만이죠. 그건 민감한 문제잖아요. 작사가는 한 글자 바꿔도 기분 나빠하는데요. 하나의 의미가 있잖아요. 그걸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처음부터 내가 쇁아하는 사람과 음악 한다면 단점은 없는 것 같아요.”
용감한 형제의 「돌아 돌아」에서 본인의 이름이 거론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 친구가 어떤 의미로 이랬을까. 근데 큰 의미는 없어요. 황당하기도 했지만 살짝 귀엽기도 했어요. (웃음) 근데 큰 의미는 없어요. 제 선배도 (디스)했으니까요. 만약에 거론되지 않았어도 서운하지 않았을까요? (웃음)”
지금 아이돌 작곡가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러울 만큼 잘하죠. 제가 못하는 걸 가지고 있으니까요. 감각 있는 친구들이에요. 그런 면에서 좋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한 선배로서 얘기하자면, 작업하는 걸 옆에서 보진 못했지만 롱런했으면 좋겠어요. 오래 해야 잘 된 거죠.”
선배로서 신인 작곡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음악적으로 얘기하면, 요즘 워낙 댄스 음악이 많아졌고, 미디 음도 많아졌어요. 근데 존경하는 김형석 선배님 같은 분은 스트링 편곡도 다하면서 피아노 치는 음악을 하시잖아요. 저도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했는데, 어떤 음악을 하든 그런 기본을 갖췄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야 트렌드가 바뀌어도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제일 기본은 클래식이거든요. 요즘 녹음실에 가면 기타 세션 녹음할 때 자기 악보에 코드조차 못 보는 사람이 많아요. 그만큼 감각이 뛰어나겠지만, 감각이 항상 좋을 수 없잖아요. 감각, 지식, 감성이 다 맞아야 하니까요. 오래 남는 작곡가가 되려면 지금 시작하는 친구들은 기본에 조금 뒤받쳐줬으면 좋겠어요.”
소속사에서 <슈퍼스타 K2>의 김그림과 이보람을 영입했다. 나름의 기획을 갖고 있는가.
“음악적 색깔은 계속 고민해야겠는데, 원칙은 딱 하나에요. <슈퍼스타 K2>의 인기는 업고 가지 말자. 금방 나오진 않을 거예요. 물론 지금 바로 나오면 조금의 이득이 있지만 일회성이니까요. 이 둘을 뽑은 이유는, 이 친구들이 탑 11에서 가장 먼저 떨어진 친구들이에요. 그만큼 사람들에게 노출이 덜 됐죠. 지금 사람들은 허각과 존박을 생각하면 예상가는 음악이 있지만 이 친구들은 없잖아요. 그래서 발전 가능성도 있고, 만드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진짜 이 두 명의 숙제는 롱런인 것 같아요.”
오토튠에 대한 생각은.
“필요하면 무조건 써야겠죠. 오토튠 걸으면 듣기 좋은 곡이 많거든요. 지향하는 것은, 노래 감추려고 하면 티가 나요. 그렇게 쓰는 아이돌 그룹이 되게 많아요. 그런 때에는 잘되는 경우가 없어요. 음악 색깔로 봐줘야 하지 썼다, 안 썼다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파격적인 장르 변신을 생각하고 있는가.
“항상 새로운 걸 고민해요. 작곡가가 그런 고민을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아직 보여준 게 많진 않지만, 7년밖에 안됐으니까 정말 다양한 걸 많이 해야죠. 제가 누구한테 인정받으려는 건 아니고, 스스로 재밌을 것 같아요. 예전에 미디엄 템포 쓸 때도 초반에만 그랬지 쓰기 싫을 때도 잦았거든요. 제작자가 원하는 곡을 써야 하고 대중이 원하는 곡을 써야 하는데, 이제는 조금 책임감을 더 갖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얼마 뒤에 듀엣 신인가수가 나오는데, 케이 앤 조조 같은 느낌이에요. 그동안 그런 걸 거의 못해봤잖아요. 어떻게 보면 눈치 안 볼 입장이라 이 팀을 통해서 흑인음악의 가진 걸 다 보여주고 싶어요.”
인터뷰: 임진모, 이종민
사진: 이소희
정리: 이종민
글 / 이종민(1stplanet@gmail.com)
이렇게 조급함이 우선시되는 시대에서 사회가 열광하는 작품을 탄생시키는 인물들은 갑작스럽게 탄생하지 않는다. 슬로우 스타터. 남보다 조금 늦을 수 있지만, 그 시기에 다져진 공력은 반짝 스타가 아닌, 하나의 전성기를 이끌어주는 원천이 된다.
