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센티미터짜리 킬힐! 누가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킬힐이 막 유행하던 때에 구두 매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골라 한번 신어본 적이 있다. 11센티미터짜리. 하이힐이 주는 장점 중 하나는 몸의 선을 드러내며 살려준다는 것이다. 다리도 길어 보인다. 누가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나는 거울 속의, 킬힐을 신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201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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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원피스 두 벌
옷 매장에서 눈을 먼저 사로잡는 것은 옷이 아니라 그 옷을 입고 있는 마네킹들이다. 아름답고 도도하고 차갑고 매력적이다. 옷보다 더 근사해 보이는 마네킹도 있다. 옷은 옷으로 자신을 말하지 않는다. 옷은 입고 있는 마네킹을 더 돋보이게 만들고 그게 옷의 역할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옷이 벗겨진 마네킹들도 있다. 깡마르고 춥고 허전해 보인다. 옷이 벗겨진 마네킹을 보고 있는 때 나는 슬픔을 느낀다. 어느 땐 그것이 꼭 실제로 구현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문장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은 불완전해서 비틀리고 주름지고 파묻히고 구부정해지며 옷은 바로 그런 점들을 고려한다고 피에르 상소는 말했다. 마네킹은 완벽해 보이는 체형을 갖고 있긴 하지만 옷 없이는 불완전해 보인다. 옷이 벗겨진,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가발도 벗겨진 몇 개의 마네킹들이 겹쳐 쓰러져 있는 장면은, 끔찍했다. 옷 매장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문득 마네킹의 기원이 궁금해진다. 사람은 왜 사람과 닮은 밀랍인형을 만들기 시작했을까.
혹시 나와 비슷한 궁금증을 가진 독자들에게라면 폴란드 작가 브루노 슐츠의 『계피색 가게들』에 수록된 「마네킹에 대한 논설」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불완전하긴 하지만 마네킹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데 나는 동의한다.
옷 매장으로 성큼 들어간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다.
세 자매 중 바로 아래 동생이 언니 나 결혼할까봐, 라고 말했을 때 허를 찔린 것 같았다. 우리는 영원히 이렇게 같이 살 줄 알았다. 결혼을 하겠다는 동생을 앞에 두고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알 듯 말 듯한 감정이 둔중히 머리를 한 번 때리고 지나갔다. 축하한다는 말은 정말이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축하라니. 나는 멀리 내던져진 것 같았다. 오래된 집에서 부모와 셋이 소리 없이 늙어가게 될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동안 독립할 기회를 틈틈이 엿보긴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했어도 경제적으로 나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동생이 결혼하고 그리고 막냇동생까지 결혼해버리고 나면 부모만 남는다.
두려움 뒤에 깊은 체념의 상태가 찾아왔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 체념은 신념으로 변했고 지금도 나는 부모와 같이 살고 있다. 그 신념은 맏딸로서 부모를 모셔야 한다, 라는 게 아니다. 이것이 나의 자연스러운 삶이다, 라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내 인생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동생들의 결혼이 아니라 그 결혼 때문에 일어나게 될 변화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모험심도 없고 대부분의 일과 관계들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모두들 가버리고 진화하고 움직이는데 나만 언제나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동생들이 결혼을 한다,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자 비어 있게 될 동생들의 방과, 대화가 거의 없는 부모와 나 사이에 눈에 띄게 생겨날 무거운 침묵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동생들의 결혼으로 일어난 변화는 뜻밖에도 내 비관적 추측과는 달랐다. 하나둘씩 조카들이 태어나면서 ‘친정’이 된 우리 집으로 동생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일본 남자와 결혼하여 도쿄에 살게 된 둘째야 하는 수 없지만, 맞벌이인 막냇동생의 아이들은 친정엄마, 그러니까 내 엄마가 키워야 했고 그건 마땅히 나와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아직 조카들이 태어나기 전, 결혼식을 앞두고 있고 세 자매들은 옷을 고르는 중이다. 자신들의 결혼식에 ‘작가 언니’가 입고 나타날. 껌정은 무조건 안 돼!
동생들은 미리 못 박았다. 잠도 덜 깬 나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검은색이 안 된다면 대체 나한테 뭘 입으란 말인가, 항변할 기운도 없다. 계간지 여름호 원고를 마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동생 모두 2002년부터 이 년 간격으로 오월에 결혼식을 치렀다. 한창 여름호 원고에 집중해야 할 시간인데, 나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게다가 검은 옷도 못 입게 하고.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동생들 결혼식이다. 자매들이 원한다면 핑크 원피스를 입으라고 해도 들어주고 싶다.
