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한 경관 소총 난사 56명 사망한 사건… 기억나세요?
전투기가 넘어온 1983년 8월7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내가 중공 전투기 귀순을 이웅평의 것으로 착각했나? 그럴 리 없다. 숨가빴던 ‘실제상황’ 사이렌 소동이 이웅평 귀순 때였음을 수많은 자료가 확인해준다. 그렇다면 한 해 전이었나? 1982년 기사가 담긴 스크랩 제14권을 뒤적여봤다.
글ㆍ사진 고경태
201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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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기억은 불완전하다.
나는 그날을 확고부동하게 기억한다고 믿었다. 사이렌에 한 대 얻어맞은 하루였다. 일요일 오후였다. 10월 초였다. 아니라면, 여름 또는 초가을이었다. 짧은 팔 티셔츠를 입었다. 1983년이었다. 난 고2였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울려퍼진 사이렌과 긴박하게 흘러나온 아나운서의 음성. “공습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 그 말들은 반복되고 또 반복됐다. 하얗게 질린 어머니의 얼굴. 공포에 젖은 한 마디. “서울에 있는 네 형은 어쩐다니?” 나는 잠깐 극단의 상황을 상상했다. 드디어 전쟁이구나!! 사이렌은 20분 만에 꺼졌다. 무료한 일상을 강렬하게 깨뜨리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은 그날은 분명히 1983년, 여름이나 가을, 일요일 오후였다.

아버지의 스크랩을 뒤지다가 혼란에 빠졌다. 1983년 기사들이 담긴 제15권에서 바로 그날 벌어진 ‘이웅평 상위(대위) 전투기 귀순 사건’을 찾지 못해서다. 대신 8월9일치 신문에 중공 전투기 귀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중공 미그21기 귀순
시험비행단 손천근조종사 대련떠나 1백m 저공비행
7일 하오3시33분 ○○기지 안착


중공의 미그21전투기 1대가 우리나라로 귀순해왔다.
국방부는 7일하오 중공군 조종사 1명이 중공제 미그21전투기를 몰고 서해상공을 거쳐 귀순해왔다고 공식발표했다.
국방부 박종식대변인 발표에 의하면 귀순조종사는 중공군시험비행단소속 시험비행조종사 손천근씨(46)로 손씨는 이날하오 2시48분께 대련상공에서 항법 훈련중 편대를 이탈, 서해를 경유해 우리영공으로 접근하면서 아군초계기를 향해 귀순신호를 보내 우리 공군기○대의 유도아래 공군○○기지에 무사히 착륙했다. (하략)

(1983. 8. 9. <한국일보>)






전투기가 넘어온 1983년 8월7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내가 중공 전투기 귀순을 이웅평의 것으로 착각했나? 그럴 리 없다. 숨가빴던 ‘실제상황’ 사이렌 소동이 이웅평 귀순 때였음을 수많은 자료가 확인해준다. 그렇다면 한 해 전이었나? 1982년 기사가 담긴 스크랩 제14권을 뒤적여봤다. 아, 1982년 10월에 전투기가 넘어오긴 했다. 이웅평은 아니다. 나중에 대만으로 망명한 중공군 조종사 오영근이다.



중공군 조종사 1명 서울로 탈출
미그 19기 몰고 우리 기지에
국방부 발표 제3국 망명 희망


중공군 조종사 1명이 MIG19전투기를 몰고 우리나라로 탈출했다. 국방부는 19일 중공군 조종사 1명이 지난 16일 하오2시34분 중공제 MIG19전투기(일명 F6)를 타고 서해를 건너 우리 공군기지에 착륙했다고 발표했다.
박종식 국방부 대변인 발표에 의하면 이 전투기 조종사는 중공군정찰1단 소속 오모씨(25)이며 우리 기지에 도착 즉시 제3국으로 망명할 의사를 밝혔다는 것.(하략)

(1982년10월20일치 신문)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적성국 관계에 있던 중공군 비행기가 우리나라에 귀순해 온 것은 1961년 9월15일 고우종 소희언 등 두 조종사가 AN2수송기를 몰고 제주도에 도착한 이래 두 번째다. 북한군 전투기는 1950년 4월28일 이건순 소위의 IL10연락기를 필두로, 1970년 12월3일 박순국 소좌의 미그15기까지 총 다섯 차례 넘어왔다.

다시 스크랩15권으로 돌아와, 1983년치 기사들을 1월부터 찬찬히 살폈다. 이웅평 상위가 미그19기를 몰고 ‘북한기 전투기 사상 여섯 번째로’ 귀순한 날은 2월25일이었다. 여름이나 초가을이 아닌, 겨울이었다니.



북괴미그19기 귀순
조종사 이웅평 상위(29세), 기체는 중공제


북괴공군의 미그19(M1G) 전투기 1대가 25일 상오 서해 상공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고 국방부가 이날 발표했다.
박종식 국방부 대변인은 귀순한 북괴전투기는 이날 상오10시45분께 해주상공을 지나 연평도 상공의 휴전선을 넘어 남하했으며 이순간 우리공군 경보망에 포착돼 초계비행중이던 공군기에 의해 11시4분께 서울 남쪽 OO기지에 유도 착륙됐다고 밝혔다. (중략)
군당국에 의하면 귀순조종사는 북괴공군소속 이웅평 상위(29)이며 미그기는 중공제인것으로 알려졌는데 조종사의 정확한 신원과 귀순동기등은 당국의 조사가 끝나는 대로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1983년 2월26일치)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이웅평’을 검색하고 시작했으면 쉬웠으리라. 뇌리에 허술하게 박힌 주관적 정보를 지나치게 신뢰했다. 일요일 오후라고 생각했던 그날은, 실제로는 목요일 오전 11시였다. 1983년 2월25일이라면 고2로 넘어가기 직전의 봄방학 기간. 휴일이라 일요일과 혼동했던 모양이다.