2000년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하나인 조영수는 그런 인물이다. <대학가요제> 입상 후, 앨범 실패와 입대라는 기나긴 어둠의 터널에서도 꿈을 놓지 않았고, 20대 후반이라는 뒤늦은 작곡가 데뷔에도 조급하지 않은 채 뚝심 있게 한 길을 걸었다.
그렇게 쏟아 부은 정성은 에스지 워너비(SG Wannabe )의 「사랑하길 정말 잘했어요」, 「내 사람」, 「라라라」, 씨야(SeeYa)의 「여인의 향기」 같은 미디엄 템포 발라드로 흥행을 이끌며 가요의 한 트렌드를 책임졌다. 그뿐인가, 2007년부터는 매년 평균 60여 곡 가까이 발표하면서 괴물에 가까운 집중력을 발휘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이런 부지런함에 그는 “다른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그냥 곡 쓰는 데에만 투자할 수 있어서 가능한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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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 K2>의 반응이 좋을 걸 예상했나.
“전혀 생각 못했어요. 프로그램 출연은 시작 전부터 요청이 왔었는데 답을 못 내렸어요. 녹음이 많아 시간적 여유가 없고, 방송을 많이 안 해서요. 계속 거절하다가 부탁을 많이 해서 하게 됐는데 첫 미션, 리메이크 미션 등 중간에 여러 번 후회한 적도 많았어요. 결과적으로 끝에 「언제나」가 나오면서 허각이라는 가수가 잘됐고, 이렇게 시청률 높은 줄 몰랐는데 어딜 가도 다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허각의 「언제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당시 표절 얘기가 있었다.
“일단 발을 내디딘 신인가수에게 오점을 남긴 부분에서 허각한테 되게 미안했어요. 그 표절 시비가 났던 곡이 디셈버(December)의 「별이 될게」란 곡인데요. 그게 제가 가르치는 동생 곡이에요. 그래서 항상 곡을 쓸 때, 그 친구 곡을 손봐주고, 「별이 될게」도 손봐훁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 감성이 들어갔던 것 같아요. 보통 표절 시비가 오래가는데, 원작자가 해명해서 빨리 끝났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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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음악 할 때는 어렸을 때부터 흑인 음악, 알앤비, 소울, 재즈를 정말 좋아해서 누구보다도 화성에 자신 있고 공부를 많이 했어요. 음악 시작 전에는 대중작곡가들 보면서 “코드가 왜 저럴까?” 생각했었는데, 만들고 나서부터는 시선이 바뀐 게, 가장 중요한 게 멜로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화성, 편곡의 화려함이 아니고 대중가요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편하게 듣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것에 가치를 두었어요.
결정적으로 2006년에 에스지 워너비(SG Wannabe )의 「내사람」을 썼을 땐대요. 후회가 많았는데, 택시를 타고 가다 어느 라디오에서 한 50대 부부 사연이 나왔어요. 남편분이 올린 거였는데, 젊었을 때 부인에게 해준 게 없다가 이제 좀 살만해졌다, 근데 아내가 암에 걸렸다, 시한부 인생이다, 부인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데 「내사람」이란 곡을 신청한 거예요. 너무 찡하고 감동적이고, 제가 음악 하면서 누군가 내 음악을 듣고 위로를 받고 위로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 이후부터 쉬운 음악으로 초점을 맞춘 것 같아요.”
멜로디를 어떻게 떠올리는가.
“곡 쓰는 스타일은 집중력인 것 같아요. 가끔 티아라(T-ara)의 「너 때문에 미쳐」도 그렇고 댄스곡, 콘셉트 있는 곡은 리듬부터 찍고 거기다 화성 넣고 스타일이나 멜로디 따로 입히고 이런 식인데, 제가 발라드가 많잖아요. 그런 곡 쓸 때는 피아노 치면서 동시에 멜로디를 떠올려요. 그렇게 안 되면 자꾸 꼬이더라고요.”
처음에 친 멜로디를 수정하나 아니면 그대로 믿고 가나.
“믿고 가는 경우도 있고, 다음날 스스로 들어봤을 때 아쉬우면 수정하고요. 대부분 중요한 후렴 부분은 처음 썼던 걸로 해요.”
작곡가로 봤을 때 본인의 곡 중 멜로디가 가장 좋은 노래는.