자매들이 옷 매장을 잔뜩 어지럽히며 샅샅이 둘러보고 있다. 세 자매가 함께 백화점에서 옷을 골라보기는 처음이다. 매장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를 깨워 자매들이 눈앞으로 옷을 내민다. 눈에 불꽃이 탁 튀는 것 같다. 강렬한 붉은색 원피스다. 이거 입어봐, 언니. 동생들은 씩씩하고 즐거워 보인다. 불쑥 눈물이 날 것 같다. 한 방에서 부대끼며 지내야 했던 시간이 더 길었다. 너네 언니 요즘 뭐 하니? 누가 물으면 할 말이 없게 만들었던 시간도 길었다. 가장 어려웠던 순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함께 보낸 자매들이었다. 웃고 있지만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도 자매들 얼굴엔 기미가 끼어 있고 그 얼굴이 꼭 내 얼굴 같다. 결혼하지 말고 계속 이렇게 같이 살자, 이런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원피스를 움켜쥐곤 탈의실로 숨어버린다. 그런데 맙소사. 이런 새빨간 원피스를 입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민소매, 등도 V자로 푹 파였다.
비죽거리며 탈의실에서 나온 나를 보고 자매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오, 완전 잘 어울리는걸!
시간이 지난 지금,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런데 왜 레드였을까? 두 자매들 결혼식 모두 나는 디자인만 약간씩 다른 붉은 원피스를 입었다. 자매들 의견도 의견이었지만 나 역시 머뭇거리면서도 그 선택에 동의했고 결혼식 날, 그 옷이 나에게 제법 잘 어울렸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평소의 나였으면 일 초도 주저하지 않고 블랙을 선택했을 텐데.
지금도 믿고 싶지 않지만 우리나라 풍습에 동생이 결혼하는데 언니가 만약 싱글이라면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는 거라고 한다. 여행을 가거나 집에 있거나. 가까운 친지 중 누군가 눈치 없는 나에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자매들이 눈처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이라는 의식을 치르는 걸 왜 내가 볼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나보고 결혼식에 나타나지 말란 말이지? 어쩌면 그 약간의 불편한 마음과 반감이 작용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자매들의 결혼식 때마다 세상의 모든 색깔들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고 격렬하며 가장 시끄럽다는 빨강을 선택한 것일까. 옷을 고르고 입을 때는 언제나 덜 새롭고 덜 과시적이고 덜 장식적이며 덜 개방적인 것을 선택하는 내가. 어찌 되었든 그날 나는 펄럭이는 빨간 원피스를 입고 하객들 사이를 휘젓고 돌아다니며 나의 새 페르소나를 유감없이 발휘했고, 자매들은 예뻤다.
이제 나는 열다섯 살 때 내가 뭣도 모르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자매들의 결혼식 날, 그 빨간 원피스들은 내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니까. 안방에 있는 엄마 옷장에는 두 동생들 결혼식 때 입었던 나의 빨간 원피스 두 벌이 고이 걸려 있다. 집이 비면 슬그머니 안방으로 들어가 옷장 문을 열어보곤 한다. 내가 다시 그 빨간 원피스를 입게 될 날이 올지 오지 않을지 그건 아직 알 수 없지만.
하이힐과 부츠
백화점에 구두 수선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본 구두 수선실은 한 두어 평이나 될까. 짐작보다 좁은 공간에서 수선공이 거꾸로 세운 구두 굽을 망치로 두들기고 있었다. 별도의 수선실이라기보다는 간이시설 느낌이 들었다. 구두 굽 가는 데 보통 사천 원. 손님은 하루에 삼사십여 명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구두뿐만 아니라 핸드백과 가방 수선도 겸하고 있었다. 백화점에서 산 구두만을 수선하는 데가 아니라 여타에서 구입한 구두 수선이 필요한 손님들의 편의를 위한 임대매장이다. 주로 백화점 이층이나 삼층 코너에 위치하고 있다.
구두 수선실은, 내가 고객의 자격으로는 둘러볼 수 없으나 취재를 허락받고 볼 수 있었던 백화점의 많은 공간들 중 가장 협소한 곳이었다. 수선이 필요하지만 매장이 없어진 경우나 백화점에서 사지는 않았지만 수선해서 더 신고 싶은 구두들이 있다면 유용하게 이용할 공간이다. 혹여 몸에 닿아 벽에 걸려 있는 구두나 핸드백이 떨어질까봐 어깨를 웅크리고 구두 수선실을 나오다 말고 나는 문득 뒤돌아본다. 수선을 마친 그 구두와 핸드백들. 꼭 누군가 찾아가주길 기다리는 헌책방의 책들처럼 보인다. 겉은 낡았지만 아직은 쓸모 있고 누군가에게는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를.
구두 수선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나는 예전부터 그래왔듯 매장으로 간다. 그 수선을 맡길 당시에 구두 수선실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매장으로 바로 갔을 것 같다. 어쨌든 그 구두를 산 곳이니까 그 구두를 가장 잘 이해하고 수선에 필요한 적합한 부속품들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검증되지 않은 기대 때문에라도.