1980년대 초반은 ‘사이렌의 시대’였다. 매달 15일이면, 특정 시간에 맞춰 긴 사이렌 소리와 함께 민방공훈련을 했다. 가상의 공습경계경보가 발령되고 여기에 따라 대피훈련과 화생방훈련을 했다. 모든 자동차와 사람의 통행은 중지됐다. 늘 전쟁을 예감하며 살아야 했고, 실제로 전쟁 같은 일들이 벌어졌던 때다.

그 전쟁 같은 뉴스들에 관해서 쓴다. 굳이 이름을 붙여본다면 ‘사이렌 뉴스’. 사이렌처럼 예고 없이 독자들을 습격한 긴급뉴스들. 아버지의 스크랩 14권과 15권을 장식한 ‘호외’를 살펴본다.

신문이 주류 미디어로서 위세를 떨치고 방송의 보도기능이 활발하지 않던 시절, 호외는 유일한 속보 매체였다. 이웅평 귀순 사건이 났을 때도 신문들은 당일 오후 호외를 발행해 전국에 뿌렸다. ‘이웅평 호외’는 보관목록에 빠져있지만, 80년대 초반 아버지의 스크랩엔 유독 호외가 많다. 그중에서도 14권과 15권에 집중돼 있다. ‘호외’는 대판 신문의 절반 크기로 달랑 한 장이다. 때로는 한쪽 면만, 때로는 양면 모두 편집됐다. 형식적으로는 전단지를 뜻하는 ‘찌라시’를 닮았다. 그러나 내용을 읽고 나면 통증이 느껴지고 머리가 어지러운 ‘센 뉴스’들이 많다.



부산방화범 3명 검거
이미옥ㆍ최충언ㆍ박원식등
주범 문부식등 5명 수배


【부산=노기창 기자】부산미문화원방화및 불온유인물 살포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사건발생 12일 만인 30일 일당 10여 명 중 방화조와 살포조등 3명을 검거하고 주범 문부식(24ㆍ부산K대학4년)등을 포함한 나머지 공범5명을 지명 수배했다. 이 사건 수사본부 (한기형 부산시경부국장)는 이날 범행동기를 “한미간의 이간과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는 신흥 좌경불순분자들의 사회혼란을 목적으로 한 범행”이라고 발표했다.

(<한국일보> 1982년 3월30일치 호외)






아니 이게 ‘센 뉴스’인가? 잠깐 고개를 갸우뚱했다. 1982년 3월18일 오후, 누군가의 고의적 방화로 인해 불에 타올랐던 부산 대청동 미국문화원. 주범을 잡지 못했을 때다. 공범인 이미옥(당시 22살), 최충언(당시 19살), 박원식(당시 20살) 3명만을 검거했는데도 호외를 발행했다. 아, 그렇지. 당시로선 얼마나 엄중한 사건이었던가.

우방, 그것도 최우방 미국의 상징적 시설물을 공격한 행위는 국내외에 충격을 던졌다. 극형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산 고신대생과 부산대생 10여명이 주인공들이다. 부산미문화원이 불에 타던 시간, 인근 국도극장 3층과 유나백화점 6층에선 수 백 장의 유인물이 살포됐다. 광주학살의 주인공 전두환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을 비판하며 반미투쟁을 천명하는 내용이었다. 사람만 안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불행히도 이 불로 도서실에 있다가 미리 피하지 못한 동아대생 1명이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이틀 뒤인 주범인 문부식(당시 23살) 김은숙(당시 24살)이 자수했다. 이들은 원주의 카톨릭 교육원에 숨어있었다. 신문 보도를 보자.



주범 문부식ㆍ김은숙 검거
원주서 신부 권유…자수
부산 방화사건 14일 만에 해결


공개수배중인 문부식(23ㆍ부산고신대 4년 제적)과 문의 애인 김은숙(24ㆍ여ㆍ부산고신대 4년 제적)이 1일 하오1시께 강원 원주에서 검거됐다. 치안본부는 이날 “문과 김이 경찰수사망을 피해 서울을 거쳐 원주에 피신, 모 교계에 은신처를 구하다 성직자를 통해 자수 검거됐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이들을 서울로 압송 범행전모와 배후관계등을 추궁중인데 “상세한 조사내용은 추후 발표”된다. 이로써 지난달 18일 부산에서 발생한 미문화원방화 및 불온유인물 살포사건은 발생 14일만에 모두 해결됐다. 이들이 검거됨에 따라 부산사건과 관련, 범인은 모두 8명(이호철 제외)으로 늘어났다.