“<이 죽일 놈의 사랑>(2005)이란 드라마에 주제곡(「이 죽일 놈의 사랑」)을 이수영이 불렀는데, 데모 음반을 승훈 형이 듣고 말씀하셨어요. “이 곡이 지금 잘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가치를 인정받을 곡이다.” 그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곡보다 히트한 것은 아니지만, 일 년이 지나서 거짓말처럼 코코리(Coco Lee)가 리메이크하고 대만의 어느 가수가 리메이크하고, 3~4 가수가 리메이크를 다 하더라고요. 보통은 우리나라에서 히트한 곡을 리메이크 하는데, 그때 그 말이 생각났어요.”
조영수 곡의 핵심은 무엇인가.
“곡을 쓰면서 항상 생각하는 게 간결함이에요. 소박하다는 느낌은 아니고, 어떤 대선이 있으면 그걸 굉장히 중요시 생각해요. 더 멋있게 보이려고 리듬, 선율을 쪼개는 것 보다, 메인 멜로디 자체를 지키는 편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들었을 때, 간결하고 한 번에 귀에 남고 이런 느낌이 좀 있는 것 같아요.”
「라라라」의 마지막 부분. 그건 어디서 떠오른 건가.
“그건 가이드 할 때부터 “라라라”였어요. 작사를 안영민 씨가 했는데, 거길 살렸더라고요.”
너무 많은 곡을 쓰는 것은 아닌가.
“다른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그냥 곡 쓰는 데에만 투자할 수 있어서 가능한 것 같아요. 지금은 술도 끊었거든요. 먹어도 두 달에 한 번 정도. 그게 특별한 능력이나 재주는 아닌 것 같고요. 처음 시작할 때는 곡 쓰는 게 재밌고, 내 곡이 발표되어 길에서 나오고, 지하철에서 벨소리가 나오면 내 곡이고 해서 정말 재밌게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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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지 워너비나 기존의 가수 분들은 너무 잘 알아서 상상만 해도 곡이 나오는데, 처음 작업할 때는 그 가수의 1집부터 모두 들어봐요. 그래서 어떤 음역이 좋고 왜 이 사람을 좋아하나 나름의 판단을 해요. 그걸 부각해서, 더 극대화하거든요. 어떤 감성을 좋아하는지 나름 분석하고 파악하죠.”
다시 해보고 싶은 가수는.
“인연을 소중히 여겨서 보통 한 번 작업한 가수는 계속 가는 경우에요.”
많은 곡이 사랑을 받았다.
“2007년도에는 순위 1, 2, 3, 4, 5, 7, 9위에 제 노래가 올라간 적이 있었어요. 1위가 이기찬의 「미인」, 2위가 씨야(Seeya)의 「미워요」, 3위는 에스지 워너비의 「가시리」, 4위가 PK헤만과 이지혜가 부른 「Evergreen」 등.”
그럴 때, 행복과 동시에 부담되지도 않았나.
“기분 좋은 부담감인데요. 다음에 또 이럴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을 했어요.”
지금까지 같이 작업한 가수 중 인상적인 가수는 누구인가.
“제가 평가하기엔 좀 그렇지만, 누구나 다 아는 이승철이요.”
본격적인 작곡가 생활 이후, 단기간에 상당히 많은 제의가 들어왔다.
“정말 운인 것 같아요. 제가 데뷔하자마자 공동 작업을 많이 했어요. 박근태 씨랑 작업하면서 많이 인정들을 해주셨고, 기회를 많이 준 거죠. 그래서 소문이 많이 났고, 제작자가 모이더라고요.”
후회되는 작품은.
“딱 하나 있는데요. 이효리의 「그녀를 사랑하지마」. 미디엄 템포 한창 할 때 쓴 곡인데, 원래 이효리에게는 「미인」을 줬지만, 김광수 사장님이 발라드 말고 미디엄 템포를 원해서 다시 쓴 게 「그녀를 사랑하지마」에요. 그 당시 소몰이 때문에 스트레스 많았어요. 이효리만은 안 하길 바랬죠. 분명히 주면 욕을 미친 듯이 먹을 거고. 그래서 반대했는데, 당시 제작자의 관계도 그렇고 기를 꺾을 순 없었어요. 곡이 나온 날도 제가 썼지만 듣기 싫은 기분이었어요. 근데 또 타이틀을 그걸로 민 거예요. 저는 미칠 것 같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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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 정말 못 해요. 곡을 많이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떻게 보면 되게 우유부단인 것 같아요. 싫은 말도 잘 못하고 누가 부탁하면 “해볼게요.” 이렇게 대답하거든요.”