뭐 필요한 게 없느냐는 판매원의 질문에 나는 바로 돌아 나가지 못하고 매장을 둘러보는 척한다. 단연 킬힐과 부츠 종류들이 많다. 킬힐의 굽은 아찔하게 높다. 저런 것을 신고서도 걸을 수가 있나? 의심이 들 만큼. 내가 갖고 있는 최고로 높은 굽은 8센티미터.
킬힐이 막 유행하던 때에 구두 매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골라 한번 신어본 적이 있다. 11센티미터짜리. 하이힐이 주는 장점 중 하나는 몸의 선을 드러내며 살려준다는 것이다. 다리도 길어 보인다. 누가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나는 거울 속의, 킬힐을 신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마릴린 먼로가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그’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다고 말했을 때의 그는 바로 하이힐을 가리킨다. 자, 그럼 어디 한번 걸어볼까?
거울 앞에서 발을 떼자마자 나는 팔을 버둥거리며 크게 휘청거린다. 항간에 킬힐을 두고 도는 유행어처럼 그건 구두를 신는 게 아니라 구두 위에 몸을 올려놓는 그런 느낌이었다. 유행에 크게 뒤처지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철심이 박혀 있을 킬힐을 신고 도저히 걸어다닐 자신이 없었다. 대체 이런 걸 신고 어떻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거지? 계단을 생각하자마자 금세 풀이 죽어버렸다. 나는 지미 추라는 구두는 신어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 디자이너가 11센티미터가 넘는 굽은 만들지 않겠다고 한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다. 지미 추. 마놀로 블라닉과 더불어 슈어홀릭이나 구두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에게라면 이젠 너무나 유명해져버린 디자이너의 이름이다. 이런 디자이너들의 구두가 급부상한 것은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다.
1980년대의 의상과 구두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여권신장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여성들 사이에서 어깨를 강조하고 부풀린 재킷과 뾰족하고 위협적으로 보이는 높은 굽의 구두들이 유행했다. 패션의 세계에서 “추한 것은 팔리지 않는다”라는 R.뢰비의 말은 중요한 명제처럼 굳어져 있지만, 디자이너들은 애초에 팔리지 않을 물건은 만들지 않는다. 패션을 이끄는 사람이나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 모두의 공통점은 미적 자유다. 그 미적 자유에 따라야 하는 행위가 바로 소비다. 소비는 유행과 맞물려 있으며 그 유행을 구축하는 바탕은 사회적 분위기다.
하이힐의 재탄생은 1980년대 여권신장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첫 번째 역사는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때였다. 복장과 장신구에 관심이 컸던 여왕이었다. 영국에선 이미 11세기 후반에 구두장이 길드가 런던에 설립되었고 그것이 최초의 길드로 기록되어 있다. 재력과 권력을 가졌던 엘리자베스 1세는 직속 제화공들을 두어 구두를 만들게 했다.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는 화려한 수가 놓인 벨벳 구두와 가죽 구두들. 그 당시엔 지금의 뮬Mule이라고 불리는, 굽이 약간 있는 슬리퍼 형식의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다. 여왕 사후, 이 구두들 중 아치형의 굽이 발견된다. 그 디자인을 변형시킨 것이 현재 하이힐의 원형에 가까운 쐐기 모양 굽이며, 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1세를 그린 판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이힐의 변천사는 그 후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몸의 라인을 살려준다는 이유 때문에 17세기에는 남성들 사이에서도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레이스나 비단 같은 사치품의 교역이 늘어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한편 이때 유행하기 시작한 또다른 디자인의 구두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부츠다.