(<한국일보> 1982년 4월2일치)




하루가 더 지난 뒤엔 문부식 김은숙을 세뇌시켰다는 ‘배후조종자’ 김현장(당시 32살)이 역시 원주에서 체포됐다.(김현장과 문부식은 원주에서 우연히 조우했는데, 이들을 숨겨준 카톨릭 원주교육원장 최기식도 국가보안법 위반과 범인은닉 혐의로 체포돼 구속된다) ‘광주 사람’ 김현장은 1981년 가을 ‘부산 사람’ 문부식을 만나 광주학살극의 진상을 알려줬다고 한다. 나는 당시 원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문부식 김은숙 김현장이 원주에서 체포됐다는 소식은 그곳의 청소년들에게 경악과 함께 안도감을 주었다. 아니 그런 흉악범들과 같은 도시에 살았다니! 잡혔으니 다행이구나!!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하면 ‘김현장 문부식’이라는 이름부터 떠오른다. 김현장과 문부식은 ‘방화와 유인물 살포’에 관해 의논한 적이 없다. 방화의 기획과 실무 과정에서 김현장의 역할은 전혀 없거니와, 지금까지도 김현장은 당시의 주범과 공범들에게 ‘배후’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1950년생으로, 문부식보다 아홉 살 많은 김현장은 1970년대 나름 유명한 르포라이터였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진상’ 등 일간신문이 못 쓰는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대화> 등 월간잡지에 실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80년 광주학살 직후엔 ‘전두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해 지명수배당했다. 수사당국으로선 이 엄청난 사건을 어린 대학생들만의 거사로 발표하기엔 부담스러웠으리라. 경력을 갖춘 ‘새빨간 인물’이 필요했다. 어쩌면 김현장은 억울하다. 1년 뒤 문부식과 함께 사형선고까지 받으니.



김현장ㆍ문부식 두 피고 사형확정
대법원 관련피고인 16명도 모두 원심대로
부산 미문화원 사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 김현장 문부식 피고인 등 2명에게 사형이 내려지는 등 관련피고인 16명에게 모두 원심대로 유죄가 확정됐다.
대법원 형사1부(재판장 이일규ㆍ주심 전상석 대법원 판사)는 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김현장 피고인 등 16명에 대한 국가보안법ㆍ계엄법 등 위반, 현주건조물 방화치사상ㆍ범인은닉사건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북괴가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하려는 야욕아래 허위선전 선동 등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내세워 온갖 책동을 다하고 있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고 밝히고 “우리나라와 혈맹의 관계에 있는 미문화원에 방화하고 반미활동을 전개, 한미간을 이간하려는 피고인들의 행위가 국가안위를 위태롭게해 궁극적으로 북괴를 이롭게 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결이유를 밝혔다.(하략)

(<한국일보> 1983년 3월9일치)






김현장과 문부식은 1988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두 사람은 그 뒤 친하게(!) 지내고 있을까. 아닌 것 같다. 원래 친하지 않았거니와, 평생을 거의 교유하지 않았다. 인간적으로도 그렇고, 정치적으론 더 그렇다. 최근 맡았던 자리나 발언을 보면 두 사람의 거리감을 느낄 만 하다. 문부식은 2011년 12월 한국사회에서 가장 왼쪽편에 자리한 진보신당의 대변인을 맡았다가 한 달만에 ‘음주사고’로 사임했다. 김현장은 2012년 6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뉴라이트스러운’ 발언들을 쏟아내며 진보운동권을 공격했다. 다음과 같은 말은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난세가 아니라 치세다.” 김현장은 2007년 박근혜를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공개지지했고, 그보다 10년 전엔 광주포럼을 결성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밀기도 했다. 1980년대 반미투쟁사의 첫머리에 이름을 올린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갔다.



만취경관 난사 59명 사망
어젯밤 의령서 20여 중상
지서서 카빈ㆍ수류탄 꺼내
내연의 처와 말다툼 끝에
범인 우순경 새벽에 자폭


【마산=김인규ㆍ이홍렬기자】 술에 만취된 경찰관이 내연의처와 말다툼을 한후 지서 무기고에 보관중인 수류탄, 카빈총과 실탄을 꺼내 주민들에게 무차별 난사해 59명이 숨지고 2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26일 밤 9시30분께 경남 의령군 의령경찰서 궁류지서에 근무하는 우범곤 순경(27)이 술에 만취돼 지서 무기고에 보관중이던 카빈총 2정 실탄 1백80발 수류탄 7개를 들고 나와 근처에 있는 궁류면 토곡리 궁류우체국에 들어가 카빈총을 난사하고 밖으로 나와 다시 카빈총을 한 후 수류탄을 던졌다.
이 사고로 궁류우체국 교환양 정은숙양(21) 집배원 정종섭씨(40) 송태진씨(42 궁유면 토곡리) 등 59명이 숨지고 최분이 할머니(71) 전미수군(8) 등 21명이 중경상을 입고 마산고려병원에 입원가료중이나 사망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하략)

(<한국일보> 1982년 4월27일치 호외)






맨 앞에서, 내 기억이 불완전했다는 에피소드를 전했다. 호외의 팩트 역시 불완전하다. 사실관계를 확인할 여유가 부족했을 것이다. 1986년 11월16일 ‘김일성 피살’을 보도한 호외는 오보사건의 백미였다. 거기에 비하면, 위 호외의 실수는 사소한 편이다. 실제 사망자 숫자는 59명이 아닌 56명이었다. 35명은 총경상을 입었다.

경남 의령군 궁류면 궁류지서에 근무하던 우범곤 순경(당시 27살)은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훔친 카빈 소총과 실탄, 수류탄으로 무장한 채 1982년 4월26일 밤 10시께부터 다음날 새벽 4시경까지 반나절간 ‘죽음의 파티’를 벌였다. 호외 이후에 발행된 신문을 보면 자세한 범행경로가 나온다. 파리 한 마리의 날갯짓으로부터 광란의 질주는 시작됐다.