드라마 O.S.T에 매년 참여하고 있다.
“평균적으로 일 년에 1곡정도 참여하고 있는데, 보통 제가 작업하는 양에 비해선 많이 안 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많이 하고 싶어요.”
<대학가요제> 대상 이후, 상당한 공백 기간에도 음악의 끈을 놓으려 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다.
“1996년도, 21살 때 <대학가요제>에 나갔었고, 음반도 냈었어요. 그때 완전히 망했죠. 그 뒤로 음악을 너무 하고 싶은데, 길이 없는 거예요. 이후 입대했고, 군대에서 이어나갈 수 있었던 건 중대장님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작곡할 수 있도록 건반을 갖고 오게 허락해주셨죠. 상병 때부터는 밤만 되면 자유 시간에 키보드로 곡을 쓰고 그랬어요. 26살 때 제대하면서 바로 복학했는데, 공부는 너무 하기 싫고, 마음은 음악에 가 있었죠. 그때는 막막해서 직업으로 음악 할 생각도 못했어요. 제 주위에 음악 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고요. 그 길이 나에게 열릴까 하는 고민 탓에 졸업 잘하고 회사 다닐 생각 했는데, 그런 와중에 노래하는 친구 몇을 알게 됐어요. 앤드(AND)를 만나면서 그는 노래하고, 저는 곡을 쓰고 하다가 그때 그 친구 음반 프로듀서를 박근태 씨가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박근태 작곡가를 처음 알게 됐고, 근태 형이 저에게 되게 잘해주셨어요. 음악 들으시더니 고민도 안 하시고 바로 했던 게 옥주현 싱글이었어요. 그때부터 대중가요의 길을 들어선 거죠. 운이 좋았던 거예요.”
‘코어 콘텐츠 미디어’와의 인연은 상당한 것 같다.
“아무래도 김광수 사장님과는 콤비였죠. 에스지 워너비, 다비치, 씨야, 티아라, 초신성 등. 고마운 사람이고, 어떻게 보면 저에게 가장 많은 기회를 주고 가장 많이 믿어줬어요. 보통 제작자와 작곡가 사이에서 10곡이 다 히트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한 번 안 되면 다른 사람 찾거나 하기 마련인데, 사장님은 끝까지, 지금도 저를 믿어줘요.
아마 작년까지 제가 쓴 곡이 80~90퍼센트가 김광수 사장님과 한 곡이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음악 범위가 그것 때문에 더 적어질 거란 생각을 했어요. 아무래도 좀 더 다양한 곡을 쓰려면 조금은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년부터는 의도적으로 다른 제작자의 의뢰도 받고 있어요. 제가 재밌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매년 등록되는 곡수가 엄청나다. 이게 진정 가능하단 말인가.
“작년까지는 그랬는데요. 올해부터는 나이도 조금 들었고, 건강도 신경 써야 하고, 주위 사람도 챙겨야 할 때가 됐고, 그전에는 앞만 보면 달려야 했거든요. 지금은 제 주변의 동생분과 같이 잘되는 거에 초점을 맞추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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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길로 인도한 아티스트와 음반이 있다면.
현재 작곡가 중 최고는 누구라고 생각하나.
“국외는 너무 많은 것 같아요. 흑인 음악 하는 사람은 다 좋아하니까요.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의 음악을 듣고 자랐고, 베이비페이스(Babyface)나 퀸시 존스(Quincy Jones)는 절대 우상입니다. 국내 작곡가 중에선 현재는 박진영씨. 무엇보다 센스가 있는 것 같아요. 그분은 직접 노래하고 춤을 추는 가수고, 연예인이고, 인기란 개념에서 사람들이 뭘 좋아할 거라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인데요. 제가 가지지 못한 거죠. 단순히 음악적으로 작곡을 얘기하기 전에 전체적인 작곡 프로세스 봤을 때 너무 센스 있게 잘하는 것 같아요.”
소몰이 열풍의 핵심이었다.
“지금 와서 후회하지 않아요. 항상 트렌드라는 게 있는 것이고, 지금은 걸 그룹이잖아요. 비판한다고 해서 그게 바뀌는 것도 아니고. 대중들이 원하니까, 그만큼 많이 사랑받은 부분에서 스스로 점수를 더 주고 싶어요.
