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필립 빌랭 저 / 이재룡 역 | 문학동네
아니 에르노의 『젊은 남자』를 읽고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연하 연인이 아니 에르노와의 연애에 관해 쓴 소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렇게 구하게 된 책이 필립 빌랭의 『포옹』이었다. 검색해 보니 대체로 혹평이었다. 여러모로 아니 에르노에게 쨉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고 좋았다. 33살 연상의 인기 많은 작가 애인을 둔 20대의 혈기왕성한 작가지망생 남성이 질투와 선망, 피해의식이 뒤엉킨 사랑 속에서 무너지지 않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텐데, 그걸 어떻게든 포장하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못나게 그려 내 주어서. 그리고 유명세에 기대고 싶은 건지 미련이 남은 건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여러모로 ‘쨉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면서 기어이 아니 에르노를 따라 하는 일을 감행해 주어서.
‘하다 보면 된다’ 부적
작업을 하다가 난관에 부딪히면 무척 괴롭다(다들 그렇겠지만). 하루는 머리를 쥐어뜯다가 잠시 유체이탈한 상태로 ‘하다 보면 된다, 수진아’라고 써서 모니터 밑에 붙여 놓았는데 그걸 본 사람들이 하나둘 나에게 ‘하다 보면 된다, ㅇㅇ아’라고 적어 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러다 얼마 전에는 도서관에서 강연을 하다가 잠깐 그 이야기를 했는데, 나중에 사인회 때 거의 모두가 ‘하다 보면 된다, ㅇㅇ아’라고 적어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또 행복한 수고로움의 시간을 보냈다. 아무튼 본의 아니게 이런 식으로 계속 부적을 써 주는 일이 이어져 최근에는 아예 스티커로도 제작하게 됐다. 서울로 이전해 새로이 오픈한 저의 책방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갑자기 존댓말). 그리고 효과 있음.
전진희 리사이틀 《우후(雨後)》 | 공연
얼마 전 보았던 음악가 전진희의 공연이 너무 좋았다. 음악가에게 사로잡혀 아무것도 안 보이는 황홀이 아니라 음악가 덕분에 모든 게 보이는 황홀을 체험했다. 일단 공간이 보였다. 공연장으로 사용된 서울대학교 안의 한 폐공장이 보였다. 높이 나 있는 창밖으로 푸른 나무들이 보였다. 그 공간을 조심조심 가르며 조명이 움직이고, 연기가 채워졌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연출한 사람이 보였다. 무대 단차가 크지 않아 전진희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 보였다. 연주와 목소리가 잘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가시성을 위해 음향을 연출한 사람도 보였다. 앵콜곡이 흐르던 순간, 나는 어둠 속에서 진희 씨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공장의 콘크리트 기둥과 푸른 나뭇가지들이 다 행복해하고 있다고. 이상하게 그게 다 보인다고 적었다.
<해피 엔드>,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나미비아의 사막> | 영화
미팅을 나가서 ‘쟤만 빼고 다 괜찮다’고 생각하면 꼭 그 애랑 짝이 된다는 DJ DOC식 머피의 법칙이 있다면, 나의 머피의 법칙은 늘 극장에서 이루어진다. 여유가 생겨 극장에 가려고 하면 보고 싶은 영화가 없고, 할 일이 너무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면 보고 싶은 영화가 우르르 극장에 쏟아진다. 요즘 매일같이 이 세 영화를 한 번씩은 검색하고 있다. 극장에서 내리기 전에 꼭 보고 싶다.
『밤의 신이 내려온다』
장자샹 저 / 김태성 역 | 민음사
(25.06.10. 출간 예정)
대만의 뮤지션이자 작가인 장자샹의 소설 『밤의 신이 내려온다』(원제: 『야관순장』)는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인상 깊었다. 대만 남부의 작은 시골에서 자란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대만의 토착 신앙과 역사적 순간들이 엮여, 마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는 듯 현실과 꿈이 잘 구분되지 않는 환상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게다가 책을 발표하기 전에 발매한 동명의 앨범까지 있어서, 말 그대로 모든 감각을 동원해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나는 며칠간 음반을 들으며 소설을 읽었는데 오싹하면서도 후끈한, 그러면서도 시종 슬픔에 마음을 내어 주는 이상하고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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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
뮤지션, 작가. 2015년부터 책방무사를 운영하고 있다.