◇우순경 범행경로

▲26일 밤 9시40분=궁류지서 무기고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M12정과 실탄 1백29발ㆍ수류탄 6발 절취.
▲9시45분=지서 앞에서 행인1명을 사살하고 궁류 우체국에 침입 교환양 등 3명 사살
▲10시10분=압곡리 매곡부락에 침입 6명 사살
▲10시35분=운곡리에 침입 집배원 일가족등 18명 사살
▲10시50분=평촌리에 침입 초상집을 비롯 불켜진 집만 골라 27명 사살
▲27일 새벽 2시=다시 평촌리 서인수씨(68) 담배가게에 침입 인질극
▲새벽3시40분=서씨 일가족 4명에게 수류탄 2발 투척하고 함께 폭사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싸워
괴퍅한 성격에 열등의식 빠져
내연의 처 전 여인과 일문일답


-가정 불화로 우순경과 싸움을 했다는데
▲우순경은 26일 근무하면서 낮12시께 집에 들어와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던 중 몸에 붙은 파리를 잡아주기 위해 내가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자 벌떡 일어나며 화를 냈다. 이를 계기로 말다툼을 하다 하오4시께 지서로 간 후 저녁 7시30분께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왔었다.

-집에 와서는 어떻게 했는가
▲주먹으로 코피가 날 정도로 나를 때려 같은 집에 세들어사는 친척언니가 뛰어와 말리자 언니의 뺨마저 때리며 정신없는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두들겨부수는 등 난폭하게 굴었다. 이때 동네사람들이 몰려들어 저런 사람과 어떻게 결혼할 수 있느냐며 나를 동정하자 우순경은 혼자 나갔다.

-우순경을 알게 된 동기는.
▲궁류지서로 전근 온뒤 한달 반쯤 지난 2월께 이웃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어 알게 돼 사귄뒤 3월초부터 우리집에서 동거생활을 해왔다. 나는 대구J 모직회사에서 여공으로 일하다가 80년 9월 추석에 집에 돌아와 가정 일을 돌보고 있었다. 부모들은 결혼한 뒤 동거하라고 만류하는 것을 우순경이 결혼비용이 없다며 가을에 식을 올리기로 하고 당장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고집해 함께 살았다.

-성격은.
▲술을 많이 마시는데다 성격이 괴퍅스럽고 어른들에 대한 말씨가 거칠며 자기집안이 가난해 늘 열등의식에 젖어있었다. 또 식도 올리기 전에 여자 집에 얹혀살자 마을사람들이 수근거려 실의에 빠져있는듯 했다.



집을 나가 술을 마시고 저녁 7시30분께 들어온 우 순경은 집안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동거녀인 전 여인과 이웃들을 폭행했다. 그리고 나서 무기를 들었다. 함께 궁류지서에 있어야 할 경찰관 2명은 근무지를 이탈한 채 온천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말리거나 제지할 공권력은 없었다. 우범곤 순경은 가장 먼저 전화교환 업무를 보는 궁류우체국을 찾아 여자 교환원 두 명을 죽이는 작업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시골의 집전화가 우체국을 통해 수동으로 연결되던 시절이었다. 우 순경은 용의주도하게 우체국 근무자를 몰살시킴으로써 외부와의 통신을 완벽하게 끊었다. 그리고 애인 전말순의 집으로 들어가 그녀에게 총상을 입힌 뒤 4명을 사살했다. 다행히 살아남아 인터뷰로 증언을 남겼던 동거녀 전말순은 며칠 뒤에 숨졌다. 궁류면 토곡리, 압곡리, 운계리에서 모두 28명을 사살한 우 순경은 평촌리로 들어와 초상집에 문상을 하고 조위금까지 낸 뒤 또 죽이기 시작했다. 그는 마을을 돌면서 “간첩 나타났다 모여라”라고 외치기도 했다. ‘수류탄 자폭’은 그의 최후였다.


우 순경은 ‘세계 최고기록 보유자’로 오래 남았다. 전시도 아닌 때에 한 사람이 총기로 56명을 쏴죽인 적은 이전에 없었다. 그 기록은 29년을 넘게 지속되다가, 2011년 7월22일에야 깨졌다. 그날 오후 노르웨이 오슬로 우토야 섬에서 아르네스 베링 브레이비크(당시 33살)는 자동소총과 폭탄으로 여름캠프에 참가 중이던 청소년들을 포함해 77명을 죽였다. 그는 우 순경처럼 고립된 지역에서 경찰제복을 입고(경찰이 아닌데도) 살인을 즐겼다. 우 순경과 달리 밤이 아닌 대낮에 범행을 했고,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였으며, 105분 만에 희생자들을 모두 절멸시켰다.

우 순경은 1981년 4월부터 청와대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는 ‘주벽이 심하고 성격이 난폭하다는 이유로’ 8개월 만에 최정상 근무지에서 벽촌 시골 중의 시골 지서로 전보조치 당했다. ‘유배’였다. 의령경찰서 궁류지서는 일선 경찰서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작은 ‘4급지’에 속했다. 당시 정부 합동조사반은 좌천에 따른 인사불만을 가장 큰 원인으로 결론지었다. 또한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의령경찰서장 최재윤과 허창순 궁류지서장, 김진우 경장 등을 직무유기 등 혐의로 구속하고, 상급기관인 경남도경의 주요간부들을 문책인사했다.

대통령 전두환은 서정화 내무부장관의 사표를 받았다. 체육부장관이던 노태우를 내무부 장관 자리에 앉혔다. 후임 대통령이 된 노태우에게 우 순경 사건은 정치적 기회였다.