물론 제가 대표로 욕먹는 느낌도 들어요. 제가 쓴 곡보다 다른 작곡가들이 따라서 쓴 곡이 더 많은데 욕은 저에게 가장 많이 왔으니 말이죠. (김)진호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에스지 워너비가 최고고 대표였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죠. 그건 정말 모순 같아요. 약간 기분 나쁘기도 하지만, 대표가 됐으니까요. 그리고 2007년부터는 그런 스타일의 곡을 잘 안 썼어요. 「미인」 쓰면서 발라드 곡을 썼는데, 그런 글을 봤어요. 다른 발라드에 제 이름만 들어가면 다 미디엄 템포다. 뭐 그냥 무작정 욕을 하는 사람이 꽤 많은 것 같아요.”
소속사를 설립하고 1호로 만든 가수가 숙희다. 어떤 점을 보고 결정하게 됐나.
“첫째는 목소리였어요. 숙희 처음 본 게 가이드 뜬 곡을 숙희가 불렀어요. 누가 소개해줘서 한 건데, 나카시마 미카(Nakashima Mika) 같은 감성이 있는 거예요. 「눈의 꽃」을 불렀는데, 정말 원작에 뒤지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하더라고요. 목소리 정말 좋다. 그게 처음이고, 제작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죠. 그때는 회사를 차리기 바로 직전 단계였는데, 여러 사정으로 거절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전에 여러 기획사 돌아다니면서 상처를 많이 당해서 겁을 좀 먹고 있었어요. 그 뒤로 3년 정도 계속 못 보다가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다시 물어봤는데, 그때 예스를 한 거죠.”
현재 가수로서의 욕심은 어떤가.
“처음부터 가수의 꿈은 없었어요. <아는 여자>(2004) OST를 부른 건 가수가 섭외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부른 거고,
대학가요제 출신자로서 작년 대학가요제에 심사를 맡았다.
“<대학가요제>를 심사하면서 기분은 정말 최고였어요. 15년 전에 제가 나가서 봤던 심사위원들은 노영심, 김현철, 이문세 씨, 이런 분들이었는데, 그 꿈같던 자리에 제가 왔다는 자리에 너무 기분이 좋았고, 되게 뿌듯하고, 방송하기 전에 멘토 역할도 했어요. 저희 사무실 와서 편곡 같이 도와주고 코드도 좀 봐주고 그러면서 친해졌는데, 그런 과정에서 음악 선배로서 의미를 많이 찾게 됐죠.”
본인이 어떤 작곡가인 것 같나.
“현재로서는 대중이 원하는 음악을 하는 작곡가이고, 목표는 그게 아니지만, 후대에 봤을 때는 정말 “모든 장르를 잘하는 작곡가”라고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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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박근태 작곡가님 만난 것. 그다음엔 김광수 사장님과 에스지 워너비를 만나게 된 것. 그리고 이기찬의 「미인」 나왔을 때. 그때 스스로는 아닌데, 주위에서 “발라드도 대박이다.” 라고 했어요. 그전에는 제가 그런 곡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 안 했나 봐요. 형석 형이 이런 얘길 했어요. “너 이제 발라드도 하니?” 저는 원래 발라드를 많이 썼던 사람인데, 그때부터 스스로 자신감이 더 생겼죠.”
7년간 제일 힘들었던 때는.
“항상 그런 것 같아요. 언제가 딱 없어요. 곡 쓰기 바로 전. 너무 힘들고 죽을 만큼 힘들다가 곡을 다 쓰면 너무 행복하다. 그러다 또 힘들고. 항상 그게 반복이에요.”
3년 내리 랭킹 1위다. 그래서 정말로 돈을 많이 벌었나.
“작곡가 중에 제일 많이 벌었겠죠. (웃음)”
“노래의 제목은 곡이 나타내고자 하는 메시지나 감성이 담겨 있을 때 가장 좋은 제목으로 오랜 생명력을 얻게 된다.”라고 일간지에 쓴 적이 있는데, 그 부분에서 가장 만족하게 했던 곡은 무엇인가.
“「내 사람」이요. 「내 사람」이란 단어에서 찡한 느낌이 저는 있어요. 모든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고 하면서 “진짜 내 사람이란 사람이 있을까?” 고민했거든요. 내 사람이란 사람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다면 너무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요. 종속 관계가 아니고요. 진짜 나의 모든 걸 이해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좋거든요.”
공동 작업에 대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걸로 안다. 그렇다면, 금전적 부분을 제외하고 공동 작업 때문에 생기는 단점은 무엇인가.
