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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대교 아래로 내려가면 이끼와 잡풀에 덮인 작은 비석이 있다. 1982년에 태어난 한 청년이 2007년 동호대교 남단에서 숨을 거뒀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정작 자신은 일찍 세상을 뜨고 만 그 사람이 원욱씨였다. 원욱씨, 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이끼와 잡풀, 벌레로 덮인 그 비석뿐이다. 그 비석은 서울시에서 그의 의로운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전형적인 문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의 이름과 생몰일자, 그가 어떻게 정의롭게 숨을 거두었는지. 거기까지 읽을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그 바로 아래, 가족이 새긴 문구에서 갑자기 눈물이 넘쳐흘러 뚝뚝 흘렀다.
영원히 함께하는 엄마 아빠 경윤이가, |
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건만 도대체 왜…… 어이없이 계속 눈물이 났다. 그 짧은 문구가 왜 그렇게 애틋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비석 위에 적힌 온갖 엄숙한 문구보다 이 짧은 글이 훨씬 더 애절했다. 위엄 있는 어투로 용감한 시민 누구누구누구 씨의 아름다운 자기희생을 기념하여, 뭐 그런 말들은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교과서에 나오는 독립유공자나 애국지사처럼 낯설었지만 엄마 아빠 경윤이와 함께 살았던 원욱씨는 갑자기 의로운 청년에서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피와 살을 가진 또래의 남자애가 되었다.
원욱씨, 죽은 나이 스물다섯 살, 고등학교를 바로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면 몇 년차의 직장인이 되었을 것이고 대학에 진학했다면 아마 군에 입대했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었을 테다. 영원히 함께하는 엄마 아빠 동생이 있던 남자애가, 내가 온갖 신경질을 내면서 걷고 있는 이 길을 똑같이 걷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저 칙칙하고 무서운 한강물에 주저없이 뛰어들었구나, 그리고 그 사람 건져내고 자기는 못 빠져나오고 끝내 힘이 다했구나…… 엄마 아빠 경윤이는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서울 곳곳의 다리를 볼 때마다, 서울 시내 어디에서나 보이는 이 한강을 볼 때마다 얼마나 그리워서 마음을 태울까…… 잡풀을 헤치고 그 문구를 읽은 날, 내가 왜 울고 있나 도통 모르겠다 하면서도 어쩐지 너무 안타까워 다 큰 여자가 주책스러운 거 알면서도 하염없이 주책스럽게 엉엉 울면서 고수부지를 따라 회사로 걸어갔다.
그 이후로, 신경질이 현저히 적어졌다. 출근길에 동호대교 계단을 내려가 그 조그만 비석을 볼 때마다 매일매일 경건해졌다. 원욱씨, 나 잘할게요.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이 애인처럼 애틋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부모님하고 동생이 얼마나 보고 싶을까.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나 잘할게요, 신경질 내지 않고, 쓸데없는 불평 하지 않고 잘할게요. 간혹 물티슈를 가져가 비석을 박박 닦고, 붙어 있는 벌레들을 휘휘 쫓고, 꽃을 놔두기도 하면서 내내 울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청승을 떨면서 울었을까, 주책맞기는. 쓸데없는 울화가 부끄러워서 울었나. 만날 회사 다니기 싫어 죽겠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입 함부로 놀린 스스로가 창피해서 울었나. 그 비석이 너무 애틋해서 울었나. 무시하고 있었던 생명이란 것, 목숨이란 것의 무게가 갑자기 너무 엄중하게 다가와서 울었나.
실은 그 모두 다일 것이다. 그래서 더 쪽팔려서 운 게 틀림없다. 그래도 쪽팔린 줄은 알았던 것이다. 이 젊디젊은 남자애는 바로 여기서 생을 고귀하게 맺었는데 아 회사 가기 싫어서 확 죽어버리고 싶어, 하는 식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으면서 이 작고 귀한 성지를 훼손해왔다는 것이. 그리고 알고 있었다. 그런 성지는 이곳만이 아니라는 것. 매일매일 싸우면서 사는 귀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원욱씨는 물에 빠진 그 사람만 살린 것이 아니라 나도 살려놨다. 약해 빠지고 쓸데없는 생각이 들면 입술을 꽉꽉 깨물었다. 왠지 원욱씨에게 송구했다. 반짝반짝 빛나지 않더라도 생은 소중한데, 그 소중한 것 아는 사람이니까 당신도 사람을 살려놨을 텐데, 미안합니다, 저 잘할게요. 쓸데없는 생각 안 할게요. 저 잘할게요. 열심히 살겠습니다.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이사하면서 동호대교와는 멀어졌지만 쓸데없는 생각이 들 때나 동호대교가 보일 때면 그를 생각한다.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 그래도 매일매일 생의 경건함을 일깨워주었던 그 사람, 고맙습니다. 아, 올해도 미친 듯이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했다.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는 쓸데없는 목숨을 하루하루 살려놔줬던 당신을 만나러 가야겠다. 손에 꽃 한 송이 가지고. 시간 낭비 하는 것 싫다고 단 한 번도 짝사랑해본 적 없는 매정한 년이 딱 한 번 해본 짝사랑이다. 원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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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겁게 안녕 글 김현진 | 다산책방
『뜨겁게 안녕』은 이제 막 서른 이후의 삶에 접어든 저자가 써내려간 ‘서울살이’의 회고록이자 비망록이다. 여기에는 저자의 개인적 삶이 가장 뜨겁게, 그리고 가장 리얼하게 담겨 있지만, 동시에 서울이라는 도시의 소외된 거리와 시대의 풍경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철거촌과 비개발지역, 서울의 소외된 곳을 옮겨다니며 살아온 삶은 비속하고 하찮고 시시하고 애절한 기억들투성이지만, 그럼에도 정겹고 그립고 끝도 없이 사랑스럽기도 하다. 그 기억의 순간을 새겨놓은 곳들이 재개발의 삽질에 밀려 죄다 사라져버리기 전에..
김현진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스스로를 도시빈민이라 부르는 그녀는 대구 출생에 목회자인 부친의 모든 희망에 어긋나게 성장하였고 기어코 말 안 듣다가 고등학교를 두 달 만에 퇴학에 준하는 자퇴를 감행하였다.
냉소와 분노와 우울을 블랙 유머로 승화시키는 연금술을 몸 속에 장착한 그녀가 숨 막히는 고등학교를 용감히 박차고 나온 '불량소녀'로 세상에 알려진 지 이제 10년이 넘어간다. 그녀는 단편영화 <셧 앤 시 Shut And See>(97년) 감독, 웹진 <네가넷>(97년)의 최연소편집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최연소 합격 등의 화려한 타이틀을 가졌다. 그래서 한 시사주간지는 성공한 10대라는 제목으로 그를 표지인물로 내세웠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 자퇴생이라는 사실이 언론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 텔레비전의 관심도 남달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직시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꾸준히 살아왔다.
앙ㅋ
2012.03.12
천사
2012.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