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영원히 떠올리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만날 때면 나는 언제라도 휩쓸려간다. 우리의 미움, 질투, 선망, 경멸, 연민, 배반, 성장, 그 모든 걸 다 합친, 우정이라는 것에.
글: 한소범(한국일보 기자)
2025.10.15
작게
크게


『여름은 고작 계절』

김서해 저 | 위즈덤하우스

 

D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는 없다그런 이야기들 앞에서. D와 나는 초등학생 때 친구가 되었다가 고등학생이 되어 멀어졌고 성인이 되어 다시 친밀해졌다그리고 2015 D가 보낸 문자를 끝으로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 D 없이도 시간은 잘 흘러갔다이제 내가 일상에서 D를 떠올리는 일은 거의 없다이런 이야기를 만나지 않는 한.

 

『여름은 고작 계절』을 읽기 전에 내가 예상한 것은 좀 달랐다나는 이제 어엿한 삼십 대 중반의 어른 여성이고, ‘여자애들’ 이야기에 휘둘릴 처지는 아니다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은얼마나 멀리 나아왔든지 간에 그것들은 기억 너머 잠복해 있고 내 영혼의 일부는 그 시절에 묶여 있다는 것이런 이야기를 만날 때면 나는 언제라도 휩쓸려간다는 것이다우리의 미움질투선망경멸연민배반성장그 모든 걸 다 합친우정이라는 것에.

 

십 대라는 시기는 그 자체로 전쟁터다그 전쟁에서마저 이방인이 될 때 성장은 한층 험난해진다김서해 장편소설 『여름은 고작 계절』에서 주인공인 제니가 2004년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가게 되는 나이는 열 살이다십 대가 막 시작되는 시기아직 영어가 서툰 동양인 여자아이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당연히 아메리칸드림 속 그런 나라가 아니다서럽다는 말을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지 못해 그저 ‘sad’라고만 써야 할 때의 서러움은 온전히 제니만의 것이고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는다심지어 공장과 식당세탁소를 전전하며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부모님의 것과도 다르다부모님에게 제니는 오히려 “엄마랑 아빠가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만도 감사해야 하는 처지다

 

콤플렉스와 트라우마의 교집합 속에서” 제니는 자기를 빚어간다제니가 발명한 생존의 방식은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다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노골적인 적대만 아니라 미묘한 ‘분위기이기도 때 그것과 대적할 수 있는 방법은 그 분위기를 깨뜨릴 언어뿐이니까제니는 “언제든 따질 일이 생겼을 때 어떤 분위기에서든 주저하지 않고 나서려고”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일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춤을 추는 것과 비슷하다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니까계속해서 주춤거리며 나아가거나 돌아서야 한다머릿속의 생각자극불편함을 여실히 느끼면서내가 가진 단어들을 재배치하고 또 재배치하면서 움직여야 한다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무대 위에 홀로 남겨지는 듯한 묘한 긴장 속에 놓인다이 춤에는 웅크리는 안무도 없다.” (44)

 

영어 실력이 늘고 여자 축구부에서 활동하며 겨우 자기 자리를 찾아가던 어느 날한나라는 이름의 동갑 여자애가 전학을 온다한국에서 왔다는 사실만 같을 뿐한나는 여러모로 제니와 달랐다미국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라고 발음하는 것을 참지 못해 매번 “잇츠 낫 해나잇츠 한나라고 정정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제대로 설명할 언어는 갖지 못한 여자애다그러면서도 의사 아빠와 서울대를 나온 우아한 엄마를 둬서 제니로 하여금 미묘한 질투를 느끼게 하는 여자애한나에게 제니는 자신의 부족한 영어를 대신 통역해줄자신보다 먼저 미국에 온 여자애지만제니에게 한나는 연민과 질투경멸과 우월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존재다자기를 놀리는 줄도 모르고 해맑게 눈을 반짝거리는 한나를 보며 제니는 “뺨을 세게 쳐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동시에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는 한나를 지켜보기만 할 뿐 나서서 구출하진 못하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한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 애를 생각하는” 자신이혐오스럽다.  

 

배척과 선망공명의 순간을 거쳐 우정의 형태로 발전해가던 제니와 한나의 이야기는 어쩌면 정해진 결말로 향해간다제니는 한나를 신경 쓰면서도자신을 그들의 세계로 초대하고 승인해 줄 백인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제니는 한나와한나를 괴롭히던 백인 여자애들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면서 어쩌면 그들이 자신처럼 한나도 받아들여 줄지 모른다는 허약한 기대를 품는다제니가 한나를 그들의 아지트인 호수로 초대했을 때독자들은 어쩌면 제니보다 먼저 이 이야기의 끝을 눈치채게 된다인종계급성별 같은 세계의 오래된 법칙은 결코 우호적인 법이 없고그 앞에서 우정에 바탕을 둔 낙관 같은 건 언제든 하찮아지기 때문에이야기가 끝나고 결국 호수에서 둘 중 한 사람만 빠져나오게 됐을 때 알게 된다이건 한 사람이 사라짐으로써다른 사람이 영원히 떠올리게 되는 이야기라는 것

 

하지만 어쩌면 그게 애초에 우정이란 것의 속성인지도 모른다물리적인 영원을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영원의 속성을 띠는 것. “내가 나에게만 중요하다는” 잔인하고도 다행이었던 진실을, “나는 너처럼 되고 싶어는 말 하나로 뒤바꿔놓는 것내가 아닌데도 나에게 중요해지는 최초의 존재함께 자라지 못하더라도 삶의 어느 순간에 영원히 각인돼 언제라도 그 시절로 되돌려놓는 존재이 소설에 유독 ‘너무나 공감했다는 후기가 많은 것은 세상에는 존재만큼의 수로 우정이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여름은 고작 계절』은 집요하리만치 섬세한 언어로 저마다의 기억 아래 묻혀있는 ‘우정이라는 이야기를 복원해 낸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이 소설이 2000년대 중반 이후 미국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세밀한 기록이기도 하다는 점이다그 즈음 한국은 1인당 GDP 2만 달러를 돌파했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텃세 앞에서 그런 수치는 충분히 존중받지 못했다소수자의 고유성은 난감한 것일 뿐이고해석하기 어려운 존재는 위협적일 뿐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전 세계적 흥행 앞에서 어리둥절해지다가도실은 그것이 멸시와 배척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이민자들의 성취이자그들에게 충분히 빛이 돌아가야 할 결과임을 알게 된다

 

*

 

『여름은 고작 계절』을 읽는 동안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함께 봤다. “좋아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그래서 파괴했다.”는 드라마 속 대사를 보면서 미움과 사랑이 공존하는 관계는 우정뿐임을 다시금 깨닫는다상처 입고 상처 입히면서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는 것그런 이야기들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D가 보냈던 마지막 문자를 떠올린다거기 적힌 말들은 애틋하고도 가차 없어서 나는 매번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이 되고 만다내 미숙한 얼굴을 마주 보고 만다그런 강한 장력이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지 나는 모른다그리고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그건 혼자서는 결코 알지 못하는 것두 사람 사이에서만 발휘되는 힘이니까나머지 하나는 영영 네가 쥐고 있으니까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0의 댓글
Writer Avatar

한소범(한국일보 기자)

199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국문학과 영상학을 전공했다. 발표된 적 없는 소설과 상영되지 않은 영화를 쓰고 만들었다. 2016년부터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