남성의 영역인 전쟁과 군대에서 탄생한 부츠가 빅토리아 여왕(1819~1901) 시절부터 여성들에게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 전에 부츠가 여성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성용과 마찬가지로 군대 제복에서 빌려온 여성용 부츠는 18세기 초, 길이를 줄이고 레이스나 천으로 장식을 해 다리를 돋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낭만주의가 시작되자 현재의 앵클부츠보다 길이가 더 짧아지고 허리를 졸라매는 드레스에 어울리도록 구두에 장식이 크게 늘어 실용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 후 여성들 사이에 유행을 선도한 것은 앙증맞고 우아해 보이는 굽 낮은 비단 구두들. 여성들은 구두를 이용해 발을 작게 보이려고 애썼다. 작은 손과 발이 이상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이라고 여기던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빅토리아 여왕 초기까지 이어지지만 여왕의 실외 활동이 늘자 변화가 인다. 아무래도 앙증맞은 핑크색 비단 구두는 실외 활동에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류층 여성들을 중심으로 튼튼한 가죽 구두와 부츠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반복과 변화를 거듭하는 구두의 역사는 간단하지 않다. 부츠 때문에 실내에서는 슬리퍼를 신어야만 했던 여성들 사이에서 뮬이 유행하게 되고 19세기 중엽, 재봉틀의 등장과 더불어 다양한 디자인의 구두들이 대량으로 쏟아져나온다. 하이힐이 재등장하고 부츠는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0세기 초, 치마 길이가 짧아지고 스타킹이 패션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부츠를 찾는 여성들이 늘기 시작했다. 이어 펑크의 문화가 열리고 스포츠에 대한 관심, 그리고 핫팬츠 같은 새로운 패션 아이템이 등장하면서 부츠의 디자인은 시대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그 후 부츠나 하이힐을 포함한 구두 디자인은 1990년대 초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복고 열풍, 글로벌 세계에서의 자아표현이 중시되면서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눈앞에 수백 켤레의 구두들이 전시돼 있다. 어느 것이나 신어볼 수 있고 어쩌면 그중 한 켤레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들 속에선 언제나처럼 갈등이 생긴다. 이것은 물건을 살 때의 내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많이 구경하고 보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을 사는 상점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사진 않아도 지금 이렇게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잘 진열된 구두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는 구두, 신발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엄격했다. 운동화라면 언제나 일주일에 한 번은 깨끗하게 빨아 신어야 했고 구두라면 먼지 하나 없이 닦고 다녀야 했다. 현관 앞에 구두를 벗어놓을 때도 항상 반듯하게. 잠들기 전 맨 마지막에 아버지가 하는 일은 현관 앞, 가족들의 신발을 앞으로 나란히 놓는 것이다. 지금 그 일은, 내가 한다. 나만 그런 걸까. 아무리 잘 차려입은 사람이라고 해도 어쩌다 시선이 간 신발이 허름해 보이면 그 전부가 허름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내가 구두 수선을 자주 하러 백화점에 오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손님?”
문득 정신을 차린다.
“……네?”
“혹시 뭐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요.”
나에게 수선증을 건네주었던 판매원이 내가 그 매장의 새로운 어떤 구두에게 흥미를 갖기를 여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구두 파는 남자. 신입 직원 같다. 그러나 대개의 구두 파는 남자들처럼 지나치게 공손한 것 같진 않아 다행이다. 나는 그 지나친 공손함, 이를테면 구두를 신겨주거나 신은 구두를 벗겨주거나 발 사이즈를 잴 때 판매원들의 스킨십이 불편하다.
우리나라 백화점 구두 매장뿐만 아니라 도쿄 이세탄 백화점의 남성 구두 매장에서도 느낀 것인데 구두 판매원들을 뽑을 때는 어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상냥하고 말끔하게 생긴 직원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속으로 말하며 돌아선다.
필요한 구두는 없지만 갖고 싶은 구두는 언제나 있지요.
신관 통로 쪽으로 가다가 말고 슬쩍 매장을 돌아보니 그 판매원이 어느새 다른 여성 손님의 발에 구두를 신겨주고 있다. 구애하듯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구두 파는 남자들에게 궁금한 게 있다. 발을 만지는 게 좋은가요? 물어보고 싶다. 싫어도 어쩔 수 없죠 뭐.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 같다. 그러나 만약 네, 난 여성의 발을 만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라고 대답하면 뭐라고 말할까. 그러면 나는 적어도 발에 관해서라면 가장 집요한 묘사가 살아 있고 아름다움이 있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후미코의 발」이라는 단편소설을 들려줄 것이다. 첩으로 들여앉힌 열일곱 살 후미코의 발에 매혹당한, 죽어가는 한 전당포 노인의 페티시즘을 탐미적으로 표현한 짧은 이야기를. 그리고 우리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면 발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콤플렉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오늘 쇼핑은 무엇을 사게 되건 집에 갈 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구두를 충동구매하진 않았으니까. 구두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물건이지만 언제나 새로 필요한 아이템은 아니다.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는 팔려고 하는 물건과 필요한 물건, 그 사이에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가 백화점에 오는 이유를 깨닫는다.
어느 때, 나는 다른 데가 아니라 나를 배려해주는 곳에서 물건을 사고 싶다. 특히 구두 같은 상품은.
클래식 음악과 구두 사이에는 아무 연관성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둘 다, 더 깊이 들어갔다가는 틀림없이 돌아 나오지 못할 것 같아 두렵다. 다양하고 아름다운 것들에는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한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듣지도 보지도 않는다.
내가 구두에 빠질 가능성? 구십구 프로다.
