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 영국 드라마 <스킨스 skins>
새벽 세 시 반. 아침 일찍 있는 일정 때문에 누운 지 세 시간이 넘었는데도 잠이 안 왔다. 와인이라도 좀 마셔볼까. 냉장고를 열어 보니 와인은 둘째치고 대충 주워 먹을 것도 하나 없었다. 만약 냉장고 안이 빵빵했다면 보기만 해도 소화가 안 되는 것 같다며 서둘러 침대로 들어갔겠지만, 잘만 하면 내 한 몸 누일 수 있을 것 같은 공간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중얼거렸다. 잘됐다. 어차피 잠도 안 와.
새벽 네 시의 마트는 내 예상과 다른 풍경이 있었다. 이 시간에 장을 보는 중년 아주머니가 있으며 이 시간에 아이를 카트에 태우고 걷는 부부가 있고 이 시간에 의류 매장을 기웃거리는 젊은 남자들이 있었다. 묘하게 끓어오르는 동지의식을 무표정으로 감추며 걷다 보니 말똥말똥한 눈으로 괜히 침대에 안 누워 있길 잘했다는 뿌듯함마저 든다. 비장한 표정으로 카트를 끌며 계획에도 없는 물건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지금 사고 싶은 것으로. 당장 집에 들어가 뚜껑을 열고, 뜯고, 소비할 수 있는 것으로.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이 입버릇이 되어버린 지인이 있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생존과 생활을 위한 일일 뿐,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다는 말을 몇 년째 반복하고 있었다. 상황이 나아지고 결심이 굳혀지면 줄곧 꿈꿔 온 그 일을 향해 돌진할 거라는 얘기를 벌써 수십 번 듣고 나서 나는 더 이상 그의 결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가 지금 원하는 것은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를 이루는 일이 아니라 그저 결심을 되새기는 일이기 때문에. 몇 년간 자신의 마음과 머릿속을 지배하는 그 욕망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그가 언젠가 그 일을 이루고 살 거라는 상상도, 그 일을 이루고 나서 행복해 하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형편과 욕망이 상충할 때면 빈 종이를 꺼내 든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왼쪽에는 그 일을 통해 얻게 될 것, 오른쪽에는 그것을 통해 잃게 될 것을 적는다.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는 사이,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무언가에 휩쓸려서 충동적으로 갖기를 바라고 있는지를 깨닫는다.
그 단순한 행동을 통해 내가 품은 욕심과 욕구의 질량을 가늠해보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그 어떤 처세술보다 좋은 해답을 내려준다. 단, 그 모든 과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행복해지는 선택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묵혀 둘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것들이 있다. 와인이 그렇고, 오래된 사랑이 그렇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값이 매겨지는 빈티지 아이템이 그렇다. 반면 막 잡은 물고기, 갓 딴 맥주처럼 신선할수록 빛나는 것들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
욕구도 마찬가지다. 지금 하고 싶은 것, 지금 갖고 싶은 것, 지금 원하고 바라는 모든 것은 지금 채워져야 한다. 단 그 실현에 있어 자신만의 룰은 지켜야겠다. 나의 이 욕구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지 그렇지 않은지, 주변 사람들과 나 자신까지 망치고 말 욕구인지 아닌지.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 주변 사람들과 나 자신까지 망가뜨리지 않겠다는 결심은 생각보다 타당한 구속력을 갖는다.
갑자기 먹고 싶은 게 생겼다면 그건 몸이 원하는 거라는 말이 있다. 내 몸을 유지하기 위한 영양분과 필요가 식욕으로 나타나듯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은 욕구와 욕망으로 표출된다. 우리가 매일같이 읊조리고 마는 ‘나중에’, ‘이다음에’는 지금 품은 이 간절함이 분명 사라지거나 퇴색할 거다. 갑자기 하고 싶은 게 생겼다면 그건 바로 지금, 내 마음이 원하고 있는 것. 그 마음은 최대한 신선할 때 즐겨야 한다.
새벽 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시커멓던 하늘은 서서히 동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집에 들어가자마자 와인을 딸 거다. 망설임 끝에 고른 치즈를 자를 거다. 약 세 시간 후엔 지옥의 얼굴로 출근을 하게 되겠지만 상관없다. 아무리 사소하더 라도 지금 하고 싶은 건 지금 하면서 살 거다.
작가, 서른을 위해 변명하다! 잭 니콜슨, 모건 프리먼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몇 해 전부터 버킷리스트라는 단어를 자주 접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 아니 실은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목록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 참 많을 거다. 하지만 버킷 리스트를 실현하고 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버킷리스트를 만들지 않는 일 아닐까. 하고 싶은 일을 나중에, 라며 미뤄두지 않고 지금 당장 실행해보는 것.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한 달에 하나씩, 석 달에 하나씩, 아니면 일 년에 하나씩 클리어 해 나가는 것. 기나긴 버킷리스트를 가진 사람일수록 계획성 있고 성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귀 기울이지 않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지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지금 내 마음이 원하고 있는 것. 그건 바로 지금 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거니까. | ||
- 서른엔 행복해지기로 했다 김신회 저 | 미호
오늘보다 살짝 더 즐거운 내일을 위한 계획표이자 행복해지기 위한 변명 일기다. 일상의 반경 100미터를 둘러봐도 서른의 내가 고쳐야 할 것, 당장 끊어야 할 것들이 허다하다. 하지만 나를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현재 내 모습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지금의 내가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서른,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좋은 사람,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신회(작가)
10여 년 동안 TV 코미디 작가로 일했고, 10년 남짓 에세이스트로 활동 중이다. 지혜로운 사람보다 유연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보다 게으른 사람에게 끌리지만 정작 자신은 지혜에 집착하고 쓸데없이 부지런한 타입이라 난감할 따름. 이런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날이 대부분일지라도, 스스로에게 정 붙이는 연습을 하며 사는 중이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오늘 마음은 이 책』 등을 썼다.
freewired
2012.08.30
하고 싶다고 해서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할 수 도 없는 노릇이니. 작가님 처럼 종이에 이 일을 함으로써 얻는 것, 잃는 것을 따져보고 결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듯 합니다. 글 잘 읽었어요^^
trizmo
2012.05.08
와인을 따고
치즈를 자르고
행복을 넘기시는 군요.
평범한 사람
201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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