대구디스코클럽 큰불
22명사망ㆍ70여명 중경상
오늘 새벽 2층 천정서 발화
화인누전…희생자 거의 10대
경사45도의 출구 아수라장


18일새벽 1시30분께 대구시중구향촌동51의7 고고클럽 초원의집(주인 김병수ㆍ38)에서 불이나 춤을 추고 있던 이원지양(19ㆍ대구시수성구수성동1가1의9의14), 유경애양(18ㆍ대구시서구비산동), 이진향군(18ㆍ대구공고 야간부 전기과1년)등 22명이 숨지고 7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등 큰 인명피해를 내고 1시간30분만인 새벽3시께 진화됐다. 불이나자 2층 초원의집 1백여평의 홀에서 남녀2백여명이 서로 먼저 나오려고 출입구로 몰려들다가 출입구가 1m40cm로 좁은데다 경사45도 가량의 계단에서 1명이 넘어지면서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계속 넘어져 인명피해가 커졌다.(중략)
이날 초원의집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이창동군(21ㆍ대구시 중구 삼덕동)은 홀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매케한 냄새가 나면서 “불이야”하는 고함이 터져나와 1백여명이 충입구쪽으로 한꺼번에 몰렸는데 출입구가 좁은데다 경사가 져 1명이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잇달아 넘어지는 아수라장을 이뤘다고 마랬다. 이군에 따르면 초저녁에 2백50석의 좌석을 꽈 메웠던 초원의집에는 사고 당시 1백50여명이 남녀가 디스코를 추고 있었는데 음악이 멈추면서 “불이야 ”하는 고함과 함께 전기가 꺼져 암흑천지를 이루었다는 것.

(<한국일보> 1982년 4월18일치 호외2호)






이 호외는 ‘2호’다. ‘1호’가 궁금하다. 아마도 2호는 1호보다 진전된 뉴스를 실었으리라.
제목엔 ‘22명 사망ㆍ70여명 중경상’으로 돼 있다. 하루 지난 신문은 다르다. 아마도 중경상자 70명 중에서 3명이 추가로 죽었나 보다. ‘25명 사망, 67명 중경상이다.




대구에선 유독 큰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이 글을 쓰며 알았지만, 1991년 10월17일엔 대구 서구 비산동 나이트클럽 거성관에서 방화사건이 났다. 사람들이 한참 춤을 추고 있던 저녁9시50분경 한 농민이 무대 위에 휘발유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바람에 16명이 타죽었다. 누전으로 오인한 종업원이 전원을 차단해버려 사고가 더 커졌다고 한다.

대구의 지하철 또는 지하철공사장에선 ‘가스폭발-붕괴-화재참사’가 시리즈3부작으로 이어졌다. 먼저 가스폭발. 1995년 4월28일 오전 7시52분경 달서구 상인동 지하철 1호선 1~2구간 공사장 가스가 폭발해 101명이 죽고 145명이 다쳤다. 사망자가 100명을 넘은 엄청난 사건이다. 두 번째는 붕괴. 2000년 1월22일 중구 동산동 신남네거리 지하철2호선 공사현장에서 임시로 만든 복공판이 내려앉는 바람에 버스가 추락하고 승객 3명이 사망했다. 손님이 버스에 타고, 그 버스가 추락하는 현장 CCTV 녹화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보며 가슴이 아렸던 기억이 있다. 세 번째는 화재참사. 2003년 2월18일 오전 9시53분경 중구 성내동 중앙로역에 정차 중이던 1079호 열차 객실 안에서 한 50대 남자가 휘발유통을 꺼내 불을 질렀다. 마주오던 1080호 열차에까지 옮겨 붙어 승객 192명이 타죽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참고로 1946년 10월1일 수 천명의 대구시민들이 미군정에 항의하며 들고 일어나 경찰이 발포로 맞섰던 ‘대구항쟁’때도 20명밖에 죽지 않았다.(당시 시위를 주도한 박정희의 형 박상희도 이때 경찰의 총격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중공승객 조속 송환
납치범 한국서 재판권행사
중공선 인도요청했으나 국제관례 따라 결정
기체도 가능하면 함께
부상자1명 추후 따로
3차회담서 합의…문서 오늘 교환


중공여객기 피납사건을 처리하기위해 이틀째 협상을 벌여온 한ㆍ중공양측대표단은 8일하오4시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3차회담을 열고 피납여객기의 승객및 승무원과 기체의 조기송환에 합의하는 한편 부상자는 중공측의 희망에 따라 별도 송환키로 아울러 합의했다. 이날 회담에서 중공측은 납치범6명의 인도를 희망했으나 한국측은 국제협약과 국제관례에 따라 한국측이 재판관할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확실히 했다. 결국 중공이 유보입장을 표명키로 함에 따라 한국측이 납치범들을 처벌키로 결정했다.
한ㆍ중공양측은 이날 회담협의내용과 관련, 한국측 수석대표인 공노명 외무부 제1차관보와 중공측 수석대표인 심도 민항총국장간에 합의문서를 9일 교환키로하는 한편 양측에서 각기 대표1명씩을 지명, 문서작성작업을 계속키로 했다고 한국 측 회담배석자가 전했다.