“간혹 필요에 의해서 같이 작업할 때, 중간에서 누군가가 곡을 썼는데 작곡가에게 의사도 안 물어보고 다른 작곡가에게 줘서 탄생한 예도 있어요. 저는 없는데 그런 경우는 오히려 불만이죠. 그건 민감한 문제잖아요. 작사가는 한 글자 바꿔도 기분 나빠하는데요. 하나의 의미가 있잖아요. 그걸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처음부터 내가 쇁아하는 사람과 음악 한다면 단점은 없는 것 같아요.”
용감한 형제의 「돌아 돌아」에서 본인의 이름이 거론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 친구가 어떤 의미로 이랬을까. 근데 큰 의미는 없어요. 황당하기도 했지만 살짝 귀엽기도 했어요. (웃음) 근데 큰 의미는 없어요. 제 선배도 (디스)했으니까요. 만약에 거론되지 않았어도 서운하지 않았을까요? (웃음)”
지금 아이돌 작곡가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러울 만큼 잘하죠. 제가 못하는 걸 가지고 있으니까요. 감각 있는 친구들이에요. 그런 면에서 좋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한 선배로서 얘기하자면, 작업하는 걸 옆에서 보진 못했지만 롱런했으면 좋겠어요. 오래 해야 잘 된 거죠.”
선배로서 신인 작곡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음악적으로 얘기하면, 요즘 워낙 댄스 음악이 많아졌고, 미디 음도 많아졌어요. 근데 존경하는 김형석 선배님 같은 분은 스트링 편곡도 다하면서 피아노 치는 음악을 하시잖아요. 저도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했는데, 어떤 음악을 하든 그런 기본을 갖췄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야 트렌드가 바뀌어도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제일 기본은 클래식이거든요. 요즘 녹음실에 가면 기타 세션 녹음할 때 자기 악보에 코드조차 못 보는 사람이 많아요. 그만큼 감각이 뛰어나겠지만, 감각이 항상 좋을 수 없잖아요. 감각, 지식, 감성이 다 맞아야 하니까요. 오래 남는 작곡가가 되려면 지금 시작하는 친구들은 기본에 조금 뒤받쳐줬으면 좋겠어요.”
소속사에서 <슈퍼스타 K2>의 김그림과 이보람을 영입했다. 나름의 기획을 갖고 있는가.
“음악적 색깔은 계속 고민해야겠는데, 원칙은 딱 하나에요. <슈퍼스타 K2>의 인기는 업고 가지 말자. 금방 나오진 않을 거예요. 물론 지금 바로 나오면 조금의 이득이 있지만 일회성이니까요. 이 둘을 뽑은 이유는, 이 친구들이 탑 11에서 가장 먼저 떨어진 친구들이에요. 그만큼 사람들에게 노출이 덜 됐죠. 지금 사람들은 허각과 존박을 생각하면 예상가는 음악이 있지만 이 친구들은 없잖아요. 그래서 발전 가능성도 있고, 만드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진짜 이 두 명의 숙제는 롱런인 것 같아요.”
오토튠에 대한 생각은.
“필요하면 무조건 써야겠죠. 오토튠 걸으면 듣기 좋은 곡이 많거든요. 지향하는 것은, 노래 감추려고 하면 티가 나요. 그렇게 쓰는 아이돌 그룹이 되게 많아요. 그런 때에는 잘되는 경우가 없어요. 음악 색깔로 봐줘야 하지 썼다, 안 썼다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파격적인 장르 변신을 생각하고 있는가.
“항상 새로운 걸 고민해요. 작곡가가 그런 고민을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아직 보여준 게 많진 않지만, 7년밖에 안됐으니까 정말 다양한 걸 많이 해야죠. 제가 누구한테 인정받으려는 건 아니고, 스스로 재밌을 것 같아요. 예전에 미디엄 템포 쓸 때도 초반에만 그랬지 쓰기 싫을 때도 잦았거든요. 제작자가 원하는 곡을 써야 하고 대중이 원하는 곡을 써야 하는데, 이제는 조금 책임감을 더 갖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얼마 뒤에 듀엣 신인가수가 나오는데, 케이 앤 조조 같은 느낌이에요. 그동안 그런 걸 거의 못해봤잖아요. 어떻게 보면 눈치 안 볼 입장이라 이 팀을 통해서 흑인음악의 가진 걸 다 보여주고 싶어요.”
인터뷰: 임진모, 이종민
사진: 이소희
정리: 이종민
글 / 이종민(1stplanet@gmail.com)
2개의 댓글
필자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앙ㅋ
2011.10.30
천사
2011.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