옷 매장에서 눈을 먼저 사로잡는 것은 옷이 아니라 그 옷을 입고 있는 마네킹들이다. 아름답고 도도하고 차갑고 매력적이다. 옷보다 더 근사해 보이는 마네킹도 있다. 옷은 옷으로 자신을 말하지 않는다. 옷은 입고 있는 마네킹을 더 돋보이게 만들고 그게 옷의 역할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옷이 벗겨진 마네킹들도 있다. 깡마르고 춥고 허전해 보인다. 옷이 벗겨진 마네킹을 보고 있는 때 나는 슬픔을 느낀다. 어느 땐 그것이 꼭 실제로 구현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문장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은 불완전해서 비틀리고 주름지고 파묻히고 구부정해지며 옷은 바로 그런 점들을 고려한다고 피에르 상소는 말했다. 마네킹은 완벽해 보이는 체형을 갖고 있긴 하지만 옷 없이는 불완전해 보인다. 옷이 벗겨진,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가발도 벗겨진 몇 개의 마네킹들이 겹쳐 쓰러져 있는 장면은, 끔찍했다. 옷 매장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문득 마네킹의 기원이 궁금해진다. 사람은 왜 사람과 닮은 밀랍인형을 만들기 시작했을까.
혹시 나와 비슷한 궁금증을 가진 독자들에게라면 폴란드 작가 브루노 슐츠의 『계피색 가게들』에 수록된 「마네킹에 대한 논설」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불완전하긴 하지만 마네킹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데 나는 동의한다.
옷 매장으로 성큼 들어간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다.
세 자매 중 바로 아래 동생이 언니 나 결혼할까봐, 라고 말했을 때 허를 찔린 것 같았다. 우리는 영원히 이렇게 같이 살 줄 알았다. 결혼을 하겠다는 동생을 앞에 두고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알 듯 말 듯한 감정이 둔중히 머리를 한 번 때리고 지나갔다. 축하한다는 말은 정말이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축하라니. 나는 멀리 내던져진 것 같았다. 오래된 집에서 부모와 셋이 소리 없이 늙어가게 될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동안 독립할 기회를 틈틈이 엿보긴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했어도 경제적으로 나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동생이 결혼하고 그리고 막냇동생까지 결혼해버리고 나면 부모만 남는다.
두려움 뒤에 깊은 체념의 상태가 찾아왔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 체념은 신념으로 변했고 지금도 나는 부모와 같이 살고 있다. 그 신념은 맏딸로서 부모를 모셔야 한다, 라는 게 아니다. 이것이 나의 자연스러운 삶이다, 라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내 인생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동생들의 결혼이 아니라 그 결혼 때문에 일어나게 될 변화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모험심도 없고 대부분의 일과 관계들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모두들 가버리고 진화하고 움직이는데 나만 언제나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동생들이 결혼을 한다,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자 비어 있게 될 동생들의 방과, 대화가 거의 없는 부모와 나 사이에 눈에 띄게 생겨날 무거운 침묵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동생들의 결혼으로 일어난 변화는 뜻밖에도 내 비관적 추측과는 달랐다. 하나둘씩 조카들이 태어나면서 ‘친정’이 된 우리 집으로 동생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일본 남자와 결혼하여 도쿄에 살게 된 둘째야 하는 수 없지만, 맞벌이인 막냇동생의 아이들은 친정엄마, 그러니까 내 엄마가 키워야 했고 그건 마땅히 나와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아직 조카들이 태어나기 전, 결혼식을 앞두고 있고 세 자매들은 옷을 고르는 중이다. 자신들의 결혼식에 ‘작가 언니’가 입고 나타날. 껌정은 무조건 안 돼!
동생들은 미리 못 박았다. 잠도 덜 깬 나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검은색이 안 된다면 대체 나한테 뭘 입으란 말인가, 항변할 기운도 없다. 계간지 여름호 원고를 마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동생 모두 2002년부터 이 년 간격으로 오월에 결혼식을 치렀다. 한창 여름호 원고에 집중해야 할 시간인데, 나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게다가 검은 옷도 못 입게 하고.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동생들 결혼식이다. 자매들이 원한다면 핑크 원피스를 입으라고 해도 들어주고 싶다.
자매들이 옷 매장을 잔뜩 어지럽히며 샅샅이 둘러보고 있다. 세 자매가 함께 백화점에서 옷을 골라보기는 처음이다. 매장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를 깨워 자매들이 눈앞으로 옷을 내민다. 눈에 불꽃이 탁 튀는 것 같다. 강렬한 붉은색 원피스다. 이거 입어봐, 언니. 동생들은 씩씩하고 즐거워 보인다. 불쑥 눈물이 날 것 같다. 한 방에서 부대끼며 지내야 했던 시간이 더 길었다. 너네 언니 요즘 뭐 하니? 누가 물으면 할 말이 없게 만들었던 시간도 길었다. 가장 어려웠던 순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함께 보낸 자매들이었다. 웃고 있지만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도 자매들 얼굴엔 기미가 끼어 있고 그 얼굴이 꼭 내 얼굴 같다. 결혼하지 말고 계속 이렇게 같이 살자, 이런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원피스를 움켜쥐곤 탈의실로 숨어버린다. 그런데 맙소사. 이런 새빨간 원피스를 입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민소매, 등도 V자로 푹 파였다.