(<서울신문> 1983년 5월9일치 호외)






대구디스코클럽 화재 21일 뒤의 호외다. 처음 이 호외를 읽고 어리둥절했다.전혀 기억에 없는 사건이다. 중공여객기가 피납돼서 한국에 왔다고? 누가 납치했지? 북한이? 미국이? 한국이? ‘납치’가 뉴스의 알맹이도 아니다. 납치 사실은 이미 3일 전 신문에 실렸다. 호외의 핵심은 중공여객기 납치범의 재판권을 한국에서 행사한다는 내용이다. 왜 합의결과가 그토록 중요했을까. 3일 전 신문을 통해 사건의 개요부터 알아보자.






중공여객기 불시착
105명 탑승…휴전선 넘어 중부기지에
남녀6명이 납치, 모두 관리…망명을 요청, 기내서 총격 2명 부상
만주 심양서 상해가던 중…어제 춘천서 1박 서울로


승객과 승무원 1백5명을 태운 중공의 민간여객기가 5일 하오 2시10분께 납치범에 의해 비무장지대를 넘어 중부전선○○기지에 불시착함에 따라 정부는 6일 대책회의를 여는 등 국제법과 국내법 규정등에 따른 납치인 승무원 승객등의 처리대책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정부대변인 허문도 문공부장관직무대리는 6일상오 5일 착륙한 중공항공기의 처리와 관련, “정부는 한국과 중공이 동시에 가입하고 있는 항공기 불법납치 억제를 위한 협약등 항공기 테러방지협약의 정신을 충분히 존중하여 항공기와 승무원 승객을 처리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관계당국에 의하면 불시착한 중공 여객기는 만주 심양(구 봉천)에서 이륙하여 상해로 가던 중 탑승객 중 남자 5명 여자1명 등 6명의 납치범에 의해 승무원2명이 총상을 입고 납치되어 북한 상공을 거쳐 휴전선을 넘은 것으로 밝혀졌다.

(<경향신문>1983년 5월6일치)



1983년 5월5일 중국 심양에서 상해로 가던 중국민항소속 국내선 트라이던트 여객기가 하이재킹(비행기 납치)을 당했다. 납치범들은 탁장인(卓長仁), 강홍군(姜洪軍), 안건위(安健偉), 왕염대(王艶大), 오운비(吳雲飛), 고동평(高東萍) 등 6명. 이들은 승무원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북한 상공을 지나 우리나라 영공에 들어왔다가 춘천 부근 비행장에 불시착했다.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다. 대만이 최종 목적지였다.

중공 민항기가 남한 땅에 착륙한 일은 처음이었다. 사건 발생 3일 만에 중국민항총국장 심도(沈圖) 및 33명의 관리와 승무원이 직접 서울을 방문해 공로명 외무부차관보와 직접 협상을 벌였다. 한국전쟁 이후 한-중간의 첫 공식외교접촉이었다. 정부는 피납 항공기의 승객, 승무원과 기체를 곧 중공에 송환하기로 했으나, 망명을 요구하는 납치범들은 송환대상에 넣지 않았다. 중공 당국도 이를 묵인했다. 이들의 재판권은 한국에서 행사하기로 했다. 1심에서 법원이 선고한 징역4~6년형은 1984년 5월22일 대법원 판결에서 확정되었다. “항공기 납치행위는 어떠한 이유로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정부는 대법원 확정판결 석달 만인 1984년 8월18일 이들 6명 모두를 형집행정지결정으로 석방했고, 그들이 원하던 대만으로 갈 수 있도록 했다.




호외 뒷장에서 보듯, 잠시 한국에 머물렀던 105명의 민항기 승객과 승무원들에겐 극진한 대접을 해줬다. 춘천에서 1박을 한 뒤 서울로 데려가 최고급 워커힐 호텔에 투숙시켰고 서울대학교와 용인자연농원을 구경시켰다. 갈비도 대접했다. 중국 민항기 승객에 대한 이런 대접은 곧이어 한국 민항기가 받을 대접과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KAL점보기 사할린 강제착륙
미CIA, 한국측에 통보…피랍-항로 착오 여부 등 계속 조사
뉴욕발 서울행 오늘새벽 3시20분 북해도 비행 중 마지막 교신
일자위대, “실종직후 소 연해주접근 비행체 포착”
미하원의원1명 포함,
승객등 2백69명 탑승,
한국인 VIP는 없어.
새벽5시50분 김포도착 예정


1일 오전 5시50분 김포공항에 도착예정인 뉴욕발 대한항공(KAL)점보기가 이날 새벽3시30분쯤 북위46도30분 동경1백41도30분 사할린 남쪽에서 실종, 사할린에 강제착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사실은 미 중앙정보국이 한국측에 알려온 것이다.
KAL기의 강제착륙이 납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불가항력의 기상과 관련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동경=이도형 특파원】1일 오전 5시50분 김포공항에 도착예정인 뉴욕발 대한항공(KAL) 여객기가 새벽3시20분 일본 근해에서 마지막 교신을 해올 예정이었으나 예정대로의 교신을 해오지 않고 실종됐다고 일본의 NHK방송이 보도했다.
NHK에 따르면 이 KAL점보기는 1일 새벽3시20분 훗까이도의 네무로 남동쪽 1백10km 지점을 통과하면서 무전연락을 일본관제소에 보내오지 않고 소식이 끊겼다. 이 비행기가 마지막 교신을 한 것은 새벽2시07분이었으며 규칙에 따라 3시20분에 다음 교신을 해올 예정이었다.
이 점보기에는 2백40명의 승객과 29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다.
한편 일본자위대당국은 소속을 알 수 없는 한 비행기가 새벽3시26분경 동해의 연해주쪽으로 비행하는 것이 레이다에 포착됐다고 밝힘으로써 KAL기가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일본항공자위대는 레이다로 분석한 결과,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KAL기가 1일 오전 최종적으로 위치해 있었다고 교신해올 지점에는 비행기가 없었으나 훗까이도 최북단와까나이 북쪽 1백80km 상공(사할린 상공)에서 3시29분께 국적불명 항공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고 밝혔다. 일본항공자위대는 그러나 이 항공기가 KAL기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하략)

(<조선일보> 1983년 9월1일치호외)






명백한 오보다. KAL기는 강제착륙하지 않았다. 기사 본문에도 ‘강제착륙’에 관해선 “알려졌다”는 말로 막연하게 나올 뿐이다. 누가 봐도 ‘실종’이다. ‘KAL 점보기 사할린서 실종’으로 제목을 붙이는 게 맞다. ‘강제착륙’은 그저 바람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뒷면엔 승객과 승무원 명단까지 전부 실었다. 하루 뒤 신문은 그들이 모두 ‘고인’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KAL기 피격추락
뉴욕발∼서울행 蘇전투기 3대 미사일 요격받아
“격추했다” “어디 떨어졌나” 사할린-모스크바교신
소전투기ㆍ지상기지 ‘발견’ ‘발사’ ‘격파’란말 오가


【동경=송효빈 특파원】일본자위대는 1일 KAL기가 강제착륙된 것이 아니라 소련전투기의 발진에 의한 미사일 발사로 격추됐을 가능성이 많다고 분석했다.
항공자위대는 이날 새벽 포착된 레이다와 무선자료를 분석 ①KAL기가 레이다망에서 사라진 부근의 해상에 소련의 구조활동이 행해지고 있는 무선교신이 있었으며 ②사할린의 소꼬루기지로부터 발진한 것으로 보이는 미그23전투기로부터 대공미사일을 발사한 행적이 있다고 밝혔다.
항공자위대는 KAL기의 실종에 대해 제일 먼저 레이다로 포착했으며 기종 미상의 항공기가 소領인 사할린을 횡단, 스크램블이 걸린 사실을 들었다.
항공자위대는 이날 새벽3시20분과 32분, 53분 3차례에 걸쳐 KAL기의 항로 동쪽과 남쪽에서 스크램블이 걸린 흔적이 발견됐다고 정통한 소식통은 말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또한 실종 KAL기가 추락할 가능성이 많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있다.
북해도의 자위대 레이다망에 KAL기가 사라지기 직전인 1일 새벽 3시29분 급히 발진한 소련전투기와 소련의 지상기지로부터 빈번한 교신이 오갔으며 그 가운데는 ‘발견’ ‘발사’ ‘격파’등의 낱말이 빈번히 오고갔다.
또한 KAL기가 실종된뒤 2시간이 지난 1일 새벽 5시30분으로부터 이날상오9시까지 사할린과 모스크바간의 통신이 보통 때보다 급격히 늘어났으며 암호를 쓰지 않고 ‘격추했다’ ‘어디에 떨어졌느냐’의 교신이 빈번했다.
이처럼 소련의 사할린기지로부터의 발신과 급히 발진한 전투기와의 사이에 오고간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실종KAL기가 추락됐을 가능성이 짙으며 스크램블이 걸린 소련전투기 기종이 무엇인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미사일을 적재한 미그23일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있다.
항공자위대쪽은 이처럼 처음부터 북해도에 설치된 레이다망에 행적을 분석, 실종KAL기가 강제착륙 또는 격추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국일보> 1983년 9월2일치)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죽었다. 미국인 51명과 일본인 28명을 제외한 한국인은 190명이었다.(한국인 숫자로만 치면 2003년 대구지하철화재 참사 때보다 2명 적다) 뉴욕에서 김포로 오던 KAL 정기여객기 007편은 중간 귀착지인 앵커리지 공항을 1983년 8월31일 밤에 이륙한 이후부터 조금씩 북쪽으로 항로를 이탈했다. 소련 영공을 침범해 세 시간 가까이 비행하던 비행기에 소련 미사일이 날아왔다.

소련 정부는 처음엔 격추 사실을 부인하다가, KAL기가 미국과 남한의 사주로 첩보활동을 하려고 자국 영토를 침범해서 격추시켰다고 주장했다. 아버지의 스크랩은 분노와 눈물로 얼룩져 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안드로포프 화형식이 열렸고, 일본 최북단 와까나이 해상에 배를 타고 간 유족들은 울부짖으며 꽃을 던졌다. “사할린 바다는 말이 없고 건너편 ‘살인 곰’은 억지만”이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경향신문> 4컷만화 주인공 청개구리는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붉은 곰’ 방석을 깔고 앉는다. ‘곰’으로 상징되는 소련을 조롱하고 원망했지만, 그러곤 끝이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미국에게 “대신 혼좀 내달라”고 하지 않는 한, 소련에겐 직접 말을 붙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소련은 적성국이자 미수교국이었다. 한국은 미국을 따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참가를 보이콧하지 않았던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에 항의한다는 의미였다. 1990년대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가 시작되기 전까지 소련은 계속 접근불가의 성역이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만 실리를 챙겼다. 레이건은 소련의 만행을 군사관련 예산을 통과시키는 데 적절히 써먹었다. 미 의회가 반대하던 MX미사일, 레이저무기연구개발 자금 등은 물론이고 비밀리에 지원하던 니카라과 반군 게릴라 콘트라 지원금도 따냈다. 사실 2년 전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 그다. 아버지의 스크랩 제13권에 있는 호외를 보자. 레이건 피격! 1981년 3월30일 워싱턴의 힐튼 호텔 앞에서 한 청년이 레이건을 향해 6발의 총탄을 쏘았다. 그 중 한 발을 왼쪽 가슴에 맞았으나 즉각적인 수술로 제거해 살아났다. 레이건은 케네디처럼 되지 않았다.