비죽거리며 탈의실에서 나온 나를 보고 자매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오, 완전 잘 어울리는걸!
시간이 지난 지금,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런데 왜 레드였을까? 두 자매들 결혼식 모두 나는 디자인만 약간씩 다른 붉은 원피스를 입었다. 자매들 의견도 의견이었지만 나 역시 머뭇거리면서도 그 선택에 동의했고 결혼식 날, 그 옷이 나에게 제법 잘 어울렸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평소의 나였으면 일 초도 주저하지 않고 블랙을 선택했을 텐데.
지금도 믿고 싶지 않지만 우리나라 풍습에 동생이 결혼하는데 언니가 만약 싱글이라면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는 거라고 한다. 여행을 가거나 집에 있거나. 가까운 친지 중 누군가 눈치 없는 나에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자매들이 눈처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이라는 의식을 치르는 걸 왜 내가 볼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나보고 결혼식에 나타나지 말란 말이지? 어쩌면 그 약간의 불편한 마음과 반감이 작용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자매들의 결혼식 때마다 세상의 모든 색깔들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고 격렬하며 가장 시끄럽다는 빨강을 선택한 것일까. 옷을 고르고 입을 때는 언제나 덜 새롭고 덜 과시적이고 덜 장식적이며 덜 개방적인 것을 선택하는 내가. 어찌 되었든 그날 나는 펄럭이는 빨간 원피스를 입고 하객들 사이를 휘젓고 돌아다니며 나의 새 페르소나를 유감없이 발휘했고, 자매들은 예뻤다.
이제 나는 열다섯 살 때 내가 뭣도 모르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자매들의 결혼식 날, 그 빨간 원피스들은 내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니까. 안방에 있는 엄마 옷장에는 두 동생들 결혼식 때 입었던 나의 빨간 원피스 두 벌이 고이 걸려 있다. 집이 비면 슬그머니 안방으로 들어가 옷장 문을 열어보곤 한다. 내가 다시 그 빨간 원피스를 입게 될 날이 올지 오지 않을지 그건 아직 알 수 없지만.
하이힐과 부츠
백화점에 구두 수선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본 구두 수선실은 한 두어 평이나 될까. 짐작보다 좁은 공간에서 수선공이 거꾸로 세운 구두 굽을 망치로 두들기고 있었다. 별도의 수선실이라기보다는 간이시설 느낌이 들었다. 구두 굽 가는 데 보통 사천 원. 손님은 하루에 삼사십여 명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구두뿐만 아니라 핸드백과 가방 수선도 겸하고 있었다. 백화점에서 산 구두만을 수선하는 데가 아니라 여타에서 구입한 구두 수선이 필요한 손님들의 편의를 위한 임대매장이다. 주로 백화점 이층이나 삼층 코너에 위치하고 있다.
구두 수선실은, 내가 고객의 자격으로는 둘러볼 수 없으나 취재를 허락받고 볼 수 있었던 백화점의 많은 공간들 중 가장 협소한 곳이었다. 수선이 필요하지만 매장이 없어진 경우나 백화점에서 사지는 않았지만 수선해서 더 신고 싶은 구두들이 있다면 유용하게 이용할 공간이다. 혹여 몸에 닿아 벽에 걸려 있는 구두나 핸드백이 떨어질까봐 어깨를 웅크리고 구두 수선실을 나오다 말고 나는 문득 뒤돌아본다. 수선을 마친 그 구두와 핸드백들. 꼭 누군가 찾아가주길 기다리는 헌책방의 책들처럼 보인다. 겉은 낡았지만 아직은 쓸모 있고 누군가에게는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를.
구두 수선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나는 예전부터 그래왔듯 매장으로 간다. 그 수선을 맡길 당시에 구두 수선실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매장으로 바로 갔을 것 같다. 어쨌든 그 구두를 산 곳이니까 그 구두를 가장 잘 이해하고 수선에 필요한 적합한 부속품들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검증되지 않은 기대 때문에라도.
뭐 필요한 게 없느냐는 판매원의 질문에 나는 바로 돌아 나가지 못하고 매장을 둘러보는 척한다. 단연 킬힐과 부츠 종류들이 많다. 킬힐의 굽은 아찔하게 높다. 저런 것을 신고서도 걸을 수가 있나? 의심이 들 만큼. 내가 갖고 있는 최고로 높은 굽은 8센티미터.
킬힐이 막 유행하던 때에 구두 매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골라 한번 신어본 적이 있다. 11센티미터짜리. 하이힐이 주는 장점 중 하나는 몸의 선을 드러내며 살려준다는 것이다. 다리도 길어 보인다. 누가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나는 거울 속의, 킬힐을 신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마릴린 먼로가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그’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다고 말했을 때의 그는 바로 하이힐을 가리킨다. 자, 그럼 어디 한번 걸어볼까?
거울 앞에서 발을 떼자마자 나는 팔을 버둥거리며 크게 휘청거린다. 항간에 킬힐을 두고 도는 유행어처럼 그건 구두를 신는 게 아니라 구두 위에 몸을 올려놓는 그런 느낌이었다. 유행에 크게 뒤처지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철심이 박혀 있을 킬힐을 신고 도저히 걸어다닐 자신이 없었다. 대체 이런 걸 신고 어떻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거지? 계단을 생각하자마자 금세 풀이 죽어버렸다. 나는 지미 추라는 구두는 신어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 디자이너가 11센티미터가 넘는 굽은 만들지 않겠다고 한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다. 지미 추. 마놀로 블라닉과 더불어 슈어홀릭이나 구두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에게라면 이젠 너무나 유명해져버린 디자이너의 이름이다. 이런 디자이너들의 구두가 급부상한 것은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다.
1980년대의 의상과 구두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여권신장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여성들 사이에서 어깨를 강조하고 부풀린 재킷과 뾰족하고 위협적으로 보이는 높은 굽의 구두들이 유행했다. 패션의 세계에서 “추한 것은 팔리지 않는다”라는 R.뢰비의 말은 중요한 명제처럼 굳어져 있지만, 디자이너들은 애초에 팔리지 않을 물건은 만들지 않는다. 패션을 이끄는 사람이나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 모두의 공통점은 미적 자유다. 그 미적 자유에 따라야 하는 행위가 바로 소비다. 소비는 유행과 맞물려 있으며 그 유행을 구축하는 바탕은 사회적 분위기다.
하이힐의 재탄생은 1980년대 여권신장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첫 번째 역사는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때였다. 복장과 장신구에 관심이 컸던 여왕이었다. 영국에선 이미 11세기 후반에 구두장이 길드가 런던에 설립되었고 그것이 최초의 길드로 기록되어 있다. 재력과 권력을 가졌던 엘리자베스 1세는 직속 제화공들을 두어 구두를 만들게 했다.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는 화려한 수가 놓인 벨벳 구두와 가죽 구두들. 그 당시엔 지금의 뮬Mule이라고 불리는, 굽이 약간 있는 슬리퍼 형식의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다. 여왕 사후, 이 구두들 중 아치형의 굽이 발견된다. 그 디자인을 변형시킨 것이 현재 하이힐의 원형에 가까운 쐐기 모양 굽이며, 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1세를 그린 판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이힐의 변천사는 그 후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몸의 라인을 살려준다는 이유 때문에 17세기에는 남성들 사이에서도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레이스나 비단 같은 사치품의 교역이 늘어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한편 이때 유행하기 시작한 또다른 디자인의 구두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부츠다.
남성의 영역인 전쟁과 군대에서 탄생한 부츠가 빅토리아 여왕(1819~1901) 시절부터 여성들에게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 전에 부츠가 여성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성용과 마찬가지로 군대 제복에서 빌려온 여성용 부츠는 18세기 초, 길이를 줄이고 레이스나 천으로 장식을 해 다리를 돋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낭만주의가 시작되자 현재의 앵클부츠보다 길이가 더 짧아지고 허리를 졸라매는 드레스에 어울리도록 구두에 장식이 크게 늘어 실용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 후 여성들 사이에 유행을 선도한 것은 앙증맞고 우아해 보이는 굽 낮은 비단 구두들. 여성들은 구두를 이용해 발을 작게 보이려고 애썼다. 작은 손과 발이 이상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이라고 여기던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빅토리아 여왕 초기까지 이어지지만 여왕의 실외 활동이 늘자 변화가 인다. 아무래도 앙증맞은 핑크색 비단 구두는 실외 활동에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류층 여성들을 중심으로 튼튼한 가죽 구두와 부츠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반복과 변화를 거듭하는 구두의 역사는 간단하지 않다. 부츠 때문에 실내에서는 슬리퍼를 신어야만 했던 여성들 사이에서 뮬이 유행하게 되고 19세기 중엽, 재봉틀의 등장과 더불어 다양한 디자인의 구두들이 대량으로 쏟아져나온다. 하이힐이 재등장하고 부츠는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0세기 초, 치마 길이가 짧아지고 스타킹이 패션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부츠를 찾는 여성들이 늘기 시작했다. 이어 펑크의 문화가 열리고 스포츠에 대한 관심, 그리고 핫팬츠 같은 새로운 패션 아이템이 등장하면서 부츠의 디자인은 시대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그 후 부츠나 하이힐을 포함한 구두 디자인은 1990년대 초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복고 열풍, 글로벌 세계에서의 자아표현이 중시되면서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눈앞에 수백 켤레의 구두들이 전시돼 있다. 어느 것이나 신어볼 수 있고 어쩌면 그중 한 켤레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들 속에선 언제나처럼 갈등이 생긴다. 이것은 물건을 살 때의 내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많이 구경하고 보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을 사는 상점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사진 않아도 지금 이렇게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잘 진열된 구두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는 구두, 신발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엄격했다. 운동화라면 언제나 일주일에 한 번은 깨끗하게 빨아 신어야 했고 구두라면 먼지 하나 없이 닦고 다녀야 했다. 현관 앞에 구두를 벗어놓을 때도 항상 반듯하게. 잠들기 전 맨 마지막에 아버지가 하는 일은 현관 앞, 가족들의 신발을 앞으로 나란히 놓는 것이다. 지금 그 일은, 내가 한다. 나만 그런 걸까. 아무리 잘 차려입은 사람이라고 해도 어쩌다 시선이 간 신발이 허름해 보이면 그 전부가 허름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내가 구두 수선을 자주 하러 백화점에 오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손님?”