레이건의 총애를 받았던 전두환도 죽다 살아났다. 안타깝게도 이와 관련된 호외는 아버지의 스크랩에 없다. 정상발행된 신문만 있을 뿐이다. KAL기가 피격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어 일어난 아웅산 폭발사건. 1983년 10월 동남아 순방길에 오른 전두환 대통령 일행은 9일 오전 버마 독립전쟁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고 다음날엔 유산유 버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었다. 아웅산 묘소에서 전두환이 도착하기 직전에 폭탄이 터져 먼저 대기중이던 서석준 부총리, 김재익 경제수석 등 수행원 16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버마당국은 이 폭탄테러에 관해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진아무개 소좌, 강민철 상위, 신기철 상위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범인들은 현장의 폭탄설치는 완벽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스위치를 일찍 눌렀다. 이와 관련해선, 테러범들이 머리가 벗겨진 이계철 버마 대사 또는 함병춘 대통령 실장을 전두환으로 오해했다는 설이 있다.


이제 그만 하자. 너무 많이 죽었다. 아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하자. 역시 호외로는 나오지 않았으나 스크랩된 센 뉴스! 1982년 3월5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이륙해 제주로 가던 C123군용기가 한라산에서 추락하면서 탑승한 특전사 군인 53명 전원이 사망했다. 당시 군 당국은 ‘대간첩침투 작전’중이었다고 했지만, 25년 뒤인 2007년 3월15일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제주에 내려온 전두환 대통령의 경호를 위해 악천후를 무릅쓰고 출동하다 목숨을 잃었다. 아마 이건 호외를 내려 했어도, 군 정보기관에서 막았으리라.




정리해본다. 부산에 사는 대학생 누군가는 미국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정의를 실천한다는 명분 아래 그곳에 불을 지른 대학생들 때문에 질식해 숨졌다. 경남 의령 농촌에 사는 누군가는 “간첩 나타났다 모여라”는 말에 나갔다가 경찰 제복을 입은 누군가에게 총 맞아 죽었다. 대구에 사는 고교생 누군가는 밤에 디스코를 신나게 추다가 화재를 피해 계단에서 굴러넘어져 깔려죽었다. 중공에 살던 누군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탔다가 총을 든 납치범들에 휘말렸지만 적성국에서 식사 잘 하고, 구경 잘 하고 돌아왔다. 한국에 사는 누군가는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난데없이 소련 미사일을 맞고 비명횡사했다. 그 일로 이익을 본 미국의 높은 사람 누군가는 자기나라 수도 한가운데서 권총을 맞고도 살아났다. 한국의 높은 사람 누군가는 동남아에 건너갔다가 폭탄이 터져 몸이 가루가 될 뻔 했지만 한 발 늦어 살아났다. 한국의 군인들 누군가는 그 높은 사람을 위해 수송기를 탔다가 한라산 계곡에 몽땅 떨어져 죽었다. 돌고 도는 삶과 죽음의 연쇄고리. 호외 또는 호외에 준하는 신문기사를 읽다보면 숫자에 무감각해진다. 1명…56명…25명…269명…16명…53명. 80년대 초반 사건들의 사망자 숫자를 헤아려보다가 가장 최근의 핵폭탄급 사건은 무엇이었는지 찾아본다. 2011년 3월11일 일본 동북부 대지진이다. 몇 명 죽었지? 헉! 10,000 명 이상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아버지의 스크랩 제15권 첫머리의 시를 읽는다. 제목이 ‘懲忿窒慾’(징분질욕)이다. “분노와 사욕은 덕을 쌓는데 해로우므로 이를 참고 억제하라”는 뜻이다. 첫 문장은 ‘장수의 비결’. 눈이 확 뜨인다. 호외급 재난에서 살아남아 장수하는 법? 오랜만에 등장한 아버지의 시다. 다 좋은데, 마지막 연의 ‘민심’ 운운하는 대목이 좀 걸린다. 흑흑, 고리타분해요 아버지!




懲忿窒慾(징분질욕)

장수의 비결은 무엇인가
지나치게 먹지 말고
지나치게 자지 말고
지나치게 일하지 말라

출세의 비결은 무엇인가
지나치게 명예를 사랑하지 말고
지나치게 마음이 교만하지 말고
지나치게 황금을 쫓아가지 말라

정권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민심을 보고
민심을 배우고
민심을 사랑하는 것이다.

1983년 2월




※ 참고한 책과 자료

『한국 현대사 산책 - 1980년대편 2권』(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3)
『법원사』(법원행정처, 1995)
‘28명 죽이고 초상집 문상… 부의금 3000원 낸 뒤 또 난사’(최성진, <한겨레> 2012년4월14일치)


#이웅평 #귀순 #우범곤 #우 순경 #KAL기 #레이건 #전두환 #버마
1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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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스테네스

2012.08.12

스크랩의 힘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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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호

2012.06.30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건들이네요.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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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sooyoon

2012.06.25

그냥 놀랍고 무서울따름, 사람 목숨이 정말....살고 죽는 건 한끝차이인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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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