문득 정신을 차린다.
“……네?”
“혹시 뭐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요.”
나에게 수선증을 건네주었던 판매원이 내가 그 매장의 새로운 어떤 구두에게 흥미를 갖기를 여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구두 파는 남자. 신입 직원 같다. 그러나 대개의 구두 파는 남자들처럼 지나치게 공손한 것 같진 않아 다행이다. 나는 그 지나친 공손함, 이를테면 구두를 신겨주거나 신은 구두를 벗겨주거나 발 사이즈를 잴 때 판매원들의 스킨십이 불편하다.
우리나라 백화점 구두 매장뿐만 아니라 도쿄 이세탄 백화점의 남성 구두 매장에서도 느낀 것인데 구두 판매원들을 뽑을 때는 어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상냥하고 말끔하게 생긴 직원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속으로 말하며 돌아선다.
필요한 구두는 없지만 갖고 싶은 구두는 언제나 있지요.
신관 통로 쪽으로 가다가 말고 슬쩍 매장을 돌아보니 그 판매원이 어느새 다른 여성 손님의 발에 구두를 신겨주고 있다. 구애하듯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구두 파는 남자들에게 궁금한 게 있다. 발을 만지는 게 좋은가요? 물어보고 싶다. 싫어도 어쩔 수 없죠 뭐.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 같다. 그러나 만약 네, 난 여성의 발을 만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라고 대답하면 뭐라고 말할까. 그러면 나는 적어도 발에 관해서라면 가장 집요한 묘사가 살아 있고 아름다움이 있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후미코의 발」이라는 단편소설을 들려줄 것이다. 첩으로 들여앉힌 열일곱 살 후미코의 발에 매혹당한, 죽어가는 한 전당포 노인의 페티시즘을 탐미적으로 표현한 짧은 이야기를. 그리고 우리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면 발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콤플렉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오늘 쇼핑은 무엇을 사게 되건 집에 갈 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구두를 충동구매하진 않았으니까. 구두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물건이지만 언제나 새로 필요한 아이템은 아니다.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는 팔려고 하는 물건과 필요한 물건, 그 사이에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가 백화점에 오는 이유를 깨닫는다.
어느 때, 나는 다른 데가 아니라 나를 배려해주는 곳에서 물건을 사고 싶다. 특히 구두 같은 상품은.
클래식 음악과 구두 사이에는 아무 연관성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둘 다, 더 깊이 들어갔다가는 틀림없이 돌아 나오지 못할 것 같아 두렵다. 다양하고 아름다운 것들에는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한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듣지도 보지도 않는다.
내가 구두에 빠질 가능성? 구십구 프로다.
- 백화점 조경란 저/노준구 그림 | 톨
소설가 조경란이 쓴 백화점을 직접 조명한 문화 에세이다. 백화점이라는 ‘장소’가 현대인들에게 갖는 의미와 기능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이 책은 현장 취재와 자료조사를 통해 깊이와 넓이가 더해져 오롯이 백화점을 다룬 최초의 논픽션이 되었다. 정신적인 삶, 물질적인 삶 사이에서 갈등한 저자의 고민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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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조경란
주변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인간의 고독과 우수를 부감시키며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깊이 있게 보여주는 작가 조경란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년 후에 서울예대 문학창작학과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소설집 『불란서 안경원』『나의 자줏빛 소파』『코끼리를 찾아서』 『국자 이야기』 『풍선을 샀어』, 중편소설 『움직임』,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혀』, 산문집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백화점』 등이 있다. 문학동네작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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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